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단상 이견(斷常二見)과 열반(涅槃) 36

근와(槿瓦) 2014. 6. 8. 00:13

단상 이견(斷常二見)과 열반(涅槃) 36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대혜 보살이 물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부셔 버릴 수가 있습니까?"

"몸이나 재화나 경계도 다만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혹은 영구히 존재한다는 상견을 일으키며, 또는 완전히 없어진다는 단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더우기 일으키는 바의 그 견해도 또한 마음(心)이다.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다. 대혜여, 지금 너를 위해 공(空)과 무생(無生)과 무성(無性)에 대한 이치를 설하겠다.

모든 법(法)의 상(相)과 각각의 고유의 자상(自相) 또는 제법 공통(諸法共通)의 공상(共相)도 다같이 공이다. 그것들이 서로 모이고 서로 도와 관계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인연은 소생(所生)의 모양으로 분석하여 구해도 고유의 체(體)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물의 상(相)은 공이다. 또 법 그 자체에는 생도 없고 멸도 없으며, 이것이다라고 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정할 수 없는 것을 정하여 망령되이 분별하여 만물에 각각 성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와 같이 성도 또한 공한 것이다.

대혜여, 이와 같이 만물 자체에는 생도 없고 멸도 없으며, 본래 그 성이 공이므로 무생(無生)인 것이다. 또 모든 법은 서로 관계하여 성립되어 있되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써, 단독으로는 존립되지 않는다. 빛과 그림자, 긴 것과 짧은 것, 백과 흑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생사의 밖에 열반이 없으며, 열반의 밖에 생사가 없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달리하는 것이 아니므로 제법에는 두 가지 상(相)이 없다. 그러므로 무이상(無二相)이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 무생, 무자성(無自性), 무이상의 이치는 제불이 설교하신 것으로 그 진실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아지랭이는 짐승을 현혹시키는 물체로 착각하게 하는 것처럼, 부처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로 가르침을 설하여 기쁨을 일으키게 한다. 다만, 지자에 의해 증득한 진실한 법은 도저히 이것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치에 따라 음미해야 한다.

"세존이시여, 세존은 여래장(如來藏)의 본성이 청정하여 항상 끊임없이 변하지 않고, 부처의 모든 모양을 갖추어 일체 중생들의 몸 속에 있으며, 더러운 몸, 모든 번뇌 속에 있는 것이 마치 값진 보석이 더러운 옷 속에 있는 것 같다고 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래장은 이교에서 말하는 바의 '항상 창조자이며 자재하여 멸하는 일이 없는 '아'와 매우 비슷한 것 같은데, 지금까지 설하신 무아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혜여, 내가 설하는 바의 여래장과 이교자가 말하는「아」와는 같지 않다. 부처가 성공(性空), 실체, 열반, 불생(不生), 무상(無常), 무원(無願) 등의 말로써 여래장을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무아의 가르침을 듣더라도 놀라며 두려워하는 일을 없애고, 또 분별 망상의 그림자를 여의고 아의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혜여, 예를 들면, 도공(陶工)이 물, 지팡이, 바퀴, 밧줄 등의 방편을 사용하여 진흙으로 가지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부처도 또한 모든 분별을 버리고 무아법 가운데에서 가지가지 지혜와 좋은 방편을 가지고서, 혹은 여래장이라 설하고 혹은 무아라고 설하여 이름은 가지가지로 나누지만 다른 것은 아니다.

대혜여, 내가 여래장을 설한 것은「아」에 집착하는 모든 이교의 신자들을 끌어들여서 망견(妄見)을 여의고 증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모쪼록 저를 위하여 보살의 도를 닦는 법을 설해 주십시오."

"대혜여, 보살은 네 가지 법으로써 도를 닦아야 한다.

첫째로 모든 것은 자기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관(觀)한다. 삼계는 자기의 마음을 떠나서는 없다. 본래「아」와「나의 것」의 생각을 여읜 것으로써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시작도 모르는 먼 옛날부터 집착하는 습관에 깊이 물들어 갖가지 삼계를 지어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의 갖가지의 사물, 활동, 언어, 계박(繫縛)과 몸, 재보, 거처도 모두 분별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관(觀)해야 한다.

둘째는 생(生), 주(住), 멸(滅)의 견해를 여의는 것으로 모든 꿈과 환상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물(物)은 그 자신에서 생하는 것도 아니고 또 남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과 남에 의해서 생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 자기 마음의 분별에서 나타난 것으로,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미 외물(外物)로써 실체가 없으면 이것을 분별하는 식(識)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인연에 의해서만 삼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내외의 모든 법은 붙잡힐 곳이 없어져서 꿈과 같고 환상과 같아, 생, 주, 이, 멸이 없는 것이 된다. 보살은 이와 같이 요득(了得)하여 생멸의 견해를 여의는 것이다. 세째는 외물의 무자성(無自性)을 생각해 본다. 모든 법은 아지랭이와 같고 꿈과 같은 것이라 보고, 옛부터 무용한 논의, 갖가지의 집착, 허망한 습관 등이 그 인이 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나, 사실은 모든 법에는 원래 체성(體性)은 없는 것이다. 네째는 이와 같은 온갖 법을 관찰하여 성지(聖智)를 구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열반(涅槃)이란 무엇입니까?"

"대혜여, 모든 식(識)의 자성에 깊이 물들어 있는 허망한 기분과 아뢰야식, 말나식(末那識), 의식의 습기(習氣)를 뒤엎는 것이 열반이다. 제법의 자성이 공(空)인 것과 일치하는 경계이며, 또 단(斷), 상(常), 유무의 범주를 여읜 성지가 활동하는 경지이다. 또 열반은 무너지는 일도 없고, 죽음도 없다. 만일 죽음이 있다면 또한 생이 있을 것이다. 아뭏든 무너지는 일이 있다면 변화가 있는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무너지는 일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도를 닦는 자가 가는 곳이다. 또 세간의 법을 버리지도 않으나 세간의 법과 하나가 되지도 않으며 둘이 되지도 않는 것이 열반이다."

세존이여, 말이 있으면 반드시 법이 있다고 봅니다. 만일 법이 없으면 어찌 말이 있겠습니까?"

"대혜여, 법은 없어도 말은 있다. 실제로 거북의 털, 토끼의 뿔, 석녀의 아이는 보지 못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런 말을 사용할 수 있다. 대혜여, 그것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말만이 있을 뿐이다. 대혜여,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말이 있는 곳에 반드시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불토에 모두 있을 수는 없다. 어떤 불토에서는 응시하는 것만으로 법을 나타내고, 눈썹을 올리고 눈동자를 움직이며 미소하고 찡그리고 기침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써 법을 나타내고, 혹은 불순(不瞬) 세계, 묘향 세계, 보현불(普賢佛)의 나라에서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응시하는 것에서 보살을 깨달음에 들게 한다. 그러므로 말이 있고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도 파리나 개미 등은 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각자의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어떠한 법에 의해서 상주(常住)를 설하시는 것입니까?"

"대혜여, 무상이라는 미망의 법에 의하여 상주는 설해진다. 미망의 법은 성인에게도 나타나지만 성인은 이를 바르게 본다. 아지랭이나 불의 바퀴 또는 신기루, 꿈, 환상 그리고 거울 속의 모습과 같이, 어리석은 자는 전도되어 집착하지만 지자는 바르게 본다. 이 미망의 법은 본래「유」와「무」를 떠나 있으므로 무상이 아니다. 비유컨대, 악귀는 항하를 보지 못하므로 물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 밖의 사람들은 강물을 볼 수 있으므로 물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미망의 법에는 본래 유무의 다른 상이 없으므로 상주이다. 차별의 상이 없는데도 분별을 일으키므로 차이가 있으나, 그 체(體)는 상주인 것이다. 대혜여, 미망의 법은 그대로 진실이다. 성자는 미망의 법 가운데 있어서 전도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미망의 법이 즉 진실한 법, 만일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생각을 일으킨다면 성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말씀하시는 망집의 법은「유」와 「무」가운데 어느 것이옵니까?"

"유와 무는 집착의 상이다. 일체의 법은 본래 이 집착의 상을 여읜 것이므로 환상과 같다고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면 변화할 수가 없으므로 이교도가 말하는「아」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은 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써 변이한다. 그러므로 망집의 법이 즉 참된 법인 것이다."

대혜 보살이 물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미망의 법이 환상과 같다면, 그것은 다른 미망의 법의 인으로 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혜여, 환상물은 망법(妄法)의 인으로는 되지 않는다. 환상은 과실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모든 환상적 법은 분별하는 일이 없다. 어리석은 자가 집착에 의하여 망법의 진여(眞如)를 본다. 미망의 법 이외에 진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진여도 망법이다. 대혜여, 그러므로 내가 설하는 바의 열반이란 허망한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 즉 제6의 의식을 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존은 무엇 때문에 팔종의 식(識)을 세우셨습니까? 그리고 왜 제6식만을 멸하고 다른 칠식은 미치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대혜여, 제6식을 인으로 하고 또는 소연(所緣)에서 다른 칠식이 생한다. 즉, 제6의 식이 경계를 향하여 집착을 일으킬 때에 거기에 하나의 습성을 지어 제8식인 아뢰야식을 기른다. 제7의 식은 나와 나의 물(物)의 집착으로서 아뢰야식에 대해 항상 생각을 굴린다. 이와 같이 스스로의 마음에서 나타난 경계에 집착하여 갖가지 마음이 모여 생하고, 서로 인이 된다. 대혜여, 비유컨대, 바다의 물결처럼 나의 마음에서 나타난 경계에 바람이 불어 혹은 멸한다. 이 도리에 의해 제6식이 멸할 때에 다른 칠식도 또한 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인연(因緣)에 의하여 낳고 인연이 다하면 멸하는 것이다. 마치 풀섶에 붙은 불이 풀섶이 다 타면 꺼지는 것 같이, 인간의 수명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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