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관세음보살입적후기-47

근와(槿瓦) 2016. 11. 21. 00:10

관세음보살입적후기-47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대사의 승천입적시(昇天入寂時)의 모습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로서 성도(成道)할 때의 모습이라 하겠다.

따라서 성도 후의 존칭은 대사에서 보살로 바뀌어 보살도(菩薩道)를 성취한 자의 최고위로 되었다.


보살성도(菩薩成道)의 감격적인 광경에 입회하였던 노재상 “아나라”는 묘음, 묘원 두공주와 함께 조속히 궁전으로 돌아가서 대사의 열반입적(涅槃入寂)의 제반(諸般)을 묘장왕에게 상세히 보고하였다.


묘장왕은 비애와 아울러 양심의 가책에 못이겨, 깊이 전과(前過)를 참회하며, 명을 내려 보살의 유체(遺體)를 정중히 방부시공(防腐施工)하여 향포(香包)에 싸아서 큰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특별히 제조된 관곽(棺槨)에 단단히 납봉(納封)한 후 영롱각(靈瓏閣)을 보살의 묘능(墓陵)으로 개축해서 유체(遺體)를 안치하고 영세토록 세인의 향연(香煙)을 향수(享受)케 하였으며 영롱각의 명칭도 대자대비관음각(大慈大悲觀音閣)이라 개명하였다.


또한 보살의 모습을 후세에 남기고자 일류공장(一流工匠)에 조각(彫刻)을 위촉하여 금광명사의 오전(奧殿)에 공봉(供奉)하였고, 이름높은 화사(畵師)에 의뢰하여 유명한 벽화로 남겨 긴 세월에 걸쳐 보살의 대위덕(大威德)을 찬양토록 하였다.


온 나라 안은 물론이요, 인접외국의 민중도 일찍이 이를 본받아 사원은 말할 것도 없고 각 가정의 제단에 보살을 제사(祭祀)해서 생전위덕(生前威德)을 찬양하게 되었다.


특히 보살이 수미산(須彌山)에 행각하는 도중에 머무른 마을과 부락의 민중들, 특별히 보살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대사입적의 소식을 듣고 줄을 이어 무리를 이루어 흥림국에 순례(巡禮)하여 의덕(懿德)을 기리며 가슴깊이 보살의 대승자비심(大乘慈悲心)에 감읍(感泣)하였다.


그리하여 보살의 대덕화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파문이 퍼지듯이 전해져서 서역으로부터 북천축에 이르러 대승신앙자와 대승사상가(大乘思想家)들에 의해 전천축, 전불교전파국에 보급이 됐으며 보살의 덕풍위광(德風威光)으로 다시 불타 가르침의 정지(正旨)를 고양하게 되었다.


결국, 불타의 진수(眞髓)를 체득한 보살은 대승사상에의 기운을 융성시켜, 그것이 또한 불교전도에 박차를 가해 대승불교를 일으켜 세워서 흥융(興隆)케 한 것이다.


참으로 불교가 있어 보살이 있고 보살이 있어서의 불교이기도 하다. 금광명사는 보살의 유명(遺命)에 의해 보모와 제자 영련이 주지(主持)해 왔으나 실무는 전적으로 다리니와 사리니가 맡아, 잘 처리해 나갔으므로 두사람은 보살도수행(菩薩道修行)에 전심봉행(全心奉行)하였다. 이 두분은 보살성도(菩薩成道)의 대공로자인 것이다. 소사(燒死)를 면한 득진 장로니승(得眞長老尼僧)은 그후 그대로 백작사에 유임(留任)하였다.


묘장왕은 그 뒤로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복에 이르도록 굳게 미타(彌陀)를 신봉해서 불타(佛陀)의 가르침과 보살의 훈유(訓諭)를 충실히 지켜나가기에 게을리함이 없었다.


묘장왕의 불문귀의(佛門歸依) 동기에는 다음과 같은 실화가 전해져 온다. 보살이 입적(入寂)한지 2, 3년후 묘장왕은 돌연 큰 병에 걸렸다. 그 병은 보통병과는 달라 전신에 종창(腫瘡)이 생겨, 그 종창이 곪아터지고 피와 고름이 흘러 살이 썩어나는 괴질(怪疾)이었다.


아프기가 비유할 수 없어서 바늘로 온몸을 계속 쑤시며 칼로 째는 듯하고 안으로 열과 염증으로 신음하며 면식(眠食)을 제대로 취할 수 없는 중병이었다.


묘장왕이 고민하며 고통과 싸우는 모습은 보기에도 처참해서 사국팔방(四國八方)의 명의(名醫)를 다 모아 치료케해도 효력이 없었다. 그 위에 낮에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밤에는 수다(數多)한 망령귀신이 꿈속에 나타나 고투(苦鬪)속에 시달려서 완전히 심신양면(心身兩面)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딱하게도 산 송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온 나라에 왕의 운명이 경각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던 그 즈음에 한사람의 노명의(老名醫)가 궁전에 나타나 묘장왕을 진찰하게 되었다.


진단을 마친 의원은

“이 악병(惡病)을 치료함에는 반드시 꼭 자기의 혈연인 사람의 눈과 손가락을 약과 배합 조제하여 마시는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소살(燒殺)된 오백여명의 니승(尼僧)의 원혼(怨魂)이 달라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말해서 이것은 원귀(怨鬼)의 괴질로서 보통의 약(藥)으로 나을 병이 아니옵니다.” 하고 말했다.


묘장왕은 행여나 하고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이는 줄 알고, 절벽에 붙어있는 풀 한포기를 잡은 기분이었다가 결국 이 노명의(老名醫)의 진단을 듣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혈연있는 자라고 하면 묘음, 묘원 두 공주 밖에 없다. 이 두사람도 이제는 불문에 들어서 보살도(菩薩道)를 수행하고 있었다. 불문에 들어 입문하지 않았다 해도 눈을 파내고 손가락을 자를 수는 없는 일, 묘장왕은 온갖 고통과 고뇌 끝인지라, 자신을 위요하는 불길한 운명에 몸을 맡기겠다는 한가지의 체념(諦念)으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무착무아(無着無我)의 경지(境地)에 무의식간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까지 범했던 죄과의 응보(應報)라면 하는 수 없는 일, 자신이 병들어 갖은 고통을 받음으로써 억울하게 죽어간 무수무고(無數無辜)한 원혼이 구원받는다면 이대로 고통속에 죽음으로 보상하리라는 생각에 이르자 단호히 노명의의 처방을 거부했다. 거부하는 이유를 알고자 하는 노명의에게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운명과 인생을 관조하여 초탈(超脫)한 마음자세로 깊이 지난날의 과오를 마음으로 참회하면서 이 순간부터 억울한 원혼구원에 심신을 공양(供養)하리라는 고백을 고통속에 신음하는 사이사이에 이야기했다. 진심의 회개(悔改)인지라 노명의도 감동되어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노안(老眼)을 적시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노명의는 눈물을 닦고 왕을 바라보다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더니

“아니, 이런! 전하의 용안찰색(龍顔察色)이 달라지옵니다. 놀랐습니다. 절망이라고 진단했사오나 지금의 참회와 사신(捨身)의 원심(願心)에 의해 급히 용태(容態)가 달라졌사옵니다. 치료할 방법이 한가지 떠 올랐사옵니다. 속히 누구를 보내어 대향산(大香山)에 오르게 하소서. 그곳 정사(精舍)에 목적하는 것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묘장왕은 모든 일체사(一切事)를 체념했는지라 고개를 저으며 노명의의 치료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노재상 “아나라”는 일찍이 송림정사를 찾아가 대사를 심방(深訪)한 적이 있으므로 자진하여 친히 대향산으로 가기로 했다. 서둘러 가마를 재촉하여 대향산으로 떠났다. “아나라” 재상의 심중은 왕년에 공주를 찾아 대향산으로 떠날 때의 정경(情景)이 새로운 감회를 느끼게 하여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송림정사는 이전 공주가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을 때 신풍맹호(神風猛虎)가 돌연히 나타나 공주를 물고 간 곳이다. 긴 여로(旅路) 끝에 송림정사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 살펴보니 선방(禪房) 중앙 탁상에 작은 상자 하나가 있어, 뚜껑을 열고 본 즉 그 속에는 향포(香袍)에 싸인 두 눈알과 두 손가락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놀래어 이 기적이 필시 관세음보살의 대자비(大慈悲) 신통위력(神通威力)이라 여겨 한동안 감격과 감사의 기도를 올리었다. 기도와 예배를 마치자 조심히 간직하고 서둘러 돌아와 노명의(老名醫)에 보여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나서 즉시 치료를 서둘렀다.


그 눈알과 손가락을 약과 배합하여 시료(施療)한 바 부사의(不思議)하게도 아침 저녁으로 용태와 병세가 나아져갔다. 월여가 지나자 원기는 회복되고 병질도 거의 나아졌다. 다시 회복됨에 크게 기뻐한 왕은 진심으로 명의(名醫)의 신효(神効)에 감격하여 은상(恩賞)을 하사(下賜)하려 한 바 노명의(老名醫)는 한사코 이를 거절하며 왕께 말했다.

“실은 상감마마를 낫게 한 눈과 손가락은 셋째공주 묘선(妙善)인 관세음보살의 눈과 손가락이올시다.”


묘장왕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딱 벌린 채 닫을 줄 몰랐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일말의 의심과 불안에 쌓이자 노명의(老名醫)는 왕의 안색의 변화를 보고 그 마음을 꿰뚫어본 듯

“믿을 수 없으시오면 관음각(觀音閣)의 보살유체(菩薩遺體)를 조사해 보시오면 알 것이옵니다.” 라 말하고 일어나 나가 버렸다.


왕은 친히 관음각에 시자(侍者)들의 시중을 받으며 신하들과 함께 가서 조사해 보니 노명의가 이른 바와 같이 보살의 유체(遺體)에 눈과 손가락이 없었다.


묘장왕은 이 불가사의한 신통기적(神通奇蹟)을 직접 당해보고 보살의 자비심, 사람의 아들로서의 효심에 마음속 깊이 감동하고 통감(痛感), 응해 갈수록 자신의 죄업(罪業)이 심중(深重)함을 마음 아파하며 세상의 무상(無常)함과 무아(無我)를 깊이 느껴 그대로 성(城)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대향산 송림정사에 출가(出家)해 버렸다. 그뒤 오로지 수행에 불철주야 매진(邁進)하여 드디어 득과(得果)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고 보살위에 올랐으니 그 이름이「대장엄선승보살(大莊嚴善勝菩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국모 보덕왕비(寶德王妃)도「대성자만선보살(大聖慈萬善菩薩)」의 호를 받게 되었다.


그후 왕위는 묘음공주의 부마(駙馬) “초괴(超魁)”와 묘원공주의 부마 “가봉(可鳳)” 둘 중 어느 하나가 잇도록 했으나 두사람 모두가 묘음, 묘원공주의 강한 감화력으로 굳게 사양하면서 동시에 출가해 버렸다. 난감해진 “아나라” 재상과 대신 및 고관신하들이 모여 회합한 결과 묘장왕의 동생인 “싯단달(㗭㫜達)”을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다.


왕제(王弟) “싯단달” 역시 굳게 사퇴(辭退)했으나 형님인 묘장왕과 중신들의 강력한 요망에 의해 백성을 위하여 자기 고집을 철회하고 왕위를 승계하였다. 이렇게 하여 보살의 감화는 사람들을 무욕청정(無慾淸淨)케 하여 호양호혜(互讓互惠)를 미덕으로 이타자리(利他自利)의 보살문화(菩薩文化)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싯단달왕은 보살의 설법과 행적을 기록케하여 경전으로 편찬하였으며 보살의 대승자비행(大乘慈悲行)을 체(體)로 하여 치국(治國)에 임(臨)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국교로 정하여 포교사를 제국(諸國)에 파견하고 불타진지(佛陀眞旨)와 보살진행(菩薩眞行)을 선양(宣揚)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보살의 무형유형의 영향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인덕(仁德)을 숭앙(崇仰)하도록 중생을 교화했던 것이다.


노재상 “아나라”는 그후 일체의 국무, 정사(國務 · 政事)를 “싯단달”왕에게 반상(返償)하고 묘장왕을 따라 대향산에 가서 출가수행하여 득도매진(得道邁進)하다가 일천(日淺)하여 입몰(入沒)하였다.


묘음공주는 얼마 안되어 보살의 수기(授記)대로「대지사리문수보살(大智師利文殊菩薩)」로 성과(成果)했으며 묘원공주는 「대행능인보현보살(大行能仁普賢菩薩)」에 성과(成果)하였다. 유년시(幼年時) 모후(母后)를 잃은 이래 줄곳 보살을 친자(親子)나 다름없이 애중수호(愛重守護)하면서 갖은 고로(苦勞)를 다해 온 보모이모(保母姨母)는 그 대공덕(大功德)에 의해 「보적군보살(保赤君菩薩)」로 이르게 됐으며 또한 제자 영련(永蓮)은 오랜 세월 보살수시(菩薩隨時)의 대공덕(大功德)으로 「시향용녀보살(侍香龍女菩薩)」이라 칭호(稱號)되어 더불어 장구(長久)하게 보살의 연전에 시봉하며 떨어진 일이 없었다. 무한영원(無限永遠)히 보살을 따라서 세중(世中)의 액난과 업고(業苦)를 구제(救濟)해 오고 있는 것이리라.


금광명사(金光明寺)의 기동(奇童)이었던 사동(使童) 진영(畛英)도 보살이 입적(入寂)한 이래로 번연(翻然)한 각오(覺悟)가 있어 심기일변(心機一變)하여 이 또한 대향산 송림정사에 들어가 일심으로 수행에 힘썼다.


본성이 총명하여 영기(靈氣) 수승(殊勝)했으므로 참오돈각(參悟頓覺)이 남달리 빨라 보통 사람과는 아득히 멀어 감히 미칠 바가 아니었다.


공덕원만(功德圓滿)으로 된 후는「선재동자(善財童子)」에 봉명(封名)되어 보살의 연대하(蓮台下)에 수무(收務)케 되었다.


이와 같이 야마산 금광명사(耶摩山金光明寺)는 니승사(尼僧寺)로 발전했으며 대향산 송림정사(大香山松林精舍)는 비구사원(比丘寺院)으로 크게 팽창하여 근행정진해 나갔다. 긴 인류역사를 통하여 보살의 비호와 보우를 받아 혜광(惠光)과 자애(慈愛)를 얻은 사람으로 몇십억 몇백억을 어찌 헤아리리오!


다시 말하여 일월의 광명이 사라져 없어져도 보살의 공덕은 멸하지 않으며 또한 감해질 수도 없다 하겠다.

그 대위신령(大威信靈)은 광통무변(廣通無邊)하며 그 대위광명(大威光明)은 크게 빛나 보명편조(普明遍照)하여 그 대위서원(大威誓願)은 후대(後代)에 승계되어 청사(靑史)에 향화(香花)가 끊임없으리라. 사실 그대로 보살성탄시에 노도인(老道人)이 예언한 바와 같이 인세(人世)를 교화하여 불국(佛國)문명을 이룩했다. 한번 핀 꽃이 한번 지듯 보살의 인간생활은 겨우 삼십년 미만의 짧은 기간밖에 되지 않았으나 수백년 산 것보다도 더 가치가 크며 천년 살면서 닦은 공덕보다 더 큰 대성사(大聖事)를 성과(成果)해 올린 것이라 하겠다.


보살에는 천수천안(千手千眼), 성(聖), 마두(馬頭), 십일면(十一面), 준재(准貾), 여의륜(如意輪)의 육관음(六觀音)의 화신(化身)과 양류(楊柳), 용두(龍頭), 지경(持經), 원광(圓光), 유희(遊戱), 백의(白衣), 연와(蓮臥), 농견(瀧見), 시약(施藥), 어람(魚藍), 덕왕(德王), 수월(水月), 일엽(一葉), 청경(靑頸), 위덕(威德), 연명(延命), 중보(衆寶), 암호(岩戶), 능정(能淨), 아뇩(阿耨), 아마제(阿摩提), 엽의(葉衣), 유리(瑠璃), 다라존(多羅尊), 합리(蛤蜊), 육시(六時), 보자(普慈), 마랑부(馬郞婦), 합장(合掌), 일여(一如), 불이(不二), 지련(持蓮), 여수(麗水), 송자관음(送子觀音) 등의 분신(分身)이 있으며 색신(色身)을 시현(示現)해서 수시수처(隨時隨處)에 변화하여 모든 사람들의 고난(苦難)을 구(救)한다.


그 종종의 모습도 또한 마찬가지로 세상을 사랑하며 중생의 영고(靈苦)를 해탈(解脫)시키기 위해 현현(顯現)한 것이다. 보살의 활약은 너무나도 크며 후래(後來)의 경전(經典)상에 무한(無限)히 표현되어 그 덕(德)이 찬양되어 있다.


그의 일례로서「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이 보살의 몸의 길이는 팔십만억나유타유순(八十萬億那由他由旬)으로 몸은 자금색(紫金色), 정상(頂上)에 육개(肉鬐)가 있으며 머리에 원광이 있다. 얼굴은 각백천유순(各百千由旬), 그의 원광중에 오백의 화불(化佛)이 있고, 석가모니불과 같이 하나하나의 화불에 오백의 화보살(化菩薩)이 있으며 무량재천이 시자가 되어 거신광중(擧身光中), 오도(五道)의 중생 일체의 색상(色相) 모두가 그 가운데에서 나타난다.


정상의 비능가마니보(毘楞伽摩尼寶)를 천관(天冠)으로 한다. 그 천관(天冠)중에 일립화불(一立化佛)이 있어, 높이가 25유순(二五由旬)이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색은 염부단금(閻浮檀金)의 색과 같다. 미간호상(眉間毫相)은 칠보색을 갖추고 팔만사천종의 광명을 유출한다. 하나하나의 광명에 무량무수백천의 화불이 있어, 하나하나의 화불은 무수의 화불을 시자로 한다. 변현(變現)이 자재(自在)해서 시방세계에 가득하며, 비유하자면 연화색과 같이 운운」이라 되어있다.


보살의 덕은 인류가 살아있는 한 사라짐이 없이 모든 사람들의 혼중에 새겨져 보살신앙은 한없이 융성할 것이다. 보살은 여자의 몸으로 최고의 도덕을 실천하신 분인 것이다. 본디 정직 청순으로 일체 오염되지 않은 깊은 산골에 홀로 핀 아름다운 지란화(芝蘭花)처럼, 원근간에 고결한 방향을 표산(漂散)하듯이, 왕녀로 태어나서도 부귀영화에 물들지 않고, 청정무구로 아름답게 빛을 발한 대자대비의 보살, 일체의 고액과 마장을 구탈해 마치신 보살, 복덕지혜의 원만하신 보살은 영원히 무궁하게 변화해서 삼계시방의 중령(衆靈)을 계속 구제하실 것이다.


실로 보살은 과거중생만이 아닌 현재, 미래를 통한 영원한 중생의 구제자이심에 틀림없다. 자비에 넘치는 따뜻한 그 모습은 인류가 구극(究極)이상으로 하는 어머니이기도 하며 숭앙해 마지않는 위대한 만세의 사표이기도 하다.


글 가운데에 있는 색시보(塞氏堡)는 후에 크게 발전하여 “사카”왕조(王朝)를 이루었고, “가라족(族)”은 중앙아시아 “힌두” “쿠슈”산맥연대(山脈沿帶)에 사는 “가라, 길기스”와, “가라, 갈박”족인데 그후 역사적으로 훌륭한 국가를 구성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보살일대기 편술의 큰 수확이기도 하다. 보살 성도 후는 거의 이 이동민족의 활동에 의해 꿀벌이 꿀과 꽃가루를 사방으로 전파하듯, 천하에 널리 전교되어 그 위에 또한 대덕이 흘러 간다라지방으로 들어가서 찬연한 간다라 문명을 이루고, 오늘날 유명한 간다라 미술의 아름다운 보살상을 낳게 된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놀람과 흥분을 금할 수가 없다.


이러한 옛날 사람들의 고심했던 활동의 일단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제 보살은 남해고불(南海古佛)로 존칭(尊稱)되고 있음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며 불계(佛界)를 봉찬(奉讚)해 백일(白日)의 부반(副盤), 우주의 은덕(隱德)을 장리(掌理)하여 말법세상을 정화구제하게 됨을 알림과 아울러 거기에 참찬(參贊)하게 될 다행을 기원하는 바이다.


보살의 일대기를 우리나라에서 비로소 발표하게 된 흥분으로 집필중 매일 심장의 박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척이나 사실(史實)에 충실을 다하면서 가능한 한 보살의 생애를 인간적인 면에서 포착(捕捉)해 묘사하려 하였기에 만에 일이나마 죄송천만의 표현을 하지나 않았는지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감정의 앙분을 억제치 못하여 만에 일이나마 보살의 대덕을 손상한 점이 있다면 겸허히 고두사죄(叩頭謝罪)하는 바이다.


끝으로 누구나 의문으로 느꼈을 여러차례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노도사(老道師) 즉 장미(長眉)의 노도인(老道人), 백의노승(白衣老僧), 예언자 백수노인(豫言者 白鬚老人), 또는 노명의(老名醫) 등은 바로 연등불(燃燈佛)이 화신(化身)하신 모습이었다.


선불(仙佛)은 시운(時運)에 응해서 여러 곳에 따라 분령화신(分靈化身)된다. 제불조(諸佛祖)의 현현비호(顯現庇護)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보살성도(菩薩成道)가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무한생명, 무한광명으로 일러지는 미타의 가호와 자비깊은 본원(本願)이라 여겨진다.



출전 : 大聖 관세음보살일대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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