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객진번뇌(客塵煩惱)와 각(覺)의 묘심(妙心) 51

근와(槿瓦) 2014. 7. 8. 00:10

객진번뇌(客塵煩惱)와 각(覺)의 묘심(妙心) 51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아난은 전다라족의 딸의 유혹에 대한 자신의 힘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어느 날 세존께 간절히 도를 닦는 방편에 대하여 물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너는 처음 발심했을 때 어떠한 모습을 보고 세간의 애욕을 버렸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세간에서도 뛰어난 세존의 상호(相好)를 뵙고 '이 유리처럼 맑은 몸은 결코 애욕 속에서 생긴 것은 아니다. 애욕의 마음은 거칠은데 피고름처럼 흐린 마음을 가진 인간에게서 어떻게 이 같은 빛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고 갈앙(渴仰)한 나머지 출가했습니다."

"아난이여, 착하도다. 네가 만일 진실로 참된 각을 궁구하려고 생각한다면 정직한 마음으로 나의 물음에 대답하라. 아난이여, 너는 부처의 상호를 갈앙하여 출가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에 의해 보고 무엇에 의해 사모한 것인가?"

"세존이시여, 저는 이 눈으로 뵙고 이 마음으로 사모하였습니다."

"아난이여,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또한 너를 오늘날까지 생사의 세계에 유전케 한 것도 그 눈과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난이여, 마치 국왕이 역적의 침범을 받아 이를 토벌하려고 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그 역적이 있는 곳을 알 필요가 있는 것처럼, 지금 번뇌의 티끌을 없애려면 먼저 그 눈과 마음의 소재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의 눈과 마음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눈은 얼굴에, 마음은 몸 안에 있습니다."

"지금 이 강당에서 너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가?"

"먼저 세존이 뵈며 다음으로 대중을 보고 그 다음으로 밖의 숲이 보입니다."

"사실 네가 말한 것처럼, 지금 이 방의 창이 열려 있어 멀리 숲 속까지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대중 가운데 부처를 보지 못하고 바깥만을 보고 있는 자가 있을까?"

"그런 자는 없습니다."

"아난이여, 만일 너의 몸 가운데 마음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몸의 내부에 대한 일을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몸의 내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면 '마음은 몸 내부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가르침에 의하여 마음은 몸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의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유컨대, 실내에 등불을 켜면 등불은 자기 자신을 비추지 않고 먼저 실내를 비추며, 다음에는 방 밖을 비추듯이 사람들도 또한 몸의 내부를 보지 않고 다만 몸의 바깥만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아난이여, 만일 마음이 몸 밖에 있는 것이라면 몸과 마음은 서로 떨어져 마음이 아는 바를 몸은 알지 못하고, 몸이 아는 바를 마음은 알 까닭이 없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아는 바를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느낀 것은 마음이 잘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이여, 마음은 몸 밖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여기에 아난은 합장하고 다시금 세존께 물었다.

"이미 마음은 몸의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할진대 도대체 마음의 본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원컨대 세존이시여, 대자비의 마음으로써 그 이치를 밝혀 도를 닦는 자의 요제(要)로 삼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세존이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모든 중생들은, 시작도 알 수 없는 옛날부터 깊이 업의 기반에 계박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오로지 두 가지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이다. 첫째는 생사의 근본이 미망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것을 자기의 본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요, 둘째는 깨달음의 본체인 청정한 본심이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존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러한 다음에 팔꿈치를 들고 손가락을 굽히시면서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이것을 무엇으로 보는가?"

'세존께서 지금 팔꿈치를 드시고 주먹을 쥐시어, 우리들의 마음을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에 의해 보았는가?"

"대중이 함께 눈으로써 보았습니다."

"눈으로써 보았다면 마음을 이끈다고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제가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는 주먹이라고 분별한 것입니다."

"아난이여, 너는 그 분별하는 것을 너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는가?"

"참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허허, 아난이여, 그것은 너의 참마음이 아니다."

여기에 이르러 아난은 매우 놀라며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저의 참마음은 무엇이옵니까?"

세존이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그 분별하는 마음은 실이 없는 허망한 것이다. 인연에 의해 일어나고 인연에 의해 변천하는 실체 없는 공(空)인 것이다. 그것을 실이 있는 마음이라고 믿었던 곳에 너의 영겁의 망집이 일어났던 것이다."

다음으로 세존은 또 주먹을 쥐고 다시 그것을 펴시면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아난이여, 너는 이것을 무엇으로 보는가?"

'세존께서 주먹을 쥐시었다가 다시 그것을 펴신 것으로 압니다."

"너는 나의 손의 개합(開閤)이 있다고 보는가, 혹은 너의 견해에 개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세존이시여, 세존의 손에 개합이 있는 것입니다. 저의 견해에 의해 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움직이는 것은 나의 손인가 너의 마음인가?"

"세존의 손입니다."

세존은 다시 손을 들어서 좌우로 움직이고, 아난의 마음에 어떠한 암시를 주었다. 아난은 그것에 따라서 좌우로 머리를 움직이니, 세존이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네가 나의 손을 따라 머리를 움직일 때에 너의 머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너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혹은 너의 견해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세존이시여, 머리입니다. 견해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이때 세존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모든 중생들은 마치 이와 같이 모두 객진(客塵)과 번뇌 때문에 항상 그 청정한 본심이 더럽혀져 그릇된 생각에 떨어지고 있다. 외면에 끌려 일어나는 번뇌는 항상 움직이고 있어 멈추는 데가 없다. 그것은 마치 손님과 같이 잠시 동안 머무는 마음이고, 티끌처럼 밖에서 달라붙어서 내부의 본심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나 각의 본체인 청정한 마음은, 그 때문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더렵혀지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티끌에 묻어도 그 성은 상실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아난이 머리를 움직였지만 보는 법은 움지이지 않는다고 하고, 나의 손은 움직이지만 아난의 견해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너희들은 명심하여 움직이는 객진의 번뇌를 자기의 본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움직이지 않는 각의 본심에 눈을 떠, 진실한 자기를 알아야 한다. 만일 움직이는 번뇌에 마음이 붙잡히면 항상 전도된 견해에 쫓겨 미혹의 세계에서 방황하게 된다."

이 가르침을 듣고 아난을 비롯하여 모여 있던 대중들은 갑자기 마음이 열려 기쁨이 용솟음쳤다. 마치 젖을 못 먹은 갓난 애가 어머니를 발견한 듯한 생각으로 세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모임 가운데 있었던 바사닉왕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제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을 때에 산사야비라타자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는 그때, 이 몸이 죽어 없어지는 것을 열반이라 했는데, 아뭏든 죽은 후에 없어진다는 것은 허무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존께서는 멸함이 없는 각의 본심이라는 것을 설해 주셔서 저는 참으로 밝은 기분입니다. 모쪼록 그 없어지지 않는 마음의 경계에 들어가는 도를 설해 주십시오."

세존이 말씀하셨다.

"왕이여, 그대의 몸은 금강과 같이 강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멸하는 것인가?"

"멸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멸하지 않은 것에서 어떻게 하여 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이 몸은 마치 풀섶이 차차 불에 타 재로 변해가듯 각일각 변천해 가옵니다. 세존이시여, 어렸을 때는 저도 피부가 윤택했지만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주름살이 생겼습니다. 또 젊었을 때는 혈기가 왕성하였지만 지금은 기운도 약하고 마음도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어느 만큼 늙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10년을 1기로 지나간 날을 되돌아 보면 분명히 늙은 변화가 나타납니다. 다시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는 1년 사이에도 나타나고 1개월 사이에도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찰나의 사이에도 멈추지 않는 것이 인명의 무상인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 관찰하면 제 몸도 머지않아 멸할 것이라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왕은 몸이 멸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 멸하여 없어지는 몸 내부에 멸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겠도다. 왕이여, 왕은 항하를 처음 본 것이 언제인가?"

"세 살 때 어머니와 같이 신묘를 참배할 즈음, 처음 항하를 보았습니다."

"그때와 지금과 항하의 물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44세가 된 오늘이나, 세 살이었던 옛날이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왕이여, 머리가 세고 얼굴에 주름이 잡힌 지금과 세 살 때의 어린 옛날과 그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보는데 있어, 보는 눈에 다른 바가 있지 않는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왕이여, 얼굴에 주름이 잡힐지라도 보는 눈의 성에는 주름이 잡히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변할지라도 불변의 것은 변하지 않는다. 주름잡히는 것은 변하며, 변하는 것은 멸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멸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왕이여, 이교도 쪽에서 말하는 것처럼 몸이 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멸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왕은 세존의 이 가르침을 듣고, 비록 썩어지는 몸은 버릴지라도 거기에 멸하지 않는 것이 있어서 영원히 생을 얻을 수가 있음을 깨닫고 대중과 함께 더할 수 없는 기쁨에 잠겼다.

 

이때 아난이 일어서서 세존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우리들의 견해에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다고 하면, 우리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본심의 성을 잃어 전도된 견해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물(物)도 마음도 모든 것은 다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은 본래 마음에서 시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주 설명한 바이다. 그러고 보면 너희들의 몸도 마음도 본래 미묘하고 분명한 마음이 있어서, 그 가운데 나타난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 미묘한 본심을 돌아보지 않고, 본래 오성(悟性)을 지닌 마음 가운데에서 미혹을 맺어 그 미혹된 망상을 본성이라고 착각하여, 이것이 이 육신 속에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하(山河), 대지(大地), 허공 끝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미묘한 본심 속에서 시현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작은 물거품을 움켜쥐고서 대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등의 어리석음이 아닌가?"

"세존의 말씀에 의해 마음의 근본인 상주하는 심성에 대해서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분별심에 의한 것이 아니옵니까?"

"아난이여, 만약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법을 들었다고 하면, 그 듣게 된 법 또한 분별의 법인 것이며, 법 그 자체의 성에 즉(卽)했다고는 할 수 없다. 아난이여, 손으로 달을 가리켰을 때, 그 손가락 끝에 눈을 붙이고 달을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달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손가락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빛이 없는 손가락을 빛이 있는 달로 오인한 점에서 본다면, 그 사람은 밝음과 어두움의 성질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참으로 분별에 의해서는 법의 진성을 알 수가 없다. 아난이여, 지금 너는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나의 말을 깨달았다고 했는데, 만일 분별이 참으로 너의 마음이라면. 그 분별하는 마음은 언제까지나 변치 않고 존재해야 하는데, 그러나 분별은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써, 인연이 다하면 변하거나 혹은 멸하게 된다. 참으로 인연을 여의고서는 분별의 성은 없다. 그리고 그 인연이 오고 또는 가는데는 상관없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멸하지 않는 심성이 있다. 그거야말로 네 마음의 본체인 것이며 주인이다. 아난이여, 하나의 비유로써 설하겠다. 여인숙에는 손님과 주인이 있다. 손님은 분별하는 마음으로 인연이 있으면 와서 묵지만, 인연이 다하면 떠나 모습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손님이 오가는데 상관 없이 주인은 머무르고 있다. 손님이 떠났다고 해서, 그 때문에 여인숙이 없어졌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인연에 따라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졌다고 해서 자기가 없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난이여, 외연(外緣)에 의해 분별심을 성이라고 하지 말라. 외연의 마음에는 관계없이, 항상 변하지 않는 마음을 주인으로 삼으라."

"세존이시여, 외연에 움직이지 않는 본성의 마음은 어찌하여 없어지지 않을까요?"

'아난이여, 자세히 들어라. 지금 이 강당은 해가 떠 있어서 밝으나 만일 해가 지면 어두워진다. 이 경우 밝다는 것은 해에 돌릴 수 있고 어둡다는 것은 밤에다 돌릴 수 있다. 그렇지만 사물을 분명하게 판별하는 힘은 어디에도 돌릴 수 없다. 밝음이 오더라도 어둠을 아는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어둠이 사라져도 그것은 밝음을 보는 힘이 일어난 것 때문이 아니다. 명암의 오고 감에는 상관없이, 명암을 보는 힘은 항상 머물고 있다.

밝다고 보는 것도 한 때의 마음, 어둡다고 보는 것도 한 때의 마음, 그것은 마음의 진성은 아니다. 밝음과 어둠에 매이지 않는 상주하는 마음, 그것이 너의 진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심성은 밝음에도 침해되지 않고 어둠에도 더럽혀지지 않으며, 밖의 인연에 끌려서 거래하는 선악, 애증(愛憎)과 같은 번뇌 가운데 싸여 있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으며, 본래부터 미묘 청정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난이여, 둥근 그릇에 물을 담으면 둥글게 되고 네모진 그릇에 담으면 네모지게 된다. 그러나 본래 물에는 둥글거나 네모진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 똑같이 모든 사람들은 시작이 없는 옛날부터, 담아진 물에서 인생을 보고 혹은 대소를 생각하며, 혹은 방원(方圓)을 생각하고, 혹은 선악을 생각하고. 혹은 애증(愛憎)을 생각하며, 그 생각에 사역되어 외물만을 좇아 괴로와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기(器)라고 하는 외연(外緣)에 계박되어 그 계박된 자기를 자기의 심성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망상이다. 그러므로 계박된 견해를 계박된 외연으로 돌리고, 계박되지 않은 자기의 진심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람은 부처와 같이 되어 몸과 마음이 원만하고 밝게 되어, 어떤 것에도 장애가 되는 일이 없이, 이 몸 그대로 시방의 법계를 수용할 수가 있다.

아난이여, 거울을 들고 태양을 향하여 쑥으로 불을 붙이려 할 때, 그 불은 거울에서 나오는가 또는 쑥에서 생기는 것일까? 거울은 손에 있고 태양은 하늘에 있고 쑥은 땅에서 취한다. 태양과 거울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화합할 수가 없다. 그러나 태양 속의 불이 거울을 인연으로 하여 쑥에 나타났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금 부처를 낳는 근본인 여래장(如來藏)의 진심은, 본래부터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퍼진 신화(信火)의 근원이다. 한번 불혜(佛慧)의 거울을 인연으로 하여 중생이라는 쑥에 점화한다면, 거기에 불성 개각(佛性開覺)의 불길이 타오를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이미 한곳에서 거울을 비추면 불이 일어난다. 따라서 모든 법계를 향하여 거울을 비추면 온 세간에 불이 충만하리라는 것은 명확한 일이다. 아난이여, 부처는 이 이치에 따라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항상 법이라는 거울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난을 비롯하여 모인 대중은 모두 함께 세존의 가르침을 받아 오성의 본심에 대하여 깨닫고, 이 육신은 요컨대 허공 가운데 떠도는 아주 작은 티끌 같은 것임을 깨달아, 육신의 생멸에 사로잡혀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와하고 번민하는 어리석음을 뉘우쳤다. 이리하여 세존을 예배하고 게송으로 각자의 원을 세웠다.

바다처럼 밝고 묘한 법을 다 지니시고 동하지 않으시는 부처님, 우리들 억겁(億劫)의 망집을 녹여 때를 놓치지 않고 법신을 얻으시니 그 용감함은 헤아릴 수가 없네. 우리들은 원컨대 법왕이 되어 한없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이 참으로 깊은 마음으로써 한없는 나라를 다스리는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아니랴.

세존이시여, 증명하소서. 우리들 오탁(五濁)의 세계에 들어와 만약 한 사람도 부처가 될 수 없다면, 끝내 멸도하도록 맹세하리라.

비록 대공이 다할지라도 이 금강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으리라.

그때 대중 가운데 있었던 부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삼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본래의 묘각(妙覺)인 진심과 부처의 마음과는 꼭 일치하여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는다면, 부처님의 마음에 여러 차별의 세계가 어떻게 생하는 것일까요?"

"부루나여, 여기에 어떤 사람이 어느 마을에 들어가 남쪽과 북쪽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 혹(惑)은 미혹한 마음에서 온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오성의 본심에서 온 것인가?"

"세존이시여, 미혹은 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써 실성(實性)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뿌리 없는 풀입니다. 그러니 뿌리 없는 풀이 다음에 미혹의 싹이 트는 일은 없습니다. 또 깨달음 그 자체가 미혹을 짓는 일도 없으므로, 각의 마음에서 망집이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미혹된 사람에게, 만약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와서 바른 방향을 가르쳐 준다면, 그 사람이 다시 미혹되는 일이 있을까?"

"그와 같은 일은 없습니다."

"부루나여, 부처도 그와 같다. 한번 깨달은 망집의 성(性)은 공이다. 뿌리가 없는 것이라고 바르게 안 다음에는 두번 다시 망집을 낳는 일은 없다. 부루나여, 눈병이 있는 사람은 공중에 환화(幻華)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병이 나으면 그 환화는 없어진다. 본래 망집의 꽃은 있는 것이 아니다. 무명(無明)으로 지혜의 눈병을 앓기 때문에 중생들은 망집과 증오의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명의 눈병이 나은 부처에게는 미망의 환화는 없는 것이며, 다만 보이는 것은 바른 깨달음의 세계뿐이다. 따라서 부처에게는 차별의 세계 같은 것은 결코 없다.

부루나여, 한번 달군 순금은 다시 금광 속으로 되돌아 가는 일이 없다. 한번 재로 화한 나무는 또다시 나무로 돌아가는 이치는 없다. 망집을 끊은 부처에게 무슨 차별의 세계가 일어날 것인가. 그것은 망집된 자의 눈으로 본 생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부루나여, 저 허공의 모양은 정한 것이 아니다.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고 동(動)도 아니고 정(靜)도 아니다. 해가 비치면 밝은 모양이 나타나고, 구름이 끼면 어두운 모양이 나타난다. 또 바람이 불면 동이 되고 바람이 자면 정이 된다. 즉, 정한 모양이 없으므로 인연에 응하여 어떠한 모양으로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각의 본심도 움직여 나타나는 것이다.

여래장이라고 하는 각의 본심은 공도 아니고, 지수화풍(地水火風)도 아니며,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아니다. 또 무명으로 시현된 세계도 아니며 그것이 멸한 경지도 아니다. 그 어느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만일 사람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형체 있는 것에 집착하여 도를 구하면, 그 곳의 지수화풍에 의해 이룩되는 형체로써 나타날 수도 있고, 또한 그 형체 있는 것이 인연이 되어 이루어져 자성(自性)이 없는 공함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여래장은 그 공 가운데 나타날 수가 있느니라. 이리하여 중생들의 근기에 응하여 도와 비도(非道), 물과 마음, 유(有)와 공의 어느 쪽이나 지유로이 나타나 조금도 장애되는 바가 없다. 그런데 중생들은 마치 물에 비친 달 그림자가 동쪽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동쪽으로 따라 이동하고, 서쪽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서쪽으로 따라오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과 같이, 각자의 구하는 바에 묘각의 여래장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부루나여, 중생들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묘각을 저버리고 번뇌의 티끌에 사로잡힌 상(相)에 마음이 계박되어, 이 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괴로와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는 원만하게 법계에 충만하여 어떤 것에도 장애가 되지 않는 이 묘각에 일치되어 있으므로, 1을 무량으로, 무량을 1로, 소(小)를 대로, 대를 소로, 잘 나타내어 잘 일치하고 조금도 장애되는 일이 없고, 도량에 앉아 있는 그대로 몸이 시방에 편만(遍滿)하고, 또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까지도 이 일신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혹은 한가닥 털끝에도 보옥처럼 존귀한 법의 세계를 나타내고, 미진(微塵)처럼 작은 것 가운데도 전미개오(轉迷開悟)의 대법륜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부의 눈에는, 실로 부처는 차별의 세계에서 차별의 경계를 일으키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부루나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사람들에게 본래부터 각의 묘심(妙心)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 어찌하여 허망한 마음을 일으키어 그 묘심의 빛을 감추고 생사의 골목에 빠지는 일이 있사옵니까?"

"부루나여, 사위성에 연야달다(演若達多)라는 자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니, 자기의 얼굴도 머리도 없으므로 깜짝 놀라 스스로 도깨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드디어 정신에 이상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이 경우와 같이 묘각(妙覺)중에 미혹이 있을 리 없으나, 한없이 오랜 동안 밖의 티끌에 움직여 망상을 낳고, 망집에 망집을 거듭하여 미친 사람 같이 생사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다가 그 연야달다가 다시 제 정신을 차려 자기에게 머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중생들도 한번 망상을 떨어 버리고 보면 자기에게 본각(本覺)의 묘심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우기 연야달다의 두뇌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이 다른 데서 온 것도 아니고 정신이 돌았을 때 없어진 것도 아닌 것처럼, 근본 각체의 묘심 또한 깨달았기 때문에 새로 나온 것이 아니고, 미혹되었기 때문에 없어진 것도 아니다. 망상이 없어진 곳이 바로 보리(菩提)이다. 번뇌와 보리는 그 체가 하나인 것이다.

부루나여, 값비싼 여의보주를 갖고 있으면서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제방(諸方)에서 먹을 것을 빌어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처럼, 본각의 묘심을 알지 못하고 남에게 각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만일 그 어리석은 자가 지자로부터 그 보물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면, 갑자기 부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부처에게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 본각의 묘심이 있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존의 가르침에 의하여 중생들은 그 의문을 제거하고 원만한 지혜를 채울 수 있었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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