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뱀을 잡는 이유 49

근와(槿瓦) 2014. 7. 4. 00:43

뱀을 잡는 이유 49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이 기원 정사에 돌아오신 어느 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탐욕을 알아 그것을 멸하고 여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법을 닦아야 한다. 즉, 공의 정(定)과 무상(無相)의 정(定)과 무원(無願)의 정이다. 또 진에, 우치, 한(恨), 부(), 자부(自負), 질(嫉), 간(), 첨(諂), 광(), 훤조(喧), 증상만(憎上慢), 교(), 방일 등을 알고, 이것들을 멸하고 여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법을 닦아야 한다."

어느 때, 한 바라문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교답마여, 당신은 현세에 보(報)가 있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어떻게 직접적인 결과가 있으며, 또 그것이 열반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탐욕, 진에, 우치에 불태워지며 패괴(敗壞)되고, 사로잡힌 마음은 자해(自害)하려 생각하고 남을 해치려 생각하며 마음 속에 괴로움과 근심을 느낀다. 만약 탐욕, 진에, 우치를 여의면 자타의 해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 속에 괴로움이나 근심을 느끼는 일이 없다. 바라문이여, 이 법은 이와 같이 현세에 보(報)가 있는 법이며 또 그것이 열반으로 인도되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느 날, 원래 독수리잡이를 직업으로 삼고 있던 아리타(阿梨)라는 제자가 악견(惡見)을 일으켜 말하였다.

"세존께서 장애의 법이라고 일컫는 일이더라도 그것을 실행해 보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많은 제자들에게 그 악견을 여의게 하려고 갖가지로 논의도 하고 훈계도 했으나 무익했다."

세존은 이 말을 듣고 아리타를 불러 질책한 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제자들이여, 비유컨대, 땅꾼이 한 마리의 큰 뱀을 발견하자 동체나 꼬리를 붙잡는다. 그러면 그 뱀은 몸을 구부려서 그 사람의 손이나 팔 등 어느 곳이나 가리지 않고 물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은 죽거나 또는 죽을 정도의 고통을 받게 된다. 그것은 뱀을 잡는 방법이 나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이 법의 뜻을 깊이 궁구하지 못했고 그것을 통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논의할 때에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하기 위하여 그 법을 배운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배우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 가르침을 오해하여 오랫동안 고통을 자초한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여, 여기에 또 어떤 양가 자제들은 이러한 교법을 익히고 그 뜻을 새기며 그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여, 길이 기쁨과 행복을 맞는다. 왜냐하면 그는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땅꾼이 큰 뱀을 보자 갈고리 또는 몽둥이로 머리를 꼭 누르고 목을 붙잡는다. 그때 아무리 뱀이 그 사람의 손이나 팔, 그 밖의 어떤 곳이든 몸뚱이를 휘감기더라도 그 사람은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르지 않고 또 죽음과 고통을 받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 뱀의 목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여, 나는 너희들로 하여금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해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하겠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오랜 여행을 하다가 어떤 곳에서 큰 바다를 보고 이같이 말하였다. '이 대해(大海)의 이쪽 언덕은 위험하지만 저쪽 언덕은 안전하다. 그러나 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갈대나 나뭇가지나 잎을 모아 뗏목을 만들어 그것에 의지하여 안전하게 저쪽 언덕에 이르러 생각하였다.'이 뗏목은 나에 대하여 큰 공이 있다. 이 뗏목에 의해 안전하게 이 언덕으로 건너 올 수 있었다. 나는 이 뗏목을 나의 머리 위에 얹거나 어깨에 메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야하겠다.' 제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사람은 이와 같이 하므로써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보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이여,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하면 그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제자들이여, 그 사람은 건너간 다음 이렇게 생각한다. '이 뗏목에 의해 나는 안전하게 이 언덕으로 건너왔다. 나는 이 뗏목을 언덕에 올려놓든가 또는 물 가운데 띄워 놓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라고.

이렇게 할 때 이 사람은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제자들이여, 나는 이 뗏목을 비유로 말하건대, 법은 버려야 하는 것이며,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한 것이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법의 방편에 의할 뿐 법까지도 버려야 한다. 하물며 비법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제자들이여, 이에「아」와「아소(我所)」라는 악견이 일어날 수 있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그것은 몸과 마음과 견문 각지(見聞覺知)와 마음의 견해 그 자체 등이다.

제자들이여, 무식으로서 선인(善人)에 접근하지 않고 성자나 선인의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이 네 가지 것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다, 나인 것이다, 나의 자아다'라고 인지하며 집착한다. 그러나 많은 것을 배우고 선인에 가까이하여 성자나 선인의 법에 훈련된 자는 이 네 가지에 대해 그와 같이 인지하여 집착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그런 것이 없어졌기에 바른 염을 잃고 공포에 위협 받는 일도 없다."

그때 어떤 제자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외물(外物)에 의해 바른 염을 잃고 공포에 위협 받는 일이 있습니까?"

세존이 대답하셨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이것은 전에는 나의 것이었는데 지금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없을까? 아마 앞으로 두 번 다시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 때문에 슬퍼하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면서 운다. 이것이 외물에 의해 바름 염을 잃고 공포에 위협 받는 경우다. 또 이와 같이 생각하더라도 슬퍼하지 않고 탄식하지 않고 가슴을 치면서 울지 않는다면, 이것은 외물에 의해 바른 염을 잃지 않고 공포에 위협 받지 않는 자이다."

"세존이시여, 내부의 것에 의해 바른 염을 잃거나 공포에 위협 받는 경우가 있습니까?"

"여기에 어떤 사람이 '이 세계와 이 자아는 영원히 변치 않고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더라도, 부처님의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이 가르침에 따르면 나라고 하는 것은 단절된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슬퍼하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면서 운다면, 이것은 내부의 것에 의해 바른 염을 잃고 공포에 위협 받는 일이다.

부처님의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나는 멸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 것은 내부의 것에 의해 바른 염을 잃지 않고 공포에 위협 받지 않는 자이다.

제자들이여, 너희들은 영구히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가진 일이 있는가, 또는 본 일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제자들이여, 착하도다. 나도 그렇다. 세간에는 상주 영존(常住永存)하는 것은 없다. 나에게 집착하면 우, 뇌, 고가 일어나지 않는 법이 없다. 제자들이여, 아가 있으면 아소가 있고, 아소가 있으면 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 아소도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세계와 자아는 영구히 존재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견해는 어리석은 것이다."

"제자들이여, 몸은 상주인가, 무상인가?"

"세존이시여, 무상입니다."

"무상한 것은 고뇌인가, 행복인가?"

"세존이시여, 고뇌입니다."

"무상하면서 고뇌, 변천하는 법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 나란 말이다,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적당한 일일까?"

'세존이시여, 그것은 적당치 않습니다."

"제자들이여, 그것은 몸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몸일지라도 모든 몸은 모조리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르게 알아야 한다.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이여, 이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듣고서, 몸과 마음을 싫어하고 욕(欲)을 여의어 해탈해야 한다. 그래야 '해탈했다'고 하는 지혜가 생한다. '생은 다했다, 청정한 행은 성취되었다, 해야 할 일은 마쳤다, 이 생의 끝에 다른 생은 없다'고 알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을 장애를 여의고 무거운 짐을 내리고 계박을 여읜 성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이와 같이 나에게 대하여 어떤 출가자들은 아무 근거도 없이 망령되이 비난한다. '교답마는 사람들에게 파괴와 단멸(斷滅)을 가르치는 자이다'라고 . 제자들이여, 나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제나 지금이나 현세의 고뇌와 그 고뇌의 단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남이 부처를 비난하고 꾸짖고 욕을 하더라도 부처는 초조해 하지 않고 노여움을 품지 않는다. 또 비록 타인이 부처를 공양해도 부처는 기뻐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으며 교만해지지도 않는다. 또 남이 부처를 존경하고 공양할 때에 부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에게 이같은 일을 하는 것은 전부터 알려진 일이다.' 그러므로 만일 남이 너희들을 비난하고 꾸짖고 욕하더라도 너희들은 마음을 초조하게 하고 노여움을 품어서는 안 된다. 또 남의 존경을 기뻐하고 교만하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전부터 알려진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제자들이여, 그러므로 너희들의 것이 아닌 것은 그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너희들에게 영겁의 행복이 될 것이다. 제자들이여, 너희들의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몸은 너희들의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버려라. 너희들의 것이 아니다. 마음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너희들에게 영겁의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다.

제자들이여,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이 기다림(祇多林)에 와서 풀이나 가지나 잎을 모아다가 불태운다고 하자. 너희들은 그때 '이 사람은 우리들의 물건을 운반하여 제멋대로 태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아」도「아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여, 꼭 그와 같이 너희들의 것이 아닌 것은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너희들은 영겁의 행복을 누릴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