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80)-80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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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온갖 공함을 갖춤이라 하는가 하면, 능히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방편과 자(慈)·비(悲)·희(喜)·사(捨), 4제(諦)의 보리(菩提)와 지혜·서원의 장엄함과 사마타(舍摩他)·비바사나(毘婆舍那)·해탈(解脫)·부끄러움[慚愧] 따위를 관찰하지 않는 이것을 부처님의 방편·삼매·신통·걸림 없는 지혜라 하며,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을 섭취(攝取)하되 2승(乘)에 더럽히지 않느니라.
모든 습기를 끊고 한량없는 큰 신통의 지혜를 갖추어 온갖 중생의 귀의할 곳이 되며,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장엄하여 온갖 중생을 조복하되 네 가지 폭류와 생사의 큰 바다를 건너게 하며, 모든 얽어 묶음을 끊고 일체 법성을 청정케 하는 이것을 성품의 고요함이라 하며, 법의 고요함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면서도 법의 버리는 성품에 취향(取向)하여 분명히 법의 눈이 어두운 성품에 나아가고, 들음이 있으면 법의 귀먹은 성품에 나아가며, 부지런히 조복하여 법의 머묾에 나아가고, 멸하고 고요하여서 불꽃처럼 왕성함을 조복하는 이것을 온갖 행의 공함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그림을 잘 그릴 줄 알되, 그 중에 진흙으로 잘 바르는 이도 있고 색칠을 잘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몸뚱이는 그릴 줄 알아도 손발은 그릴 줄 모르고 어떤 사람은 손발을 그릴 줄 알아도 얼굴을 그릴 줄 모르는데, 때마침 어떤 국왕이 담요 한 장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부면서 말하기를 ‘그림 그릴 줄 아는 여러 사람은 다 이 담요 위에 모여와서 내 몸의 화상을 그려라’고 하자, 그때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기능에 따라 공동으로 만들되, 어떤 화공 한 사람이 사고로 인연하여 오지 못한 채 여러 사람은 그림을 마쳤다 해서 왕에게 함께 올렸다면, 선남자야, 이 그림을 여러 사람이 다 모여서 만들었다고 말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야, 내가 이 비유로 말함도 그 이치가 아직 분명히 나타나지 못하였느니라. 선남자야, 한 사람이 오지 않음으로써 다 모여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 화상도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나니, 불법의 행이란 것도 그와 같아서 만약 한 가지 행이라도 성취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여래의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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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원만히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모든 행을 원만히 갖추어야만 위없는 보리(菩提)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 법을 말씀하실 적에 6만의 보살이 모든 행에 대하여 공함을 원만히 갖추게 되었다.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般若)바라밀을 깨끗이 하는 것인가 하면,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열두 가지의 지혜를 갖추나니, 과거를 알되 걸림 없음이 그 하나요, 미래를 알되 걸림 없음이 그 둘이요, 현재를 알되 걸림 없음이 그 셋이요, 함이 있음[有爲]을 알되 걸림 없음이 그 넷이요, 함이 없음[無爲]을 알되 걸림 없음이 그 다섯이요, 온갖 세상의 조작을 알되 걸림 없음이 그 여섯이요, 출세함을 알되 걸림 없음이 그 일곱이요, 변재(辯才)를 알되 걸림 없음이 그 여덟이요, 진실을 알되 걸림 없음이 그 아홉이요, 세간의 진리를 알되 걸림 없음이 그 열이요, 그 으뜸가는 진리를 알되 걸림 없음이 그 열 하나요, 모든 중생의 영리함과 우둔함을 알되 걸림 없음이 그 열둘이니, 이를 지혜라 이르는 것이니라.
깨뜨리기 어려움을 능히 깨뜨리고, 관찰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이해하되, 마치 금강(金剛)을 저지하거나 파괴할 수 없음과 같은 이것을 출세의 지혜, 필경의 지혜, 온갖 중생의 마음을 진실히 아는 지혜라 하느니라.
다니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고 보기도 어렵고 아주 깊어서 배우기도 어려우며, 바른 소견과 정취(正聚)로써 모든 소견과 습기를 멀리 여의고, 스스로 앎이 분명하여서 온갖 중생의 마음을 알며, 법의 지혜와 이치의 지혜로써 아무런 탐착이 없고, 넓고 큰 광명으로 싸움도 없고 핍박함도 없으며, 시절(時節)과 시절이 지남을 잘 알아 정법취(正法聚)를 옹호하고 필경의 깨달음․바른 깨달음·진실의 깨달음으로 모든 더러움을 여의어 아무런 가책을 받지 않으며, 한 가지 행으로써 행이 없고 온갖 중생의 행이면서도 발자취의 행이 없느니라.
온갖 세간의 행을 여읠지라도 그 세간의 행을 멀리 여의지 않고, 세계를 여읠지라도 불토는 여의지 않고, 온갖 행의 장엄을 여읠지라도 중생 조복하기를 멀리 여의지 않고, 모든 행을 여읠지라도 착한 행은 여의지 않고, 중생 마음의 행[心行]의 인연을 여읠지라도 중생 마음의 행 알기를 여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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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행은 여읠지라도 세간의 법은 여의지 않고, 모든 몸을 여읠지라도 중생의 마음에 들어가는 이것을 지혜라 하나니, 이러한 지혜는 매우 얻기 어려우니라.
선근이 잘 익지 않으면 마침내 얻을 수 없고, 착한 법을 항상 수행하지 못한 자도 이러한 지혜를 얻을 수 없고, 보리 나무 아래에서라야 얻을 수 있어서 참으로 법성을 알아 모든 부처님의 옹호를 받고 저 언덕에 이르러 일체 법 보시와 단 이슬의 맛을 알게 되리니,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러한 지혜는 마침내 온갖 인연과 온갖 모양[相]과 온갖 중생심의 소행을 분명히 아나니,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에 지혜라 하느니라. 이러한 지혜는 두 가지 고요함이 있으니, 그 두 가지란 걸리는 모양[礙相]을 아는 고요함과 걸림 없는 모양을 아는 고요함이며,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깨달음이 없는 것의 깨끗함이 그 하나요, 모든 소견을 여의는 것의 깨끗함이 그 둘이니라.
이러한 지혜로써 보살마하살은 항상 중생의 영리하고 우둔한 근기 속에나 중생의 마음속에나 일체 법 가운데에 놀면서 모든 번뇌를 관찰하니, 이것이 바로 지혜이니라.
보살은 온갖 세계에 머물러도 법계에 많이 머물러서 시방세계를 잘 관찰하되, 온갖 번뇌[蓋]를 여읨은 다 불법의 근본이라고 보며, 더없는 모든 불법을 원만히 갖추어서 모든 법을 배우지 않고 모든 법을 여의지도 않으며, 한 가지 법을 헐지 않고 한 가지 법을 이룩하지도 않느니라.
보살은 이러한 지혜를 성취함으로써 능히 공덕을 짓고 불법을 읽어 외우고 말하며, 온갖 복덕을 다 얻고 온갖 착한 법을 닦아 이룩하나니, 이것을 일러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행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이 법을 말씀하실 적에 2만 2천의 중생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 8천의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고, 5백의 비구는 번뇌가 다하여 해탈하게 되고, 십천의 하늘과 사람은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다.
그때 온갖 하늘과 사람은 같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누구든지 이 경전을 믿기만 하여도 마땅히 이 사람은 여러 부처님께 옹호까지 받을 것이거늘, 하물며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고 베껴 쓰고 공양하는 사람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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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보리의 행을 깨끗이 하는 것인가 하면,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신념처(身念處)을 관찰함에 두 가지 행이 있으니, 깨끗하지 못한 행이 하나요, 깨끗한 행이 또 하나이다. 깨끗하지 못한 행이란 몸의 깨끗하지 못함으로써 냄새와 더러움이 가득하여 덧없고 머묾이 없어 모든 범부를 속이는 것인 줄 관찰함이요, 깨끗한 행이란 보살마하살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깨끗하지 못한 몸으로 인하여 깨끗한 부처님 몸을 얻고 깨끗한 법신(法身)과 깨끗한 공덕의 몸과 온갖 중생의 보기 즐겨하는 몸을 얻으리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몸을 관찰하고 나서 또 두 가지 행을 깨끗이 하나니, 첫째는 덧없음이요, 둘째는 떳떳함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몸이 덧없으므로 마침내 반드시 죽는다고 관찰하며, 이렇게 관찰하고는 몸을 위하기 때문에 나쁜 업을 짓거나 삿된 생활[命]로 스스로 살지 않고서 세 가지 견고한 법을 닦나니, 첫째는 몸의 견고함이요, 둘째는 목숨의 견고함이요, 셋째는 재물의 견고함이니라.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나서 능히 중생을 위해 심부름하여 곧 몸과 입과 뜻의 그릇됨을 멀리 여의게 되므로, 보살은 이 몸의 덧없음을 관찰하고 이러한 한량없는 공덕을 얻느니라.
어떤 것을 떳떳하다 하는가 하면, 보살마하살은 덧없음을 관찰하고는 곧 떳떳한 몸을 얻고, 덧없음을 인하므로 공덕의 몸을 얻고, 덧없음을 인하므로 불·법·승의 종자를 끊지 않느니라.
선남자야, 또 떳떳함이란 곧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음이란 곧 함이 없고[無爲], 함이 없음이란 곧 온갖 지혜의 행하는 곳이고, 온갖 지혜의 행하는 곳이란 곧 공하고 모양 없고 원 없는 곳이며, 또 떳떳함이란 바로 이 허공이므로 보살마하살은 일체 법을 마치 허공과 같다고 관찰하느니라.
선남자야, 다시 보살은 신념처를 닦아서 온갖 중생의 몸은 필경 이 부처님의 몸이고 부처님의 몸처럼 법신(法身)도 그러하고, 이 두 가지 몸과 같이 나의 몸도 그러하다고 관찰하나니, 이것을 일러 보살이 번뇌 없는 몸을 관찰한다는 것이니라. 보살이 그때 얻는 착한 법은 그 많고 적음에 따라 다 번뇌가 없으므로, 이러한 법으로써 발원하여 온갖 갖가지의 지혜에 회향하며, 번뇌를 없애고 마침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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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란 것은 이른바 욕심의 번뇌, 존재의 번뇌, 무명의 번뇌, 이 세 가지니, 보살은 세 가지 번뇌를 분명히 알고 나서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욕계에 태어나기는 하지만, 욕심과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고 색계·무색계에서도 그러하느니라.
무명의 번뇌란 것은 이미 그 뿌리를 뽑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무명(無明)을 뽑음으로써 곧 소견[見]의 번뇌가 없게 되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몸의 염을 닦고 나서 이 몸 가운데에 나[我]와 내 것[我所]을 보지 않고 교만을 내지 않아 나와 내 것을 여의기 때문에 온갖 재물을 구하거나 취하지 않으며, 구하거나 취하지 않기 때문에 재물에 대해 싸움이 없으며, 싸움이 없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고요함이니라.
무릇 고요함이란 곧 참음이니, 참음에 머문다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음이니, 높거나 낮지 않음은 곧 법답게 머묾이요, 법답게 머묾이란 착한 법을 행하지도 않고 나쁜 법을 행하지도 않는 것이니라.
높거나 낮지 않으면 착한 벗을 얻나니, 착한 벗을 얻으면 착한 지식을 만나고 착한 지식을 만나기 때문에 바른 법을 듣게 되며 바른 법을 들음으로써 번뇌의 마음을 지녀 번뇌 있는 법에 회향하지 않나니, 이것을 일러 모든 번뇌의 경계를 벗어났다 하느니라.
번뇌의 경계를 벗어나며 언제나 선정에 들고 이미 선정에 들었다면 나아가 한 가지 법에 이르기까지도 분별을 내지 않나니, 분별이 없으므로 한 법을 짓지 않고 한 법도 변하지도 않으니, 이를 참다운 법이라 하고 일체 법의 평등이라 하느니라. 만약에 이러한 모든 법의 평등을 얻는다면 이를 온갖 지혜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약에 이와 같이 몸의 염하는 대상을 관찰한다면, 이를 몸을 관찰하는 몸의 염이라고 이르니라.
선남자야, 보살은 그때 차례대로 수념처(受念處)를 관찰하여 느낌이 있는 것에 대해서 자비한 마음을 내고 모든 중생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하느니라.
‘필경의 즐거움이란 온갖 느낌을 끊음이니라. 누구든지 온갖 느낌을 끊는다면 이것이 바로 떳떳한 즐거움이리라.’
보살은 그때 느끼는 것에 따라 자비한 마음을 내나니, 자기로서나 다른 사람으로서나 즐거움을 느낄 적에 애욕의 마음을 여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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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괴로움을 느낄 때라도 성내는 마음을 여의고 슬퍼하는 마음을 내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에는 무명의 마음을 여의고 버리는 마음을 내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즐거움을 느낄 때에는 탐착하지 않고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성내거나 미워하지 않고, 괴롭지 않고 즐겁지 않음을 느낄 때에는 무명을 내지 않나니, 보살은 그때 온갖 느낌의 덧없고 괴롭고 나 없음을 관찰하여서 즐거움 느끼는 것을 보고는, 이것이 바로 괴로움인 줄 알고, 괴로움 느끼는 것을 보되 마치 헌 데나 부스럼같이 하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은 이 고요하지 않음이라 보고, 즐거움의 느낌은 바로 덧없음이라고 관찰하고, 괴로움의 느낌은 바로 허무하다고 관찰하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은 곧 나 없음이라고 관찰하느니라.
보살은 그때 이런 관찰을 하고 나서, 이 모든 느낌은 곧 느낌 없음이라고 보고, 온갖 느낌은 곧 함이 있다[有爲]고 보나니, 만약에 함이 있다면 이는 곧 나고 멸하고 흩어지고 새고 머묾이 없는 것이라고, 이렇게 관찰하고는 나[我]를 보지 않고 느낌을 보지 않나니, 이를 보살의 큰 지혜 방편이라 하느니라.
이 방편으로 인하여 온갖 느낌은 덧없이 나고 멸한다고 보고, 일체 법은 다 허무하여서 느낌 없고 느낄 것도 없고 조작 없고 조작할 것도 없이 인연에 따라 나고 인연에 따라 멸한다고 관찰하며, 매임도 없고 취함도 없어 모든 인연에 각(覺)과 관(觀)을 내지 않고 각과 관이 없음을 인하여 ‘모든 인연의 법은 다 공한 것이다’라고 말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관찰할 때에 느낌의 염하는 대상을 이룩하여 능히 몸과 마음을 다 고요하게 해서 온갖 행을 아나니, 이를 일러 느낌의 염하는 대상을 느낀다 하느니라.
어떤 것을 보살은 심념처(心念處)를 닦는다 하는가 하면, 보살마하살은 보리심에 머물러서 이 심성(心性)을 관찰하되, 안으로 느끼는[內入] 마음을 보지 않고 바깥으로 느끼는[外入] 마음을 보지 않고 안팎으로 느끼는[內外入] 마음을 다 보지 않고 음(陰) 속의 마음을 보지 않고 계(界) 속의 마음을 보지 않으며, 이미 보지 않고는 이런 생각을 하느니라.
‘이러한 마음과 인연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만약에 마음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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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과 다르다면 같은 때에 응당 두 가지 마음이 있을 것이요, 마음이 바로 인연이라면 응당 다시는 자기의 마음을 관찰할 수 없으리니, 마치 손가락 끝이 스스로 촉감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역시 그러하리라.’
이런 관찰을 하고 나서 마음은 머묾이 없고 덧없어서 변하거나 달라진다고 보고, 인연하는 대상이 멸한다면 곧 이 마음은 인연 따라 나는 것도 아니고 인연 따라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떳떳함도 아니고 끊임도 아니고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줄을 아나니, 마음을 관찰하되 이와 같이 한다면 진리다운 법에 방해되지 않고 마음의 고요함을 아는 것이니라. 이것을 보살이 마음으로 마음의 염함을 닦는다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마음을 관찰하되 색이 아니므로 볼 수 없고 각과 관이 아니라 하나니, 이를 일러 보살이 마음의 염하는 대상을 닦는다 함이니라. 심(心)과 같이 심수(心數)도 그러하고 심수와 같이 심의 행도 그러하고 심의 행과 같이 심의 구하는 법도 그러하고 구하는 법과 같이 보리도 그러하고 보리와 같이 온갖 착한 법이 다 그러하느니라.
보살이 마음 관찰하기를 원숭이가 물에 그림을 그리고 아침이슬과 왕벌[蜂王]과 고기의 어미[魚母]처럼 하며, 강물과 불꽃처럼 하고, 먼 일을 생각하듯 하며, 홀로 다녀 몸이 없고 항상 굴러서 머묾이 없고 모든 경계에 탐착해서 차례로 나고 멸한다고 하느니라. 능히 이와 같이 한량없는 마음을 거둬서 한 곳에 머물게 하고 움직이거나 굴리지 않고 새거나 섞이지 않고 산란하지 않나니, 이것을 사마타(舍摩他)라고 하느니라.
보살이 능히 이같이 관찰한다면, 이는 마음을 관찰하되 마음의 염하는 대상을 성취함이라 하고, 마음의 경계를 안다 하고, 마음의 법계를 안다 하고, 마음의 진실한 모양을 안다 하고, 마음의 진실한 성품을 안다 함이니, 이는 곧 널리 알고 깨끗이 알고 진실히 알고 허깨비[幻] 같음을 분명히 알므로 이를 일러 법을 안다 하고, 심성을 안다 하고, 마음의 마지막을 안다 하고 취(取)함이 없는 앎, 걸림 없는 앎이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같이 관찰하고 나서 온갖 중생의 심성을 잘 알며, 알고는 응하는 대로 그들을 위해 설법하느니라. 자기의 심성을 아는 것처럼 온갖 중생의 심성을 앎도 그러하고, 자기의 마음의 모양[心相]을 아는 것처럼 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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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마음의 모양을 앎도 그러하고, 자기의 마음 공함을 아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 공함을 앎도 그러하고 자기의 마음 평등함을 관찰함도 그러하여서, 이렇게 관찰하고는 법계에 움직이지 않나니, 이를 일러 보살이 마음으로 마음의 염하는 대상을 닦음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법의 염하는 대상을 닦는다 하는가 하면,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관찰하느니라.
‘법은 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며, 나와 중생과 수명과 장정도 없고, 또 나거나 멸함이 없고 빠지거나 나오는 것도 없으므로 이를 법성(法性)이라 하나니, 만약에 법을 구할 수 있다면 이는 나는 법[生法]이라 하고, 법을 구할 수 없다면 이는 멸하는 법[滅法]이라 하리라.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것이나 나는 것도 인연에 따르고 멸하는 것도 인연에 따른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에 세 가지 행을 관찰하나니, 이른바 나쁜 행과 착한 행과 움직이지 않는 행이니라. 이 세 가지 행 가운데에서도 ‘나는 항상 복되고 착한 일을 행하리라’고 하여 열 가지의 착한 법을 삼나니,
열 가지 착한 법이란, 몸의 업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여래의 32상과 80종호를 구함에 있어 다른 것이 해칠 수 없게 하려는 것이며,
입의 업을 깨끗이 함이란 모든 말씀한 것을 중생들이 즐거이 듣게 하려는 것이며,
마음의 업을 깨끗이 함이란 모든 중생에게 그 마음을 평등이 하며 항상 선정에 들어 4무애지를 깨끗이 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써 중생에게 항상 즐거움을 베풀고 슬퍼하는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써 한량없는 세간에 중생을 위해서 괴로움을 받아도 그 마음을 뉘우치지 않으며,
10력을 깨끗이 함은 중생들의 모든 근기의 영리하고 우둔함을 알기 때문이요,
4무소외를 깨끗이 함은 중생들의 장애가 있고 없음을 알기 때문이요,
열여덟 가지 법을 깨끗이 함은 3세의 장애 없음을 알기 때문이요,
모든 불법을 깨끗이 함은 온갖 중생으로서는 더 뛰어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능히 이렇게 관찰하여 모든 착한 법과 공덕에 만족하여 생각을 내지 않고서 착한 행에 친근하고 나쁜 행과 번뇌의 습기를 멀리 여의어 진실로 움직이지 않는 행을 분명히 알며, 탐내지 않음을 알고서 자재롭게 되어도 원에 따라 왕생(往生)하되, 업대로 태어나지 않고 욕계에 태어남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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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위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착한 방편을 얻어 법의 염하는 대상을 관찰하되, 보리 돕는 법을 닦고 장엄하여서 보리를 장애하는 온갖 더러움을 멀리 여의나니, 이 공덕을 얻고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에 다 집착하지 않고, 또 이 두 가지 소견을 멀리 여의고서 중도(中道)를 행하느니라.
중도에는 착하지 않은 염과 무명, 이 두 가지 법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법에서도 마음의 방일하지 않음을 중도라 하느니라.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지어감[行]과 식별[識]이 그것이며,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는 이름과 색[名色], 둘째는 6입(入)이며, 다시 닿임[觸]과 느낌[受]의 두 가지 법이 있고, 애욕[愛]와 취함[取]의 두 가지 법이 있고, 존재[有]와 남[生]의 두 가지 법이 있고, 늙고 죽음의 두 가지 법이 있는데, 이 여러 두 가지 법에서도 방일하지 않는 것을 중도라 하나니, 이러한 중도는 세간의 지혜로써 볼 수 없고 설할 수 없고 나타내 보일 수도 없으며, 어떤 모양이나 색이 없고 있는 곳이 없고 취함도 버림도 없으면서 청정하고 고요하니라.
선남자야, 무릇 중도란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내지 몸으로 부딪치지 않으며, 또 이르는 곳이 없고 세간이면서 출세간이며, 설할 수 없고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므로 중도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나와 나 없음[無我]을 두 가지 변견[二邊]이라 하나니, 만약에 말하기를, 상견(常見)도 단견(斷見)이 아니고 수명도 장정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깨달음 아닌 것도 아니고, 실다운 것도 아니고 실다운 것도 헛된 것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함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어감도 아니고 지어감이 아닌 것도 아니고, 생사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라고 하여, 두 가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이를 중도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법으로 법의 염함을 관찰하되 법계를 분별하지 않고 법계와 같이 중생계도 분별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두 세계를 허공계라 하느니라.
일체 법은 다 법계에 들어감으로 법계가 바로 중생계인 동시에 중생계는 분별이 없으므로, 이를 일러 일체 법을 관찰한다 하며, 온갖 세계를 평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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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이 바로 법계이므로, 비록 분명히 보아서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함이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살 눈[肉眼]이나 하늘 눈[天眼]이나 지혜 눈[慧眼]으로 법의 염하는 대상을 관찰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러한 세 가지 눈은 어떤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법 눈[法眼]으로 법을 관찰하기 때문에 비록 분명히 알아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 집착하지 않는다 해서 법계를 잃어버리지 않나니, 이를 부처님 지혜라 하며, 능히 이러한 아주 깊은 법계를 알고서도 온갖 지혜의 염함을 잃어버리지 않나니, 이를 보살이 법으로 법의 염하는 대상을 닦음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무엇 때문에 4념처(念處)를 닦느냐 하면, 네 가지의 뒤바뀜을 멀리 여의려고 하기 때문이니, 신념처(身念處)를 닦음은 깨끗함에 대한 뒤바뀜을 여의기 위함이요, 수념처(受念處)를 닦음은 즐거움에 대한 뒤바뀜을 여의기 위함이요, 심념처(心念處)를 닦음은 떳떳함에 대한 뒤바뀜을 여의기 위함이요, 법념처(法念處)를 닦음은 나에 대한 뒤바뀜을 여의기 위함이니라.
또 4식(食)을 여의나니, 신념처를 닦음은 단식(摶食)을 여읨이요, 수념처를 닦음은 촉식(觸食)을 여읨이요, 심념처를 닦음은 식식(識食)을 여읨이요, 법념처를 닦음은 사식(思食)을 여읨이며, 또 식(識)의 네 가지 머무는 곳을 멀리 여의나니, 신념처를 닦음은 색(色)에 머무는 곳을 여읨이요, 수념처를 닦음은 느낌[受]에 머무는 곳을 여읨이요, 심념처를 닦음은 생각[想]에 머무는 곳을 여읨이요, 법념처를 닦음은 행(行)에 머무는 곳을 여읨이니라.
다시 5음(陰)을 여의나니, 신념처를 닦음은 색음(色陰)을 멀리 여읨이요, 수념처를 닦음은 수음(受陰)을 멀리 여읨이요, 심념처를 닦음은 식음(識陰)을 멀리 여읨이요, 법념처를 닦음은 상음(想陰)과 행음(行陰)을 멀리 여읨이니, 이를 보살이 네 가지 염(念)하는 행을 깨끗이 함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4정근(正勤)한 행을 닦는다 하느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항상 온갖 착한 법을 즐거이 닦아서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쁜 법은 미리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고, 이미 생긴 나쁜 법은 멀리 여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며,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생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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