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경지(境地) 34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중인도(中印度)에서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 바다를 건너서 능가도(楞伽度)에 이르니, 성주(城主)인 라바나왕(羅婆那王)은 세존을 마라야(摩羅耶) 산상(山上)의 자기 궁전에 권청(勸請)하였다.
그 마음은 법장(法藏) 무아일진대, 견해에 더러움이 있으랴. 원컨대 깨달음의 지혜를 말씀해 주소서. 선한 법을 몸에 지니고 지혜를 깨달아 편안한 가운데 자재로 불가사의를 나타내시다. 부처님이시여, 원컨대 능가의 성에 들어가사이다. 저희들은 이제 일심으로 법 듣기를 원하옵니다.
세존이 그 청을 허락하시자, 성중의 대중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들었다. 왕은 대혜(大慧)라고 부르는 보살에게 말하기를,
"보살이여, 모쪼록 우리들을 위하여 세존에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우리들은 일심으로 세존께서 깨달은 경지를 듣는 것이 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존이 대혜의 물음에 응하여 라바나왕에게 '일체는 환상과 같은 것이다'라는 법문을 설하셨는데, 갑자기 모습은 공중으로 사라지고 사람과 숲도 일시에 사라져 라바나왕만이 궁중에 남게 되었다. 왕은 생각하기를 '아까 본 것은 무엇이었나. 설법을 듣고 있던 자는 누구였던가. 세존과 성(城), 모든 보물과 산림은 어디로 자취를 감춘 것일까. 꿈인가, 환상인가, 신기루인가, 참으로 이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존께서 일체의 모든 법은 이와 같이 환상과 같다는 것을 보이신 것임에 틀림없다. 모든 경계는 다 자기 마음의 분별에서 생기는데 불과하다. 사람은 이를 깨닫지 못하나 사실은 보는 사람이나 보이게 하는 사람 또는 설자(說者)나 그 설을 듣는 자도 없는 것을 허망하게 분별하고 집착하여「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불과하다. 부처님을 뵙는 것이나 법을 듣는 것도 모두 이 분별이 아닐까. 내가 전에 보았던 것은 이 분별된 부처였는데, 지금 설법을 듣고 분별이 없어지고 보니 결국 분별에서 생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리라. 참으로 분별하는 마음으로써는 참된 부처를 뵐 수가 없다.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참된 부처를 뵙는 것이다.' 라바나는 이와 같이 마음이 열려 더러움을 여의고 전혀 분별이 없는 경계에 들어가 일체의 법을 실지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이때 세존이 깨달음에 이르게 된 왕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전과 같이 몸을 나타내시자, 왕은 기뻐하며 다시 세존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항상 '법까지도 버려야 한다. 하물며 비법(非法)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설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두 법을 버려야 하옵니까. 법과 비법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왕이여, 예를 들면 병은 깨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괜히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이 보았던 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안으로 자기 마음의 본성을 본다면 밖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이 바른 생각으로 법을 보는 것을「법을 버리다」라고 한다. 다음에 비법이라는 것은 토끼의 뿔이나 석녀(石女)의 아이처럼 실(實)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집착할 것이 못되므로 버려야만 한다. 왕이여, 부처의 법이란 또한 일체의 분별과 쓸데없는 논의를 여읨을 말한다. 오직 참된 지혜만이 이를 깨달을 수 있다.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설법하여 차별을 여읜 지혜를 부처라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참된 지혜와 일체인 만큼 분별하는 지혜로는 생각할 수가 없다.
왕이여, 벽에 그린 유정(有情)은 감각이 없는 것처럼 세간의 모든 사람들도 환상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는 것을 바른 생각이라고 이름하고 이와 다른 것을 분별하는 생각이라 이름한다. 분별에 의하므로 법과 비법에 집착한다. 왕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거나 혹은 등불이나 달에 의해 생긴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분별을 일으키어 그것에 집착하여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법이나 비법이라 하는 것도 다만 분별에 불과하다. 분별에 의하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으며, 모든 허망이 증장하여 번뇌의 적멸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적멸이란 허망을 여읜 일심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부처를 낳은 곳집이며, 그러므로 이것을 여래장이라 일컫는다."
그때 대혜(大慧)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를 찬송하였다.
자비, 지혜의 부처님은 생멸의 차별을 여의고, 세상은 하늘에 뜬 꽃과 같은 것, 버리는 것도 취하는 것도 모두 허망한 것으로 관조(觀照)하신다. 부처의 법신(法身)은 꿈과 같으며, 무엇으로 이를 찬송하리오.
「성(性)」이 없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을 찬송하는 일이어라. 부처님에게는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은 없다.
보지 않는 것이 즉 부처를 보는 것이다. 칭찬하든 훼방하든 부처에게는 상관이 없다.
자비, 지혜의 부처님은 마음에 분별하는 상(相)을 여의었는데, 법은 모두 환상과 같아서 버리는 것도 취하는 것도 모두 허망하다고 관하신다. 깨달음과 깨닫게 된다는 것과 유와 무의 분별을 다같이 버리시니, 부처는 깨달음에 있지 않고, 깨달음은 부처가 아니며 부처를 뵙고 정적한다면 생사를 초월한다. 그런 사람은 집착하는 생각을 여의리라.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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