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94)-94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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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불이여, 보살의 일곱 가지 깨닫는 법 다함없음이란 이것을 말함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8성도(聖道:正道) 또한 다함없나니, 어떤 것을 여덟 가지라 하느냐 하면, 바른 소견[正見]과 바른 생각[正思惟]과 바른 말[正語]과 바른 업[正業]과 바른 생활[正命]과 바른 정진[正精進]과 바른 기억[正念]과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입니다.
바른 소견이라 함은 만약 출세하는 경우에 있어도 나의 소견과 중생·수명·양육(養育)·사부의 소견과 단견(斷見)·상견(常見)을 일으키지 않고, 또 착하고 착하지 않는 소견과 착하지 않고 착하지 않지도 않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고, 내지 생사와 열반 두 가지 모양의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합니다.
바른 생각이라 함은 생각함에 있어서 만약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모든 번뇌 따위를 일으킨다면 이는 바르지 못함이요, 이 바른 생각은 이러한 일을 생각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으면서 오직 계율 선정·지혜 해탈·해탈 지견만을 생각함이니, 이 바른 생각은 능히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 계율 따위의 덩어리에 머무므로 이러한 생각을 바른 생각이라 합니다.
바른 말이라 함은 무릇 연설함에 있어서 그 몸으로 하여금 초조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을 손상하지 않고서, 이같이 착하고 미묘하고 좋은 말을 성취하여 바른 도(道)에 나아가는 것을 바른 말이라 합니다.
바른 업이라 함은 업이 더러운 갚음이 있고 업이 깨끗한 갚음이 있고 업이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면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갚음이 있으므로, 이러한 업을 짓지 않아야 하고, 업으로서 능히 다하는 업이라면 이러한 업은 반드시 지어야 하므로, 보살이 의지하는 업은 이러한 바른 업을 부지런히 닦음이니, 그러므로 이를 바른 업이라 합니다.
바른 생활이라 함은 성인의 종자와 두타(頭陀)와 위의를 버리지 않고 모든 간사와 아첨에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고 세간의 이끗[利養]에 끌리지 않고, 이끗에 만족하기 쉬우므로 항상 위의와 예절을 굳게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이익 얻음을 보고서 마음에 뜨거운 번뇌를 내지 않고 자기의 이끗에 지족(止足)할 줄 안다면 이러한 바른 행은 성인의 칭찬하는 것이므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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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바른 생활이라 합니다.
바른 정진이라 함은 이른바 탐욕과 음행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번뇌로서 삿됨에 나아가고 성인의 칭찬하지 않는 이 바르지 못한 정진은 끝까지 하지를 않고, 능히 바른 진리, 성인의 도, 적멸과 열반으로 반연한 바른 길에 들어가는 이 바른 정진은 부지런히 닦고 행함이니. 이것을 바른 정진이라 합니다.
바른 기억이라 함은 법을 잃어버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정직하여 굽지 않고 생사의 허물을 보고는 열반에 나아가고 전일한 마음으로 바른 도를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바른 기억이라 합니다.
바른 선정이라 함은 모든 법에 산란하지 않고 보살이 이러한 법에 머물 때 바른 결정을 이룩하므로 이것을 바른 선정이라 하며,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묾은 모든 중생을 위해 해탈을 얻기 때문에 바른 결정을 이룩하나니, 그러므로 이를 바른 선정이라 합니다.
이 여덟 가지 성인의 도는 모두 과거·미래·현재 부처님의 도이니, 보살이 이를 깨닫고는 연설하여 널리 보이고 분별하여 나타내므로써 불도를 성취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여덟 가지 성인의 도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선정과 지혜를 닦아 행함 또한 다함없습니다.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느냐 하면, 마음이 고요함으로써 바로 고요하기도 하고 적멸하여서도 초조하지 않고, 마음이 항상 어지럽지 않아서 모든 근기를 수호하고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아서 갑작스러움이 없고, 편안하고 자세하고 잠잠하여 굳게 가져 잃어버리지 않고, 잘 조복되고 부드러워서 고요함에 처하되 그 몸을 멀리 여의어 마음이 굴리지 않고, 공적(空寂)한 아련야(阿練若)에 있기를 즐거워하되 나쁨을 구함이 없고 또 아무것도 구함이 없고 많이 구함도 없고 바른 명과 바른 행으로써 위의를 굳게 하고, 때[時]를 알고는 때를 따라 항상 지족(止足)할 줄 알고, 모든 것에 견디어 참는 힘을 지니기 때문에 교만하거나 깔보는 마음이 없어 능히 나쁜 욕설을 참고 오로지 착한 법을 향하여 생각하기를 발심하고, 생각하는 곳과 모든 선정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켜 슬퍼하는 마음에 들고, 기뻐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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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편히 머물러 버리는 마음을 닦고, 초선(初禪)·제2선(禪)·제3선·제4선과 공처(空處)와 식처(識處)와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바로 들어가고, 9차제정(次第定)을 잘 생각함으로 이것을 선정이라 하나니, 요약하여 말하자면, 보살이 선정을 돕기 위하여 한량없고 그지없이 부지런히 행하고 닦는 것을 보살의 선정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지혜라 함은 이 지혜로써 도를 닦아 나없고 사람·중생·수명 없는 모든 법에 들어감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모든 음(陰)은 허깨비와 같고 모든 계(界)는 평등하고 모든 입(入)은 허공덩어리[空聚]와 같다고 분별하며, 모든 진리를 분별하여 모두 분명히 알고 12인연에 수순하되 이 인연을 관찰하여 알고 모든 소견과 인과와 과증(果證)을 분별함입니다. 이른바 분별이란 것은 모든 법에 바른 소견을 얻어서 사실대로 보고 공한 소견과 모양[相]없는 소견과 원(願)없는 소견을 진실히 봄이며, 또 분별이란 것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분별함이며, 소견이란 것은 보는 것이 없고 분별하여 아는 것도 없음이니, 이러한 소견은 진실한 소견이므로 소견이 진실하면 곧 방편을 얻는다. 이 보살은 이 같은 지혜의 소견으로써 함이 없음[無爲]에 따르지 않고 모든 착함을 수행하여 마음이 머무는 곳 없으므로 이것을 지혜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의 선정과 지혜를 수행함이 다함없음이란 바로 이를 말함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다라니[摠持]와 변재(辯才)가 다함없나니, 어떤 것을 다라니라 하는가. 보살의 닦는 선근을 바른 생각으로 쌓음이니, 이른바 8만 4천의 법 덩어리[法聚]를 바르게 받아 지니고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다라니라 하며, 또 다라니라 함은 모든 부처님의 말씀하신 미묘한 법이나 모든 보살·연각·성문·범부·중생들의 음성과 착한 말을 모두 받아 지님을 다라니라 하나니, 설령 겁재(劫災)가 일어나 생명을 버릴지라도 보살은 그때 바른 생각으로 다 총괄하여 잊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기를 마치 손바닥 안에 아마라(阿摩羅) 과일을 보는 것처럼 합니다. 보살이 모든 법을 관찰하여 보는 것도 그러하므로, 이를 다라니라 합니다.
변재라 함은 보살의 말씨는 막히거나 걸림이 없고 머묾도 끊임도 없으며, 그 말씨가 즐겁고 빠르나니, 이러한 말씨는 모두 선업(先業)의 청정한 결과 갚음이므로, 모든 부처님의 옹호를 받고 온갖 하늘도 거둬주며, 또 그 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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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릇됨이 없고 공덕이 허망 되지 않아 열반에 나아간다.
보살은 이러한 변재를 성취함으로써 모든 형상과 중생의 종류에 그 근기를 맞추어 미리 생각하지 않고 미리 분별하지 않고서도 계경(契經)과 게송을 잘 찬탄하여 말하며, 대중과 찰리(刹利)의 무리와 바라문(婆羅門)의 무리와 장자(長者)의 무리와 사문의 무리와 사천왕의 무리와 삼십삼천의 무리와 마군의 무리, 범천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도 낱낱 그곳에 따라 자연히 중생의 근량(根量)을 알아 걸림 없는 변재로써 그들을 위해 설법하나니, 이는 보살이 본연 그대로 기쁘고 즐겁게 법요(法要)를 연설하여 종신토록 끊지 않기 때문에 이를 변재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의 다라니와 변재 다함없음이란 바로 이것을 말함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법을 닦음이 다함없나니, 어떤 것을 네 가지 법이라 하는가. 보살이 모든 행의 덧없음[無常]과 모든 행의 괴로움과 모든 법의 나 없음과 모든 법의 적멸한 열반을 앎이 그것입니다.
덧없음이라 함은 아무것도 없음이 덧없는 이치요 파괴할 것 없음이 덧없는 이치니, 이 덧없는 이치란 곧 나 없는 이치입니다. 만약에 법으로서 나 없고 파괴할 것도 없다면 그 본성이 적멸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를 덧없음이라 합니다. 괴로움의 이치라 함은 아무것도 구함이 없고 애욕에 물듦이 없고 소원이 없고 공하여 존재[有]가 없기 때문에 이를 괴로움의 이치라 합니다. 나 없는 이치라 함은 끝까지 나 없는 이치니, 나 없는 이치는 바로 공한 이치요 아무것도 없는 이치요 거짓말[虛誑]이며 진실하지 않은 이치이므로 이를 나 없는 이치라 합니다. 적멸한 열반이라 함은 찰나 찰나[念念]에 사라지지 않는 그것이 적멸의 이치요, 만약 찰나 찰나에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적멸입니다. 보살은 이 다함없는 지혜를 얻어 모든 법의 모양이 적멸과 같음을 아나니, 적멸이란 그 자체가 곧 열반인 것이므로 이를 적멸한 열반의 이치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의 닦는 네 가지 법 다함없음이란 이것을 말함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한 가지 도(道)의 다함없음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 도를 말하자면, 보살의 얻은 진실한 지혜는 다른 데로부터 들음이 아니요, 또 한 가지 도를 말하자면, 이는 보살이 한 가지 도가 있을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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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짝이 없으므로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크게 장엄하여서 자기의 힘으로 정진하고 섭취(攝取)하되 끝까지 자기의 힘으로 닦고 다른 조작을 빌리지 않으며, 자기의 용맹한 힘을 인연함으로써 이같이 견고하고 장엄함을 세우고 중생들의 착한 업 짓는 것까지도 내가 다 짓고 모든 성인들의 처음 발심할 때부터 지은 온갖 행도 내가 다 지으며, 보시는 나의 짝이 아니지만 나는 보시의 짝이고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도 나의 짝이 아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의 짝이고, 여러 바라밀은 나를 사용할 수 없지만 나는 그 여러 바라밀을 사용할 수 있고, 모든 선근이 다 그러하므로 이 같은 법들이 비록 나의 짝은 아닐지라도 나는 마땅히 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용맹을 믿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짝 없음을 홀로 행하며, 도량의 금강좌(金剛座)에 앉아 한결같은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룩하되 나는 마땅히 이같이 깨달아 분별하리라고 하나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한 가지도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그 방편을 닦음이 다함없나니,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모든 법을 보는 것이 방편이고 모든 법을 일으키는 것이 방편이며, 보살의 심부름 되는 것이 방편이고 필경 분별하는 것이 방편이며, 제한(齊限)없는 것이 방편이고 항상 출세의 법을 구하는 것이 방편이며, 보시할 때에 모든 바라밀을 원만히 갖춤이 방편이고 금계를 가질 때에 어느 곳에나 자재로이 태어나는 것이 방편이며, 인욕을 행할 때에 자기의 몸과 보리의 도를 장엄함이 방편이고 정진을 행할 때에 마음이 머무는 곳 없음이 방편이고, 선정을 닦을 때에 물러나거나 잃어버림 없음이 방편이며 지혜를 수행할 때에 함이 없음[無爲]에 빠지지 않음이 방편이며, 사랑하는 마음을 닦을 때에 세력 없는 자를 가엾이 여김이 방편이고 슬퍼하는 마음을 닦을 때에 생사를 싫어하지 않음이 방편이며, 기뻐하는 마음을 닦을 때에 즐거워할 것이 없으나 즐거움에 처하는 것이 방편이고 버리는 마음을 닦을 때에 모든 선근을 닦음이 방편이며, 부처님 눈[佛眼]을 얻기 위하여 하늘 눈[天眼]을 닦음이 방편이고 부처님 귀를 얻기 위하여 하늘귀를 닦음이 방편이며, 부처님 지혜를 얻어 중생들 근량(根量)의 깊고 얕음을 알기 위하여 남의 속 아는 지혜[他心智]를 닦음이 방편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얻어 3세(世)의 걸림 없음을 알기 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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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전생일 아는 지혜[宿命智]를 닦음이 방편이고 부처님 신통력을 얻기 위하여 신통을 닦음이 방편이며, 중생의 마음에 따르는 것이 방편이고 스스로 깨닫고는 다시 중생을 깨닫게 함이 방편이며, 스스로 제도하고는 제도하지 못한 자로 하여금 부지런히 제도하는 법을 닦게 함이 방편이고 이미 번뇌를 여의고서 번뇌 있음을 보이는 것이 방편이며, 이미 무거운 짐을 버리고서 무거운 짐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 방편이고 그 근량(根量)을 알고서 근량에 따라 설법함이 방편이며, 근기가 둔한 중생을 잘 깨우쳐 정진하게 함이 방편이고 때와 때 아님을 아는 것이 방편이며, 도 행할 것을 알고서 삿된 도에 떨어진 중생을 바른 도에 편이 머물게 함이 방편이며, 한량 있는 것을 한량없게 만들거나 한량없는 것을 한량 있게 만드는 것이 방편이고 파괴한 것을 본래의 모양대로 도로 회복하는 것이 방편이며,
본래의 모양을 벗어나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내는 것도 방편이고 열반에도 5욕(欲)의 즐거움이 있음을 나타내 말하는 것이 방편이며, 이미 해탈을 얻고서도 얽매임이 있음을 보임이 방편이고 생사에 처해 있으면서 생사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방편이며, 모든 위의를 자기만으로 담당함이 없으면서도 그 위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방편이고 중생을 관찰하되 계를 지녔다거나 계를 헐뜯었다고 보지 않는 것이 방편이며,
모든 소견의 반연을 거둬서 경쟁을 내지 않는 것이 방편이고 모든 음성은 진실 없는 붙인 이름이라고 아는 것이 방편이며, 언제나 삼계(三界)에 다니는 것이 방편이고 범부에 친근하기를 성인에 친근함과 같이 함이 방편이며, 열반에 빠지지 않고서 항상 생사에 처하는 것이 방편이고 마군의 다니는 곳에 큰 광명을 나타내어 번뇌를 없앰이 방편이며, 모든 것을 그렇다거나 모든 것을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방편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수행하는 방편의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의 여든 가지 다함없음이란 바로 이것을 말함이니, 이 여든 가지 다함없음은 모든 불법을 모두 함수(含受)한 것이라 합니다.
무진의 보살마하살이 이 법문품을 말할 때에 아직 발심하지 못한 67백천의 중생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 5백2천의 보살마하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그때 대중들이 갖가지 꽃, 향과 갖가지 꽃다발과 갖가지 꽃일산으로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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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무진의보살과 아울러 경전까지 공양하며, 공중에서는 한량없는 하늘풍악[天樂]이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겁(劫)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았고 이제 무진의보살은 이 대집경에서 그 이치를 설명하였으니, 만약에 이 다함없는 법문을 듣고서 깊이 믿고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고 해설하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곧 이 다함없는 법을 원만히 갖추게 될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어깨 덮은 옷[覆肩衣]을 무진의보살에게 주시면서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대사는 이 이치를 쾌히 말하였도다. 나만이 허락할 뿐 아니라 시방 여러 부처님도 다 허락하시리라.”
그때 무진의 보살마하살이 두 손으로 옷을 받들어 자기의 정수리 위에 두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은 마땅히 이 옷을 보고 탑(塔)보다도 더 존중하게 생각하리니, 이는 부처님으로부터 받아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갖가지 보배옷과 갖가지 보배일산과 갖가지 보배기[幅]와 갖가지 보배나무와 갖가지 보배 목걸이가 시방 세계로부터 자연히 굴러 와서 무진의보살을 덮어 공양하는데, 때마침 이 보배옷과 기·일산·나무 목걸이들이 자연히 이러한 말을 연출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선남자께서는 이 다함없는 법문을 잘 연설하였습니다. 그대의 말씀과 같이 우리들도 허락합니다.”
그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보배옷 따위 공양거리[供養具]는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이런 말을 내나이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무진의보살이 처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 때에 교화 받는 중생들이 다 시방에서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였으니, 저 시방의 부처님 정변지(正遍知)들이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기 때문에 이 보배옷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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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와서 무진의보살의 진실한 공덕을 높이 찬탄하고 아울러 설법한 경전을 공양하는 것이니라.”
그때 대중들이 무진의보살에게 더욱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마음을 내어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들은 이제 큰 이익을 얻었도다. 무진의보살을 보고서 공경히 공양하고 존중하여 찬탄하였으며, 아울러 이 다함없는 법문을 들었도다. 만약에 무진의보살의 명자(名字)만이라도 바로 듣는다면 착한 이익을 얻거늘 하물며 눈으로 직접 보고 이 경전까지 겸하여 들은 사람이겠는가.”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 속에서 이 말을 듣고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보살도를 배워서 한 겁(劫) 동안에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계율과 위의를 배워 견디어 참는 힘으로서 모든 중생의 생사의 괴로움의 짬을 다 겪어 정근하고 닦기를 마치 머리털에 불붙는 것을 구원하듯이 하며, 모든 선정에 마음을 모아서 지혜의 방편을 성취하더라도 만약 이 경전을 떠난다면 나는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아직 6바라밀을 원만히 갖추지 못하였다 하리라.
사리불이여, 만약에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전을 듣고서 깊이 믿고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고 그 이치를 해설하며 경전의 말씀과 같이 수행한다면, 나는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이미 모든 바라밀을 원만히 갖추어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리라고 하리라.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보살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어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한다면 이는 곧 단(檀)바라밀을 원만히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 이유로서 모든 보시 중에는 법 보시가 으뜸 되므로 처음부터 보살의 마음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음이며, 이 경전을 지님을 바로 계율을 지니는 것이므로 능히 시(尸)바라밀을 갖추게 되나니, 왜냐하면 모든 보살의 배우는 금계는 이 경전의 거둠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이 경전의 금계를 능히 견디어 참아서 즐거워한다면 모든 중생도 이 금계를 파괴하지 못하며, 이 경전 속에 나아가 인욕을 닦는다면 곧 찬제(羼提)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될 것이며, 이 경전을 부지런히 행하여 옮겨 연설하고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정근하고 닦는다면 곧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될 것이며, 이 경전에 그 마음이 적멸하여 산란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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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 한뜻으로 법상(法相)을 분별한다면 곧 선나(禪那)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될 것이며, 이 경전에서 스스로 현지(現智)를 얻고 다른 데로부터 듣지 않고서 바른 행의 지혜를 얻는다면 곧 반야(般若)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될 것이니라.
사리불이여, 어떤 보살이든지 이 경전을 부지런히 배워서 모든 바라밀을 원만히 갖추려고 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사리불이여, 어떤 보살이 이 경전을 배워 익혀서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며, 경전의 말씀과 같이 수행하고 또 그 경전을 베껴 쓴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모든 경전을 이미 자기의 손에 넣었다고 알 것이니, 4대(大)의 성질을 변화시켜 다르게 할지라도 이 보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다시 흔들 수 없으리라.
사리불이여, 이 경전은 바로 보살의 퇴전(退轉)하지 않는 인(印)이니라. 그러므로 보살로서는 마땅히 이 인을 구하여야 하나니, 만약에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퇴전하지 않는 인에 친근한다면 곧 모든 법에 친근하게 되리라.”
그때 사천왕과 그의 권속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사천왕도 부처님의 제자로서 이미 도의 자취[道跡]를 얻었으니, 만약에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닌다면 저희들은 이 사람을 위해 옹호하고 공급하고 심부름하는 일을 맡을 것이며, 마땅히 이 사람에게 여래의 생각을 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전 중에서 모든 승(乘)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때 석제환인(釋提桓因)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여러 번 부처님으로부터 한량없고 그지없는 백천의 경전을 들었으나 아직 이러한 경전의 깊은 이치를 분별함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느 국토의 도시, 촌락이든지 이 경전을 연설하는 자가 있다면 저는 마땅히 삼십삼천을 몸소 인솔하여 일부러 그곳에 가서 법을 받아 듣겠으며, 아울러 법사를 옹호하여 그 기력을 돕고 그의 바른 변재를 용맹정진하게 하는 동시에, 법사로 하여금 여러 대중에게 두려움 없이 이러한 경전을 널리 널리 설하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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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교시가(憍尸迦)여, 네가 이 설법하는 자를 옹호하여 바른 변재를 용맹정진하게 하려는구나. 교시가여, 이 설법하는 사람을 옹호하려는 것은 곧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옹호함이요 바른 법을 옹호한다면 모든 중생을 옹호함이 되느니라.”
그때 범자재천왕(梵自在天王)이 합장하고 길이 꿇어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경전을 유포하는 곳이라면, 제가 몸소 여러 범천 무리[梵衆] 및 그의 권속들과 더불어 선정의 기쁨을 버리고서 저곳에 나아가 받아 듣고 질문하며, 저곳에 나아갈 때에는 제가 마땅히 네 가지 상서를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겠습니다. 네 가지 상서라 함은, 첫째는 미묘한 광명을 보게 함이요, 둘째는 훌륭한 향내를 듣게 함이요, 셋째는 설법하는 자로 하여금 걸림 없는 변재와 바른 기억을 얻어 좋은 상서를 말하되 장구(章句)를 잃어버리지 않게 함이요, 넷째는 그 대중으로 하여금 착한 욕심을 내어 즐거이 법을 듣되 자기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함이니, 이 네 가지 상서를 나타냄으로써 저 범천왕도 그의 권속을 데리고 몸소 와서 법을 들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제6의 마왕(魔王) 파순(波旬)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경전은 저희들의 세력을 모두 쇠약하게 만들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보살이라도 이 경전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고 다른 사람을 위해 널리 연설한다면, 그 보살은 곧 수기(受記)하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보살의 나아가는 곳이라면 그 모든 불세계가 부처님 세존과 같으리라고 알겠습니다. 이제 저의 모든 교만과 질투와 잘난 체하는 마음은 무진의보살의 위덕(威德)의 힘 때문에 이미 다 부수어졌으니, 저도 이제는 이러한 경전과 설법하는 자를 옹호하겠습니다. 이 경전을 유포하는 곳이라면 조금도 방해할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거늘, 하물며 제 자신이 가서 일부러 인연을 짓겠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존자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셨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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