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105-21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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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 이것이 그들이 들어갈 성제문(聖諦門)이니라. 이 문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으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놓아 버린 평등한 마음을 증득하므로 능히 모든 번뇌의 그물을 끊고 바른 도에 편히 머물러 저 언덕에 이르러서 법의 자성을 증득하여 나고 듦이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네가 마땅히 온갖 법을 관하라. 본성이 다 공하며 자성이 적정하여 지은 자가 없나니 모든 법이 실로 번뇌와 서로 응함도 아니며, 서로 응하지 않음도 아니니라. 저 자성이 없는 법 가운데 마땅히 집착하지 말며, 또한 성(性)과 성 아닌[非性] 것을 여의고 분별을 일으키지 말지니라.
이미 능히 인연이 청정한 줄을 알았거든 마땅히 일체 인연으로 난 법을 희론하지 말지니라. 저 인연의 성이 공하여 끝내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인연이 서로 응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법이 서로 인연함이 지은 것도 없으며 행함도 없으며 하는 것도 없느니라. 이렇게 생각하면 온갖 법이 서로 공한 까닭에 자성이 없으며 의지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네가 이 가운데 잘 깨달아 들어가면 곧 능히 부서지지 않을 끝없는 광명의 청정 법문을 길러내어 거두어 잡아들이므로 마땅히 청정함을 얻으며, 희론이 없으므로 마땅히 광명을 얻으며, 번뇌의 부림을 초월하여 집착함이 없으므로 마땅히 벗어남을 얻으리라.
무변장엄아, 온갖 법을 오직 이름과 모양[名相]으로 열어 보이어 연설할 뿐이니라.
어떤 것이 '이름'은 일체의 물질 아닌 온(蘊) 이니라. 이와 같은 이름과 모양은 일체가 다 허망하여 실답지 않건마는 뒤바뀐 생각으로 인하여 집착하여 혹은 '물질이 나[我]다, 물질이 나의 것이다'라고 모양을 분별하므로 이름 붙여 말함이 있느니라. 이와 같이 이름과 물질 둘이 다 실답지 않아서 모두가 허망하여 무너지는 법이라, 꼭두각시 같고 꿈과 같으며 물질 자체가 진실치 못한 것이 꿈에 본 것과 같으며,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의식 [識]의 4온(蘊)도 또한 진실치 못하니 다만 세속 문자로써 내세울 뿐이니라.
이렇게 알 때에 괴로움이 있음을 보지 못하며, 실다운 이치로 말미암아 반연함이 없고, 반연이 없으므로 마음에 있는 바가 없고, 있는 바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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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저 열반과 서로 응할 것이 있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능히 열반계에 생각[想]과 앎을 초월하는 멸함을 얻느니라.
무변장엄아, 삼계는 상과 작의(作意)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삼계가 허망하다 말하며, 상과 작의도 또한 진실함이 아니니라. 저 온갖 상은 곧 물질의 집착이며, 온갖 작의는 다 느낌·생각·지어감·의식과 서로 응하느니라. 모든 법의 본성은 또한 서로 응함이 없으며 또한 서로 응함 아님도 아니며, 상도 아니며 또한 작의도 아니니 상과 작의의 본성이 다 공이며, 온갖 언설(言說)도 또한 다 허망하여 다만 거짓 시설이니라. 자성으로 하여금 적정하게 하라.
무변장엄아, 모든 법의 본성을 붙인 이름으로 분별한 까닭에 이러한 말이 또한 다 평등하니라.
무변장엄아, 이 법 가운데 실제(實諦)를 증득할지니 모든 보살도 마땅히 깨달아 알지니라. 말하자면 '모든 여래는 온갖 번뇌의 부림을 다 놓아 버린 까닭에 그 연설하신 것을 끝내 헛되이 버려서 아니 된다'고. 너희들은 잘 생각하여 집착함 없이 온갖 법에 분별을 내지 말고, 모든 희론을 여의고 온갖 법이 자성이 없는 줄을 깨달아서 중생을 가엽게 여기는 생각을 일으키며, 이러한 법문에 깨쳐 들어가서 일체를 위하여 열어 보이어 연설할지니라.
어떤 법문인가. 말하자면 '무명 등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알고 지견(智見) 등 모든 무위법(無爲法)을 깨달으며, 두루 청정하게 일체 유위·무위·무희론지(無戱論智)에 깨쳐 들어가서 수(數) 아니면서 수에 들어가며, 수 아니면서 수에 머물러서 이와 같은 수 아닌 법에 수순하므로 무위·청정 법문을 증득하며, 총지[徧持] 광명지혜를 얻어서 모든 법을 거두어 잡아 지니어 잃어버리지 않게 하며, 능히 지혜의 방편선교로 널리 중생을 위하여 모든 법을 연설 할지니라.
무변장엄아, 이 모든 보살들이 다라니문에 들어가는 것은 이 문으로 말미암아 광대한 차별지혜를 발생하여 또한 능히 모든 법의(法義)를 연설하는 선교지(善巧智)를 일으킬지니라.
무변장엄아, 이 가운데 어떤 것을 다라니문이라 하는가. 이 보살이 모든 법 가운데 능히 총지 방편선교를 얻나니, 무변장엄아, 이 가운데 보살이 변청정(邊淸淨) 선교지에 머물러서 변재를 행하여 의각혜(義覺慧)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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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 본연의 자성을 관찰하느니라, 그러나 온갖 법 자성이 머무른 바 없으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건립함도 없고 끝없이 건립함을 말로 나타낼 수 없지마는 다만 세속의 말로 연설할 뿐이니라. 모든 법 본연의 자성은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나니,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문자로 표시할 수도 없으며, 문자가 청정하여 공용(功用)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의 본성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니라.
온갖 법이 다 이와 같이 조작도 없고 일어남도 없고 모양도 없이 청정하므로 다만 허공과 같다는 모양으로 열어 보이고 연설하나니, 이것이 곧 모든 법의 문 없는 문이니 문이 청정하므로 끝내 물듦이 없으며 또 물듦을 따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이 끝내 난 것도 아니요 일어남도 아니며 법 자성이 또한 생기(生起)함이 아니니라. 이러므로 마땅히 알지니라.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온갖 법의 자성이 성(性)이 없나니, 또한 이 '제법무성(諸法無性)'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이 모든 보살의 집착 없는 다라니문이니라. 모든 보살문의 청정이 되는 까닭이니라. 이와 같이 온갖 법을 연설할지니라. 형상이 있다는 것은 말한 바 형상이 곧 형상이 아니라, 지어짐도 아니요, 무너짐도 아니요, 사랑함도 아니요, 성냄도 아니니라. 이러므로 형상문(形相門)이라 함은 곧 문이 아니니라. 문이 청정하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형상 없는 청정법문에 들어가느니라. 이 형상문이 없는 것인 줄을 비추어 알기 위하므로 유의(有義)로써 하지 말고 이와 같이 지음[所作]이 없으므로 형상 없는 데 들어간다고 선설할지니라.
무변장엄아, 이와 같이 말한 형상 없는 문은 다라니의 청정을 위하므로 굴리느니라. 무변장엄아, 말한 바 문이라 함은 마치 허공과 같으니라. 온갖 법이 허공에 의지하여 나고 멸함이 있나니 저 나고 멸함이 성(性)이 평등하니라. 이렇게 관할 때에 생멸이 없으며 거두어 줄 것이 없나니 온갖 법을 마땅히 이렇게 알지니라. 온갖 법이 또한 거두어 줄 것이 아니며, 거두어 줌 아님도 아니며 등(等)도 아니며 등 아님도 아니며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이 형상문을 깨달아서 무상문(無相門)의 청정을 얻기 위하므로 열어 보이어 연설하느니라.
무변장엄아, 모양이 없다고[無相] 한 것은 말하자면 신(身:及身)과 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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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身施設]이 없으며 이름[名]도 없고 글귀[句]도 없고 또한 시현도 없느니라. 이 교의를 잘 알지니라. 저 형상이 없다 함은 허공과 같음이니 허공이란 것은 또한 허공과 허공을 보이어 말할 것이 없느니라. 이것이 무명이 명(明)에 수순하는 지력취(智力聚)의 법문이니라. 보살이 능히 다라니 이취방편(理趣方便)을 증득하면 그 증득하여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쟁론(爭論)이 없게 되고 잊어버림[忘失]이 없으며 끊임없는 비밀한 말[無斷秘密語言] 다라니문에 따라 들어가게 되느니라. 마치 무열뇌(無熱惱)라고 이름하는 용이 큰 비를 퍼부어 끊임없는 듯하니라. 무변장엄아, 말한 다라니라는 것은 이 어떤 구의(句義)인가.”
무변장엄보살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다라니라 함은 곧 이것이 모든 법에 수순하는 비밀 방편의 붙인 이름[假名]이며, 생각을 따라 총지[徧持]하는 업(業)이며, 법을 설하는 어구(語句)이니 지혜의 전일(專一)한 힘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다라니 수(數)에 들어가게 되며, 선각혜(善覺慧)로써 한량없고 끝없는 보리의 힘을 받아 지니게 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다라니문은 이것이 대허공(大虛空)이며, 이것이 대방광(大方廣)입니다. 이 뜻으로 능히 널리 연설하오며 평등을 말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거두어 주므로 명자(名字)가 교법을 따라 교묘하게 열어 보이어 널리 유포하나이다. 문자의 차별에 원만함을 얻으므로 변재에 통달하여 성취하게 되며 뜻을 잘 관찰하고 교묘하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의변재(義辯才)에 원만을 얻으며 모든 법을 결정하여 잘 열어 보이므로 법(法) 변재에 원만함을 얻어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어 큰 자비로써 거두어 잡아들이며, 거두어 잡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차제로 길들여 청정을 얻게 하고 모든 희론을 여의고 능히 평등한 법을 말하게 되나이다.”
세존이 이 다라니의 비밀 방편법문을 말씀하실 적에 한량없고 끝없는 선교의(善巧義)가 부처님 입에서 나왔다.
그때에 부처님이 무변장엄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문이란 것은 여래의 온갖 지혜의 지혜 문이라는 말이다. 이 가운데 말로 말미암아 온갖 법을 연설하느니라. 여래는 끝없는 청정과 최고[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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竟] 청정의 자연 지견(自然智見)에 머물러서 집착함이 없고 건립할 바 없는 데서 광대 심심(甚深)한 법을 흘러 내느니라. 무변장엄아, 여래가 일찍이 온갖 법이 다 불법이라고 말하였나니 모든 법에 능히 잘 깨달아 알면 불법이라 이름하리라. 모든 법의 본성이 불법과 같으니라. 이러므로 모든 법이 다 이 불법이라고 하느니라. 능히 법과 법 아닌 것을 깨달아 앎으로써 능히 온갖 법을 깨달아 앎이니라. 이것은 다라니문으로서 능히 온갖 법에 널리 들어가나니 말하자면 언어·연설·담론(談論)이다.
일체의 언어·연설·담론이 다 문자(文字)로서 표시하여 연설하느니라. 이 가운데서 문자는 아자(阿字)를 머리로 하고 하자(何字)로 끝을 삼나니, 마치 태(胎)에 들어 태를 받고 태를 지니는 것이 어머니를 근본으로 삼는 것과 같으며, 또는 종자가 자라나게 됨을 아버지를 머리로 삼는 것과 같으며, 또는 5온(蘊)이 쌓여 모이어 남[生]으로 머리를 삼고 다음에 나머지의 각기 다른 여섯 감관이 차례로 이룩되듯이 자모(子母)가 머리가 되어 일체 문자의 차별상(差別相)이 어울려서 이룩되듯이 자모가 머리가 되어 자라나나니, 말하자면 '아'자가 머리가 되고 '하'자가 끝이 되어 나머지 모든 글자가 그 중간에 있어서 자모에 따라 서로 응하고 어울려서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능히 연설·언어·다라니문에 들어가게 됨이니라.
또 마땅히 일체 행법(行法)이 다 무너져 없어지듯이 저 문자 서학(書學)이 이룩되었다가 곧 없어지는 줄을 깨달아 알지니라. 이와 같이 일체의 유지(有支:有爲)가 되었다가 곧 없어지는 줄을 깨달아 알지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이 화합하므로 이것과 저것이 화합치 않으면 무너져 없어지느니라. 이와 같이 두 가지가 서로 화합하여 일체 생명계(生命界)의 애결(愛結)을 건립하느니라. 또한 이 두 가지가 화합하므로 일체 유위(有爲)의 모든 법을 건립하느니라.
이와같이 관찰하므로 차츰 능히 무작(無作)법문을 깨끗이 하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생멸(生滅)을 연설하는 다라니문에 들어가서 모든 보살로 하여금 방편선교에 빨리 원만함을 얻게 하나니, 마치 자모에 '아'자가 머리가 되고 '하'자가 끝이 됨과 같으니라. 이렇게 모든 글자가 만들고는 마땅히 언어·연설·담론으로써 잘 일체 비밀 언사(言詞)에 들어가며 또는 무장애법...
-나무 관 세 음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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