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일자 불설(一字不說) 37

근와(槿瓦) 2014. 6. 10. 01:37

일자 불설(一字不說) 37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이시여, 모쪼록 성자의 행상(行相)과 일승(一乘)을 설해 주십시오."

"대혜여, 보살은 여러 가지 가르침에 의해 분별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조용한 곳에 머물러 법에 관하여 스스로 깨달으며,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분별의 견해를 여의고 위로 나아가 부처의 경지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닦는 것을 성자의 행상이라 한다.

다음에 일승의 행상이라 하는 것은 일승의 도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차별을 여의고, 여실(如實)하게 주(住)하는 것이다. 승(乘)이라는 마음이 일어나면 승이 아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멸하고 승과 승자(乘者)와의 차별을 여의면, 그것은 진실로 참된 일승이 아니겠느냐. 모든 승을 설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를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다. 탐애는 어머니, 무명(無明)은 아버지, 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서 이 세계가 생한다. 마음에 이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부처라 이름할 수 있다.

 

 

"세존이시여, 일찌기 세존은 '정각의 처음과 열반의 끝에 이르기까지 한 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대혜여, 두 가지의 뜻으로 나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첫째는 스스로 깨달은 법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모든 부처가 증득한 바를 나도 증득하였는데, 거기에는 더하는 것도 덜하는 것도 없다. 그 지혜는 말을 여의고 분별을 여의며 이름을 여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본성의 법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금은 광석 속에 있듯이 부처가 세간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관계 없이 법은 모두 그 본성이 상주하는 진여이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광야를 지나 평탄한 구도(舊道)를 찾아 고성에 들어가듯이, 옛날의 제불이 깨달은 바의 진여를 나도 증득하였으므로 법성은 상주 불변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성불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한 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말에 의하지 말고 뜻을 취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대혜여, 말은 분별과 그 습기(習氣)가 인이다. 목이나 혀, 입술 등의 도움에 의해 갖가지 소리를 내어 서로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말이라 한다. 또 도를 닦는 사람이 홀로 조용한 곳에서 듣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닦는 것 등 세 가지 지혜로써 깨달음의 도를 향하여 경계를 알고 번뇌를 멸하여, 수도의 단계에서 각각의 행을 닦는 것이 의(義)인 것이다. 대혜여, 도를 닦는 자는, 말과 의는 하나가 아닌 것이며 또 다르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의와 말이 다르다고 하면, 말에 의하여 의를 보는 것은 등불이 물건을 비추는 것처럼 말이라는 등불에 의하여 말을 떠난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혜여, 불생, 불멸, 자성, 열반 등에 대하여 만일 말대로 뜻을 취한다면 상견이나 단견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환상을 보고 실(實)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어리석은 자가 보는 바이다. 어리석은 자는 '뜻과 말과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뜻은 체가 없으므로'라고 하니 말의 자성을 알지 못한다. 말은 멸해도 의는 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대혜여, 모든 말은 문자에 사로잡히지만 의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유」와「무」를 떠나 생하는 일도 없으므로 체도 없다. 부처는 문자에 사로잡히는 법을 설하는 일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문자에 사로잡히는 법을 설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설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은 문자를 떠나서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제불과 함께 한 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법은 문자를 떠나서 있으므로 뜻에 의하지 않고서는 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혜여, 만일 설하지 않으면 교법은 끊어진다. 교법이 끊어지면 수도하는 자도 부처도 없어질 것이다. 만일 모두가 없다면 누가 누구를 위해 설할 것인가. 그러므로 수도하는 자는 문자에 사로잡히지 말고 방편을 좇아 설하는 것이 좋다. 나는 사람들의 번뇌와 요해(了解)에 따라 설법을 하는데, 모든 법은 내 마음을 보는 곳에서 밖으로 경계가 없음을 알게 되고,「유」와「무」의 분별을 떠나서, 심, 의, 식을 전개시킨다. 이것은 깨달음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뜻에 따를 뿐, 문자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문자에 의지하는 것은 악견(惡見)에 떨어지고, 자기의 종(宗)으로의 일에 집착하여 법의 모양이나 문사 장구(文辭章句)를 요득할 수가 없으며, 스스로를 해치고 남을 해칠 것이다.

대혜여, 진실한 법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다른 것도 없다. 모든 무용한 논의는 그 앞에서 멈출 것이다. 그러므로 도에 뜻을 둔 사람은 말과 같이 뜻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실한 법은 문자를 떠나서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키는데, 아이는 손가락만을 보고 물건을 보지 않듯, 어리석은 자도 괜히「말」이라는 손가락에 집착하여 목숨이 끝날 때까지 그 손가락을 버리지 않고는 제 1의를 깨달을 수 없다.

대혜여, 진실한 의는 미묘하고 또한 적정하여 열반의 인이 된다. 말은 망상과 합해져 생사의 거리를 돈다. 그리고 진실한 의는 많이 들음으로서 얻어진다. 많이 듣는다는 것은 의를 선(善)하게 하는 것이나, 말을 잘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뜻을 선하게 하는 것은 스스로 일체 이교의 나쁜 견해에 따르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남들까지도 따르지 않게 함을 의미한다. 이것을 '의에 있어서 많이 듣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의를 구하는 자에게 친밀하게 그리고 문자에 사로잡히는 자로부터는 멀리 하는 것이 좋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자성을 설명해 주시옵소서."

세존이 게(偈)로써 설하셨다.

 

부처는 오관의 경계를 넘어서 과(果)도 아니고 인도 아니면서 모든 법의 상(相)을 여읜다.

경계의 법이나 몸을 부처는 하나도 보지 않으며 보는 법이 없으니, 어찌 분별을 일으키리요.

분별의 밖에 있지만 법은 없는 것이 아니며, 법은 법으로써 저절로 있다.

「아」와「아소」의 이치를 요득하지 못하고 다만 말에 사로잡힌다면「유」와「무」에 빠져 스스로를 파괴하고 세상을 해치리라.

이 법을 볼 수 있으면 모든 과오를 여의리라.

 

 

대혜 보살이 세존의 힘을 받아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교에서 설하는 바 '법의 불생 불멸'과 세존의 설하는 바와는 같은 것이옵니까?"

세존이 대답하셨다.

"대혜여, 내가 설하는 '법의 불생 불멸'과 이교도들이 설하는 바와는 같지 않다. 왜냐하면 이교도는 법에는 실성(實性)과 실상이 있어서 생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이「유」와「무」의 범주에 떨어지는 설을 세우지 않는다. 내가 설하는 바는「유」도 아니며「무」도 아니며, 또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여의고 있다. 어째서「무」가 아니냐 하면 일체 만법은 모두 꿈과 환상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유」가 아니냐 하면 일체 만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 만물은「유」도 아니고「무」도 아니다.

그러므로 법은 다만 자기가 보는 바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 망상을 여의면 세간의 번잡한 일은 길이 멈출 것이다. 망상은 어리석은 범부가 하는 바로써 성자가 하는 일이 아니다. 대혜여, 망집의 마음은 허위의 경(境)을 생각한다. 비유컨대, 어린아이가 신기루나 마법사의 인형을 보고 실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이 생이라 보고 멸이라 보며, 망집이라 보고 깨달음이라 보는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인형이 들고나는 것을 보고 생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대혜여, 세간 중생들은 이같이 허위로 생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만 성자는 그렇지 않다. 허위라는 것은 법성(法性)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전도된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법의 본성을 유라고 고집하여 적멸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허위의 분별을 여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무상(無相)이라고 보는 것이다. 상을 보고 여기에 집착하는 것은 망집의 생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만일 상을 보지 않는다면 분별은 없다. 대혜여, 열반이란 진실한 이치를 보고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부처님 속에서 깨닫는 성지를 얻는 것이다. 이것을 적멸하면 열반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3세의 제불은 항하의 모래와 같다'고 설하셨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대혜여, 말대로만 들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부처는 가장 뛰어나, 뭇 세간을 초월하여 비유로써 미치지 못할 경지이다. 다만 비유에 의하여 그 일부분을 나타낼 뿐이다. 사람들은 항상 세간에 집착하여 나쁜 생각이 증장하며 생사의 골목을 윤회하고 있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염증을 느끼게 하고 큰 희망을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부처가 되기도 쉽고 부처를 만나기도 쉽다고 말해 주어, 부처는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다고 설한다. 만일 부처의 교화를 받는 자를 보면, 나는 부처를 만나기 어려움이 마치 우담화(優曇華)를 만나는 것과 같이 드물다고 가르친다.

대혜여, 진실한 부처는 범부의 마음, 의, 식으로서 보는 바를 초월하여 비유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때로 비유로써 설하는 것은 억지로 해석하면 이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항하의 물을 두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북, 물고기, 코끼리, 말 등에 밟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아무리 밟혀도 항시 청정하다. 부처의 성지(聖智)는 항하와 같고 자재력은 모래와 같아서, 이교의 고기와 거북 등이 다투어 와서 소란을 피워도 부처는 일념의 분별을 일으키는 일이 없어 언제나 청정하다. 왜냐하면 부처는 그 본원에 의하여 선정의 즐거움으로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마치 항하의 모래에 애증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대혜여, 항하의 모래 수가 한없이 많은 것처럼 부처의 광명도 한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부처의 회상(會上)을 비추는 것이다. 또 항하의 모래는 아무리 취해도 줄지 않으며, 모래를 더 집어 넣는다고 해도 늘지 않는 것처럼, 부처는 방편의 지혜로써 중생들을 교화하는데 있어 그 덕에 조금의 증감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처의 법신은 세간에 흔히 있는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항하의 모래를 짜서 소유(蘇油)를 만들려 해도 기름을 얻을 수 없듯이, 부처는 아무리 사람들의 고통에 눌려도 그들이 모두 열반을 얻기까지에는 피곤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비의 마음을 완전하게 갖추었기 때문이다. 또 다음에 대혜여, 항하의 모래가 물에 따라 흐르고 역류하지 않듯이 부처의 모든 가르침도 열반의 흐름에 따라가지 않는 것이 없다.

대혜여, 이러한 이치에 의하여 부처는 항하의 모래와 같다고 설하는 것이다."

 

 

(1) 진실을 관(觀)하려거든 분별을 여의고 옳은 안목을 닦으라. 반드시 부처를 뵈오리.

세상은 꿈과 같고 재보 또한 환상과 같다. 만일 사람이 이 이치를 알면 세인의 존경을 받으리.

망집의 세계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미혹하여 망령되이 보는 곳. 미혹을 여의면 삼계는 없다. 참되게 안다면 물듦이 없으리.

(2) 그림에서 높고 낮음을 보려고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법도 또한 이와 같이 아지랭이 같고 꿈과도 같다. 세인의 분별은 모두 헛된 것이다. 미혹은 꿈 또는 환상이며 모든 집착을 여의고, 미혹의 세계는 의지할 곳이 못된다고 보라.

(3) 물(物)은 본디 나지 않는 것으로 공(空)이며 자성이 없다. 다만 인연에 의해 있는 것임을 망집에서 생멸이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말에 의하여 성 가운데 물은 일어난다. 말이 없으면 일어나는 물도 없다.

나쁜 습기에 마음이 물들어 나타나는 모양에 미혹하여 갖가지 모양을 인정하고 분별할 것이 없는데도 굳이 분별한다. 분별이 없으면 참된 성이 나타나고 공을 볼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