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大寶積經)

대보적경-150-30

근와(槿瓦) 2016. 7. 6. 23:05

대보적경-150-3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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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움이 다하는 도에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리니, 그런 이치가 있을 수 없느니라. 나는 이런 모양을 보지 못하노라. 내가 이런 모양을 보지 못하였을 때에 안락한 머무름을 얻어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 법의 본성을 나타내 보여 대중 가운데 사자후를 하느니라. 넷째는 '내가 모든 장애법(障碍法)을 말할 때 이에 어떤 천상·인간·마·범(梵)·사문·바라문들이 나에게 대하여 그것을 닦아 행하더라도 장애될 것 없다'고 하면, 그런 이치가 있을 수 없느니라. 내가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할 때에 최상의 안락한 머무름[增上安樂住]을 얻어서 대중 가운데 사자후를 하되 '내가 능히 최상의 법바퀴를 굴리니 일체 외도와 세간 천상·인간의 능히 굴릴 바가 아니다'고 하느니라.


무변장엄아, 이것이 열의 사무소외(四無所畏)니라, 이 가운데서 보살이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속히 두려움 없는 경지를 얻어서 인간·천상 가운데 가장 뛰어남을 얻느니라.


무변장엄아, 보살이 허공 같은 모습을 잘 닦아 익히므로 능히 부사의하고 모두 청정한 법문을 내나니 이 문으로 말미암아 온갖 법에 근본을 사무쳐 알아서 온갖 법과 허공의 모습이 둘이 없고 다름이 없음을 보느니라. 온갖 법도 또한 분별하지 않으며 희론하지 않느니라. 의(義) 선교를 얻어서 어떤 작은 법도 좇아온 데가 없으며 또한 가져감도 아니며 쌓아 모음이 아니니라. 이에 능히 온갖 법을 쌓아 모음이 없으며, 온 것도 아니며, 간 것도 아님을 관찰하여 온갖 법에 행할 바 없음을 행하며, 큰 법의 횃불을 밝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법의 등불이 되느니라.


무변장엄아, 네가 이 법을 관하라. 능히 보살에게 얼마만한 이익이 되며 얼마만한 사업이 되겠는가. 말하자면 부처의 십력과 사무소외라는 것도 또한 어떤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얻지 못함도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온갖 법이 허공의 모습과 같건마는 의리(義利)를 얻기 위하여 업의 의지할 바 일과 그 업의 원인을 열어 보이어 연설하나니 그 가운데 또한 의리의 얻을 것이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이 깊은 법은 일체 세간의 믿기 어려운 바이니라. 이렇게 세간은 다 멸해 없어지는 허망한 건립이라, 이 까닭에 이 법 '비나야'가 능히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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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지니지 않으며 또한 세간으로 능히 세간을 아는 것이 아니니, 다 법이 아니언만 집착하므로 세간과 안주처가 있다고 말하느니라. 가령 법이란 생각에 집착할지라도 또한 어떤 법을 집착할 것이 없느니라. 법 아닌 데 집착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여래와 여래의 말한 법에 함께 쟁론을 일으키며, 또 능히 온갖 법의 본성을 알지 못하므로 다시 무생법(無生法)과 서로 어그러지나니 이러므로 이 깊은 법교를 능히 알아 깨닫지 못하느니라.


무변장엄아, 나는 일체 천상·인간이 믿을 만한 진실하게 말하는 자·쟁론이 없는 자이니, 여래 세존은 쟁론을 쉰 까닭이며 온(蘊)을 놓아 여읜 까닭에 이러한 법교를 열어 보이어 연설하되 그 가운데 온이 없으며 또한 온이 다함도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일체의 유(有)라는 것은 말하자면 일체의 선법·불선법인데 실은 그 가운데 도무지 선법·불선법이 없나니 선법·불선법이 다 적정하여 각기 서로 알지 못하여, 서로 가리어 덮는 것이 아니지마는 선·불선에 집착하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있으니, 이러므로 여래가 온갖 법이 다 무기(無記)라고 말하느니라. 그 진실한 선법·불선법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니 만일 얻을 것이 있다면 곧 기억할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 가운데 인(因)이 없나니 인을 볼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무변장엄아, 네가 이제 온갖 법이 다 무기인 줄을 관할지어다. 만일 보살이 이렇게 깨달으면 온갖 법 무기에 언설(言說)도 또한 얻지 못하리니, 이러한 법문은 모든 보살이 불선법을 사실대로 본 까닭으로 모두 놓아 버림[捨]의 원만을 얻어 법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무기문으로 모든 법에 증입(證入)하느니라. 이 무기문이 곧 문이 아니니 만일 문이 아닐진대 얻을 수 없으며, 만일 그것을 얻지 못할진대 그것이 곧 청정하나니, 이것이 모든 보살이 들어갈 다라니청정문이니라. 이 문으로 말미암아 온갖 법 광명의 횃불을 얻어서 모든 법 가둔데 우암(愚闇)·미혹·망설임 없음과 능히 걸림 없는 법과 지혜의 눈이 청정함을 얻느니라.


무변장엄아, 이 법 가운데 마땅히 희망의 즐거움[願樂]을 낼지니라. 어떤 것을 희망의 즐거움이라 하느냐? 말하자면 모든 법에 취할 바가 없으므로 집착할 것이 없으며, 마침내 여의어 버리고 거두어 감춤[攝藏]을 뛰어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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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희구가 없으므로 선법·불선법·온갖 유위법 및 세간법에 대립을 보지 않는 것이니라. 이것이 위없는 불방일(不放逸)의 경지며 반연을 여읜 경지니라. 모든 법 가운데 머무를 바가 없으며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며 내세울 것이 없나니, 이것을 곧 지혜눈[慧眼] 청정이라 이름하나니 끝내 멀리 여의어 취할 것이 없는 까닭이며, 잘 관찰하여 일체를 놓아 버린 본연 자성을 지혜눈이라 이름하느니라. 지혜눈이라 함은 이른바 번뇌가 다 없어지고 세간을 여읜 지혜의 성품[智性]이다. 이러한 지혜의 성품은 난 것도 없고 조작도 없으며, 본성이 적정하되 또한 적정과 서로 응함도 아니니 서로 응함이 끊어진 까닭이며, 또한 끊임도 아니요 끊임이 없는 것도 아니며, 이지러짐도 없고 준 것도 없나니 이것을 깨끗한 지혜눈이며 희론 없는 도[無戱論道]라 하느니라. 이 지혜눈이 성취되므로 큰 자비로 중생을 거두어 잡아 그들을 발심시켜 중생에게 반연하는 다함 없는 묘행[無盡妙行]에 머무르게 하며, 또한 능히 온갖 법이 '나'·'인'·'중생'·'수자'가 없는 이치를 깨달아 알게 하느니라. 그가 만일 큰 보리를 얻을 때에 결정코 능히 무상 법장을 열어 보여 연설하며 또한 능히 청정다라니문으로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불종성(佛種性)과 교법을 계속케 하기 위하여 마땅히 법인(法印)을 두느니라.


무변장엄아, 이 다라니의 청정한 법문은 모든 부처님이 항상 보호하시고 거두어 잡아주시고 연설하시는 것이며, 시방에 머무르는 삼세 모든 부처님도 또한 다 이러한 법문을 연설하시되 모든 보살을 위하여 삼세의 평등한 법성을 열어 보이시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희 삼세의 모든 법에 있어서 이 법문을 깨쳐 들어가게 하나니 보살이 청정한 삼세 총지혜(摠持慧)를 성취한 까닭이니라. 그 보살은 '삼세'라는 생각이 없고 선·불선에 둘이 없는 줄을 깨달아 알고 능히 온갖 착한 뿌리를 길러내어 몸·말·뜻으로 하는 일이 다 청정하며, 두루 한량없는 법문을 청정케 하나니 청정한 총지혜를 얻은 까닭에 또한 능히 조작없는 자성 청정의 법교를 연설하며, 다시 능히 온갖 법이 마침내 공적함이 마치 허공과 같음을 열어 보이며, 또 능히 광대한 지혜의 빛을 보이나니 청정한 지혜를 열어 보이기 위한 까닭이니라. 또한 능히 온갖 법과 보리가 허공성과 같음을 열어 보이나니 온갖 지혜의 지혜가 청정함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까닭이니라. 또한 청정한 도법이 곧 보리임을 열어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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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 그 원하는 대로 원만함을 얻는 까닭이니라. 능히 진실한 이치[實諦]를 연설하는 방편선교를 깨달아 아나니 능히 분별 없는 이치[無分別諦]를 연설하는 까닭이니라. 능히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 보이나니 모든 법의(法義)를 수순하여 깨달은 까닭이니라.


무변장엄아,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 가운데 잘 닦아 배운다면 속히 청정한 불의 자량으로 보리를 얻어 머무르되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어떤 법과 서로 어그러지지 않으며, 또한 이 말한 바 법에 멀고 가까움을 보지 않으며, 법과 비법으로써 보리를 견주어 보지 않고, 보리는 무엇으로나 나타내어 보일 수 없는 것을 통달하여 능히 평등하여 나타내어 보일 수 없는 뜻으로 보리를 깨달아 알며, 또한 모든 법의 적정한 뜻[義]을 관할 때에 보리라 분별하지 않고 또한 적정과 적정 아닌 뜻을 보지 않으며, 적정 밖에 적정 아닌 것을 보지 않으며, 조금도 본다는 생각 없이 어디서나 능히 청정하게 보며, 또한 조금이라도 청정하게 했다는 것이 없느니라. 이것이 모든 보살의 청정한 문이라, 이 문으로 말미암아 능히 모든 여래의 끝없는 법장 다라니문을 생각하며, 능히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 법의 광을 열어 보이어 연설하며, 능히 모든 지혜업과 원하는 것을 청정케 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평등한 깨달음[等覺]을 나타내고는 솟아오르는 의욕이 끝내 물러가지 않으며, 또한 능히 생각하는 대로 청정한 원과 같이 온갖 법에 속히 자재를 얻어 모든 여래의 대자대비를 익혀 행하므로 모든 여래의 미묘한 법의 광이 다 앞에 나타나며, 또한 능히 한량없는 큰 법의 광명을 나타내어 보이고 몸이 항상 모든 부처님 지혜 경계에 머무느니라.


무변장엄아, 이 한량없는 법문은 누구의 말이냐, 무변장엄아, 한량이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모든 법, 곧 '지계(地界)·수계(水界)·화계(火界)·풍계(風界)·허공계(虛空界)·식계(識界)'가 다 한량없는 까닭이며 욕계(欲界)·색계(色界) 및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중생계가 한량이 없느니라. 그러나 조금도 모든 중생계에 사무쳐 알 것이 없나니 중생이 없는 까닭이니라. 이와 같이 이 중생계를 얻을 수 없으며, 사무쳐 알 수 없나니 '계(界)'가 없는 까닭이니라. 이러므로 모든 법이 열반계와 같나니 열반계에 몰려 들어가고 보면, 온갖 법은 다 같은 말할 수 없는 경지[不可說處]에 들어가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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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 열반계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열반계에는 장애가 없고 또한 번뇌의 덮임이 없나니 장애와 번뇌 덮임의 길이 깨끗해진 까닭이니라. 이러므로 열반계는 깨끗하고도 가장 깨끗하니라. 이 열반계라는 계도 또한 계가 아니니 계를 멀리 여읜 까닭이며, 계가 없는 까닭은 계를 뛰어넘은 까닭이니라. 그러나 계와 비슷한 방편으로 나타내어 말하나니 말한 바 계라는 것은 계 아님과 계 아님도 아닌 데 머무느니라.


언설 가운데 또한 '계'가 없건만 다만 언어로 모든 법을 나타내어 말하나니, 그 언설과 말하는 자도 다 얻을 수 없으며 깨달아 알 수 없나니 일체의 언설이 곧 언설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일체 언설이 마치 허공 자체가 똑같이 허공에 들어가듯 허공 자체와 허공이라는 말을 다 얻을 수 없나니 이런 이치로 말미암아 지계(地界)를 능히 말하지 못하며 능히 말할 재주[才]가 없으며, 공계를 능히 말하지 못하나니 능히 말할 재주가 없기 때문이니라. 식계(識界)라고 말하는 자는 이것은 다만 말로 모든 법을 나나태어 말하지만 저 식계라는 계는 또한 계가 아니라 모든 계에 들어가지 않나니, 계와 서로 응함도 아니요, 서로 응하지 않음도 아니니라. 허공으로 좇아 나와서 허공에 들어가나니 이와같이 식계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밖에 있는 것도 아니요,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나, 공의 성분으로 허공에 따라 들어갈 뿐 하나 내세울 것이 없으며 볼 수도 없느니라.


만일 내세울 것이 없다면 그는 지은 바도 없나니 다만 인연이 서로 응하므로 식계가 있다고 말할 뿐이니라. 이것이 보살이 들어갈 바의 문이라 온갖 법의 본성이 허공과 같나니 법계에 의지하여 열어 보이어 연설하지만 또한 모든 법의 '계'랄 것도 없으며, 계가 계 아닌 까닭에 온갖 법이 허공과 같으니라. 이러므로 여래가 온갖 법이 다 허공과 같다고 말하나니 헤아려 얻기 어려운 까닭이며 온갖 법이 다 허공성임을 나타내며 모든 법의 본성이 허공과 같은 까닭이니, 다만 말로 열어 보이어 연설할 뿐이니라.


무변장엄아, 내가 여래지(如來智)로써 연설한 것이 저렇게 청정한 줄을 관하라. 법은 생(生)할 것이 없으며 또한 법을 맡겨 줄 것이 없나니 이러한 청정 법교는 이것이 모든 보살의 똑바른 지혜니라. 이러므로 너희들이 마땅...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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