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전기-23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23. 대사, 수행의 극치(極致)를 가르치다
이와 같이 빈자, 부자의 끊임없는 희사에 의해 대사의 자비행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대사의 덕화가 높아져 감에 따라 금광명사 일대는 흥림국의 평화낙토로 또한 신앙의 성지로 변모해 갔다.
대중이 수행해 나가는 가운데 보모는 성품이 원래 원만하여 온순 자각(自覺)의 성품이 더욱 순수하고 풍부해졌다. 함께 열심히 수행한 영련도 특히 그 진보가 발군하여 탁월한 이론은 젊은 니승들을 계몽할만큼 급속한 진전을 이루어 대사도 대단히 기뻐하게 되었다. 보모의 조용한 수행에 비해 영련은 동적으로 사물을 처리해서 양자가 대사의 법행을 잘 보좌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사는 현재 수행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있었다.
대사의 깊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수미산으로의 편력구법(遍歷求法)인 것이다. 하루속히 찾아가서 자신의 손으로 백련을 찾아 구도하고 싶었다. 지난날 궁전의 화원에서 만난 노승이 알려 준대로 득도를 성취하려는 것이다.
하루빨리 면수구결(面授口訣)을 실현하여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며, 원령고혼을 해탈시켜 주며, 무진의 법문(無盡意法門)을 각지(覺知)해서 무상불도(無上佛道)를 증득한다는 홍서(弘誓)의 대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우선 자신의 심안(心眼)을 열고 오경(悟境)에 통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절실한 문제는 날이 감에 따라서 대사의 마음을 조석으로 점유하게 되었다.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여 무수한 번뇌를 단절해 왔으나 단지 어떤 일의 성취에는 그 숙기(熟機)가 있다. 기(機)가 원숙되지 않았을 때는 무슨 일이든 되지 아니하는 법이어서 야마산중에 많은 사람이 모여듦에 따라 그에 맞추어 대산의 기분은 더 무거운 짐을 진듯 했고 설법을 듣는 대중이 증가함에 따라 대사의 열뇌(熱惱)도 더해갈 뿐이었다.
그와 같이 매일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영련이 눈을 빛내며 대사의 방으로 들어왔다.
“대사님! 어제 저녁 소승이 명상에 잠겨 있을 때 꿈인지 생시인지 기묘한 현상(現象)을 관했습니다. 소승의 영혼이 몸을 떠나서 일로 남향(一路南向)을 달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대사는 영련의 얼굴을 보면서 눈으로 이야기를 재촉하였다.
“기후가 더운 방향으로 몇백리 몇천리 간 곳 어느 해변에 닿았사옵니다. 그곳에는 다 떨어진 남루한 옷을 걸친 무수한 군중들이 떼를 지어 와글거리며 서로 무엇인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수척하고 안색은 창백하여 전연 생기가 없어 곤궁한 모양이었어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모여 무엇을 걱정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만국사방에서 도망해 온 피난민의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설명해 말하기를
“지금 세상이 온통 재해와 전란으로 농토는 황폐하고 가옥은 병화에 불타 목숨만 지닌 채 겨우 여기까지 도피해 왔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한결같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아직 나은 편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입을 것이 없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기대할 수 없는 나날에 오직 구세의 성자를 대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의 비참한 참상을 생각하면 아직 우리들 쪽이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어요.
소승은 연민(憐憫)의 정을 누르지 못하며 그들에게 말했사옵니다.
“정말 진정으로 무상낙토(無上樂土)와 구세의 대비심자(大悲心者)를 찾으려 생각한다면 서방 흥림국 야마산록에 있는 금광명사에 오십시오. 그곳에 묘선대사가 계시며 여러분의 재난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이별을 고하며 돌아서려는 찰나 모래와 돌을 날리고 굴리는 일진의 돌풍이 불어닥치는데 정신을 차려 자세히 보니 지금까지 이야기하던 난민들이 범이나 이리로 변해서 소승에게 달려들질 않겠습니까? 깜짝 놀라 소리지르며 도망하려는 때에 누군가가 소승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명상에서 깨어나 보니 곁에 보모께서 앉아 계셨사옵니다. 결코 잠자며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은 아니옵니다. 도대체 이는 어떻게 된 것이옵니까?”
“영련이여! 그것은 그대의 좌행법이 신속히 입정(入定)함에 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정의 상태에는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증득하여 일체의 번뇌 망상을 떠난 청정무구의 지혜를 나타내는 경우와 환각 영각(幻覺影覺)이 심경 가운데 비치어 인천(人天)의 색성(色聲)이 비쳐지게 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전자는 원신(元神)의 출규(出竅)이며 후자는 식신(識神)의 출규(出竅)입니다. 식신의 출규(出竅)는 비교적 용이하나 원신의 출규는 용이한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본 현상(現象)은 식신(識神)의 출규로 아직 색상계(色象界)를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성자(聖者)가 일체의 심상(心想)을 멸진(滅盡)하여 적정(寂靜)에 이르는 과정에는 좌행중 종종 현상을 영각(靈覺)으로 볼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영련이 긴장하며 다시 물었다.
“원신(元神)과 식신(識神)의 구별을 좀더 상세히 가르쳐 주옵소서.”
“원신이란 본래의 영성(靈性) 즉 본래의 불성(佛性)입니다. 순진 영롱(純眞玲瓏)해서 아직 육진육식(六塵六識) 아울러 인집(人執)을 일으킬 사량(思量)이 없는 말나식(末那識)입니다. 식신(識神)이란 오감(五感)을 얻어 오탁에 오염된 습성을 말합니다.”
“식신(識神)의 출규를 더 상세히 설명해 주옵소서.”
“식(識)이란 객관만유(客觀萬有)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色 · 聲 · 香 · 味 · 觸 · 法)의 육경에 대해 우리들이 그 각각을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아는 (見 · 聞 · 嗅 · 味 · 觸 · 知) 요별(了別)하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眼識 · 耳識 · 鼻識 · 舌識 · 身識 · 意識)의 식각(識覺)의 역할이 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평생의 생활에 이들의 역할, 활동이 심령상(心靈上)에 그대로 재현되어 비쳐집니다.
사량식(思量識)이나 장식(藏識)도 식신(識神)의 한가지입니다. 결국 의식계를 통틀어 색 · 수 · 상 · 행 · 식(色 · 受 · 想 · 行 · 識)의 오온(五蘊)의 경계로 말하면 현재 우리들의 감정적 활동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주로 한 것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좌행(坐行)을 하여 입정(入定)에 들었다 합시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경관(景觀)을 보기도 하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 상태에서 아름답고 훌륭한 경관을 보며 진기하고 뛰어난 향기를 맡는 등 또한 맛을 느끼고 체각(體覺), 촉각(觸覺)을 느끼게도 됩니다. 그 들리는 소리가 천상음악(天上音樂)의 신기(神奇)라 할지라도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하옵니까?”
“식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넓고 크더라도 무한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영작용(靈作用)에 색성(色聲)이 비침은 이 욕계, 색계(慾界 · 色界)를 이탈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대가 본 모습은 식신(識神)의 나타남으로 현재 도탄에서 허덕이는 백성의 고통을 본 것이라 생각합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능(靈能)이 감응하여 중생들의 고통에서의 해탈을 갈구하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색상, 성음(色象,聲音)은 마음과 몸의 생활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형상(形象)으로 보이며 성음(聲音)으로 들리며 온냉(溫冷)을 느낌은 이 생사간의 색계, 인과계 뿐입니다. 상념(想念)의 세계에 환영(幻影)으로 떠다니는 사이는 아직 인과계(因果界)의 윤회(輪廻)에서 해탈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열반(涅槃)에 이르는 길은 도저히 성취할 염두도 낼 수 없습니다. 실상진여(實相眞如)를 증득하는 열반은 생사를 초월한 영생 불사의 경계로 영원불퇴전의 경계입니다. 색성이 있으면 염사(念思)가 생깁니다. 염사(念思)가 생기면 번뇌의 속박을 받아 안팎의 마가 즉각 그 염사(念思)를 타고 들어와 아울러 소연(所緣)의 여러 가지가 달라붙어 인간에게 관련되어 버립니다. 만일 사악한 염(念)을 일으키면 당장 육적(六賊)이 발효해서 입정(入定)을 소란케 해버리고 말겠지요. 식신(識神)의 출규중(出竅中)에 사념에 침범되면 그것을 진정의 영각(靈覺)이라 착각하여 그의 색상(色像) 성음(聲音)이 명령하는대로 내달립니다. 그때의 관념에 의해서 오욕의 경(五慾境)을 극락경(極樂境)이라 생각하고 탐착의 집심(執心)을 가지고 진정한 불보살(佛菩薩)의 소념(所念)이라 단정하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어느 사이에 왔는지 곁에는 보모와 다리니 그리고 사리니가 열심히 듣고 있었다.
다음에는 보모가 물었다.
“원신(元神)의 출규(出竅)를 가르쳐 주옵소서.”
“원신(元神)이 출규하면 무극한(無極限)의 대영계(大靈界)에 귀입할 수가 있습니다. 원신이 출규하면 일념도 생기지 않은 육근청정(六根淸淨)의 경지에 이릅니다.”
“그때에는 어떠한 감각이 있을까요?”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의무식(無意無識), 무인무아(無人無我), 무주무욕(無住無慾)의 경지에 무슨 감각이 있겠는가?”
보모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다리니는 납득이 되지 않아 물었다.
“그러면 어떤 상황이 보입니까?”
“무일물, 무색, 무한의 경계에 무엇이 보이겠는가?”
다리니는 이해할 수 없어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살풍경일 뿐 극락경계와는 거리가 멀지 않겠사옵니까?”
영련은 속절없이 웃어 버렸으나 대사는 이에 주의를 주면서 다리니에게 대답하였다.
“무변공무(無邊空無)야 말로 무한락, 무진락(無限樂 · 無盡樂)의 극락경지(極樂境地)입니다.
바로 보리감, 제호미(菩提感 · 醍醐味)를 느끼고 맛봅니다. 편사(偏邪)없이 진리는 일체만유를 창조하는 진공(眞空)이면서 비공(非空)이므로 묘유(妙有)가 무궁무진합니다. 그 경계는 이 세상의 어떠한 비유로서도 형용할 수 없는 바로 정각을 성취한 사람만이 얻게 되는 경지입니다. 언제나 대비 · 대지(大悲 · 大智)로서 자리 · 이타(自利 · 利他)의 작용이 있으나 그의 본체(本體)는 언제나 적정(寂靜)의 일체감을 다 끊어버린 오각(悟覺)의 경지로서 인간 세상의 즐거움의 감각으로는 비할 수 없는 훌륭하고 기묘한 감로(甘露)가 충만한 세계입니다.”
이번에는 사리니가 물었다.
“대사님께서는 그 경지에 이르셨나이까?”
그러자 한순간 대사의 미간이 흐려지며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나는 아직 득도(得道)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 마음을 명사(明師)로부터 직지(直指)받지 못하여 이제까지 명심견성(明心見性)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깨달으면 미(迷)하고 미하면 깨닫고 하여 아직 구경(究竟)반야(般若)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득도(得道)할 때까지 삼천의 공덕을 쌓아 팔백의 과(果)를 거듭하며 수다한 마장을 받더라도 그 위에 다시 불퇴전의 의사를 계속 지닌다면 언제인가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며 열띠어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련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영련을 보고
“영련! 항시 잡념에 침범 당하지 말고 신심의 가애(罣礙)를 원리(遠離)하며 두루 더불어서 법신(法身), 반야(般若), 해탈(解脫)의 삼덕을 구하여 순정을 가져 전심영광(專心靈光)의 순열(純熱)을 닦아서 바로 대진보를 이루기 바랍니다. 바른 길을 밟아 나아가고 있어도 최초에 한오리의 오차가 있으면 필경은 천리의 간격으로 멀어지고 맙니다. 잘 생각하여 심기(心氣)를 적정(寂靜)하게 가질 것입니다.”
네사람 모두가 순순(諄諄) 설법(說法)하는 대사의 말씀에 도연(陶然)히 취한 듯 듣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은 점도 많이 있었으나 무어라 할 수 없는 불타교법의 오의(奧義)에 접촉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모는 여태까지 볼 수 없던 숭엄한 표정의 대사를 보고 이는 무엇인가 결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마음에 느꼈으나 아무 말없이 대사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두손을 모아 합장할 뿐이었다.
출전 : 大聖 관세음보살일대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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