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좌선삼매경(55)-11

근와(槿瓦) 2016. 2. 17. 02:30

좌선삼매경(55)-11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51 / 10002] 쪽

다음으로 5통(通)을 배우니, 몸이 능히 날아다닐 수 있고 변화가 자유자재하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욕정(欲定)ㆍ정진정(精進定)ㆍ일심정(一心定)ㆍ혜정(慧定)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몸을 관찰하고, 항상 가볍다는 생각을 지어서 날아다님[飛行]을 완성하고자 한다. 크든 작든[욕정이 지나치면 큰 것이 되고, 욕정이 덜하면 작은 것이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근심이니, 정진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항상 한마음으로 사유하여 가볍다고 관할 수 있다. 마치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원숭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더라도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몸에 고통과 걱정이 없는 것과 같이, 이것도 마찬가지여서 욕력(欲力)ㆍ정진력(精進力)ㆍ일심력(一心力)ㆍ혜력(慧力)으로 그것을 넓고 크게 하면 몸이 더욱 작아져 문득 몸을 움직일 수 있다. 또한 몸의 공계(空界)를 관하고 항상 이 관을 익히면 욕력ㆍ정진력ㆍ일심력ㆍ혜력이 지극히 넓고 커져서 곧 몸을 들어올릴 수 있으니, 커다란 바람의 힘이 무거운 것을 보내어 먼 곳에 도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는 마땅히 스스로 시험하여 땅에서 떨어져 한 자, 두 자 그리고 점차 한 길[丈]에 이르고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니, 마치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배우고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같다. 사유하여 스스로 살펴서, 마음의 힘이 크면 반드시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4대(大)를 배우고 관하되, 지대(地大)를 제거하고 다만 나머지 3대를 관하여 심념(心念)이 흩어지지 않으면 문득 자재할 수 있으니, 몸이 걸림이 없어서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다. 마땅히 다시 배우고 익혀서 멀더라도 가깝다는 생각을 하면, 가까운 것이 먼 것을 없애버리게 된다. 또한 여러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나무를 땅의 일종이라고 관하고 나머지 종류는 없애버리면 이 나무는 문득 변하여 땅이 되니, 왜냐하면 나무는 땅의 요소의 성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52 / 10002] 쪽

물ㆍ불ㆍ바람ㆍ허공ㆍ금ㆍ은ㆍ보물도 모두 다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나무에는 여러 가지 요소의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신통(初神通)의 근본이다. 4선에는 14가지 변화하는 마음이 있다. 초선(初禪)은 2과(果)이니, 첫째는 초선이고 둘째는 욕계(欲界)이다. 2선은 3과이니, 첫째는 2선, 둘째는 초선, 셋째는 욕계이다. 3선은 4과이니, 첫째는 3선, 둘째는 2선, 셋째는 초선, 넷째는 욕계이다. 4선은 5과이니, 첫째는 4선, 둘째는 3선, 셋째는 2선, 넷째는 초선, 다섯째는 욕계이다. 나머지 신통은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세존의 제자들은 다섯 가지 법문을 익히고 배워서 뜻을 세워 열반을 추구하니,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선정이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기[快樂] 때문이요, 지혜가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근심과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선정이 많은 사람은 먼저 선법(禪法)을 배우고 뒤에 열반을 배우며, 지혜가 많은 사람은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니,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였고, 또 아직 선(禪)도 얻지 못한 것이다. 온 마음을 다 기울여 흩어지지 않고 곧바로 열반을 구하여 애착 등 모든 번뇌를 초월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몸은 진실로 무상(無常)ㆍ고(苦)ㆍ부정(不淨)ㆍ무아(無我)이나, 몸을 뒤바꿔[顚倒] 생각하기 때문에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라 여기니, 이것 때문에 일마다 그 몸을 애착하므로, 이것이 바로 최하의 중생이다. 수행자는 뒤바뀐 것을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4념지관[念止觀 : 4념처관(念處觀)이라고도 한다.]을 익혀서 몸에는 갖가지 모든 괴로움과 근심이 많다는 것을 관해야만 한다.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며, 몸에는 36가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니, 이와 같이 관함을 익혀서 내신(內身)을 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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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外身)을 관하며, 나아가 내외신(內外身)을 관한다. 이와 같은 관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신념지(身念止)라고 한다. 몸의 실상(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견해를 일으켜 이 몸을 애착하는가? 몸 주변의 즐거움과 고통을 자세히 사유하고 생각하라. 즐거움과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움과 고통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만 한다. 어째서 얻을 수 없는가? 옷과 음식 때문에 즐거움에 이르나 즐거움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생기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종기의 고통을 근심하면 약을 발라서 치료하고, 통증이 멈추면 즐거운 것과 같이, 커다란 괴로움 때문에 작은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다. 또한 옛날의 괴로움을 괴로움[苦]으로 삼고, 새로운 괴로움으로 즐거움[樂]을 삼으니, 마치 무거운 것을 메고 있다가 어깨를 바꾸면 새로운 무거움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아서, 진실하고 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마치 불의 성질은 뜨겁기 때문에 잠시도 차가운 때가 없는 것과 같이, 만일 이것이 참다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즐겁지 않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혹자가 말하기를, 바깥의 일은 즐거움의 인연이지만 반드시 즐겁지만은 않으니, 어느 때는 즐거움의 원인이고 어느 때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만일 심법(心法)과 애착을 서로 응하게 한다면 그때는 즐거움이며, 성냄과 서로 응한다면 그때는 괴로움이며, 어리석음과 서로 응한다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답하기를 “없다”라고 하였다. 음욕은 마땅히 즐거움이 아니니, 왜냐하면 만일 음욕이 안에 있다면 바깥에서 여색을 찾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여색을 찾음이 마땅히 음욕의 괴로움임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음욕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때때로 버려서는 안 되며, 만일 버린다

 

                                                                              [54 / 10002] 쪽

면 마땅히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커다란 괴로움 속에서는 작은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마치 사람이 죽어 마땅한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채찍을 받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욕심이 불타오르면 욕망으로 즐거움을 삼지만, 노년에는 욕망을 싫어하고 욕망이 즐거움이 아니란 것을 아니, 만일 진실로 즐거움의 모습[樂相]이라면 마땅히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즐거워하고자 하는 모습이지만 실재로는 얻을 수 없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바로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움의 고통은 마땅히 괴로움이라고 관해야 하고, 괴로움의 고통은 마땅히 즐거움이라고 관해야 한다. 마치 화살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마땅히 생기고 없어져 무상(無常)하다고 관해야만 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일러 통념지(通念止)라 한다.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받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좇아 생기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인식이 대상에 일치하고 대응하여 일어나기[相似生] 때문에, 다만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라고 말할 뿐이니, 본래는 현재의 존재[今有]도 없고 과거의 존재[已有]도 또한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물질이 있음을 볼 수 있고 기억해서 보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치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가 있고 구슬이 있으며, 마른 풀과 쇠똥이 있어서 뭇 인연이 화합하여 여기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을 얻을 수 없지만 연(緣)이 합하여 불이 있다.

 

                                                                              [55 / 10002] 쪽

안식도 또한 그러해서,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두 가지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으니, 현재의 마음으로 과거의 마음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욕심이 있든 욕심이 없든 역시 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관하든 밖의 마음을 관하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관하든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라고 이름한다. 또한 마음은 누구에 속한다고 관하는가? 상(想)ㆍ사유(思惟)ㆍ염(念)ㆍ욕(慾) 등의 여러 가지 마음이 서로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을 관하고, 그 주인을 자세히 관하여도 주인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고,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마음의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특별히 관하였으니, 이제 다시 4념지(念止) 중에서도 주인을 얻을 수 없으며 이곳을 여의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을 총체적으로 관한다. 만일 항상함[常]을 얻을 수 없다면, 무상(無常)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워서 역시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항상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살뇌죄(殺惱罪)가 없고 역시 열반도 없으며, 만일 육신이 바로 정신이라면 무상한 몸이 없어지면 정신도 역시 없어져야만 하며, 또한 후세도 없고 죄와 복도 없다. 이와 같이 두루 주인이 없음을 관하면,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며 자재하지 못해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인연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인연이 화합하여 법이 되니, 이것을 법념지(法念止)라고 한다. 만일 수행자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세간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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