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성전)-214-종조13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3. 入寂과 餘蔭
聖師도 당초에는 하나의 사람이며 또는 보통 사람과 같은 범부였다. 그러나 聖師는 사람의 참 뜻을 알기 위하여 총명을 기울였고 사람의 참 값을 찾기 위하여 노력을 다했다. 그 열매로서 우주 · 인생의 참 뜻을 사무쳐 깨달았고 인류정신문화의 진수며 大乘佛敎사상의 결정인「菩薩道」를 실천하여, 온갖 죄악과 고통이 없는 이상세계인 地上佛國 건설에 일생을 바치었다. 그리고 춘추가 七十이 되시던 해 三월 三十일, 慶州 南山 穴寺에서 淡然히 입적하였다. 神文王 六년(唐 中宗 垂拱二년=西紀六八六년)이었다. 다비한 뒤에 유해를 穴寺 西峰에 龕室을 짓고 모셨다. (令胤 聰이 유해로 塑像을 만들어 芬皇寺에 모셨다고도 함)
佛法을 통한 제자 九人이 있었는데 다 大德이었으며, 弟子審詳은 뒤에 일본에 가서 화엄경을 講한 뒤에 일본의 華嚴宗祖가 되었고, 다른 제자는 芬皇寺에서 화엄경 등을 講明한 바 뒤에「芬皇宗」이라고 일컬었다.
다음 興輪寺 金堂에 新羅 十聖을 가리어 塑像을 모셨는데 東壁에는「我道 · 厭觸 · 惠宿 · 安含 · 義湘」五位요, 西壁에는「表訓 · 虵巴 · 원효 · 惠空 · 慈藏」의 五位였다.
令孫 薛仲業은 惠恭王 十五年(西紀七七九年 唐大曆十四年)에 일본에 使臣 간 일이 있었는데, 일본 君臣은 聖師의 高名을 風慕하다가 그 抱孫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우대하였다고 한다. (高仙寺碑 · 日本書記에 기록됨).
[비고]
三國史記 薛聰傳에「일본국 眞人이 新羅吏 薛判官에게 주는 詩序에「일찍이 元曉居士의「金剛三昧論」을 보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함을 한하였더니 이제 新羅國吏 薛은 곧 居士의 抱孫이라 하니, 비록 그 祖父를 보지 못했으나 그 손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 詩를 준다」한 바 그 詩가 지금도 있다」고 하였다.
출전 : 성전(대한불교원효종)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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