參禪警語

화두가 절실하면 마(魔)에 떨어지지 않는가

근와(槿瓦) 2016. 1. 28. 02:09

화두가 절실하면 마(魔)에 떨어지지 않는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능엄경」에 나오는 50가지 마(魔) 경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집착(着)이라는 한마디에 대한 내용일 뿐이다.

 

예컨대 색음(色陰)이 명백한 데서 ‘모든 염(念)을 다 떨쳐버린 경지’를 이렇게 보고 있다. 이런 경계에 도달한 사람은 겁탁(劫濁 : 色陰이 體가 되어 생기는 단명, 기아, 질병, 전쟁 등 세상의 재앙)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동기를 살펴보자면, 굳어진 망상이 근본이 되어 이것을 그 자리에서 녹여내지 못하고 그 망상 속에 들어앉아 열심히 정진하다가 희귀한 경계라도 나타나면 거기서 성과(聖果)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어찌 집착이 아니겠는가? 만일 성과를 얻었노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른 경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그것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5온(五蘊)중에 나타나는 모든 마(魔) 경계를 ‘망상’이란 말로 종합해 보자. 최초의 집착을 바로 깨어버리지 못하면 이 망상이 마의 뿌리와 줄기가 된다. 그러니 근본을 뽑지 않고 줄기만을 눌러서 꺾어버리려 한들 되겠는가. 심지어는 허명(虛明 : 색음이 다스려져 텅비어 밝은 상태)함을 더욱 탐내어 그 정기(精起)를 먹게 됨이 다 망상에서 기인하니, 마(魔)는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이러한 경계를 애써 보호하려 한다면 바로 설상가상이며 불 위에 기름일 뿐이다.

 

예컨대 수음(受陰) 가운데서 말한 허명망상(虛明妄想)은 허명함이 바로 망상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마음에 구할 것이 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그것이 망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상음(想陰) 중 융통망상(融通妄想)에 대해서는 그 첫 번째 경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으로 밝고 뚜렷함(圓明)을 사랑하여 지난번 망(妄)의 근원이 지금의 경계와 융통하여 곧 애착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이어서 10가지 마 경계를 설명함에 모두 ‘마음으로 어떤 경계를 사랑한다’는 식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천마(天魔)가 원만한 경계로부터 나와 애착심에서 짝이 되면서 끝없는 마업(魔業)을 짓는 것이니 어찌 구제할 수 있겠는가.

 

자못 참선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 한 생각을 끊어야 하니 마음이 없으면(無心) 사랑함도 없어지고, 사랑함이 없으면 집착이란 말이 있을 수가 없다. 그 중 아홉 번째 ‘마음으로 고요함을 사랑하여 깊은 공(空)을 탐하는 경계’ 등은 모두 마업이다. 이 역시 애초에 망상을 깨지 못했기 때문으로서,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니 모래란 밥의 재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행음(行陰)에서 유은망상(幽隱妄想)같은 것은 무릇 행음이 끊임없이 변하면서 성품이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생멸의 근원이 이로부터 나타나 상음(想陰)이 다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행음의 근원을 철저하게 살펴본다면 생멸이 생각생각에 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인이 계속 끊임없이 흘러가는(遷流) 생멸을 따라가지 않으면 부동(不動)하고 밝은 정심(正心)이 생긴다. 이때 외부의 마는 들어올 기회를 얻지 못하나 다만 두렷한 근원인 행음 경계 가운데에서 스스로 헤아리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시말(始末)과 유인(有因), 무인(無因)등을 따져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헤아리는 마음이 있으면 정변지(正徧知)는 없는 것인데, 그 ‘헤아림’이란 어두움(幽隱 : 행음이 비밀스럽게 천류하여 알아차리기 힘들므로 어둡다 말한다)에서 나온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저 유청(幽淸 : 미세하게 요동하는 세간의 성품)함을 보면 그 근원을 철저하게 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식음(識陰)에서의 전도망상(顚倒妄想)같은 것은 동분생기(同分生機 : 행음과 생의 근원을 같이한다는 뜻. 미세하고 끈질긴 세간의 성품)가 갑자기 무너져버리고, 6근이 텅비고 고요하여 다시는 마구 치닫지 않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텅비고 고요함이 마구 치닫지 않게끔 하였고, 치닫지 않기 때문에 행음(行陰)이 다하게 된 것이다. 이미 행음이 다하였다면 봄(見)과 들음(聞)이 한데 어울려 통하고 서로 막힘없이 청정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본문에서는 행음이 공함을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은 식(識)의 근원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 운운하며 나아가서는 정묘(精妙)함이 원만해지지 못하고 문득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게 된다고 하였다.

 

이 10가지 마 경계는 모두 식심(識心) 때문에 깨달았다는 생각이 생기게 된 것이니 이미 그렇게 되고 나면 깨달음(圓通)을 어기고 온갖 마가 생긴다.

 

선문(禪門)에서 옳게 마음을 쓰는 사람은 이 모든 잘못에 빠지지 않는다. 남악 사대(思大)스님은 “시방제불이 내 한 입 속에 다 들어갔는데 어느 곳에 다시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셨다. 이는 불조(佛祖)의 경지에서 그곳에 머물러두려 해도 머물지 않는 분이니 삿된 마나 외도들이 그를 어찌 한단 말인가.

 

삿된 마의 침입을 받지 않으려거든 오직 온몸으로 진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뿐, 억지로 쫓아내거나 보호하려 하지 말아야 하니, 망상이 다하면 마 경계는 스스로 다하게 된다.

 

옛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엉킨 뿌리에 한 도끼 내려찍어 마디 밖에 또 새 가지 돋아나지 못하게 함이 좋겠다.”

 

 

출전 : 參禪警語(博山無異禪師)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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