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93)-93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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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이 몸은 견고하지 않아 의지하거나 믿을 수 없으므로 마땅히 보리의 바른 깨달음은 몸을 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살의 바른 깨달은 몸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법신(法身)이며, 금강의 몸이며, 파괴할 수 없는 몸이며, 굳음 몸이며, 삼계(三界)에 뛰어난 몸입니다. 나의 몸에 비록 한량없는 허물이 있을지라도 서원으로서 마땅히 그 허물을 제거하고 여래의 몸을 성취하나니, 이 보살이 모든 것을 견디어 내면서 오래도록 4대(大)와 불타는 번뇌에 처함은 다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땅·물·불·바람 4대(大)의 갖가지 문(門)과 갖가지 조작과 갖가지 모양의 갖가지 기물(器物)과 갖가지 쓰임이 다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처럼, 이제 나의 이 몸도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이 그와 같다.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이익 됨을 보고는 몸은 뭇 괴로움이라고 관찰하여 싫어하거나 여의는 생각을 내지 않고 몸은 덧없음이라고 관찰하여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몸은 나 없음이라고 관찰하여 교화하기를 버리지 않고, 몸은 적멸(寂滅)하다고 관찰하여 버림에 떨어지지 않으며, 이 보살은 안[內]의 몸을 관찰할 때 번뇌를 내지 않고 바깥의 몸을 관찰할 때도 그러하며, 이 보살은 더러운 몸을 여의어 깨끗한 몸의 업을 이룩하고 묘한 상(相)을 원만히 갖추어 스스로 장엄함으로써 하늘과 사람에게 이익 되게 함이 많으니라. 이것을 보살의 몸을 관찰하여 몸을 닦는 행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느낌[受]을 관찰하고 느낌을 닦는 행인가 하면, 보살은 모든 느낌이 다 괴로움이라고 사유하여 그 느낌을 잘 분별하고 지혜로써 느낌의 적멸함을 헤아리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낄 때도 탐욕을 내지 않고, 괴로움을 느낄 때도 3악도(惡道)를 관찰하여 크게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켜 성내지 않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에도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는 보살이 느끼는 대상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느낌이 괴로움이거나 즐거움이거나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거나간에 이 모든 느낌에서 벗어날 줄 알고 닦을 줄 알아서, 모든 중생들의 느낌은 적멸하고 장엄하다고 관찰하고는, ‘이 중생들은 온갖 느낌에서 벗어남과 닦음을 알지 못하고, 즐거움을 느낄 때는 탐착하고 괴로움을 느낄 때는 성내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는 어리석음을 내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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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러므로 나는 이제 마땅히 나아가 지혜를 닦아서 온갖 느낌을 제거함과 동시에 선근을 내고 큰 자비심을 일으켜 지혜를 거둬가지며, 또 중생들의 온갖 느낌을 제거하기 위하여 설법하되 아직 느낌을 알지 못하는 자에겐 괴로움을 느끼고 괴로움을 아는 자에겐 즐거움을 느끼게 하리라’고 합니다.
느낌을 앎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느끼는 것이 없음이니,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 양육과 사부(士夫)가 없으며, 느낌을 거둬가짐을 느낌과 느낌을 느낌과 존재[有]를 느낌과 뒤바뀜을 느낌과 분별을 느낌과 모든 견(見)을 느낌과 눈의 모양을 느낌과 귀·코·혀·몸 뜻의 모양을 느낌과 색과 생각을 느낌과 소리·냄새·맛·촉감·법의 모양 느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느낌이란, 눈은 색을 인연하여 촉감을 내므로 괴로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며, 느낌이란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촉감을, 마음은 법을 인연하여 촉감을 내므로 괴로움을 느끼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낌이니, 이것을 느낌이라 합니다.
또 마음과 뜻을 분명히 깨닫는 한 가지 느낌이 있고 안[內]의 느낌과 바깥 느낌의 두 가지가 있고 과거·미래·현재를 느끼는 세 가지 느낌이 있고 4대(大)를 분명히 깨닫는 네 가지 느낌이 있고, 5음(陰)을 생각하는 다섯 가지 느낌이 있고, 6입(入)을 느끼는 것이 있고, 일곱 가지 식(識)의 머무는 곳[七識住處]을 느낌이 있고, 여덟 가지 삿된 법[八邪法]을 느낌이 있고, 아홉 가지 중생들의 유정(有情)에 머무는 곳[九衆住居處]을 느낌이 있고, 열 가지 착하지 않은[十不善] 느낌이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요약하여 말한다면, 한량없는 중생들의 모든 느낌은 생각으로 반연한 경계의 모든 것을 느낌입니다.
보살은 그 느낌 중에서 느낌을 닦고 행을 관하고 큰 지혜를 일으켜서 중생들의 착하고 착하지 않음과 나고 머물고 멸하는 모양의 느낌을 아나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바른 느낌을 생각하는 대상의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심념처[心念處]를 관찰함인가 하면, 보리의 마음을 잊거나 싫어하여 버리지 않고 바르게 생각하여 마음을 관찰하되,‘이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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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는 사라지므로 머무는 모양이 없고 안에 머물지도 않고 바깥으로부터 오지도 않는다. 내가 처음 보리심을 낸 것은 이 마음이 이미 다 지나가고 변하고 바꿔져서 어떤 곳에 이르지도 않고 설할 수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으며, 마음으로 모은 모든 선근도 다 사라져 변하고 어떤 곳에 이르지 않고 설할 수 없고 머무는 곳이 없으며, 마음의 선근도 다 사라져 변하고 어떤 곳에 이르지 않고 설할 수 없고 머무는 곳이 없으며, 마음의 선근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함도 또한 멸하고 변하는 법이어서 어떤 곳에 이르지도 않고 설할 수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다. 마음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며 마음이 마음을 내지 못하나니, 내 무슨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랴. 이 보리의 마음은 선근의 마음과 합하지 않고 선근의 마음은 회향하는 마음과 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관찰할 때에도 놀래거나 겁내지 않으므로, 이것을 보살의 부지런한 정진이라 합니다.
또 보살은 깊고 깊은 12인연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그 인과(因果)를 잃어버리지 않나니, 이 심성(心性)은 뭇 인연에 속하여 증대[長養]시킬 수 없고 조작이 없고 얽매임이 없으며, 모든 법 또한 그러하므로, 법답게 수행하여 장엄할 것을 안다. 그러므로 생각하기를 ‘나 이제 마땅히 장엄을 닦아 심성을 여의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심성은 어떤 것이고 장엄은 어떤 것인가 하면, 심성이란 허깨비와 같아서 아무런 주체도 없고 조작도 없고 시설도 없음이요, 장엄이란 조작과 보시를 모두 장엄하고 청정한 불토에 회향함입니다. 심성이란 꿈에 무엇을 본 것처럼 마음의 상(相)이 적멸함이요, 장엄이란 계율을 원만히 갖추어 모든 신통을 닦음이며, 심성이란 거울 속에 비추는 형상처럼 그 모양이 청정함이요, 장엄이란 모든 참음을 닦아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에 회향함입니다. 심성이란 더울 때의 아지랑이처럼 마지막까지 적멸함이요, 장엄이란 모든 착한 것에 깊이 발심하고 정진하여 위없는 불법에 회향하여 원만히 갖춤이며, 심성이란 어떤 물질과 상대가 없고 조작함이 없음이요, 장엄이란 모든 선정과 해탈삼매 닦는 것을 부처님의 선정에 회향하여 원만히 갖춤입니다. 심성이란 볼 수 없고 또 가질 수도 없음이요, 장엄이란 모든 질문에 잘 분별하고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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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지혜에 회향하여 원만히 갖춤이며, 심성이란 연(緣)으로 나지 않음이 없고, 장엄이란 항상 선근을 관찰함입니다. 심성이란 인(因)으로 나지 않음이 없고, 장엄이란 보다 도움을 인하여 발심함이며, 심성이란 여섯 대상[六塵]을 버리므로 그 마음의 일어남이 없음이요, 장엄이란 부처님 경계에 들어감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이 심행(心行)을 관찰하고 신통을 생각하여 신통을 얻고는 모든 중생의 마음을 알고, 마음을 알고는 그 마음의 한량에 따라 설법합니다.
또 심행을 관찰하고 큰 슬픔[大悲]을 생각하여 중생을 교화하되 싫어하거나 지침이 없으며, 또 심행의 일어나지 않고 다 멸하고 변하여 달라지는 모양과 생사를 버리지 않아 번뇌가 서로 계속됨을 관찰하되 이 마음을 바르게 생각하여 생사가 없음을 알아 바른 결정을 이룩하나니, 이와 같이 한다면 성문, 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고 이 마음의 힘을 다하여 1념(念)의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심념처를 바로 관찰함이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어떤 것이 보살의 법념처[法念處] 관찰함인가. 항상 지혜 눈[慧眼]으로써 모든 법을 보고는 도량에 앉을 때까지 중도에 잃어버리지 않나니, 이는 보살이 법을 관찰할 때에 한 법에서 조그마한 모양에 이르기까지 공하고 모양[相]없고 원(願)없고 조작 없고 나거나 멸함이 없고 아무런 물질이 없음을 여읜다고 보지 않으며, 또 한 법에서 조그마한 모양에 이르기까지 12인연에 들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지라, 보살이 법을 관찰함은 모든 법 아닌 것을 법 아님이 없다고 봅니다.
법이라 함은 나와 남[人]·중생과 수명이 없다는 이치를 말하며, 법 아니라 함은 나·남·중생·수명의 소견과 단견(斷見)]·상견(常見)을 말합니다.
또 모든 법이 이 법이고 모든 법이 이 법 아니라 함은 무슨 까닭인가. 공하고 모양[相]없고 원(願)없음을 관찰하는 이것을 모든 법이 이 법이라 함이요, 아만(我慢)과 교만과 나와 내 것과 거둬 가지는 모든 소견을 일러 모든 법은 법이 아니라 합니다. 이는 보살이 법을 관찰할 때에 어떤 법은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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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因)이거나 출세간[出世間]의 인이 아니라고 보지 않고 모든 법이 모두 출세간이 도이므로 걸림 없음과 큰 슬픔을 얻었다고 알며, 또 모든 법은 번뇌의 얽매임을 허깨비 모양 같다고 관찰하여 이 모든 법은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번뇌가 없는 것도 아님을 아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의 이치는 두 가지 성질이 없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번뇌는 숨기거나 감추는 곳이 없고 쌓거나[聚] 모음[集]이 없으므로 만약에 번뇌를 안다면 곧 보리를 앎이니, 번뇌의 성품과 같이 보리의 성품도 그러하다.
이는 보살이 바른 생각에 편히 머물러 한 가지 법도 분별할 것이 없고 아무런 장애가 없어 바르게 법성에 머묾을 분명히 알며, 법성에 머묾과 같이 중생의 성품에 머묾도 그러하며, 중생의 성품에 머묾과 같이 모든 법의 성품에 머묾도 그러하다.
보살이 법을 관찰할 때에 불법에 의지하여 모든 법이 바로 불법인 것임을 분명히 앎으로써, 그 마음이 그때 번뇌 다하는 지혜[盡智]의 함이 없음[無爲]을 내지 않고 비록 다하더라도 다함이 아니어서 다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지혜에 들며, 또 중생을 관찰하여 붙인 이름[假名]을 버리지 않는다.
법을 생각하는 곳이라 함은 모든 법을 바르게 생각하여 편히 머묾이니, 이른바 성문·연각·보살·부처님의 아시는 모든 붙인 이름의 법을 미래의 짬이 다되도록 마침내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음이요, 또 법을 생각하는 곳이란 한량없는 행을 연설하여 불법에 친근하고 모든 마군의 무리를 파괴하여 자연의 지혜를 얻음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법 생각하는 곳을 바로잡음의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4정근(正勤)의 다함없음이 있다. 그 네 가지를 말하자면, 아직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이 생기지 않을 때에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욕심을 내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둬서 그 나쁨과 착하지 못함을 바로 제거함이 하나요, 이미 생겨난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끊기 위하여 욕심을 내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둬서 그 나쁨과 착하지 못함을 바로 제거함이 둘이요, 아직 생기지 못한 착한 법을 생기게 하기 위하여 욕심을 내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둬서 그 나쁨을 바로 제거함이 셋이요, 이미 생겨난 착한 법을 닦고 더 넓히고 잃어버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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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위하여 욕심을 내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둬서 그 나쁨을 바로 제거함이 넷입니다. 이른바 욕심을 냄이란 잘 생각함이요, 부지런히 정진함이란 잘 생각함을 버리지 않음이요, 마음을 거둬 바로 제거함이란 잘 생각함을 관찰함이니, 왜냐하면 잘 생각할 때에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마음에 들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인가. 계취(戒聚)의 짝[伴]이 아닌 것과 선정의 짝이 아닌 것과 지혜의 짝이 아닌 것입니다. 계취의 짝이 아니라 함은 소중한 계를 깨뜨리거나 다른 계를 헐뜯음이 그것이며, 선정의 짝이 아니라 함은 위의를 헐뜯거나 심법(心法)을 어지럽게 함이 그것이며, 지혜의 짝이 아니라 함은 모든 소견을 거둬 가지거나 다른 소견에 장애됨이 그것입니다. 이를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이라 하며, 잘 생각할 때에 이 같은 나쁜 법으로 하여금 마음에 들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일러 처음 바른 노력으로서 이미 생겨난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끊기 위하여 욕심을 내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둬 그 나쁨을 제거함이라 합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이란 마음에 모으는 것이 아니고 어떤 방소(方所)가 없고 머무는 곳이 없다. 이 착하지 못한 법의 심행(心行)을 끊기 때문이며, 이미 깨달아 알기 때문이며, 인연에 따라 나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기 때문에 욕심을 내고 걸리기 때문에 성을 내고 무명의 인연 때문에 어리석음을 내는 법입니다. 이 착한 생각으로서 청정하지 못함을 관찰할 때에 욕심을 없애고, 사랑하는 마음을 닦아 성냄을 없애고, 12인연을 관찰하여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이러한 번뇌가 길이 적멸함은 곧 모든 붙인 이름을 끊어버림이요 또 끊을 것이 있다고 보지 않음입니다. 이것을 일러 제 2의 바른 노력으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한 법을 나게 하기 위하여 욕심을 내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둬서 그 나쁜 법을 바로 제거함이라 합니다.
이 모든 착한 법을 말하자면 한량이 없다. 왜 그런가. 한량없는 착한 법을 보살이 닦아 이 법 속에서 욕심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정진하고 닦아 마음을 거두는 자는 착한 법에 뛰어나고, 나쁜 법을 바로 제거하는 자는 어느 곳에나 항상 차한 법에 있게 되나니, 이것을 일러 제3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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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노력으로서 착한 법에 편히 머물고 그 법을 닦고 더 넓히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마음을 거둬 바르게 머묾이라 합니다.
또 이 모든 선근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나니, 왜냐하면 선근을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면 곧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선근(善根)이 삼계(三界)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삼계에 의지한다면 그 선근이 훼손되어 줄어드니[損耗], 그러므로 온갖 지혜에 회향하는 선근은 다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4의 바른 노력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4정근 닦음의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뜻대로 하는 법[四如意分]의 다함없음이 있나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하면, 욕심과 정진과 마음과 생각함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법은 자애와 슬픔과 기쁨과 평정으로써 근본을 삼나니, 이 4무량심으로써 항상 친근하고 친근함으로써 마음이 고르고 부드러워지고[調柔] 마음이 고르고 부드러워짐으로써 초선(初禪)과 제2선(禪)과 제3선과 제4선에 들어가고 모든 선에 들어감으로써 몸이 가볍고 부드럽게 되며, 이러한 가벼운 몸과 부드러운 마음을 성취함으로써 뜻대로 하는 법에 들어가며, 뜻대로 하는 법에 잘 들고는 곧 신통을 내나니, 욕심이거나 정신이거나 마음이거나 생각하는 것이나 그대로가 곧 신통입니다. 욕심이란 전일하게 저 법에 나아감이요, 정진이란 저 법을 성취함이요, 마음이란 저 법을 관찰함이요 생각함이란 저 법의 방편이니, 이러한 뜻대로 하는 법을 원만히 갖춘 때문에 능히 신통을 얻으며, 욕심이란 장엄함이요, 정진이란 성취함이요, 마음이란 바르게 머묾이요, 생각함이란 잘 분별하는 것이니, 이는 보살이 뜻대로 하는 법을 얻어 그 아는 것을 따라 하고자 하는 그대로 마음에 자재를 얻으며, 뜻의 가는 곳을 따라 모든 법을 잘 짓고 마침내 온갖 본행(本行)을 성취하되 마치 바람이 공중에 단도 아무런 걸림이 없음과 같으니라.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뜻대로 하는 법의 다함없음이라고 이른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다섯 가지 근기[根]의 다함없음이 있나니, 그 다섯 가지를 말하자면, 믿음의 근기와 정진의 근기와 생각[念]의 근기와 선정의 근기와 지혜의 근기가 그것입니다.
믿음의 근기라 함은 네 가지 법을 믿음입니다. 그 네 가지란 생사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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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세간에 바른 소견을 행하여 업보를 믿고 내지 생명을 잃어버릴지라도 끝까지 나쁜 일을 하지 않음이 하나요, 보살의 행을 믿어 모든 소견에 따르지 않고 보리만을 구하여 다른 승(乘)을 구하지 않음이 둘이요, 모든 법은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법과도 같고 제1의 이치와도 같고 분명한 이치와도 같고 매우 깊은 인연은 나와 중생이 없고 분별도 없다고 믿음이 셋이요, 모든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18불공법을 믿음이 넷입니다. 이와 같이 믿고는 의심을 없애고 불법을 닦나니, 이것을 근기라 합니다.
정진의 근기란 무엇인가. 법으로서 믿음 근기의 거둠이 되면 이것이 곧 정진 근기의 거둠 되므로 이를 정진의 근기라 합니다. 생각하는 근기라 함은 법으로서 정진 근기의 닦는 것이라면 이 법을 끝까지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음을 생각하는 것이며, 선정의 근기라 함은 법으로서 생각하는 근기의 거둠이 된다면 이 법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전일한 마음으로 어지럽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기라 함은 법으로써 선정 근기의 거둠이라면 이는 지혜의 관찰이고 지혜의 체성(體性)이므로 안으로 스스로 비추어 밝히고 바깥을 따라 알지 않으며, 스스로 바른 행에 머무나니, 이것을 지혜의 근기라 합니다.
이 다섯 가지 근기는 함께 서로 계속해서 나고 모든 법을 갖추므로 수기(授記)를 얻나니, 마치 외도의 5신통을 갖춘 신선이 태중(胎中)의 차별을 결정코 알지 못하다가 남녀의 모양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많은 보살이 믿음 따위의 근기가 없다면 부처님께서 수기하지 않을 것이요, 성취하는 자에게는 수기하여 주시리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다섯 가지 근기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또 5력의 다함없음이 있나니, 그 5력이란 믿음의 힘과 정진의 힘과 생각하는 힘과 선정의 힘과 지혜의 힘이 그것입니다.
믿음의 힘이라 함은 이 믿음으로 한결같이 나아가 누구라도 막거나 헐 수 없고, 내지 천마(天魔)가 부처님 몸으로 변하여 선정 해탈에 드나들지라도 이 보살 믿음의 힘을 흔들 수 없음을 믿음의 힘이라 하며, 정진의 힘이라 함은 보살이 모든 법에 정진하여 견고한 힘을 얻고 그 얻는 힘으로 모든 선정을 닦아 하늘과 사람으로서 파괴할 수 없고 본래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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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정진의 힘이라 합니다. 생각하는 힘이라 함은 보살이 모든 착한 법에 머묾은 번뇌에 파괴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 보살의 바르게 생각하는 힘으로 그 번뇌를 부수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생각하는 힘은 파괴할 자가 없으므로 이것을 생각하는 힘이라 합니다. 선정의 힘이라 함은 시끄러움을 멀리 여의고 항상 홀로 수행하기를 즐거워함이니, 이는 보살이 비록 말을 하여도 말과 음성이 초선(初禪)에 장애가 되지 않고 각(覺)과 관(觀)에 잘 머물러서 제2선(禪)에 장애가 되지 않고, 마음에 기쁨을 내어 제3선에 장애가 되지 않고, 보살이 중생 교화하기를 즐거워하여도 불법을 버리지 않고 또 제4선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는 보살이 제4선을 행할 모든 선정에 방해되는 법을 하지 않으며, 보살이 그때 선정을 버리지도 않고 또 선정에 떨어지지도 않으면서 능히 자재롭게 곳마다 태어나므로 이것을 선정의 힘이라 합니다.
지혜의 힘이라 함은 보살이 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법을 알므로 어떤 법이라도 이 지혜를 파괴할 수 없고 보살이 태어나는 곳마다 모든 기예(技藝)를 스승으로부터 받지 않아도 모두 자연히 알며, 세간 외도의 어떤 괴로운 행과 어려운 행이라도 이 보살은 교화하기 때문에 모두 받아들여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나니, 이 출세간의 법으로써 능히 세간을 거침은 지혜의 힘을 성취한 때문에 모든 하늘과 사람으로서는 굴복시킬 수 없나니, 이것을 지혜의 힘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의 5력의 다함없음이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7각분(覺分)의 다함없음이 있나니, 어떤 것을 일곱 가지라 하느냐 하면, 생각하여 깨닫는 법[念覺分]·법을 골라서 깨닫는 법[擇法覺分]·정진하여 깨닫는 법[進覺分]·기쁨으로 깨닫는 법[喜覺分]·제거하므로 깨닫는 법[際覺分]·선정으로 깨닫는 법[定覺分]·버림으로 깨닫는 법[捨覺分]이 그것입니다.
생각하여 깨닫는 법이라 함은 능히 법을 관찰하고 분별하고 법을 선택하고 닦고 생각하는 지혜를 가지고 또 모든 법의 자상(自相)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자상이 어떤 것이냐 하면, 모든 법의 자성(自性)이 다 공이라고 관찰하고는 이런 법들을 생각하여 분명히 깨달음이니, 이것을 생각하여 깨닫는 법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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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골라서 깨달음이라 함은 8만 4천의 법 덩어리[法聚]를 분별하고 밝히며, 분명한 법과 같이 분명한 이치는 이 분명한 이치, 분명하지 못한 이치는 이 분명하지 못한 이치, 세간의 진리는 이 세간의 진리, 으뜸 되는 이치의 진리[第一義諦]는 이 으뜸 되는 이치의 진리, 붙인 이름[假名]은 이 붙인 이름, 바르고 분명하여 의심이 없는 것은 이 바르고 분명하여 의심이 없는 것으로, 이러한 법들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을 일러 법을 골라서 깨닫는 법이라 합니다.
정진하여 깨닫는 법이라 함은 생각하여 깨닫는 법이거나 골라서 깨닫는 법이거나 기쁨으로 깨닫는 법이거나 제거하므로 깨닫는 법이거나 선정으로 깨닫는 법이거나 버림으로 깨닫는 법이거나 간에, 지혜로서 거둬가지고 정진을 용맹하게 해서 물러나지 않고자 하고, 부지런히 닦고 힘써서 본래의 뜻을 버리지 않고 바른 도를 행하는 이것을 정진하여 깨닫는 법이라 합니다.
기쁨으로 깨닫는 법이라 함은 그 법을 닦는 기쁨으로서 한량없는 법에 마음으로 기뻐하여 게으르지 않고 청정한 법에 기뻐 뛰고 능히 몸과 마음의 모든 번뇌를 제거하는 이것을 기쁨으로 깨닫는 법이라 합니다.
제거하므로 깨닫는 법이라 함은 몸과 마음의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번뇌의 덮개[覆蓋]를 떠나 선정의 경계에 들어가서 마음을 편히 머물게 함이니 이것을 제거하므로 깨닫는 법이라 합니다.
선정으로 깨닫는 법이라 함은 선정에 들어 모두 깨닫는 것처럼 선정에 들지 않음은 이 깨닫는 법이 아님을 알고 또 모든 소견과 번뇌의 얽매임을 알아 처음과 끝이 없이 그 마음이 평등하고 모든 법을 별다른 모양이 없음을 알아 능히 이러한 법들을 깨닫는다면 이것을 선정으로 깨닫는 법이라 합니다.
버림으로 깨닫는 법이라 함은 법으로서 근심하거나 기뻐하거나 그 마음은 빠지지 않고 또 세간법에 끌리지 않고 높음도 낮음도 없이 바로 머물러 흔들리지 않고 모든 번뇌가 없어 기뻐함도 집착함도 없고 모든 장애가 없어 참된 이치와 바른 도에 정직하게 수순하는 이것을 버림으로 깨닫는 법이라 합니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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