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좌선삼매경(60)-12

근와(槿瓦) 2016. 2. 18. 01:13

좌선삼매경(60)-12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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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공한 법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마땅히 열반의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정진의 힘을 세워서 깊은 사마타(舍摩陀)를 얻는다.[깊은 사마타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적절히 표현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사마타를 얻어서 제4의 법념지 가운데 머문다. 모든 존재[諸法]의 모습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시간이 아니고 티끌이 아니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번뇌와 업이 이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이 괴로움은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색계도 무색계도 세계시(世界始)도 아니니, 세계시[외도는 일체 유위법의 처음을 세계시라 하며, 열반이라 말한다. 이 처음이 있다는 것이 만물을 만들어내므로 곧 조화(造化)라고 말한다.]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은 능히 이러한 괴로움을 없앨 수 없으며, 정견(正見) 등의 8정도가 바로 열반의 길이요, 나머지 외도의 고행(苦行)이나 갖가지 공지계(空持戒)ㆍ공선정(空禪定)ㆍ공지혜(空智慧)는 열반의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 가운데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세 가지 법이 합하여 행해져야 열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평지에 서서 좋은 활과 화살을 가져야 원수인 적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것과 같이, 세 가지 법을 합하여 행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계율을 평지로 삼고, 선정을 훌륭한 활[快弓]로 삼으며, 지혜를 예리한 화살로 삼아 세 가지 일이 구비되어야 능히 번뇌의 적을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외도의 무리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수행자는 이때 네 가지 법연(法緣)을 만들어 연(緣)을 관하는 것이 활쏘기 놀이와 같다. 괴로움[苦]을 관[고제(苦諦)의 네 가지 관법은 무상ㆍ고(苦)ㆍ공ㆍ무아이다.]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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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無常)이요, 몸과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고(苦)이며, 얻을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공(空)이요,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습(習)을 관[집제(集諦)를 말하며, 이것은 집(集)ㆍ인(因)ㆍ생(生)ㆍ연(緣)의 네 가지가 있다.]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번뇌와 유루업(有漏業)이 화합하기 때문에 집(集)이며, 상사과(相似果)가 생기기 때문에 인(因)이며, 이 가운데서 일체의 행(行)을 얻기 때문에 생(生)이고, 상사과가 아닌 것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연(緣)인 것이다. 진(盡)을 관[멸제(滅諦)를 말하며, 폐(閉)ㆍ멸(滅)ㆍ묘(妙)ㆍ출(出)의 네 가지가 있다.]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일체의 번뇌를 덮고 있기 때문에 폐(閉)이며, 번뇌의 불길을 제거하기 때문에 멸(滅)이고, 일체의 법 가운데서 최고이기 때문에 묘(妙)이며, 세간을 지나가기 때문에 출(出)인 것이다. 도(道)를 관[도제(道諦)에는 도(道)ㆍ정(正)ㆍ적(跡)ㆍ이(離)의 네 가지가 있다.]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능히 열반에 도달하기 때문에 도(道)이며,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정(正)이고, 일체의 성인께서 간 곳이기 때문에 적(跡)이며, 세간의 근심과 고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離)이다. 이와 같이 관하면 무루(無漏)의 상사법(相似法)을 얻으리니, 이름하여 따뜻한 법[煖法 : 난(煖:따뜻하다, Usmagata)은 견도(見道) 무루지(無漏智)의 불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따뜻함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이라 한다. 무엇을 따뜻하다 하는가?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에 따뜻한 법이라 이름하며, 모든 번뇌의 장작을 무루지(無漏智)의 불로써 태우니, 불이 나오려고 하는 처음의 모습을 이름하여 따뜻한 법이라 한다. 비유컨대 불을 모으는데 처음 모을 때 연기가 나면 이것을 따뜻하다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열반도(涅槃道)의 첫 모습이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한마음으로 선정을 구하기를 매우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유루도(有漏道)이며,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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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대부분 애착을 제거하고 참다운 지혜를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곧 바로 열반으로 향하여 따뜻한 법 가운데 들어가며, 따뜻한 모습[煖相]을 지닌 사람은 깊이 한마음을 얻는다. 참다운 법의 거울이 무루계(無漏界)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면[거울 가운데 모습은 표면의 세계와 비슷하며, 가장자리는 가운데가 아니므로 이렇게 비유했다.], 수행자는 이때 크게 안온함을 얻어서 스스로‘나는 선정으로 마땅히 열반을 얻으리니, 이 도(道)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니, 마치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축축한 진흙에 도달하면 틀림없이 오래지 않아 물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적을 격파하여 적이 이미 물러나 흩어지면 스스로 승리했음을 알고 마음속이 안온해지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 위해서 마땅히 먼저 막대기로 몸을 두드려 시험해 보되 만일 은은하게 진맥이 일어나면 이 사람은 따뜻함이 있으므로 반드시 살 수 있다고 아는 것과 같다. 또한 법을 듣는 사람이 사유하되 기뻐서 마음으로 집착하면 이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이, 수행자는 이와 같이 따뜻한 법을 지니기 때문에 ‘따뜻함이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선근법에는 열여섯 가지가 있어서 4제(諦)의 인연을 행하며, 6지[地 : 4선의 근본정(根本定)과 미지정(未至定)과 중간정(中間定) 등 여섯 가지이다.]중 하나인 지혜는 일체 무루법의 기반이다. 야인(野人)이 능히 안온함을 행하니[무루에서 소원(疎遠)하기 때문에 야인이라고 한다. 범본(梵本)에 살펴보면 범부인(凡夫人)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이것을 따뜻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 증진하여 더 올라가면 다시 정법[頂法 : 난위(煖位)의 수행이 하나의 정점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이라고 하니, 마치 젖이 변하여 낙(酪)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법의 실상을 관하여 내가 마땅히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마음으로 이 법을 좋아하니, 이것은 참다운 법[眞法]이어서 능히 갖가지 괴로움과 근심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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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생각하기를, ‘이 법은 누가 설했는가? 바로 부처님 세존이시니, 이것을 좇아 불보(佛寶)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만일 이 법이 없다면 일체의 번뇌를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법보(法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나는 마땅히 어찌해야 진실한 지혜를 조금이라도 밝혀 이로부터 법보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큰 환희심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내가 불제자의 무리들과 좋은 짝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마땅히 참다운 지혜의 약간의 밝음이나마 얻을 것인가?’라고 하면, 이를 좇아 승보(僧寶)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크게 환희심을 얻으며, 이 세 가지 보배 속에서 한마음의 청정함을 얻어 참다운 지혜에 계합한다. 이것이 정상(頂上)의 선근이니, 또한 정법(頂法)이라 이름하고,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파라연경(波羅延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불보ㆍ법보ㆍ승보에 대하여 누구라도 조금만 믿음의 청정함이 있다면 이를 정상의 선근이라 이름하리니 그대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니라. 어째서 약간의 믿음[少信]이라 하는가? 부처님ㆍ보살ㆍ벽지불ㆍ아라한 등의 주변에는 적은데[少] 야인의 주변에는 많기[多]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파괴할 수 있고 잃어버릴 수 있으니, 그러므로 ‘적다’고 한 것이다. ?법구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파초는 열매를 생산하면 죽고 대나무도 열매를 생산하면 역시 그러하며 노새는 새끼가 있으면 곧 죽고 소인(小人)은 봉양을 받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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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타파해도 이롭지 않으므로 소인은 명예를 얻으려 하니 청정의 원인[白淨分]을 모두 잃어버리고마침내 정법(頂法)에서 떨어진다. 또한 아직 여러 결사(結使: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아직 무루의 무량한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적다’고 말한다. 또한 부지런히 정진해서 한마음으로 열반의 길로 들어가 다시 5음(陰)ㆍ4제(諦)ㆍ16행(行)을 분명하게 관하면, 이때 마음이 위축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물러서지도 않으며,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인(忍)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인선근(忍善根)이라고 한다. 인(忍)은 무엇인가? 4제를 따라 행하면 이것을 인이라고 한다. 이 선근에는 세 가지 상ㆍ중ㆍ하의 3시(時)가 있으니, 어째서 인이라고 이름했는가? 5음의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관하고, 마음으로 견디어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인(忍)이라고 한다. 또한 일체의 세간은 모두 고ㆍ공이요 즐거움이 없으니, 이 괴로움의 원인은 습(習)과 애착 등 여러 가지 번뇌이며, 이 습은 지혜의 연(緣)을 없애버린다. 이것을 상법(上法)이라 하니, 다시 위[上]가 있지 않으며, 8정도(正道)는 능히 수행자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게 하니, 다시 그 이상은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신심(信心)으로 후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참는 것을 인(忍)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 다시 참음이 있어서 갖가지 결사(結使)와 갖가지 번뇌와 의심과 후회가 마음속에 들어오더라도 능히 파괴할 수 없게 하니, 비유컨대 돌산은 갖가지 바람과 물에도 떠다니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忍)이라고 하니, 이 일로써 진실하고 훌륭한 야인(野人)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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