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관세음보살전기-20

근와(槿瓦) 2016. 10. 25. 00:54

관세음보살전기-2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20. 공주, 금광명사(金光明寺)에 진산(晋山)하고 묘선대사(妙善大師)라 존칭(尊稱)되다


금광명사 개건을 위하여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유명한 건축, 공예, 미술가들은 각기 재주를 다하여 심혈을 기울여 그들이 맡은 분야에 걸작을 남기려 애썼다. 이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신심(信心)으로 헌신봉사한 까닭에 예상이상으로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경위에 있어서 하루라도 빨리 공주를 모셔야겠다는 민중의 염원과 송림정사의 불편한 산오(山奧)생활에서 어서 수행에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일치한 염원이 뭉쳤기 때문이었다.


공주가 진산(晋山)하게 된다는 소식에 제일 감격한 것은 불교도들이었다. 대, 소승 각 교파를 초월해서 공주의 출가수행을 구세주의 출현이라 믿었다. 사실상 공주의 뛰어난 수행생활이야말로 범인의 용기로서는 도저히 될 일이 아니었다.


일국의 왕녀로 탄생하여 부귀영화의 신분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화원의 노역이나 백작사의 중노동과 소실(燒失)등의 재난에 조우해서도 오히려 구도심염(求道心炎)을 더한층 불태웠던 금강부동심(金剛不動心)에는 누구나 탄복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총명위덕한 공주가 스스로 고독극고(孤獨克苦)의 수행을 받아들여 진리묘법(眞理妙法)을 철저히 구도해 나가는 숭고한 자세를 본 사람들은 모두들 공주가 자기들을 대신하여 발고여락행(拔苦與樂行)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 굳게 믿었다. 실제가 그러하였다.


이월 초순에 기공해서 유월 초순에 금광명사는 장엄우아한 전용자를 나타내 그 현란(絢爛)한 색채미는 일대를 빛내었다. 드디어 6월 19일에 공주가 금광명사에 내림한다는 포고(布告)가 있었다. 모두가 고대하던 6월 19일이 되었다.


공주는 궁전에서 차출된 가마를 사양하고 보모와 영련을 데리고 반년간이나 수행하던 회포어린 송림정사에서 하산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공주의 무사했던 모습을 친배코자 수많은 민중들이 구름처럼 연도에 운집해 있었다. 수다한 고난을 겪어가며 끝내 이겨낸 공주, 마침내 숙원을 달성하여 보살행을 행하려는 순진일도(純眞一途)의 지성에 모든 사람들은 공주의 숙원달성을 진심으로 기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저 멀리로부터 공주의 일행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모든 군중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였다.


그리하여 이윽고 공주일행이 통과하게 되자 어느 누구할 것 없이 모두 일어나 마치 약속했던 것처럼 공주일행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공주의 행열은 갈수록 연연부단으로 장사진열을 이루며 궁전쪽으로 향해갔다. 금광명사는 궁전의 남방에 있어서 성밑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었던 때문이다. 모여든 군중들은 공주의 뒤를 따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갈수록 그 숫자가 늘어만 갔다. 한편 묘장왕은 “아나라”에 명하여 최대한으로 성대하게 공주를 맞을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이는 죄많은 아버지로서 적어도 진실한 참회에서 우러나온 공주에 대한 속죄의 표시이었다. 묘음, 묘원 두 언니들도 부마(서랑)들과 같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출영하였다.


성내에 들어온 공주는 궁전을 향해서 공손히 예배하여 마침내 두 언니 부부, 백작사 장로니승들의 환영을 받았다. 더없이 기쁜 날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이처럼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은 터지는 오열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를 본 많은 군중들 또한 눈시울이 붉어져 흐르는 눈물을 억제치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맺히었던 설움이 다하기에는 평생을 두어도 모자랄 그들이지만 이미 금강(金剛)과 같은 믿음에 차있는 그들인지라 차츰 분위기를 회복하여 나갔다.


눈물을 거둔 두 언니 공주가 묘선공주에게 오늘의 출가 입산식은 부왕마마가 직접 행하기로 하셨음을 알리자 공주는 합장하며 부왕의 뜻에 따를 것임을 나타내었다. 때마침 성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고관현악대(鐘鼓管絃樂隊)가 유양(悠揚)한 범악(梵樂)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높이 기당(旗幢)이 펄럭이며 숲을 이루고 있는데 연도에 늘어서서 공주를 전송하는 민중들이 손에 손에 꽃을 들고 나와 공주의 가는 길에 뿌리니 이에 더한 축복이 있을 수 없었다.


성밖으로 나서자 왕명을 받은 치전장군 “가샤아바”가 삼백의 친위병을 통솔하며 공주일행을 호위하기 시작하였다. 육가삼시(六街三市)의 민중은 전부 나와 공주의 행렬을 전송했으며 공주도 이들의 환송에 응답하여 합장하면서 진심으로 이들의 따뜻한 전송에 고마움을 표했다. 멀리 옹립하여 서있는 야마산(耶摩山)은 하늘이 청명하여 웅대하고 수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멀리 보이는 금광명사(金光明寺)는 아릅답기 그지없었다.


산천초목도 공주의 성스러운 진산(晋山)을 축복하는 듯 했다. 금광명사는 전체적으로 금색과 벽색(碧色)의 고상한 배색으로 보는 이의 눈을 휘황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흰돌이 깔린 길은 사원경밖 산모퉁이로부터 대웅전까지 이어져 있었다. 담은 붉은 극채색으로 사면을 에워싸고 지붕은 황금색의 기와를 올려 아름다우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사원에 도착한 공주는 우선 천왕전에 올라가 예배하고 이어서 미륵(彌勒), 위타천(韋駄天), 이존(二尊)의 불전에 무릎꿇어 예불 축원하고 이어 후전(後殿)으로 나아가 오전(奧殿)에 안치되어 있는 주불존상(主佛尊像)앞에 경건히 예배하며 미타불에 출가 수속함을 고하고 기도하였다.


향로에서는 드높은 향기가 흘러나오고 사방에 불을 밝히어 주위가 엄숙한 가운데 종이 울리고 북이 울리면서 장엄한 의식이 진행되었다. 노송고백(老松古栢)이 높이 솟은 뜰에는 삼십여명의 니승이 합장 기도하며 이 역사적인 순간에 서원성취를 축원하였다.


예배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영련이 달려와 고(告)했다.

“공주님, 부왕마마께서 수계입위(受戒入位)의 의식에 참석차 왕림하고 계십니다.”


묘장왕의 참여통치를 받고 공주는 조속히 니승과 더불어 산문에 나가 조용히 대기하였다. 이윽고 대신과 중신을 거느린 왕의 행차가 도착하였다. 깊이 읍례(揖禮)하여 왕을 영접한 공주 묘선은 부왕의 각별한 은정에 깊이 감사하였다.


이어 수당(修堂)에 들어와 마주앉게 된 왕과 공주는 서로가 순식간에 몰려오는 만감과 회포에 젖어들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이윽고 묘장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공주여! 이 아비는 공주의 수계입위식에 직접 입회(入會)할 것을 바라 왔나니 이를 용납하겠는가?”


비감(悲感)어린 부왕의 음성에 접하자 공주는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며 가슴이 메여왔다.

“묘선은 다시없는 행자(行者)이옵니다.”라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진정으로 회개한 부왕에게서 육친의 정이 밀물처럼 밀려옴을 느끼게 되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두뺨을 적시게 된 것이다.


묘장왕은 흐느끼고 있는 공주를 더 이상 마주 대하고 있을 수 없었던지 괴로운 신음을 토하면서 조용히 일어나 관정재전(灌頂齋殿)으로 향했다. 오전(奧殿)에 나아가 묘장왕은 미타불과 석가불에 분향(焚香)한 후 서방전(西方殿)을 돌아서 나한당(羅漢堂)과 가람각(伽藍閣)에도 참배소향하고 다시 오전(奧殿)에 돌아왔다.


다른 당우(堂宇)에는 아나라재상을 대리로 시켜 분향케 했으며 공주출가 수행이 부디 무사평안으로 증과 성취하기를 기원하였다. 오전(奧殿)에는 묘음, 묘원 내외와 문무백관이 양편에 도열해 있었고 하좌에는 백작사 장로니승을 비롯하여 보모, 영련이 앉아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사식(司式)이 제사 시작을 알리자 비구니들이 일제히 목어와 종을 치는 가운데 의식이 시작되었다. 묘음공주가 옥반(玉盤)을 가지고 나타났다. 옥쟁반에는 수계입위의 교본(敎本)이 얹혀 있었고 뒤따라 묘원공주가 자금(紫金)의 탁발을 올리었으며 보모는 황색의 가사(袈娑)를, 영련은 승혜(僧鞋)와 모건(帽巾)을 올렸다.


일동은 응신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눈은 코를 관하고 코는 마음을 관하며 정적한 상황속에서 기침소리도 없었다. 제천신불(諸天神佛)이 극진(極盡)하게 영험을 현현하며 보살나한(菩薩羅漢)이 일주일주(一柱一柱)로 위엄형상(威嚴形相)을 나타내 오전(奧殿)에 강림하여 공주의 사신수행(捨身修行)을 비호(庇護)하는 듯 장엄한 영기에 휩싸였다. 묘장왕은 낮고 무거운 소리로 대전의(大典儀)를 선언하였다.


묘선공주는 평민의 복장으로 조용히 법당중앙에 설치된 대좌에 올랐다. 집사역의 두사람은 긴 번(幡)을 들고 다른 두사람은 향로를 들고 공주앞으로 나아가 공주를 선도(先導)하여 묘장왕 앞으로 나갔다. 흑항(黑沆), 백단(白檀)의 향목이 훈향(燻香)되어 향연이 원내에 가득한 가운데 묘장왕은 인자한 소리로 공주에게 유시를 언급하였다.

“공주여! 어제까지 연이 있어 부녀의 사이였으나 잠깐 지나면 맥로(陌路)의 타인이 된다. 공주가 불문에 들어 구도에 정진하겠다는 염원을 허락하노라. 이제는 다만 일심으로 수도하여 정과를 성취하여 장래 후세의 경앙(敬仰)의 대상이 되기를 바랄 뿐이도다. 하루빨리 도를 얻어 육신성불(肉身成佛)의 홍복(弘福)을 받아 다시 불타정법을 널리 전하여서 세인을 구제할 것을 바라노라. 그러함에 그대는 미타불전(彌陀佛前)에 정식으로 발원함이 합당하겠도다. 수계입위(受戒入位)의 식을 작하노라.”


공주는 삼배하고 일어나 미타존과 불세존앞에 무릎을 꿇고 지극정성으로 서원을 발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나 이제 불문에 들게 됨은 오로지 불은(佛恩)이라 생각을 하옵니다. 이 몸이 멸(滅)할 때까지 정법을 구하여 기필코 모든 중생의 고난을 구제할 것을 미타불과 불타존전에 서원하나이다.”


서원을 마치자 당대전(堂台前)에 무릎을 꿇었다. 장로 니승이 삼가 그앞에 서서 엄숙히 수계입위식을 주재하여 공주의 정등정각으로의 성취를 기원하였다. 수계식(受戒式)을 마치고 장로니승으로부터 탁발(托鉢)을 받으며 서서히 승모(僧帽)를 쓰고 법의(法衣)를 두르는 공주의 출가 모습을 더 보고 있을 수 없었음인지 부왕 묘장왕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러나 사원의 뜰을 가득히 메운 군중과 사원의 언덕위에 흑산처럼 차있는 군중들에게는 더없이 감동적이고 엄숙한 순간이었다. 모든 의식이 끝난 후 궁전에 귀임하려는 묘장왕을 천왕전 밖까지 전송나온 공주는 마차 앞에 엎드려 이승에서의 마지막 하직인사를 올렸다.

“국사 다망하신 중에 우니 묘선(愚尼妙善)을 위하여 수계입위식의 행사를 친히 베푸시와 길이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금후로 구법수행에 전념할 것이옵니다. 부왕마마의 후의는 길이 잊지 않겠나이다. 사원의 모든 비구니와 더불어 부왕마마께 하직인사를 올리옵니다. 원하오니 마마!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다시 수레안의 묘장왕의 눈과 고개를 쳐든 묘선공주의 두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그들은 얼어붙은 듯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이윽고 왕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뉘엿뉘엿 지는 석양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멀어져가는 왕의 행렬을 공주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차츰 저무니 운집했던 군중들도 차츰 하산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어둠이 깔리자 다시 산사(山寺)는 고요에 파묻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칙을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이날부터 공주는 묘선대사라 존칭되어 당대(黨代)의 사람들로부터 “대사(大師)”로 통칭케 되었으니 여기서도 앞으로 공주묘선을 대사의 호칭으로 부르기로 한다.



출전 : 大聖 관세음보살일대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세음보살전기-22   (0) 2016.10.27
관세음보살전기-21   (0) 2016.10.26
관세음보살전기-19   (0) 2016.10.24
관세음보살전기-18   (0) 2016.10.23
관세음보살전기-17   (0) 2016.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