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좌선삼매경(35)-7

근와(槿瓦) 2016. 2. 13. 00:59

좌선삼매경(35)-7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31 / 10002] 쪽

...다면, 현재도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위대한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없다. 또한 부드러운 말로도 구할 수 없으며, 교묘한 말로 속이더라도 피하거나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지계와 정진도 이 죽음을 벗어나게 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사람의 목숨은 항상 위태로워서 믿고 의지할 수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항상 나의 목숨은 오래 살 것이라고 믿고 헤아리지 마라. 이 모든 죽음의 도적들은 항상 사람을 이끌어 가니, 다 늙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마땅히 죽이지는 않는다. 마치 아라한이 고뇌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깨달음을 가르쳐서 말하기를, “그대는 왜 세간을 싫어하여 도(道)에 들어올 줄 모르는가? 어떻게 이 깨달음을 지을 것인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문득 죽고, 태어났을 때 죽는 사람이 있으며, 젖먹이때나 젖을 끊었을 때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어려서, 어떤 사람은 장년 시절에, 어떤 사람은 늙어서 죽으니, 일체의 시간 속에서 죽음의 법계에 들어간다. 비유컨대 나무의 꽃이 피자마자 곧 떨어지거나, 열매가 있을 때 떨어지기도 하고, 아직 익지 않았을 때 떨어지기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삼가 정진에 힘써서 안온한 도를 찾아야 함을 알아야만 한다. 커다란 힘을 지닌 도적은 함께 살아도 믿을 수 없으니, 이 도적은 호랑이처럼 교묘하게 가리어 몸을 숨긴다. 이와 같이 죽음의 도적은 항상 사람 죽이기를 구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공하여 물거품과 같으니, 어찌 마땅히 때를 기다려서 도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는가? 어느 누가 그대는 늙어서 반드시 도를 행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가? 비유컨대 험한 언덕의 커다란 나무 위에는 큰 바람이 있고, 아래에는 많은 물이 있어서 그 뿌리의 흙이 무너지는 것과 같으니, 누가 마땅히 이 나무가 오래 살 것이라고 믿을 것인가? 사람의 목숨도 이와 같아 어려서는 믿지 않는다.

 

                                                                              [32 / 10002] 쪽

아버지는 곡식의 씨앗과 같고, 어머니는 좋은 밭과 같으며, 전생의 인연과 죄와 복은 비나 이슬과 같으며, 중생은 곡식과 같고, 생사는 수확과 같다. 갖가지 여러 천자와 인왕(人王)의 지혜와 덕은 천왕이 하늘을 도와 모든 아수륜(阿須倫 : 아수라)의 군대와 싸워 격파하는 것과 같아서 가지가지의 즐거움을 받아들이며 지극히 높고 크고 밝지만 도리어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빠지니, 그러므로 목숨이 살아있다고 믿고 ‘내 오늘은 마땅히 이것을 하고, 내일은 마땅히 이것을 하리라’고 말하지 마라.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여 죽지 않는다는 정신작용을 여러 가지로 제거하며, 이와 같이 먼저 거친 정신작용을 제거하고 뒤에 미세한 정신작용을 제거하면, 마음이 청정해져서 살아서 올바른 도를 얻으리니, 일체의 번뇌가 없어지고 이로부터 안온한 곳을 얻는다. 이것을 바로 출가의 열매[果]라고 하니, 마음에 자재함을 얻고, 3업(業)이 가장 청정해져 다시는 태에 들지 않는다. 갖가지 경전을 읽고 많이 들으면 이때 과보를 얻으리니, 이와 같이 과보를 얻으면 헛되지 않아 마왕의 군대를 격파하여 문득 가장 용맹하다는 이름을 얻는다. 세계 안에서 번뇌의 장군이 사라져도 이것을 굳세다고 이름하지 않으니, 능히 번뇌의 도적을 격파하여 3독의 불을 없애 시원하게 청정함을 즐기고, 열반의 숲 속에서 안온하게 베개를 높이 베며, 가지가지의 선정ㆍ근(根)ㆍ역(力)ㆍ7각지(覺支)의 청량한 바람이 네 번 일어나고, 중생들이 3독의 바다에 빠진 것을 돌아보며, 공덕의 미묘한 힘이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굳세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흩어지면 마땅히 아나반나를 생각하고 여섯 가지 법을 배워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끊어야 하니, 이 때문에 수식(數息)을 생각하는 것이다.

 

[문] 만일 나머지 부정(不淨)과 염불(念佛) 등의 네 가지 관법 중에서도 역시 정신작용을 끊을 수 있다면 무슨 까닭에 유독 수식만을 말하는가?

[답] 나머지 관법은 느슨해서 잃어버리기 어렵기 때문이요, 수식법은 급하

 

                                                                               [33 / 10002] 쪽

여 쉽게 변하기 때문이니, 비유컨대 풀어놓은 소와 같아서 소는 잃어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일은 적으며, 풀어놓은 원숭이는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일이 많은 것과 같다. 이것 또한 그러해서 수식(數息)의 심수[心數 : 심소(心所)의 구역(舊譯). 일반적으로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다.]는 어렸을 때는 그 생각을 얻을 수 없으니, 어렸을 때 그것을 생각하면 곧 수(數)를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정신작용을 차단하고 마땅히 호흡을 헤아린다. 이미 헤아리는 법을 얻었으면, 마땅히 따르는 법[隨法]을 행하여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끊어버린다. 들숨을 마칠 때까지 마땅히 따르되 하나를 헤아리지 마라. 날숨을 마칠 때까지 마땅히 따르되 둘을 헤아리지 마라. 비유컨대 채무를 진 사람을 채권주가 따라가서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유하라. 이 들숨은 돌아오는 것이며, 나오면 다시 다름이 있다. 날숨은 돌아오는 것이며, 들어오면 다시 다름이 있다. 이때 들숨의 다름과 날숨의 다름을 아니, 왜냐하면 날숨은 따스하고 들숨은 차다.

 

[문] 들고 나는 숨은 하나의 호흡이니, 왜냐하면 날숨이 되돌아 다시 들어오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물을 머금으면 물은 따뜻해지고 물을 토하면 물이 차가워지는 것과 같이, 찬 것은 따뜻한 것으로 되돌아오고, 따뜻한 것은 찬 것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답] 그렇지 않다. 안에서 심장이 움직이기 때문에 숨이 나오는 것인데, 나와서는 곧 없어진다. 코와 입이 바깥을 당기면 곧 숨이 들어오며 들어왔기 때문에 숨은 없어지니, 또한 데리고 나오지도 않고 데리고 들어가지도 않는다. 또한 소년ㆍ장년ㆍ노년의 사람들은, 소년은 들숨이 길고 장년은 들고 나는 숨이 같으며, 노인은 날숨이 길다. 그러므로 호흡이 한결같지 않다. 또한 배꼽 가에서 바람이 일어나고, 서로 비슷해지고, 서로 이어져서 숨이 나와 입과 코의 변두리에 이르며, 나오면 곧 없어지니, 비유컨대 풀무 주머

 

                                                                              [34 / 10002] 쪽

니 속의 바람이 열리자마자 없어지는 것과 같다. 만일 입과 코의 인연으로 그것을 당기면 곧 바람이 들어오니, 이것은 새로운 인연의 끝에서 생기는 것이다. 비유컨대 부채는 뭇 인연이 합해졌기 때문에 바람이 있는 것과 같다. 이때 들어오고 나오는 호흡의 인연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아서 생겼다 없어지며 늘 변하는 것임을 알고, 이와 같이 사유한다. 날숨은 입과 코의 인연에 따라 당기며, 들숨의 인연이 있기에 심장이 움직여 살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내가 숨 쉰다고 한다. 숨은 바람이니, 바깥의 바람과 다름이 없으며, 땅ㆍ물ㆍ불ㆍ공(空)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다섯 가지 커다란 인연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식(識)이 생기며, 식도 마찬가지여서 역시 나의 소유가 아니다.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앎이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오는 것을 따르니, 이것 때문에 ‘수(隨)’라고 이름한다. 이미 따르는 법을 얻었으면 마땅히 멈추는 법[止法]을 행해야 하니, 멈추는 법이란 헤아림[數]과 따름[隨]의 마음이 지극해서 마음을 풍문(風門)에 머물게 하고 들어가고 나오는 숨을 생각하는 것이다.

 

[문] 무슨 까닭에 멈추는가?

[답]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끊기 때문이고, 마음이 흩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숨을 헤아리고 따를 때는 마음이 많은 근심에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며, 멈추면 마음이 한가롭고 일이 적어지기 때문이며, 마음이 한 곳에 머물기 때문이다. 숨이 나고 드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비유컨대 문을 지키는 사람이 문가에 살면서 사람의 출입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마음을 멈추는 것도 그렇다. 숨이 나올 때는 배꼽ㆍ심장ㆍ가슴ㆍ목구멍으로부터 입과 코에 이르고, 숨이 들어올 때는 입ㆍ코ㆍ목구멍ㆍ가슴ㆍ심장으로부터 배꼽에 이르는 것을 아니, 이와 같이 마음을 한 곳에 묶어 두는 것을 이름하여 멈춘다[止]고 한다. 또한 마음을 지법(止法) 가운데 머물면서 관한다. 들숨 때 5음(陰)의 생성과 소멸이 다르고, 날숨 때 5음의 생성과 소멸이

 

                                                                               [35 / 10002] 쪽

달라서, 이와 같이 마음이 흩어지면 바로 제거하여 버리고, 한마음으로 사유하여 관을 증장시키는 것을 이름하여 관법(觀法)이라고 한다. 풍문(風門)에 머무는 것을 버리고 거친 관법을 여의니, 거친 관법을 여의어서 호흡의 무상(無常)을 알면, 이것을 전관(轉觀)이라고 한다. 5음의 무상함을 관하고, 또한 들숨과 날숨의 생기고 소멸함과 무상함을 생각한다. 첫머리의 숨을 보건대 온 곳이 없고, 다음으로 뒤의 숨을 관하여도 역시 자취가 없다. 인연이 화합했기 때문에 있고, 인연이 흩어지기 때문에 없으니, 이것을 전관법(轉觀法)이라고 한다. 5개(蓋)와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비록 먼저 번뇌와 부정(不淨)을 지관(止觀)하더라도 마음이 복잡하면, 지금의 이 청정한 법에서 마음은 홀로 청정함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앞에서 다른 훈련[異學]과 서로 비슷함을 관하여 도를 행하고 호흡의 출입을 생각하였으니, 지금의 무루도(無漏道)와 서로 비슷하며, 선(善)을 행하는 유루도(有漏道)를 청정하다고 말한다. 또한 처음에는 신념지(身念止)의 부분을 관하고, 점차로 일체의 신념지를 관하며, 다음에 통념지(痛念止)와 심념지(心念止)를 행한다. 이 가운데 청정하지 아니하여 무루도가 멀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법념지(法念止) 중에서 16행(行)을 관하여 들고 나는 숨을 생각하며, 난법(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ㆍ고법인(苦法忍) 나아가 무학진지(無學盡智)를 얻으니, 이것을 청정이라고 한다. 이 열여섯 가지 나뉨 중에서 처음의 들숨 부분이 여섯 가지 안나반나행(安那般那行)이며, 날숨 부분도 역시 그렇다. 한마음으로 호흡의 출입과 길고 짧음을 생각하니, 비유컨대 사람이 산을 달려서 올라갈 때 무거운 것을 지거나 기(氣)가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와 같은 것으로 이 호흡의 짧음에 비유하고, 만일 사람이 극도에 달했을 때라면 숨을 편안하게 하여 기쁨을 얻으며, 또한 이로움을 얻어 지옥 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것은 호흡이 긴 것이다. 일체의 호흡은 길던지 짧던지 두 곳을 따르니, 그러므로 숨이 길다거나 숨이 짧다고 말한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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