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89)-89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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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관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보살의 이치[諦]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깊고 깊어 들기 어려운 괴로움[苦]의 지혜, 원인[集]의 지혜, 멸함[滅]의 지혜, 길[道]의 지혜요, 괴로움의 지혜는 음(陰)의 남[生]이 없음을 관찰하고 멸함의 지혜는 애욕의 인(因) 끊음을 관찰하고 멸함의 지혜는 무명 따위 모든 번뇌의 화합 없음을 관찰하고 길의 지혜는 평등한 관찰을 얻어서 모든 법에 의지하거나 집착함이 없음이니, 보살이 만약 이 4제(諦)에서 이러한 관찰을 하되 증을 취하지 않고서 중생을 제도한다면, 이것을 보살의 이치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세 가지 이치가 있으니, 그 세 가지란 속된 이치[俗諦]와 으뜸가는 이치[第一義諦]와 모양[의 이치相諦]입니다. 속된 이치라 함은 세간에서 쓰는 언어와 문자와 가명의 법들이며, 으뜸가는 이치라 함은 아무런 심행까지도 없거늘 하물며 언어, 문자야 말할 것도 없으며, 모양의 이치라 함은 모든 모양을 한 모양과 같다고 관찰함이니, 한 모양은 바로 모양이 없는 것이라 보살은 속된 이치에 수순하되 싫어하거나 게으름이 없고 으뜸가는 이치를 관찰하되 증을 취하지 않고 모든 모양을 한 모양과 모양 없는 것으로 관찰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이치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그 두 가지란 속된 이치와 으뜸가는 이치니, 속된 이치라 함은 괴로움·원인·멸함과 길의 이치를 말하거나 세간의 언어·문자와 가명의 법 따위를 말하는 것이요, 으뜸가는 이치라 함은 열반의 법에 있어서 마침내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진리와 법계는 그 성품이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세속에 따르되 싫어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으뜸가는 이치를 관찰하되 증을 취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이치가 있으니, 그 한 가지란, 모든 법에 의지하거나 집착함이 없으면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현전에 의지하고 집착함이 있는 것이요, 이것을 보살의 이치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5음(陰)의 괴로움이 있으니, 만약에 5음의 괴로움의 모양을 본다면 이것은 괴로움의 관찰이라 하고, 괴로움은 바로 공이므로 이것을 괴로움의 지혜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를 관찰한다 하며, 5음의 모든 번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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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욕의 인(因)과 소견[見]의 인을 관찰한다면 이것을 원인[集]이라 하고, 애욕의 인과 소견의 인을 관찰하되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바라지 않고 구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을 원인의 지혜로 원인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를 관찰한다 합니다. 5음은 필경 다하는 모양이니, 과거는 이미 멸하고 미래는 생기지 않았고 현재는 머물지 않으므로 이것을 멸함[滅]이라 합니다.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이것을 멸함의 지혜로 멸함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를 관찰한다 합니다. 길[道]을 얻는 자로서 원인과 멸하는 지혜와 견주는 지혜를 증하여 안다면 이것을 길이라 하고, 이 모든 것을 다 공한 성품으로 본다면 이것은 길의 지혜로써 길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를 관찰한다 합니다. 이와 같이 4제를 관찰한다면 이것을 보살의 진리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모든 것의 느낌[受]을 괴로움이라 하고, 모든 느낌에서 사유 분별한다면 이것을 괴로움의 지혜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합니다. 느낌의 인(因)이 화합함을 원인이라 하고, 느낌의 인에서 진실다움을 아는 것을 원인의 지혜로 원인의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합니다. 모든 느낌을 제거하여 느끼는 자와 느낌이 없으므로 느낌이 완전히 멸함[滅盡]을 관찰하되 멸함을 증(證)하지 않고 중생을 위해 교화한다면, 이것을 멸함의 지혜로 멸함의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합니다.
느끼는 것이 있음을 길[道]이라 하고, 비록 화합하기는 하되 마치 뗏목의 비유같이 느낌이 되지 않고 길을 구하지 않음을 길의 지혜로 길의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합니다. 이와 같이 알고서 4제(諦)의 청정하고 평등함을 보나니, 이것을 보살이 진리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대략 말하건대 태어남[生]의 괴로움을 괴로움이라 하나니, 만약 태어남을 관찰한다면 이것을 괴로움의 지혜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합니다. 인연 따라 나는 것을 원인[集]이라 하나니, 만약에 존재와 존재 아님을 관찰한다면 이것을 원인의 지혜로 원인의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합니다. 온갖 나고 나지 않음은 곧 멸함이 아니요, 만약 법이 나지 않는다면 곧 멸함이 없으므로 이를 멸함이라 하나니, 만약에 이 멸함을 관찰한다면 이것을 멸함의 지혜로 멸함의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합니다. 만약 이러한 따위를 추구(推求)하고 칭량(稱量)하고 사유 분별한다면 이를 길이라 하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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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이 추구하고 칭량하는 것을 없애고서 법문에 든다면 이를 길의 지혜라 하고 길의 진리를 관찰한다 하나니, 이 지혜에 머물러 성스러운 진리를 증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보살의 진리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보살의 인연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착하지 않은 사유(思惟)를 쌓기[集] 때문에 무명이 쌓이고 무명이 쌓이기 때문에 지어감이 쌓이고 지어감이 쌓이기 때문에 식별이 쌓이고 식별이 쌓이기 때문에 이름과 색이 쌓이고 이름과 색이 쌓이기 때문에 6입이 쌓이고 6입이 쌓이기 때문에 닿임이 쌓이고 닿임이 쌓이기 때문에 느낌이 쌓이고 느낌이 쌓이기 때문에 욕망이 쌓이고 욕망이 쌓이기 때문에 취함[取]이 쌓이고 취함이 쌓이기 때문에 존재가 쌓이고 존재가 쌓이기 때문에 남[生]이 쌓이고 남이 쌓이기 때문에 늙고 죽음이 쌓이고 늙고 죽음이 쌓이기 때문에 근심과 괴로움이 쌓이나니, 만약에 이러한 모든 괴로움의 쌓임을 안다면 이것을 보살의 인연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이 같은 여러 법의 쌓임에 머물면 장양(長養)하지 않고 조작함이 없고 싸움이 없고 주장(主)이 없고 붙임이 없고 얽매임이 없나니, 이른바 착한 법에 인(因)하거나 착하지 않은 법에 인하거나, 움직이지 않는 법에 인하거나 열반에 나아가는 법에 인하거나, 이러한 법을 여실히 분별함이요, 만약에 중생들의 근기 양(量)이 제한(際限)된 것이라면 그 근기의 여러 작용하는 업에 인하여 받음의 갚음과 받지 않은 것의 갚음이 있으리니, 그 인을 잘 알고서 방편을 쌓는다면 이것을 보살의 인연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착하지 않은 생각이 멸한다면 무명(無明)이 멸하나니,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지어감[行]이 멸하고 지어감이 멸하기 때문에 식(識)이 멸하고 식이 멸하기 때문에 이름과 색[名色]이 멸하고 이름과 색이 멸하기 때문에 6입(入)이 멸하고 6입이 멸하기 때문에 닿임[觸]이 멸하고 닿임이 멸하기 때문에 느낌[受]이 멸하고 느낌이 멸하기 때문에 애욕[愛]이 멸하고 애욕이 멸하기 때문에 취함[取]이 멸하고 취함이 멸하기 때문에 존재[有]가 멸하고 존재가 멸하기 때문에 태어남[生]이 멸하고 태어남이 멸하기 때문에 늙고 죽음이 멸하고 늙고 죽음이 멸하기 때문에 근심과 괴로움과 모든 괴로움의 덩어리가 멸함이요, 만약에 이러한 모든 덩어리의 멸함을 안다면 이것을 보살의 인연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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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모든 법은 인(因)에 속하고 화합에 속하는 것이니, 만약 법이 인연과 화합에 속한다면 이 법은 곧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에 속하지 않음이요, 법이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에 속하지 않는다면 법수(法數)에 들지 않음이니,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이를 보살의 인연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만약에 보살이 닦는 모든 법이 보리를 돕고 보리에 편히 머물게 한다면 이러한 모든 인연은 멸하여 다함[滅盡]을 보아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증을 취하지 않으리니, 이를 보살의 인연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3세(世)를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과거세의 자기와 다른 사람, 착하고 착하지 않은 심(心)과 심수(心數)의 법을 염하되 착하지 않은 심수의 법을 가책하여 헐어버리고 착한 심수의 법을 다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는 것을 보살의 과거 관찰하는 방편이라 하며, 미래세의 심과 심수의 법을 한결같이 보리의 도(道)를 염하되 착한 마음을 일으켜 다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고 모든 착하지 않은 심과 심수의 법을 마음에 느끼지 않도록 이와 같이 발원하는 것을 보살의 미래 관찰하는 방편이라 하며, 현재세의 심과 심수의 법, 착한 생각과 모든 사업을 다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는 것을 보살의 현재 관찰하는 방편이라 함이니, 이러한 방편을 보살의 3세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보살은 3세가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잘 아나니, 이는 3세 여러 부처님께 심은 한량없는 공덕을 다 위없는 보리에 회향한다면 이는 방편의 힘이기 때문이니, 이러한 방편을 보살의 3세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과거는 다된 법으로서 미래에 오지 않는다고 보아도 항상 착함을 닦아서 정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미래의 법은 나는 것[生]이 없다고 관찰하여도 정진을 버리지 않고서 보리에 회향하고, 현재의 법은 찰나 찰나 멸한다고 관찰하여도 그 마음은 보리에 나아가기를 잊지 않나니, 이러한 방편을 보살의 3세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과거는 이미 멸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고 현재는 머물지 않는, 이러한 심과 심수의 법, 나고 멸하고 헐고 흩어짐을 관찰하여도 언제나 선근 모으기를 버리지 않고서 보리법을 돕는다면, 이것을 보살의 3세(世) 관찰하는 방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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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합니다.
또 모든 신통으로서 과거세에 지은 선근(善根)을 염하되 염하고는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며, 미래세에 생기지 않은 선근을 염하되 발원한 일을 뜻대로 성취하며, 현재세에 선근을 낳되 위없는 보리의 도에 회향하기를 전념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보살의 3세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과거세에 지은 선근과 도(道) 돕는 공덕을 염하여, 이른바 중생의 마음에 따라 제도할 자는 그의 즐김과 같이 다 제도하고, 미래세의 중생으로서 부처님과 여러 성인 뵙기를 기다려서 제도할 자는 그 형태에 따라 알맞게 다 제도하게 하고 현재세의 중생으로서 법을 듣거나 신통력을 보고서 제도할 자는 그의 알맞음에 따라 교화하고, 곳에 따라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는 곧 3세에 있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성취한다면 이러한 이익은 다 보리를 위해 걸림 없는 지혜를 갖춤이니, 이와 같은 방편을 보살의 3세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모든 승(乘)을 관찰하는 방편이라 어떤 것인가 하면, 세간에 세 가지 승이 있으니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과 대승(大乘)이 그것이며,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늘의 승과 사람의 승이 그것입니다.
보살의 성문승을 관찰함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부처님이 출세하지 않으면 성문승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데로부터 법을 듣고서 바른 소견을 내기 때문이니, 이른바 들음이란 계를 지니고 위의를 갖춤이요, 위의를 갖추기 때문에 계 덩어리[戒聚]를 원만히 갖추고 계 덩어리를 원만히 갖추고는 선정 덩어리를 원만히 갖추고 선정 덩어리를 원만히 갖추고는 지혜 덩어리를 원만히 갖추고 지혜 덩어리를 원만히 갖추고는 해탈 덩어리를 원만히 갖추고 해탈 덩어리를 원만히 갖추고는 해탈지견(解脫知見)의 덩어리를 원만히 갖추나니, 이러한 방편을 보살의 성문승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성문승을 관찰하되 착하고 착하지 않음과 움직이지 않는 행에서 마음으로 항상 삼계(三界)를 헐고 싫어 여의며, 모든 행의 덧없고[無常] 괴롭고[苦] 나 없고[無我] 고요한 열반[寂靜涅槃]임을 관찰하되 한 생각까지도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고 언제나 두려움을 품고 달갑고 즐겨하지 않으며, 음(陰)은 원수와 같고 계(界)는 독사(毒蛇)와 같고 입(入)은 허공 덩어리와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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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여 모든 갈래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분별한다면 이것을 보살의 성문승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보살이 연각승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연각이 출세할 때 그의 소행을 관찰하여 사실 그대로를 아는 것이니, 연각의 소행은 성문의 모든 공덕보다 뛰어나서 정진하려고 방일치 않으며, 계를 지니어 들음이 적고 공양을 많이 하지 않지만 여러 부처님을 모시고 심부름하매 중근(中根)인 때문에 항상 싫어하는 마음이 있고 하는 일이 적고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멀리 여의기를 즐기고 홀로 고요한 데 머물러 위의가 질서 있고 출입이 정중하고 마음을 안정시켜 정숙함과 동시 인사(人事)를 간략하게 하고 중생을 위해 세간의 복밭[福田]을 나타내되, 그 마음은 12인연(因緣)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항상 한 가지 법으로 출세 열반하기를 염하고, 자주 선정에서 놀아 다른 것으로부터 듣지 않고 자연스럽고 조그마한 경계를 분명히 알고, 인연으로 도(道)를 깨닫기 때문에 연각이라 함이니, 만약에 이와 같이 열어 보이고 분별한다면 이것을 보살의 연각승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보살이 대승을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그 승(乘)은 한량이 없으니, 이제 조그마한 부분을 말하건대 이 승(乘)이 한량없이 모든 중생을 다 용납하여 받아들임은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며, 이 승이 모든 선근을 더 자라냄은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받아 쓸 수 있게 하기 때문이며, 이 승이 모든 바라밀을 원만히 갖춤은 능히 중생의 심행(心行)에 따라 교화하기 때문이며, 이 승이 도(道) 돕는 법에 뛰어남은 나아감이 걸림 없어 도량에 이르기 때문이며, 이 승이 평등하여서 걸림 없는 광명이 모든 것에 비춤은 한량없는 중생이 다 받을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승이 두려움 없어서 겁약(怯弱)한 도에서 벗어남은 모든 불법을 다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며, 이 승이 모든 악마와 외도와 삿된 무리를 파괴함은 12인연을 밝히고 보리의 당기[幢]를 세워 돕기 때문입니다.
또 이 승이 모든 가[邊]의 유(有)와 무(無), 단(斷)과 상(常)의 인연과 모든 소견의 일어나는 번뇌의 장애와 덮임[覆蓋]과 의심[疑網]과 조희(調戱)를 제거함은 부처님의 걸림 없는 참된 지혜를 얻기 때문이며, 이 승이 모든 진귀한 보배를 풍부히 갖추어 진실하고 헛되지 않아서 중생을 이롭게 함은 큰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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픔[大悲]이 용맹스러워 본원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이 승이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을 원만히 갖춤은 상호(相好)로써 몸과 입과 뜻을 장엄하기 때문이니, 이러한 방편을 보살의 대승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보살이 모든 법을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함이 있거나[有爲] 함이 없는 것[無爲]에 보살은 그 방편을 잘 아나니, 함이 있음을 잘 관찰하는 방편이란 것은 모든 몸의 착한 업, 입의 착한 업, 입의 착한 업, 뜻의 착한 업으로서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기를 원하는 이것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 하며, 만약에 몸과 입과 뜻의 업을 보리의 모양[相]과 같다고 관찰하여 보리에 회향한다면, 이것을 보살의 함이 없음을 관찰하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함이 있는 방편이란 것은 5바라밀을 능히 모음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 하며, 반야(般若)바라밀에 그 성품 자체가 함이 없음을 알면서도 모음에 있어서는 끝내 싫어하거나 천하게 여김이 없고 모든 바라밀을 원만히 갖추려고 하여 선근이 누(漏) 없는 보리와 같음을 깊이 알고도 모든 갖가지 지혜 성취하기를 원한다면 이것을 보살의 함이 없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함이 있는 방편이란 것은 걸림 없이 평등한 마음속에 머물러서 4섭법(攝法)으로 중생을 거두는 것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 하며, 함이 없는 방편이란 중생의 나[我]와 남[人]이 없고 아무런 바라는 것이 없는 해탈과 같음을 알면서도 모든 갖가지 지혜에 회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함이 있는 방편이란 모든 번뇌와 생사가 서로 연속됨을 끊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고 모든 선근의 보리 돕는 것을 끊어버리지 않게 하고 내지 조그마한 번뇌도 행하지 않는 것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 하며, 함이 없는 방편이란 공과 무상과 무원을 관찰해도 이 세 가지 공이 바로 도(道)를 돕는 방편인 줄 알므로 증(證)하지 않는 것을 함이 없는 방편이라 합니다.
또 함이 있는 방편이란 것은 비록 삼계(三界)에 있어도 삼계의 번뇌에 더러워지지 않음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 하며, 함이 없는 방편이란 것은 비록 삼계에 뛰어나서도 이 뛰어난 것에 증하지 않음을 함이 없는 방편이라 합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이 모든 법을 아는 방편은 곧 모든 갖가지 지혜를 원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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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춤이니, 왜냐하면 갖가지 지혜는 한량없고 그지없어 바른 염[正念]과 슬기로운 방편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모든 법의 방편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지혜로 인연한 여덟 가지 방편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 지혜가 능히 이해함은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을 밝게 관찰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화살 같음은 법을 잘 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능히 행함은 성인의 법이 현재 있기[現在] 때문이며, 이 지혜가 참되게 이해함은 모든 소견과 번뇌의 장애와 덮개를 끊어버리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서원을 정함은 본래의 구하던 것을 다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통[消融]함은 모든 번뇌[燋熱]를 제거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기뻐함은 법의 즐거움을 끊지 않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바르게 염함은 인연한 이치를 통달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지혜가 편히 머묾은 37조도법(助道法)을 갖추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모양[相]을 얻음은 행하는 승(乘)과 같아 모든 것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모양을 이해함은 그 성품의 슬기로움이 비추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능히 제도함은 모든 폭류[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능히 진정함은 바른 선정과 결정된 선정을 이룩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바르게 봄은 모든 착한 법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지혜가 기뻐함은 번뇌에 떨어진 자를 구제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가장 훌륭함은 정수리의 법을 얻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미묘함은 자연히 깨닫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행하지 않음은 3세(世)에 가깝지 않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섭취함은 모든 방편을 갖추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능히 결단함은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방일하지 않음은 어둡고 어리석음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가 처음 시작함은 모든 착한 법을 발행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능히 발행함은 모든 승(乘)을 갖추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비추어 밝힘은 무명의 거리낌을 제거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눈[眼]을 베풀어줌은 온갖 중생이 그의 이해함과 같이 밝음을 얻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의지함이 없음은 눈의 색을 벗어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으뜸 되는 이치임은 진실을 내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다툼이 없음은 잘 분별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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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달함은 지혜문(智慧門)에 나아가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다함이 없음은 능히 두루 행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거슬리지 않음은 12인연을 보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해탈함은 모든 얽어 묶인 것을 잘 끊어버리기 때문이며, 이 지혜가 잡(雜)되지 않음은 모든 장애되는 법을 여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중생의 심행(心行)을 이 같은 지혜로써 다 비추어 밝히고 중생의 심행을 밝힘과 같이 모든 번뇌문(煩惱門)을 슬기롭게 생각하고 이러한 지혜로 다 분명히 관찰합니다. 만약 성문·연각·보살·여래의 모든 지혜까지 이 보살을 두루 배웁니다. 사리불이여, 이를 보살이 다함없는 지혜라 하나니, 이 다함없는 지혜로써 다함없는 슬기로움을 갖춘다 합니다.”
이 법을 연설할 때에 3만 2천의 보살과 선근 성숙한 자들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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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등대집경 제29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이진영 번역
12. 무진의보살품 ③
그때 무진의보살이 다시 사리불(舍利佛)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자애로움[慈]을 닦는 것도 또한 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의 자애로움은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이 자애로움을 닦는 것의 제한 없기가 마치 중생계와 같나니, 보살의 발심이 두루 덮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마치 허공이 두루 덮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이 보살의 자애로움도 그러하여 모든 중생을 덮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중생계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이 자애로움을 닦음도 그와 같이 한량없고 그지없어 다함이 없습니다. 허공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중생도 다함이 없고, 중생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자애로움을 닦음도 다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대사(大士)가 닦는 자애로움도 다함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중생계(衆生界)는 어느 정도입니까?”
무진의보살이 대답하였다.
“모든 땅·물·불·바람의 세계가 한량없고 그지없다 하더라도 중생계보다는 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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