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좌선삼매경(50)-10

근와(槿瓦) 2016. 2. 16. 01:12

좌선삼매경(50)-1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46 / 10002] 쪽

좌선삼매경 하권

요진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그때 수행자가 비록 한마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선정의 힘을 완성하지 못했으면 오히려 욕계의 번뇌 때문에 혼란하게 되니, 마땅히 방편을 만들어 나아가 초선(初禪)을 배우고 애욕을 꾸짖어서 버려야 한다. 어떻게 꾸짖어서 버리는가? 욕계의 허물을 관하여, 욕계는 깨끗하지 않으며 갖가지로 착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초선의 안온함과 쾌락을 생각해야 한다. 욕계를 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은 무상하며, 공덕의 원가(怨家)이고, 허깨비나 요술과 같으며, 공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여 아직 얻지 못했으면 어리석은 마음은 이미 어지러우니, 어찌 하물며 이미 음욕으로 묶이고 덮였음에랴? 하늘 위의 극락세계도 오히려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닌데, 어찌 하물며 사람 가운데서랴? 사람의 마음이 욕망에 집착하여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으면 불이 장작을 얻은 것과 같고, 바다가 물결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정생왕(頂生王)이 비록 일곱 가지 보물을 왕의 사천하에 비처럼 내리더라도 제석이 자리를 나누고도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나후사(那睺沙)라는 성을 가진 전금륜왕(轉金輪王)이 욕망의 핍박을 받아서 이무기 가운데 떨어지는 것과 같다. 또한 선인(仙人)이 열매를 먹고 풀을 입으며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면서 머

 

                                                                              [47 / 10002] 쪽

리카락을 뒤집어 쓴 채 도를 찾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욕망의 도적이 파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욕망의 즐거움은 매우 적고 원망의 독은 매우 많으니,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쁜 친구와 서로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과 멀리하며, 욕망으로 독한 술을 삼아 어리석고 미혹되어 취하여 죽는다. 욕망은 속이는 것이어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내달리게 하고, 피로와 고뇌가 만 가지인데도 자재할 수 없으니, 오직 욕망을 여의는 것만이 몸과 마음을 안온하고 지극히 쾌락하게 할 수 있다. 욕망이 얻을 바가 없는 것은 개가 마른 뼈를 씹는 것과 같으며, 욕망으로 구하는 것은 삼가 애쓰고 지극히 고생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을 얻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것을 잃기는 매우 쉬워서, 마치 잠깐 동안 세력을 빌렸지만 오래가지 않는 것과 같다. 꿈속에서 본 것이 황홀하더라도 곧 없어지는 것과 같아서 그것을 바라면 근심이 되며, 그것을 구하고자 하면 이미 괴로움이요, 그것을 얻어도 또한 괴롭다. 많이 얻으면 많은 괴로움이 있으니, 불이 장작을 얻되 많으면 많을수록 많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욕망은 살을 저미는 것과 같아서 온갖 새들이 다투어 따르니,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방이 불에 달려드는 것과 같고, 고기가 낚시바늘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사슴이 소리를 뒤따르는 것과 같고, 목마를 적에 짠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일체의 중생은 욕망 때문에 근심을 만들며 괴로움에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욕망은 독해(毒害)이므로 마땅히 초선을 구하여 욕망의 불을 끊어 없애야 함을 알아야만 한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믿고 즐거워하여 생각을 증진시켜서 뜻이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관하여 마음으로 싫어하고 번뇌를 다 없애면 초선정(初禪定)을 얻는다. 욕망의 치성한 불길을 여의고 시원한 선정을 얻는 것은 마치 더운데 그늘을 얻는 것과 같고 가난한데 부귀를 얻는 것과 같다. 이때 문득 초선의 희각(喜覺)을 얻으니, 선(禪) 가운데 갖가지 공덕을 사유하고, 좋고 추함의 분별을 관하여 문득 한마음을 얻는다.

 

                                                                              [48 / 10002] 쪽

[문]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은 한마음의 모습[相]을 얻으니,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답] 얼굴빛이 화열(和悅)하고 윤기가 나며, 천천히 다니고 조용하고 단정하여 한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눈은 색에 집착하지 않는다. 신령한 덕과 선정의 힘으로 명예와 이익을 탐내지 않고 교만함을 격파하며, 그 바탕은 유연하여 독해를 품지 않으며, 또한 인색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곧게 믿어 마음이 청정하고 논의하여 다투지 않으며, 몸에 속임이 없어서 함께 말하기 쉽다. 부드럽고 부끄러워하여[慙愧] 마음이 항상 법에 있으며, 정성스럽게 수행하고 정진하며 지계를 완전하게 갖추었다. 경전을 암송하여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이 법행(法行)을 따르며, 마음은 항상 기쁨에 넘쳐 성낼 곳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네 가지 공양 중에서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으니, 청정한 보시면 받고 양을 알아서 만족할 줄 안다. 잠깨어 일어나면서부터 이익을 가벼이 여기며 능히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행하고 인욕으로 삿됨을 제거한다. 논의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더라도 말수는 매우 적으며, 겸손하고 삼가해서 상ㆍ중ㆍ하의 자리를 공경하고, 훌륭한 스승과 선지식을 항상 가까이하고 따른다. 음식은 절제할 줄 알고 좋은 맛에 집착하지 않으며, 혼자 있는 고요한 곳을 즐기며, 괴롭거나 즐겁더라도 마음으로 참아 동요하지 않으며, 원망이나 다툼도 없고 다투는 소송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한마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각(覺)과 관(觀)[여기서 말하는 각(覺, Vitarka)은 신역(新譯)에선 심(尋)으로 번역하고, 관(觀,Vicara)은 신역에선 사(伺)로 번역한다. 합하여 심사(尋伺)라고 하는데, 각은 거칠고, 관은 세밀한 분별작용으로서 모두 초선에 상응하는 마음의 작용이다.]의 두 가지 일이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마차 물이 맑고 고요한데 파도가 일렁이면 흐려지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이미 안으로 한마음인데도 각과 관으로 번민하게 되니, 마치 목적지에 이르면 휴식을 얻고 졸리면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이 이때 차례대로 각도 없고 관도 없어서

 

                                                                              [49 / 10002] 쪽

청정한 선정을 일으키고, 내(內)ㆍ정(淨)ㆍ희(喜)ㆍ낙(樂)[제2선에서는 내(內)ㆍ정(淨)ㆍ희(喜)ㆍ낙(樂)의 선정 작용을 수반한다.]해서 2선(禪)에 들어갈 수 있다. 마음은 고요하고 묵연(黙然)해서 본래 얻을 것이 아닌데, 이제 이 기쁨[喜]을 얻으니, 이때 마음의 관(觀)은 기쁨으로 근심을 삼음이 앞에서 말한 각과 관과 같다. 기쁨이 없는 법[無喜法]을 행하여 마침내 기쁨의 경지를 여의고 성현들이 말씀하신 바의 즐거움[樂]을 얻으며, 한마음으로 자세히 알아 생각하고 보호해서 3선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기쁨을 버렸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서 기억하고 즐겨 보호[護:捨]한다. 성인은 즐겨 보호할 것을 말하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버리기[捨]가 어려우며, 즐거움 가운데 최고이니 이것보다 더한 다른 즐거움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은 일체의 청정한 경지 중에서 인자함[慈]이 최고의 즐거움이 됨을 설하였다. 즐거움은 곧 근심이니, 이유가 무엇인가? 제일의 선(禪) 중에서는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느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있으면 곧 변화가 있으며, 변화가 있으면 곧 괴로움이 생기니, 그러므로 3선에서는 즐거움으로 근심을 삼는다. 또한 선묘(善妙)로써 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버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마음을 제거하며, 청정함을 호념하여 제4선[제4선에서는 행사청정(行捨淸淨)ㆍ염청정(念淸淨)ㆍ비고비락수(非苦非樂受)의 선정 작용을 수반한다.]의 불고불락호청정념(不苦不樂護淸淨念)의 한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최고의 청정함을 보호하는 것을 제4선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3선에서는 즐거움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하여 괴로움[苦]이라 하니, 그러므로 4선에서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제거하여 없애서 그것을 이름하여 동요하지 않는 곳[不動處]이라고 한다. 점차 공처[空處 : 차례로 무색계에 상응하는 4무색정(無色定)을 설한다.]를 관조하여 안팎의 색상(色想)을 깨뜨리고, 유대상[有

 

                                                                              [50 / 10002] 쪽

對想 : 물질적으로 서로 대립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을 없애며, 여러 가지 색상을 생각하지 않고, 무량공처[無量空處 : 신역에서는 무량공처정으로 번역되어 있으며, 여기서도 동일한 의미이다.]를 관한다. 항상 색(色)의 허물을 관하고, 공처정(空處定)의 최상의 미묘한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공처정에 도달할 수 있다. 무량한 식처(識處)를 생각하고 공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량한 식처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식처정(識處定)에 도달할 수 있다.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생각하고 식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무소유처정을 얻는다.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을 생각하되, 만일 일체의 생각에 그 근심이 매우 많다면 병이든 종기든 무상(無想)이든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곳[愚癡處]이니, 그러므로 비유상비무상정은 제일 안온한 좋은 곳이므로 무소유처정의 허물을 관조하고, 비유상비무상의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비유상비무상처정을 얻는다. 혹 어떤 수행자가 먼저 초지(初地)에서부터 상지(上地)에까지 이르고, 다시 상지에서 자심(慈心:자무량심)을 익혀 행한다면, 먼저 스스로 즐거움을 얻어서 성냄의 독을 파괴하고, 다음으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다. 비심(悲心:비무량심)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가엾게 여기고, 능히 고뇌를 파괴하여 널리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비심삼매(悲心三昧)를 얻는다. 능히 기쁘지 아니한 것을 깨뜨리고 무량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희열을 얻게 하면, 이때 문득 희심(喜心: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능히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뜨리고 곧바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관하면, 이때 문득 호심(護心: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2선(禪) 역시 이와 같으며, 3선과 4선에서는 기쁨[喜]을 제거한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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