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

정법념처경(162)-1590

근와(槿瓦) 2016. 2. 29. 01:11

정법념처경(162)-159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586 / 1802] 쪽

열반으로서 해탈을 얻어 어떤 고통도 결박하지 못하리.

 

이와 같이 공작왕 보살은 제어하는 법의 한량없는 공덕을 설명하여 천자들로 하여금 모두 그것을 믿고 알게 할 때 천자들은 일심으로 자세히 들었다. 그 때에 공작왕 보살은 야마천과 도솔타천을 위해 쉬지 않고 설법한다. 그리하여 그는 천자들이 법을 존경하는 줄을 알았으므로 다시 아홉째의 청정결백한 법을 말한다.

 

청정결백한 법이란, 이른바 사문·바라문이나 그 밖의 세간 사람으로서 업보를 믿는 것이니, 업보를 믿기 때문에 큰 법을 얻는다. 사문·바라문이나 그 밖의 세간 사람으로서 업의 과보를 믿으면, 그는 몸의 악업을 알고는 그 악업을 자꾸 지어 늘리거나 사랑하거나 즐기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과보로서 지옥이나 아귀·축생 등의 나쁜 경계에 태어나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입의 악업도 자꾸 지어 늘리거나 사랑하거나 즐기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로써 지옥·아귀·축생 등 나쁜 과보를 받겠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뜻의 악업도 자꾸 지어 늘리거나 사랑하거나 즐기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로써 지옥·아귀·축생 등의 고통을 받겠기 때문이다. 사문·바라문은 과거에 지은 악업을 생각하고는 후회하여 다시는 짓지 않고 스승을 가까이하여 그의 법을 듣는다.(어떻게 하면 이 악업의 과보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그 스승이 지혜로 그를 제어하고 그 인연을 말하기 위해 방편으로 말하여 지은 것을 뉘우치게 하면 과거의 악업은 다 사라진다. 이렇게 선업을 생각하기 때문에 악업을 짓지 않고, 그 업의 인연이 어디서 일어나는가를 관찰한다. 이렇게 관찰하고 악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나쁜 업을 모두 소멸하게 하거나 혹은 현재에 짓는 몸·입·뜻 등의 악업을 희박하게 한다. 그는 마음이 가벼워졌기 때문에 짓고는 빨리 뉘우쳐 다시 짓지 않는다. 이런 뉘우치는 마음은 업으로 이루어진 악업을 모두 소멸시킨다. 그 사문·바라문이나 혹은 그 밖의 세간 사람들은 이렇게 그 업을 알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1587 / 1802] 쪽

(나는 악을 익혔으므로 장차 몸·입·뜻 등의 악업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보가 익은 때에는 지옥이나 아귀·축생 등에 떨어질 것이다.)그리하여 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악업은 바른 방편으로 그것을 생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이렇게 업의 과보를 믿으면 설사 지옥의 악업을 성취하였더라도 오랫동안 지옥에 있으면서 받을 큰 고뇌가 희박해지거나 혹은 모두 소멸될 것이다. 그리고 또 부지런히 정진하면 그로써 혹 아귀에 떨어질 악업이 있더라도, 오랫동안 아귀로 있으면서 주리고 목마르는 그 큰 고통을 잠깐 동안 받거나 혹은 그것이 모두 소멸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문·바라문이나 혹은 그 밖의 중생들로서 혹 축생에 떨어질 악업이 있더라도, 오랫동안 축생으로 있으면서 서로 잡아먹는 고통을 잠깐 동안 받거나 혹은 그것이 모두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오직 자꾸 지어 결정코 성취된 악업은 여기서 제외된다. 즉 지옥이나 아귀·축생 등 경계의 어느 길에 떨어지더라도 결정코 성취된 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다. 또 업의 과보를 믿는다. 그것은 생각하여 알기 어려운 미세한 업의 과보이다. 즉 세 가지 업을 지은 뒤에 참회하고 다시 짓지 않으면 결정되지 않은 업으로 축생에 태어난다. 그 때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지옥의 업이나 혹은 아귀의 업으로 축생의 몸을 받았다. 후회하는 마음이 청정하면 중한 업도 파괴할 수 있다.)그리하여 그는 마음의 힘으로 전부 소멸시키거나 혹은 조그만치 끊는다. 또 혹 축생의 몸을 받을 악업이 있더라도 후회하는 마음은 그 업을 소멸시켜 오래 사는 축생의 몸을 받지 않고 큰 고통을 받지 않으며 혹은 훌륭한 마음으로 악업을 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업의 과보를 믿어야 한다. 사문·바라문이나 그 밖의 사람으로서 업의 과보를 믿으면 그는 생사의 저 언덕에 이를 수 있다. 왜냐 하면 다섯 길의 생사는 모두 선업과 악업으로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진실한 업의 과보를 믿어야 한다. 일체 중생은 다 업보의 인연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나 여자나 부지런히 정진하여 밤낮으로 업의 과보를 생각하면 그는 생사 가운데서 가장 견고한 사람이 될 것이다.

 

                                                                             [1588 / 1802] 쪽

또 열째로 사문·바라문이나 그 밖의 사람으로서 생각해야 할 법이 있으니, 그것은 어떤 법인가? 이른바 머무르는 곳의 손해를 입는 것이다. 즉 사문·바라문이나 그 밖의 사람으로서 지혜가 적은 이는 머무르는 곳의 손해를 입으면서도 그곳에 집착하여 아쉬운 생각으로 버리지 못한다. 절이나 승방·촌락·나라·도시 및 다른 곳에 살면서 항상 게으름을 즐기고 법답지 않은 곳을 즐긴다. 그리하여 고요한 절이나 다른 곳으로는 가지 않으므로 그는 스님이라고도 할 수 없고 속인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 법답지 않은 곳에서 목숨을 마친다. 이런 사람은 무엇 때문에 스님이 되었던가? 그에게 어울리는 숲이나 절에는 가지 않고 법답지 않은 곳에서 목숨을 마치기까지 한다. 선정을 닦기 위해 집을 나왔으면서 숲 속의 고요한 곳에는 가지 않고,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무르고 있다.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무르면 시주들은 그를 비방하고 가까이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공양도 바치지 않고 보기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무르면 온갖 허물이 드러나 범부와 속인들의 비웃음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비방한다.(아무 사문·바라문이나 또 다른 사람은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무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님이라고도 할 수 없고 속인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는 숲 속의 한적한 곳을 좋아하지 않고 재물을 저축하며 속인과 만나기를 좋아하고, 속인과 친하여 마치 종과 같으므로 속인들의 천시를 받는다. 그러므로 그는 속인이라고도 할 수 없고 스님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무르기 때문이니, 설령 아무 허물이 없는데 남의 비방을 받는다 해도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무르는 곳 없으면 그는 시주의 천대는 받지 않을 것이다. 속인을 자주 만나거나 혹은 가까이하면 그는 남의 무시는 당하지 않더라도 혹은 다른 허물이 생기게 될 것이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 맞지 않은 곳에 머무르면 그는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무름으로써 아무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문이나 바라문은 파괴되는 곳에는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항상 머무를 곳을 즐기되, 늘 혼자 있기를 즐기고 나무 밑이나 무덤 사이 등 고요한 곳에 머물기를 즐기어 선정을 닦고 혹은 산골짝에 혼자 있으면서

 

                                                                              [1589 / 1802] 쪽

목숨을 마치더라도 법답지 않은 곳에서는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법답지 않은 곳을 모두 버리면 해탈을 얻을 수 있으나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무르면 그는 해탈을 얻지 못할 것이다.)'그 때에 공작왕 보살은 다음 게송으로 말한다.

 

'비구로서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물면 사람들은 그를 종처럼 보고 또 초개(草芥)처럼 업신여기리니 그러므로 스스로의 이익 잃는다. 비구로서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물면 그는 속인도 스님도 아니다. 선정이나 독경 그 어느 법도 그는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구로서 법답지 않은 곳에 머물면 재물을 저축해 두고 탐하는 마음으로 재물에 집착하여 죽을 때의 닥침을 깨닫지 못한다. 목숨은 찰나찰나 줄어들건만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짓는바 업을 알지 못하여 그는 미래의 과보 받는다. 비구로서 법답지 않은 곳에 살면서 항상 즐기어 속인 만나고 법답지 않은 곳에 늘 다니면 그는 죽어서 나쁜 길에 들어가리.

 

                                                                             [1590 / 1802] 쪽

마음에 즐겨 집착하는 것 없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탐욕을 모두 벗어버리면 그런 이야말로 사문이라 하리. 산이나 혹은 나무 밑에서 항상 선관(禪觀)을 닦아 익히면 그는 청정한 지혜를 얻어 일체의 허물을 멀리 떠나리. 일체의 탐욕을 멀리 떠나 경계의 유혹을 받지 않으면 그는 능히 번뇌를 멸하는 것 불이 마른 나무 태우듯 하리. 혼자 수행하는 비구로서 다섯 감관을 잘 거두고 여실히 그 몸의 성질을 알면 그는 열반의 도를 얻으리.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기 생각하고 일체의 허물을 멀리 떠나면 그는 저 열반에 이르기 마치 놀이터에 가듯 하리라. 언제나 열반을 구하고 항상 생사를 두려워하면 그와 같은 깨끗한 마음은 법답지 않은 곳을 즐기지 않는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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