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등대집경

대집경(87)-870

근와(槿瓦) 2016. 1. 9. 01:58

대집경(87)-87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861 / 1773] 쪽

이때 무진의 보살마하살은 이 삼매를 통달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능히 모든 대중과 시방의 여러 큰 보살들과 부처님과 성승(聖僧)을 다 몸 속에 넣었는데, 그 몸이 마치 대보장엄(大寶莊嚴)세계와 같아서 모든 보살마하살이 지닌 갖가지 장엄한 일을 받았다.

 

이때 대중들은 다 자기의 얼굴이 무진의보살의 몸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무진의보살이 이러한 큰 신통을 나타내 보이고 나자 대중들은 각기 도로 본래와 같았다.

 

이때 대장엄 보살마하살이 무진의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나는 이제까지 이러한 삼매의 신통과 변화를 보거나 듣지 못하였나이다.”

 

무진의보살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가령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것을 다 내 몸 속에 넣을지라도 더하거나 덜 할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이것이겠습니까.”

 

이 다함없는 참음을 말하여 큰 시통을 나타낼 때에 76나유타의 하늘과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 1만 2천의 보살마하살은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일러 보살의 참음을 수행함이 다함없는 것이라 합니다.”

 

                                                                                [862 / 1773] 쪽

대방등대집경 제28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이진영 번역

 

12. 무진의보살품 ②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보살에게 말하였다.

“착하도다, 선남자야. 그대가 이미 보살의 찬제바라밀의 다함없음을 말하였으니, 원컨대 그대는 다시 보살의 비리야바라밀을 말씀해주십시오. 보살이 얻는 다함없는 비리야바라밀이란 어떤 것입니까?”

 

무진의보살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여덟 가지 일을 원만히 갖추어 정진 수행함이 다함없나니, 그 여덟 가지란 큰 장엄을 내되 다함없음이요, 용진(勇進)을 쌓고 모으되 다함없음이요, 모든 착함을 수행하되 다함없음이요, 중생을 교화하되 다함없음이요, 도(道)의 공덕을 돕되 다함없음이요, 위없는 지혜를 돕되 다함없음이요, 위없는 지혜[慧]를 돕되 다함없음이요, 불법을 돕되 다함없음입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다함없는 장엄인가 하면, 모든 생사에 마음이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고 어느 겁수(劫數) 동안에 마땅히 불도를 성취한다고 계산하지 않으므로, 약간의 겁수에서 장엄을 짓기도 하고 약간의 겁수에서 장엄을 짓지 않기도 합니다. 보살이 장엄함에 그 겪는 겁수는 헤아릴 수 없나니, 오늘부터 생사에 이름과 같이, 하루 낮 하룻밤을 바탕삼아 이러한 서른 날[日]을 한 달로, 열두 달을 한 해로 삼아서 이 백천만 세 동안에 한결같이 도의 마음을 내고 한결같이 부처님을 봅니다. 이와 같이 발심하여 보는 여러 부처님들은 항하의 모래 수와 같으므로 그 부처님 계신 곳에서 바야흐로 모든 중생의

 

                                                                                [863 / 1773] 쪽

심행(心行)을 알며 또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의 심행을 알고서도 물러나지[退沒] 않나니, 이것을 일러 게으르지 않는 장엄, 다함이 없는 장엄이라 합니다.

 

언제든지 이와 같이 부처님을 보고 발심하여 다른 중생의 마음 행하는 때를 알고 항상 단바라밀과 시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닦아 원만히 갖추고, 모든 보리 돕는 법을 닦고, 상호(相好)와 10력(力)과 두려움 없음과 불공법(不共法)을 갖추어 닦고 모든 불법을 갖추어 닦나니, 이것을 일러 게으르지 않은 장엄, 다함이 없는 장엄이라 합니다.

 

만약에 보살로서 이러한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보살은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인 줄을 알지니, 이것을 일러 보살의 장엄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용맹스럽게 나아감[勇進]이 다함없는 것인가 하면, 만약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가득 찬 왕성한 불[火]에서라도 부처님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이 불 속을 따라 지나가며, 법을 듣고 중생을 교화하여 착한 법에 편히 머물게 하기 때문에 또 이 불 속을 따라 지나간다면, 이를 일러 보살의 용맹스럽게 나아감이 다함없다고 합니다.

 

무슨 인연으로 용맹스럽게 나아간다고 하는가 하면,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을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을 조복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을 멸진(滅盡)하게 하기 때문이며, 항상 게으르지 않고 굳고 물러나지 않아서 마음을 큰 슬픔[大悲] 속에 편히 머물러 언제나 부지런히 정진함을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용맹스럽게 나아간다고 하며, 보살이 다닐 때에 걸음걸음 마음을 모으되 다 보리를 향함은 항상 중생을 관찰하여 교화하기 때문에 비록 이러한 관찰을 하여도 번뇌를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의 용맹스럽게 나아감이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닦음이 다함없는 것인가 하면, 일으키는 모든 착한 마음은 항상 보리를 원하므로 이것을 보살의 닦음이 다함없다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근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기를 처음부터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864 / 1773] 쪽

사리불이여, 마치 하늘의 비 한 방울이 큰 바다 속에 떨어지면, 그 한 방울 물이 비록 적기는 하지만 마침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선근이 보리에 원향(願向)함도 그러하여 없어짐이 없습니다.

 

선근을 닦음이란, 이른바 바른 회향으로 선근을 닦으며, 중생을 옹호하기 위해서 선근을 닦고, 중생의 모든 필요함에 따르기 때문에 선근을 닦으며, 모든 지혜를 성취하려 하기 때문에 선근을 닦나니, 이것을 보살의 닦음이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교화가 다함없는 것인가 하면, 중생의 성품은 헤아릴 수 없고, 보살은 그 가운데에서 응당 헤아리지 않습니다. 만약 하루 동안에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여, 이와 같이 헤아리고[計數] 내지 한량없고 생각할 수 없고 칭량할 수 없는 겁에 이르기까지 중생을 교화한다면, 이와 같이 교화된 중생의 수를 칭량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다 하겠지만, 중생의 부분에 있어 아직 백분·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써 알 수 있는 중생을 교화하지 못하리니, 왜냐하면 이 중생의 성품이 한량없고 그지없고 칭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로서 이런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보살은 정진을 부지런히 닦는 이라고 알지니, 이것을 보살의 교화가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도 돕는 것[助道]의 다함없음인가 하면, 보살이 닦는 바 도 돕는 공덕은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보살이 그 가운데에서 응당 한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의 공덕으로써 과거·미래·현재의 것이나 성문·연각의 모든 공덕은 부처님에 있어서는 한 털구멍의 공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낱낱 털구멍의 공덕으로부터 내지 온갖 털구멍의 공덕을 모아 성취하여서 처음 여래의 한 수형호(數形好)를 성취하며, 낱낱 수형호로부터 내지 모든 수형호의 공덕을 모아 성취하여서 여래의 한 상[一相]을 성취하며, 이러한 낱낱 상(相)으로부터 내지 30상(相)을 모아 이러한 30상의 백 배 공덕으로써 처음 여래 눈썹 사이 백호(白豪)의 상을 성취하고 내지 백호의 상을 배로 닦는 백천 공덕으로 처음 여래의 볼 수 없는 정수리 상을 성취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도 돕는 공덕이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지혜 돕는 것[助智]의 다함없음인가 하면, 보살이 닦는

 

                                                                               [865 / 1773] 쪽

지혜 돕는 것이란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보살이 그 가운데에서 응당 수(數)를 한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한 신행(信行)으로써 지혜를 성취하더라도 이러한 신행을 한 법행(法行)으로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백분·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로써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으며,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이 다 법행이 되더라도 한 8인(人)이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백분·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로써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습니다.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다 8인의 지혜가 되더라도 한 명의 수다원(須陀洹)이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백분·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으며,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다 수다원의 지혜가 되더라도 한 명의 사다함(斯陀含)이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으며,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다 사다함의 지혜가 되더라도 한 명의 아나함(阿那含)이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습니다.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다 아나함의 지혜가 되더라도 한 명의 아라한(阿羅漢)이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으며,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다 아라한의 지혜가 되더라도 한 명의 연각(緣覺)이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로써 비유로써 미칠 수 없으며,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다 연각의 지혜를 성취하더라도 백 겁 동안 보살이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으며,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다 백 겁 동안 보살의 성취한 지혜가 되더라도 한 명의 참음을 얻은 보살의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습니다.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다 참음을 얻은 보살의 성취한 지혜가 되더라도 한 명의 물러남이 없는 보살이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으며,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다 물러남이 없는 보살의 지혜를 얻더라도 일생을 지난 뒤 부처님 지

 

                                                                                [866 / 1773] 쪽

위에 후보 될 보살이 성취한 지혜에 비교한다면 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로써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으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세계의 중생이 다 부처님 지위에 후보 될 자가 성취한 지혜와 같게 되더라도 한 여래의 시처(是處)·비처(非處)의 지혜에 비교한다면 천분·백천분·백천만분 내지 산수나 비유로써 미칠 수 없습니다.

 

일괄하여 말하자면 여래의 모든 힘과 무소외와 불공법도 그러하나니, 만약에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서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보살은 정진을 부지런히 행하는 사람인 줄을 알지니, 이것을 일러 보살이 지혜 돕는 것의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이 슬기 돕는 것의 다함없음인가 하면, 모든 중생의 심행(心行)은 다함없으므로 보살은 그 가운데에서 응당 헤아리지[計數]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과거·미래·현재 중생의 모든 심행을 어떤 사람이 한 생각 중에서 이러한 3세 중생의 모든 심행을 갖춘다면 이러한 생각 생각에서 다 이와 같은 모든 심행을 갖추게 되어 한 사람의 심중에 갖추는 심행과 같이 모든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 또한 그러하며, 만약에 과거·미래·현재 중생의 모든 탐욕과 음심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온갖 번뇌를 어떤 사람이 한 생각 중에서 이러한 3세 중생의 모든 번뇌를 갖춘다면 이러한 생각도 마땅히 그와 같이 온갖 한량없고 그지없는 번뇌를 갖추게 되어 한 사람 심중에 갖춘 온갖 번뇌와 같이 모든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도 다 그러합니다.

 

보살이 그 중에서 지혜의 광명을 내매, 한 생각의 광명에는 아무런 티끌과 가림이 없어 과거·미래·현재 중생의 번뇌와 모든 마음의 반연하는 경계와 나고 머물고 멸하는 모양을 남김없이 다 비추나니, 이 보살은 모든 중생의 3세에 서로 응하는 번뇌를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마치 허공이 덮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지혜 광명도 그와 같아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약에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보살은 정진을 부지런히 행하는 사람인 줄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일러 보살이 슬기 돕는 것의 다함없음이라 합니다.

 

                                                                                [867 / 1773] 쪽

어떤 것이 보살이 불법 돕는 것을 닦는 일의 다함없음인가 하면, 보살이 행하는 불법 돕는 것의 닦는 일은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보살은 그 가운데에서 응당 헤아리지 않습니다. 처음 발심할 때부터 도량에 앉을 때까지 그 중간에서 6바라밀을 수행하여 원만히 갖추고 모든 조도법(助道法)을 수행하여 원만히 갖춤으로써 이와 같이 발심하여 수행한 모든 선근은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다 불법을 돕나니, 이를 일러 보살이 불법을 돕는 것을 수행함이 다함없다 합니다.

 

이를 일러 보살이 여덟 가지 일을 수행 정진함이 다함없다고 합니다.

 

또 사리불이여, 보살의 정진도 다함없습니다. 몸의 착한 업이거나 입의 착한 업이거나 뜻의 착한 업에 항상 부지런하여 중지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보살이 정진하는 일은 언제나 몸과 입과 뜻과 더불어 서로 응함으로써 몸과 입의 정진함이 다 마음을 연유한다 하지만, 마음을 증상(增上)으로 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마음 정진인가 하면, 이른바 마음의 처음과 마음의 끝이니, 마음의 처음이란 처음 발심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보리심이 적멸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모든 중생에게 큰 슬픔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나와 남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모든 중생을 거둬주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모든 법을 갖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생사를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삼계(三界)가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온갖 것을 버리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깔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처음이란 계를 받아 지니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계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참음을 수행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성냄과 싸움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모든 착함을 발심 수행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홀로 난잡하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선정을 닦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많이 들어도 싫어함이 없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처음이란 이치를 수습하여 묻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법에 말

 

                                                                               [868 / 1773] 쪽

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지혜를 구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희론(戱論)을 끊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네 가지 범행(梵行)을 닦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참된 지혜를 버리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5신통을 갖추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번뇌 다함[漏盡]을 갖추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염하는 곳[念處]을 내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염하되 생각함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정근(正勤)을 내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착함과 착하지 않음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처음이란 여의분(如意分)을 내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과보로 얻는 것[報得]을 갖추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모든 감관[根]의 방편을 내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모든 감관의 법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모든 지혜를 모으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지혜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보리 돕는 갈래[助善提分]를 내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모든 깨달음의 방편을 잘 분별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처음이란 도(道)돕는 법을 구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진취(進趣)함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적멸(寂滅)을 구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영원히 적멸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슬기를 발기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법을 잘 알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인(因)을 깨달아 알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인을 잘 알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다른 데를 따라 듣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모든 법에 방일함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장엄한 꾸밈을 내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몸의 성품을 알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입을 장엄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성스럽게 잠잠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3해탈을 행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조작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처음이란 네 가지 악마를 조복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번뇌의 습기를 버리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방편을 알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슬기를 통달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발심할 줄 알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잘 제도할 줄 알기 때문이며, 마음의 처음이란 세간의 풍속을 알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참된 이치를 잘 알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살의 마음 정진이라 합니다.

 

                                                                                [869 / 1773] 쪽

이 마음은 정진을 원만히 갖추어 다함이 없으므로 처음과 끝을 말함이요, 보살은 이와 같이 짓는 모양[作相]을 원만히 갖추어도 마음은 언제나 짓는 업에 머물지 않나니, 이는 보살이 모든 업의 모양을 알고서 일부러 짓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보살이 알고서 일부러 짓는 것인가 하면, 모든 선근을 위하기 때문이며 중생들을 위해 크게 슬픔을 닦음으로써 함이 있음[有爲]을 여의지 않음이며, 모든 부처님의 참되고 묘한 지혜를 위함으로써 생사에 떨어지지 않음이니, 이를 일러 보살마하살의 비리야바라밀을 다함없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을 연설할 때에 70나유타의 하늘과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 3만 2천의 보살마하살은 무생법인을 얻었다.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보살에게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미 보살의 비리야바라밀의 다함없음을 말하였으니, 그대는 다시 보살의 선(禪)바라밀을 말씀해주십시오. 보살이 얻는 다함없는 선바라밀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무진의보살이 말하였다.

“만약에 보살마하살이 열여섯 가지 일로써 선정을 수행하되 다함이 없다면 성문·벽지불과 더불어 같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열여섯 가지란,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나 없음[無我]은 여래의 모든 선정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맛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은 자기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큰 슬픔을 행함은 모든 중생의 번뇌를 끊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모든 선정을 증익(增益)하게 함은 욕계의 모든 과환(過患)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모든 신통의 업을 갖춤은 중생의 심행을 알기 위한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그 마음이 부드럽고 연함은 중생 속에서 자재로움을 얻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모든 삼매에 잘 드나들 줄 앎은 색계와 무색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그 마음이 적멸함은 2승(乘)의 모든 선정삼매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다시 중지함이 없음은 끝

 

                                                                               [870 / 1773] 쪽

까지 성취하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쇠하여 줄어듦이 없음은 모든 습기를 잘 끊어버리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항상 지혜에 들어감은 모든 세간을 거쳐 저 언덕에 이르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중생의 마음을 알려고 함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삼보의 종자를 끊지 않음은 다함없는 모든 선정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물러나거나 잃어버리지 않음은 그 마음이 항상 안정되어 어긋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자재로움을 얻음은 모든 착한 법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며,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되 안[內]으로 잘 사유함은 드나드는 숨[息]을 끊어 훌륭한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이를 일러 보살은 열여섯 가지 일로써 선정을 수행하여도 다함이 없어 성문이나 벽지불과 더불어 함께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는 것인가 하면, 모든 신통과 지혜를 갖추기 때문입니다. 신통이란 무엇이며, 지혜란 무엇인가. 만약에 모든 색 모양을 본다면 이를 신통이라 하고 색은 다 법성인 줄 알고서도 증(證)하지 않는다면 이를 지혜라 하며, 만약에 음성을 듣는다면 이를 신통이라 하고 3세의 모든 음성이 말의 모양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면 이를 지혜라 하며, 만약에 모든 중생의 심행을 안다면 이를 신통이라 하고 심행이 다 멸함[滅]을 알고서 멸함에 증(證)하지 않는다면 이를 지혜라 하며, 만약에 과거를 염(念)한다면 이를 신통이라 하고 3세(世)를 알고서 걸림이 없다면 이를 지혜라 하니라.

 

만약에 모든 불세계에 두루 이른다면 이를 신통이라 하고 불세계가 허공의 모양 같음을 안다면 이를 지혜라 하며, 만약에 모든 법이 파괴되는 모양이 없음을 안다면 이를 신통이라 하고 법을 보지 않는다면 이를 지혜라 하며, 만약에 세간을 헐지 않는다면 이를 신통이라 하고 행(行)을 잡되게 하지 않는다면 이를 지혜라 하며, 만약에 범천[梵]·제석[釋]·호세(護世)천왕을 벗어난다면 이를 신통이라 하고 2승(乘)의 배워야 할 이[學]와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의 지혜를 벗어난다면 이를 지혜라 하리니, 이것을 일러 보살이 선정을 수행하는 신통과 지혜의 차별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모든 중생의 번뇌가 마음을 어지럽게 함을 잘 압니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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