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팔식(八識)과 업연(業緣) 35

근와(槿瓦) 2014. 6. 6. 01:54

팔식(八識)과 업연(業緣) 35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께서 대혜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부처는 지혜의 눈으로 만물 자체의 모양 또는 만물에 공통적인 모양을 본다. 그것은 외도의 사견과는 같지 않다. 그들은 경계가 마음의 분별에서 나타난 것을 알지 못하고, 법 본래의 성(性)으로서「유」와「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혜여, 만일 경계란 환상과 같은 것으로서 자기의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깨닫는다면 미혹한 세간의 괴로움이나 어리석음 또는 애욕과 업연(業緣)은 멸할 것이다."

대혜 보살이 세존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모쪼록 저를 위하여 심(心)과 의(意)와 식(識)의 구별, 명(名), 상(相)과 분별(分別), 정지(正智), 여여(如如) 등 오법의 성(性)과 상을 설해 주십시오. 모든 부처나 보살도 모두 이 가르침에 의해 자기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 외계(外界)의 상(相)을 여의고 진실한 도의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세존께서 대혜보살에게 설하셨다.

"먼저 외계의 상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실체를 근(根)이라 하고 이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경(境)이라 하며, 이런 대상에 대한 인식 작용을 식(識)이라 한다. 이를 간단히 근(根), 경(境), 식(識)이라 하는데, 근에는 육근(六根), 경에는 육경(六境), 식에는 육식(六識)이 있다. 육근에는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이 있어 사물을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 보고 감촉을 가짐으로써 이것을 총괄하는 것이 의근(意根)으로 인식의 주체를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곧 안, 이, 비, 설, 신, 의를 말한다.

육경(六境)이란 육진(六塵)이라고 하는데, 색경(色境), 성경(聲境), 향경(香境), 미경(味境), 촉경(觸境), 법경(法境)으로 빛깔을 눈으로 보고 소리를 귀로 듣고, 향기를 코로 맡고,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는 이런 인식작용을 말한다.

다음으로 육식(六識)이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작용을 말한다.

이와 같이 육근과 육진과 육식을 통한 의식 작용이 제7의 말나식(末那識)을 거쳐 제8의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머물게 되는 인연에 의한 작용을 종자식으로 밖에서 안으로 인식되어진 자기 마음 속의 인연 작용을 말한다.

이 십팔계(十八界)로 주체적 자아로부터 전개된 세계의 모든 현상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티끌 속에 세계가 있고 티끌을 떠나서 따로 세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가 자기의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이를 인정한다. 이것은 시초를 모르는 먼 옛날부터 허망이 깊이 물들어 사물에 집착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識)의 성질로써 스스로 경계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작용이 갖추어져 있어서 여러 가지 사물의 상을 향락하려고 한다.

대혜여, 식의 근본인 제 8의 아뢰야식(阿賴耶識)도, 이 근경(根境), 촉식(觸識) 등의 사연(四緣)에 의하여 작용하는데, 마치 폭포수가 수중으로 떨어져 물결을 일으키듯 심중에 폭포수가 흘러 눈, 귀, 코, 혀, 몸, 뜻(意) 말나(末那)의 칠식(七識)을 물결치게 하는 것과 같다. 어떤 때에는 거울에 물건이 비치듯 갑자기 활동하고, 어떤 때에는 바람이 바닷물 위로 불 듯이 차례로 작용한다. 이와 같이 마음의 바다에 경계의 바람이 불어서 갖가지 마음의 물결을 일으켜 계속 끊어지지 않는다.

대혜여, 근본이 되는 제 8의 아뢰야식과 나머지 칠식의 모양은 하나도 아니요, 또 다른 것도 아니다. 이러한 갖가지 식은 서로 관련되고 깊이 얽혀져 외계의 만법의 성을 알 수 없다. 이 잘못된 생각을 근본으로 하여 눈, 귀, 코, 혀, 몸, 등의 오식이 외계로 향하여 작용하고 있으며 제 6식인 의식작용(意識作用)을 통해서 제 7의 말나식(末那識)을 거쳐 제 8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인 내면 세계로 작용하는 것이다.

대혜여, 아뢰야식이 작용하는 모양은 이와 같이 미세하므로 오직 진실하게 몸을 닦는 자가 지혜의 힘에 의하여 마음의 경계를 아는 것이다."

대혜보살이 다시 물었다.

"아뢰야식이 만일 대해의 물결과 같이 춤추듯 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옵니까?"

"아뢰야식은 바다와 같고, 나머지 칠식은 물결과 같다는 것은 다만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비유로써 설명했을 뿐이다."

'세존이시여, 해가 떠올라 상하의 차별 없이 비치는 것처럼, 세간의 등불이신 세존은 어찌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 진실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습니까?"

"바다의 물결이나 거울 속의 모습 또는 꿈이 일시에 나타나듯이, 마음의 경계도 그와 같다. 칠식 가운데 모든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제 8식에 따라 점차로 작용해 가는 것이다. 제 6식은 분별하여 알고, 제 7식은 망녕된 마음을 아(我)로 인정하고, 눈, 귀, 코, 혀, 몸 등의 오식은 다만 눈앞의 경계를 비출 뿐이다.

비유한다면, 뛰어난 화가가 갖가지 상(像)에 물감칠을 하듯이 내가 설하는 것도 그와 같다. 채색 자체에도 모양이 없고 붓이나 바탕인 천에도 모양은 없다. 그러면서 이것들은 인연으로 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화려한 상을 만드는 것이다. 언설은 변천하는 것이다. 진실은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보살을 위해 설하는 바로서 어리석은 자에게는 별도로 설하겠다. 설하는 바가 듣는 사람의 근기(根機)에 상응하지 않으면 설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훌륭한 의사가 병에 따라 약을 주듯 부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응하여 법을 설한다."

대혜보살이 물었다.

"세존이시여, 사람들이 그 마음의 번뇌를 청정하게 하는데 있어서 당장에 청정해지는 것이옵니까, 혹은 점차로 청정해지는 것이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과일이 익듯이 도공이 그릇을 굽듯이, 또는 대지가 초목을 기르듯이 혹은 사람이 음악, 서화, 그 밖의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듯이, 부처는 사람들의 번뇌를 점차로 청정하게 한다. 또 밝은 거울에 물건의 모습이 비치듯 해나 달이 일시에 일체의 물상에 비치듯 부처는 사람들의 번뇌를 즉시 청정하게 한다. 부처는 이와 같이 점차로 혹은 즉시 법을 나타내어 세간을 비추고 일체의「유」와「무」의 견해를 여의게 한다."

"세존이시여, 설하시는 바의 불가사의한 상주(常住)의 제일의경(第一義經)이라고 하는 것은, 이교에서 말하는 불가사의한 상주의 창조와 같은 것이옵니까?"

"대혜여, 이교에서 이르는 바의 상주란 무상한 사물의 인이라는 의미에 있어서의「상주」이지 결코 그 자신이 상주한다는 것은 아니다. 즉 무상과 비교하여 상을 주장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모두 무상이라고 주장한다. 대혜여, 이교는 이러한 일로 인하여 불가사의한 상주를 성립시키고 있지만, 그것은「토끼의 뿔」이라는 말은 있어도 사실로서는 토끼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이 실제로는 결코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분별에서 나온 것으로써 언설뿐이다.

어찌하여 토끼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느냐 하면, 그것에는 스스로 인(因)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내가 말하는 불가사의한 상주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 인이다. 깨닫고서 상주로 되는 것이다. 이교는 이에 반하여 진실로 불가사의한 그 자체를 알지 못하고, 이것을 스스로 증득하는 성지(聖智) 밖에 두지만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대혜여, 3세의 제불은, 일체의 법(法)은 '나지 않는다'고 설하셨다. 왜냐하면, 불심으로 보면 모두가「유」와「무」를 떠나 있으므로 생과 멸의 분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망녕되어 사물에「유」와「무」를 분별하여 집착한다. 그러나 만법은 토끼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이 본래는「유」도「무」도 아니다. 부처의 지혜로 보는 바는 어리석은 자가 생각하는「유」와「무」의 경계와는 다르다.

대혜여, 신체도 생자(生資)도 모든 경계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그림자이다. 아뢰야식에서 인지하는 것과 인지되는 모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대는 부지런히 이 이치를 배우도록 하여라.

그리고 대혜여, 보살은 삼종의 성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이것은 인연에 의해 생긴 것에 대하여 범부(凡夫)가 망집을 일으켜 실재하는 것처럼 굳게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 인과 연에 의하며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그것은 모든 분별을 여읜 성지의 경, 즉 진여를 말한다.

대혜여, 보살은 두 가지 종류의 무아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인무아(人無我)로, 이 몸을 조직하고 있는 몸이나 마음이나 경계도 모두「나」와「나의 것」을 여의고 있다. 지혜가 없는 마음은 사물에 대해「나」와「나의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 몸과 경계는 모두 아뢰야식에서 나타나는데, 변하고 변하여 찰나도 머물지 않는다.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등불이 흔들리는 것과 같이, 달라져 가고 조급하게 움직이는 꼴이 마치 원숭이와 같다. 이 몸의 가지가지 기거동작(起居動作)은 인형이 기계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능히 이 상(相)을 아는 사람을 인무아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법무아(法無我)로, 이 몸도 경계도「아」라든가「나의 것」이라든가에 집착할 것은 없다. 다만 애착의 작용으로 서로 얽히고 적취(積趣)될 뿐 창조자는 없는 것이며, 사물 그 자체에는 자성이 없다. 이것은 갖가지로 분별을 일으켜 갖가지 모양으로 인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짓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지혜를 얻어 마음 밖에는 경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법무아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불타(佛陀,부처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자 불설(一字不說) 37   (0) 2014.06.10
단상 이견(斷常二見)과 열반(涅槃) 36   (0) 2014.06.08
깨달음의 경지(境地) 34  (0) 2014.06.04
케이마 왕후 33   (0) 2014.06.02
후정(後庭)의 교회(敎誨) 32  (0) 2014.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