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210-42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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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하지 않고 앙갚음 함이 없고 말할 바를 잃지 않으며, 선행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고 불순(不順)한 짓이 없으며, 참지 못할 것이 없고 선설하는 말이 화창하며, 종성(種姓)을 자랑하는 일이 없고 방정맞은 가르침이 없으며, 비법(非法)의 행위를 버리고 법다운 행위를 훼방하지 아니하고 동류를 칭찬하지 아니하고 남의 동반을 헐뜯지 아니하며, 제가 남의 기림[譽]을 얻음에 기뻐하지 아니하고 남 칭찬하는 것을 보고 심란하지 아니하며, 삼가 예절을 지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아니하고 남의 잘함을 헐뜯지 않으며, 은근한 말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때를 따라 보호하며, 맑은 지혜를 비방하지 아니하고 성현을 나무라지 아니하며, 말은 허망하지 아니하고 다 증명할 만하여 사람의 죄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남의 단처를 구하지 아니하며, 남의 말을 전하되 그 본뜻을 다치지 아니하고 남의 기쁨을 말하지 아니하며, 뜻과 원이 가장 높으며, 남의 얼굴 빛만 맞추어 주지 않고 다른 당파를 구하지 않으며, 하기 편함만 생각지 않고 거스르는 일을 행하지 않으며, 마음이 항상 유순해야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이 말과 행이 서로 응함이 되나니 '공(空)'과 황홀(恍惚)한 신비로운 용맹으로 행을 삼는 공덕 보응의 과실(果實)로서 지성스러운 말을 펴서 지은 바 과보로 좇아 얻어지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큰 나무 아래에 나아가 머물러 서서 이 나무를 관찰하고 다른 사람에게 묻되 '그대가 이 나무의 잎이 몇이나 되는지 알겠는가' 하면. 큰 지혜 있는 분은 나무를 관찰하지 아니하고 동반과 함께 앉아서 계산하지 않나니, 이미 능히 헤아리지 못할 것인데도 도덕의 극치에 이르면 곧 그 수를 알고 '그 일체가 얼마이다'라고 하나니, 그 사람의 말과 다름이 없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큰 강의 모래가 몇 말이나 되겠느냐 하고 또 낱낱이 헤어보면 몇 천억·조나 되겠는가, 물은 몇 말·몇 되나 되겠는가 하면 헤아리지 못할 것이지만, 그 한량을 관하지 아니하고 또한 헤어 보지 않고도 그 모래 수와 물의며, 모든 용이나 귀신·아수라·가루라·긴나라·건달바·마후라가·사람인 듯 사람 아닌 듯한 것·성문·연각이 다 능히 증명하지 못하고 홀로 부처님 세존께서만 아시나니 이것으로 보건대 여래 지진(至眞) 등정각(等正覺)의 지혜는 가히 헤아리지 못할지라, 만·억의 음성을 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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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매 중생이 다 듣고 다 알게 되도다.
적의여, 저 지나간 세상에 한 신선이 있었으니 이름은 누이(樓夷)였고, 그때에 한 바라문이 있었으니 이름은 적연(寂然)이었으며, 그때의 나라에 한 큰 나무가 있었으니 이름은 인현(仁賢)이었다. 그 나무는 가지와 잎·꽃·열매가 다 무성했는데, 누이는 그 나무 밑에서 십이년동안 기거하면서 나뭇잎을 헤아리고 또 관하였다. 그 뒷날에 적연 바라문이 성중에서 나와 인연수 아래에 이르러서 밤낮으로 놀면서 밥을 먹고는 나무의 줄거리와 잎을 바라보고 또 밝은 지혜로 일심으로 보면서 '어떻게 신선에게 사뢸까? 나는 마땅히 몇 낱이 있는 줄을 알았도다'하느니라. 적연 바라문은 그 나무를 관하지 않고 그 잎을 헤지도 않고서 게송으로 말했느니라.”
팔천해(八千垓)·팔천억 잎이 있고
마디는 구천 육백 이십
줄거리는 다섯 개, 가지는 이백오십
옹이는 육천 육십이로다.
성사(聖師)는 그 잎의 수를 알려거든
그 나무 줄거리의
분포된 것을 헤어 보시오
나의 아는 바는 이러하오
이제 게으름 없이
의심커든 헤어 보시오.
“그리고 나니 누이 신선은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착하다. 그 말이여. 진실하고 속임 없도다. 내가 십이년 동안이나 나무 밑에 기거하였으므로 그 나뭇잎의 수를 또한 헤지 않고도 그 줄거리와 가지며 잎의 수효를 다 아나니, 바라노라 바라문이여. 그 말하는 것이 어찌 그처럼 맞는가.'
'신선님은 들으시오.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세상 사람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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닙니다. 지성으로 올바른 행을 정하여 다 진실로 할 뿐 다투고 송사함이 없었습니다.'
그때의 누이 신선은 바로 오늘의 사리불이요, 적연 바라문은 오늘의 석가세존이시다. 그러므로 마땅히 지극히 참된 언교(言敎)를 받아 지니고 지성심에 머물러서 법의 방편에 응할 것이로다. 이것이 보살의 지극히 비밀한 업이며, 청정한 근원으로서 그 다함 없는 지혜가 깊은 한량없는 데 들어가서 그 높기가 한량없으며, 때를 따라 시현(示現)하나니 지극히 참되고 형상이 없어서 말로 이름 지을 수 없도다.”
밀적금강역사는 적의보살에게 말을 계속하였다.
“어떤 것을 마음의 비밀[心]이라 하느냐? 마음의 행이 청정하여 신통을 잃지 않고 지혜의 업을 지어서 신통으로 스스로 즐기며, 곳에 따라 시현하되 바로 신통에 머무르며, 큰 자비의 다함 없는 업을 이룩하여 신통으로써 한량없는 변화를 나타내어 일체에 두루 충만하되 성제통(誠諦通)으로써 하며, 지혜로 집을 삼아서 눈으로 온갖 법을 보나니, 이것이 보살의 정진(正眞)한 법이니라. 지혜 신통이 다함 없이 두루 일체를 둘러싸며, 그 신통 지혜로 다 온갖 형상을 나타내되 모든 색상(色像)이 본디 색상이 없는 줄을 알며, 신통으로써 모든 중생의 음성에 두루 들어가되 그들의 음성과 같이하며, 능히 일체 중생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일을 관찰하되 본래 깨끗함을 봄으로 말미암아 늘 일체를 보고 때를 따라 교화하여 항상 분명히 생각하고 일찍이 홀연히 있는 일이 없으며, 가고 오는 마음을 끊고 두루 신족(神足)을 나타내되 걸림이 없으며, 홀로 삼계에 걷되 구애되지 않으며, 다 있는 것이 없으므로 조작하여 하는 짓이 없느니라.
그 신통명(神通明)으로 일체 누(漏)를 다하여 밝게 깨닫고 때를 따라 그 기회를 잃지 않으며, 생사(生死)의 어려움을 나타내어 세상을 건지는 업을 보이되 관찰하는 바가 그윽하고 멀며, 그 신통 지혜가 성문·연각을 뛰어나서 깊이 미묘한 데 들어가며,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마군을 항복받고 모든 부처님의 법을 깨달아서 때에 맞도록 법의 바퀴를 굴려 시방 중생을 교화하여 법률 속에 들어와서 물러감 없는데 이르러 온갖 법의 바퀴를 굴리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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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여, 알고자 하는가. 이것이 보살의 마음 비밀의 업으로서 삼행(三行)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만일 마음이 참으로 깨끗할진대 길이 돌아갈 바가 없으며, 또한 기쁘지 않음이 없이 성품이 잘 조화되므로 행하는 일이 매우 선량하며, 보혜삼매(普慧三昧)를 닦아 행하여 길이 열반에 들지 않고 욕계(欲界)를 싫어하지 않으며, 설사 그 가운데 나더라도 집착하거나 얽매인 바 되지 않고 태어난 곳에서 모든 번뇌를 결단하여 일찍이 매듭[結]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일체 헛된 망상을 건너서 모든 번뇌의 매듭과 뒤바뀐 감각을 풀어 버리고 마음에 집착할 것이 없을새 이러므로 생·노·병·사를 벗어나게 되느니라.
비록 태어남이 있더라도 다 나는 것이 없으며, 대승의 근본으로써 모든 불법을 성취하며, 이 모든 불법으로 시방 중생을 구호하되 구하면 어느 곳에서도 얻지 못할 것이 없나니 이에 모든 부처님의 법을 알고 보면 온갖 법이 다 불법에 돌아가도다. 이것은 불법이 온갖 법이며 이 온갖 법과 불법이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이로다. 왜냐하면 온갖 법의 근본과 끝 간 곳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나니 만일 모든 법을 구하여도 처소가 없으면 곧 무엇이라는 건수(件數)가 없고, 모든 건수에 머무르는 온갖 법에 뛰어나서 온갖 법을 알게 되면 온갖 법에 의지하고 기대지 않게 되고, 온갖 법에 의지하지 아니함으로써 그 이익을 구한다면 곧 큰 손쇠(損衰)를 일으키리라. 그 생각을 하여 구함이 없다면 곧 이로움·쇠함도 없으리라.
이렇게 배워 차츰 앞으로 나아가면 마음에 근심할 것도 기쁨도 없을 것이며, 마음에 걱정이 없고 뜻에 걸림이 없으면 곧 머무를 것이 없게 되고 머무를 것이 없으면 마음에 온갖 번잡한 것이 없을 것이요, 번잡함이 없으면 곧 마음이 어디로나 지향함이 없을 것이요, 그 지향할 바가 없으면 이렇게 이에 지향하게 되리라. 이렇게 지향한다 함은 이것이 지향함이 없는 것이다. 그 지향할 바가 없다면 '나'의 '나'라는 것이 없고, 감각할 것이 없다면 다투어 시비할 것이 없고, 다투어 시비할 것이 없다면 싸워 어지러울 것이 없고, 싸워 어지러울 것이 없다면 이것이 사문법이라 그 마음이 평등하여 허공과 같나니, 그 평등하기 허공 같은 데 머무르면 욕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색계(色界)에 처하지 않으며, 무색계(無色界)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만일 일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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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집착한 것이 없으면 기림도 훼방함도 없으리니 기림도 훼방함도 없음을 모든 법이라 이르고 이러한 것에 다 그 깊은 뜻을 알아서 능히 이 육사(六事)의 업을 연설하며 분별함도 또한 그러하리라. 어떤 까닭으로 연설·분별하는가. 온갖 법을 가히 얻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모든 법을 연설하고 분별하되 본래 처소가 없고 삼계가 다 헛된 이치를 능히 통달하여 분별하나니 이것을 마음의 비밀이라 하느니라.”
밀적금강역사는 다시 적의보살에게 말했다.
“그 삼행의 비밀이라 함은 이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慈愍心]을 행하되 아상(我相)을 계교치 않으며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행하되 중생상(衆生相)이 없으며 기쁜 마음을 행하되 명(命)이라는 상이 없으며 능히 중생을 건져 구호하되 수자상(壽者相)이 없는 까닭이니라.
네 가지 보시를 하나니 마음에 간탐이 없는 까닭이며, 금계를 봉행하나니 그 마음을 잘 길들인 까닭이며, 인욕을 행하나니 마음의 업을 다한 까닭이며, 정진을 닦되 생각이 적정한 까닭이며, 그 한마음을 고요히 함은 마음의 있는 것을 버린 까닭이며, 그 성스러운 마음을 아는 것은 행할 것이 없는 까닭이며, 그 사의지(四意止)는 뜻도 없고 생각도 없는 까닭이며, 그 사의단(四意斷)은 그 마음이 일어남도 아니요 멸함도 아님을 깨달은 까닭이며, 그 신족(神足)으로 나는 것은 마음이 넓어서 가없는 까닭이며, 두터운 믿음[篤信]을 행함으로써 거리낌이 없는 까닭이며, 만일 정진을 닦으면 심행이 적정한 까닭이며, 그 뜻이 이미 심행을 염(念)하여 자재를 얻은 까닭이며, 그 정의(定意)는 이것이 평등함이니 마음에 여러 가지가 없는 까닭이며, 그 지혜근(智慧根)은 마음에 망상이 없는 까닭이며, 그 오력(五力)은 마음 근본에 수순하는 까닭이며, 혹은 칠각의(七覺意)로써 함은 마음의 분별하는 지혜인 까닭이며, 그 정의(定意)는 이것이 평등함이니 마음에 여러 가지가 없는 까닭이며, 그 지혜근(智慧根)은 마음에 망상이 없는 까닭이며, 그 오력(五力)은 마음근본에 수순하는 까닭이며, 혹은 칠각의(七覺意)로써 함은 마음의 분별하는 지혜인 까닭이며, 도업을 받들어 행함은 마음에 생각할 것이 없는 까닭이며, 그 적연한 것은 말쑥하게 고요히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법과 마음을 관하는 것은 견(見)에 집착이 없는 까닭이며, 현(賢)·성(聖)의 도를...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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