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54)-540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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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스무 가지인가? 선남자야, 만약에 보살이 필경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어서 온갖 중생에게 가장 훌륭한 큰 슬픔[大悲]을 내고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마음을 내며,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마음을 낸다면, 곧 위없는 큰 서원을 장엄하게 되리라.
무엇을 큰 서원을 장엄하는 것이라 하는가. 선남자야, 제도하지 못한 자를 제도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큰 배[船舫]를 타기 때문이며, 해탈하지 못한 자를 해탈케 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허망한 뒤바뀜을 벗기 때문이며, 안정되지 못한 자를 안정케 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두려움 없는 도[無畏道]에 편히 머물기 때문이며, 열반하지 못한 자를 열반하게 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5음(陰)의 무거운 짐을 버리기 때문이며, 항상 부지런히 중생들에게 풍족히 보급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정진하기를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며, 한량없는 생사(生死)를 버리지 않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지치거나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모든 부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현전에 공양하고 공경하기 때문이며, 온갖 불법을 받아 지니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삼보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온갖 들은 것을 받아 지녀 잊지 않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다라니를 얻기 때문이며, 설법을 잘하여 온갖 중생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변재(辯才)를 얻기 때문이며, 한량없는 공덕의 자량(資糧)을 모으기 위하여 큰 공덕을 장엄하나니 상호(相好)를 성취하기 때문이며, 온갖 선지식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소행을 굳게 하기 때문이며, 산란한 마음을 막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여러 선해탈(善解脫)삼매를 낳기 때문이며, 아란야(阿蘭若)에 머물러 몸과 목숨을 버리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6신통을 얻기 때문이며, 사자의 외침으로 두려움이 없고자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현전에 나 없음[無我]의 법을 얻기 때문이니라.
모든 세계에 이르고자 하기 위하여 서원을 장엄하나니 일체 법이 요술 같고 꿈같고 그림자 같음을 알기 때문이며, 온갖 세계를 널리 비추어 꾸미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계율을 깨끗이 하여 성취하는 힘을 받아 지니기 때문이며, 여래의 10력(力)을 성취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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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바라밀을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며, 4무소외(無所畏)을 얻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말한 바와 같이 행하기 때문이며, 18불공법(不共法)을 다 얻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나니 보살 자리의 법을 들음과 같이 희론(戲論)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이것을 보살이 스무 가지의 큰 서원을 장엄함이라 하느니라. 이 장엄의 힘을 지니기 때문에 능히 대승을 타느니라.
보살은 이 스스로의 장엄하는 힘을 지님으로써 3악취(惡趣)의 인연을 끊으므로 장엄한다 하고, 부처님을 위하여 옹호해 가질 것을 원만히 갖추므로 장엄한다 하고, 이르고자 하는 곳을 따라 곧 왕생(往生)하게 되므로 장엄한다 하고, 온갖 포태(胞胎)하는 것을 버리고서 부처님 앞에 화생(化生)하므로 장엄한다 하고, 능히 다툼이 없는[無諍] 몸․입․뜻의 업을 행하므로 장엄한다 하고, 방일하지 않은 행에 머물러 모든 천상․세간 사람의 공경을 받으므로 장엄한다 하고, 3해탈문을 잘 통달하여서 실제(實際)를 증(證)하지 않으므로 장엄한다 하고, 온갖 나 없음[無我]의 법을 다 나타내면서도 큰 서원의 장엄함을 버리지 않으므로 장엄한다 하나니, 이것을 보살이 큰 서원의 장엄함을 원만히 갖춤이라 하느니라.
무엇을 보살이 승(乘)을 장엄함이라 하는가. 선남자야, 승이란 것은 한량없음을 말하니, 끝[邊崖]이 없기 때문이고, 널리 온갖 것에 두루함이 마치 허공과 같이 넓고 커서 온갖 중생을 용납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니라. 성문 · 벽지불과는 같지 않기에 이를 대승이라 하느니라.
또 승이란 것은 4섭법(攝法)에 바르게 머무는 것으로써 바퀴를 삼고, 참되고 깨끗한 열 가지 착한 업[十善業]으로써 바퀴살[輻]을 삼고, 청정한 공덕의 자량(資糧)으로써 속바퀴[轂]를 삼고, 굳고 순수하고 지극한 것으로써 바퀴를 연결하는 못[輨轄釘鑷]을 삼고, 모든 선정 해탈삼매를 성취함으로써 멍에[轅]를 삼고, 4무량심(無量心)으로써 잘 고르는 것[善調]을 삼고, 선지식으로써 마부[御]를 삼고, 때[時]와 때 아님을 아는 것으로써 발동(發動)을 삼고, 덧없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는 음성으로써 채찍[驅策]을 삼고, 7각(覺)의 보배 끈[寶繩]으로써 고들개 줄[鞦靷]을 삼고, 청정한 5근(根)으로써 새끼 띠[索帶]를 삼고, 넓고 단정한 큰 슬픔[大悲]으로써 깃술이 달린 기[旒幢]를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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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근(正勤)으로써 그물[網]을 삼고, 4념처(念處)로써 편안하고 자세하며, 4신족(神足)으로써 빨리 나아가며, 뛰어난 5력(力)으로써 적의 진지[陳]를 관찰하며, 8성도(聖道)로써 곧게 나아가며, 온갖 중생에게 장애 없는 지혜의 밝음으로써 초헌[軒]을 삼고, 머묾 없는 6바라밀로써 살바야(薩婆若 : 一切智)에 회향하여 걸림 없는 4제(諦)로써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을 대승이라 하느니라.
이 승은 부처님의 받음이요, 성문 · 벽지불의 관찰함이요, 온갖 보살이 타는 것이고 제석 · 범천 · 호세(護世)들이 마땅히 경례하는 것이고 온갖 중생이 공양하는 것이고 온갖 슬기로운 이가 찬탄하는 것이고 온갖 세간들이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이므로, 모든 원수와 미운 자가 깔보거나 헐뜯을 수 없고, 모든 악마로서도 파괴할 수 없고, 모든 외도로서는 측량할 수 없고, 모든 세간의 지혜로서는 함께 경쟁할 수 없으며, 이 승(乘)은 가장 뛰어나므로 방해할 자 없고 모든 현성(賢聖)들이 수호하는 것이며, 이 승은 원(願)에 따라 온갖 부처님 세계에 이르기 때문이며, 이 승은 널리 비추어 비단 그물[縵網]의 광명을 놓기 때문이며, 이 승은 큰 명칭이 있어서 능히 법문에 뛰어나기 때문이며, 이 승은 굳센 뜻으로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 승은 견고하여 게으르거나 흐리지 않기 때문이며, 이 승은 바르게 머물러서 기울거나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며, 이 승은 뭇 일을 갖추어서 온갖 소원을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니, 선남자야, 이것을 일러 대승의 여러 큰 서원을 장엄함이라 하느니라.
보살은 이 승을 타고 나서 능히 한 자리[一地]로부터 한 자리에 이르나니 이것이 그 장엄이며, 모든 자리의 허물과 근심[過患]을 버리나니 이것이 그 장엄이며, 온갖 악마의 일[魔業]을 버리나니 이것이 그 장엄이며,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므로 이것이 그 장엄이며, 능히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므로 이것이 그 장엄이며, 보살의 신통 변화를 나타내므로 이것이 그 장엄이며, 나고 죽음과 큰 굶주림을 떠나므로 이것이 그 장엄이며, 여래의 행하는 곳에 들어가므로 이것이 그 장엄이니라.
선남자야, 무엇을 보살이 도(道)를 장엄하는 것이라 하는가. 보살은 큰 서원을 장엄하고 또 대승을 타며 이미 삿된 도를 버리고는 진실한 바른 도를 향하여 살바야(薩婆若)에 이르느니라. 그 바른 도라 함은 이른바 착한 법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큰 욕심을 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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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보리의 도에서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을 닦고, 착한 근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행실이 방일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순수하소 지극한 것으로써 하는 일에 빠지지 않고, 반드시 마지막 위의 법[上法]을 우러러 공덕의 자량을 구하되 만족함이 없고, 지혜의 자량을 구하여 끝까지 중지하거나 버리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의 바른 법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의 도란 것은 이른바 4선(禪) · 4무량심(無量心) · 4공정(空定) · 5신통(神通) · 3복업(福業) · 3학(學) · 6응경(應敬) · 6념(念) · 4섭법(攝法) · 4념처(念處) · 4정근(正勤) · 4신족(神足) · 5근(根) · 5력(力) · 7각분(覺分) · 8성도분(聖道分) · 3해탈문(解脫門)이며, 음(陰)의 방편을 알고 계(界)의 방편을 알고 입(入)의 방편을 알고 진리[諦]의 방편을 알고 인연의 방편을 아는 것이니, 이것을 도라고 함이니라.
보살이 이 도의 방편을 성취한다면 다 능히 6바라밀의 도에 수순하여 들어가게 되리니 왜냐하면 보살의 6바라밀의 도는 성문 · 벽지불과 더불어 같지 않기 때문이며, 이 도는 온갖 부처님께서 다 찬탄하는 바이며, 여래의 입[口]으로부터 나와 방편을 성취함이니라. 보살이 능히 일체 법의 진실한 성품을 안다면 출세간의 6바라밀 성도(聖道)에 머물 수 있으리라.
어떤 것을 머문다고 하는가. 선남자야, 만약에 보살이 자연의 지혜 방편을 성취하여 보리를 구하고 이 5수음(受陰) 속에서 사실대로 깨닫기 위하여 보리를 구한다면 색(色)이 덧없음[無常]을 알면서도 보시를 행하리라. 색은 괴롭다고 알고 색은 내가 없다[無我]고 알고 색은 둔(鈍)하다고 알고 색은 지혜 없다고 알고 색은 허깨비 같다고 알며 색은 물 속의 달과 같다고 알며 색은 꿈과 같다고 알며 색은 그림자 같다고 알며 색은 메아리 같다고 알며 색은 불바퀴[旋火輪]와 같다고 알고 색은 나[我]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수명[壽]도 없고 남[人]도 없다고 알며, 색은 시주도 없고 공양도 없다고 알며, 색은 공하고 모양 없고 원 없다고 알며, 색은 조작이 없다고 알고, 색은 나는 것[生]도 없고 이는 것[起]도 없고 나오는 것[出]도 없다고 알고 색은 형상이 없다고 알고 색은 고요하다고 알고 색은 여의는 것이라고 알고 색은 끝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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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알고 색은 성취가 없다고 알고 색은 허공과 같다고 알고 색은 열반의 성품과 같다고 알면서도 보시를 행하나니, 보살이 이러한 보시를 행할 적에 보시를 여읨으로써 색을 여읨을 알고 색을 여읨으로써 보시를 여읨을 알며, 색과 보시를 여읨으로써 원(願)을 여읨을 알고 원을 여읨으로써 색을 여읨을 알며, 색과 보시와 원을 여읨으로써 보리(菩提)를 여읨을 알고 보리를 여읨으로써 색과 보시와 원을 여읨을 알고, 그러면서도 일체 법은 보리의 성품과 같다고 아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을 보살의 출세간의 단(檀)바라밀이라 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야, 보살은 색이 덧없음을 알아 계(戒)를 옹호하고 내지 색은 열반의 성품과도 같음을 알아서 계를 옹호하나니, 수(受) · 상(想) · 행(行)도 또한 그와 같고, 식(識)은 덧없음을 알아 계를 옹호하고 내지 식은 열반의 성품과도 같음을 알아서 계를 옹호하느니라. 계를 여의는 까닭에 식도 여읨을 알고 계의 여읨을 앎으로써 내지 식도 여의고 내지 일체 법은 보리의 성품과 같음을 아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을 보살의 출세간의 시(尸)바라밀이라 하며, 찬제(羼提)바라밀 · 비리야(毘梨耶)바라밀 · 선(禪)바라밀도 다 이와 같으니라.
색은 덧없음[無常]을 알아 지혜를 행하고 내지 색은 열반의 성품과 같음을 알고서 지혜를 행하며, 수 · 상 · 행의 덧없음을 알아 지혜를 행하고 내지 식은 열반의 성품과 같음을 알고서 지혜를 행하며, 지혜가 평등함으로써 식이 평등함을 알고 식이 평등함으로써 지혜가 평등함을 알고 지혜와 식이 평등함으로써 원이 평등함을 알고 원이 평등함으로써 지혜와 식이 평등함을 알고, 지혜 · 식 · 원이 평등함을 앎으로써 보리가 평등함을 알고 보리가 평등함으로써 지혜 · 식 · 원이 평등함을 알고 곧 일체 법은 보리의 성품과 같음을 아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을 출세간의 반야(般若)바라밀이라 하고, 이것을 보살의 출세간의 바라밀의 도라 하여 온갖 도를 다 섭취(攝取)하나니, 마땅히 온갖 도는 다 그 안[中]에 들어 있는 줄을 알지니라.
무슨 까닭으로 출세간이라 하는가. 선남자야, 5수음(受陰)을 세간이라 하나니, 보살이 5음(陰)을 잘 분별하여 이것이 덧없고 내지 열반의 성품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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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관하고는 이 도(道) 속에 세간과 세간법이 없음을 아느니라. 이 도는 번뇌[漏]가 없으므로 이것이 바로 출세간이어서 얽매이거나 집착됨이 없음을 아는 것을 출세간이라 하나니, 선남자야, 이것을 보살의 도라고 하느니라.
또 도라는 것은 이른바 사실대로 일체 법을 구하고 분별 선택하여 일체 법을 보지 않으며, 서로 계속되고 쌓고 모이어 두 가지 없고 분별이 없나니, 이것을 도라 하느니라.
그러나 이 도는 미워하거나 사랑함이 없음이니, 미워하거나 사랑함이 없는 까닭에 평등하다 하고, 다른 승(乘)을 생각하거나 관찰함을 여의는 까닭에 광대하다 하고, 아첨함을 버리는 까닭에 정직[端直]하다 하고, 그릇된 마음을 버리는 까닭에 간악함[姦]이 없다 하고, 모든 덮개[蓋]를 끊어버리는 까닭에 얽매이거나 막힘이 없다 하고, 탐냄과 성냄과 헤치는 생각을 버리는 까닭에 티끌과 때[塵垢]가 없다 하고, 색․ · 소리 · 냄새 · 맛 · 촉감을 받지 않는 까닭에 안락하다 하고, 모든 악마의 일을 여의는 까닭에 청량(淸凉)하다 하느니라.
번뇌의 뭇 적(賊)을 버리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다 하고, 능히 열반에 이르는 까닭에 출요(出要)라 하고, 고요한 선정(靜定)을 성취하는 까닭에 청정한 물[水]이라 하고, 지혜를 잘 이해하는 까닭에 항상 밝음[常明]이라 하고, 자비를 잘 닦는 까닭에 청량한 즐거움[凉樂]이라 하고, 큰 슬픔[大悲]을 버리지 않는 까닭에 정진에 싫음이 없다[進無厭]하고, 언제나 기쁨을 행하는 까닭에 즐겨[悅豫]한다 하고, 버림[捨]을 성취하는 까닭에 잘못이 없다 하고, 거둬주는 법에 수순하는 까닭에 대부(大富)라 하느니라.
보시의 음식[施食] 바라밀의 힘을 성취하는 까닭에 살바야(薩婆若)의 슬기로운 변재를 얻고, 여러 부처님을 잘 옹호하여 받드는 까닭에 네 가지의 마(魔)를 벗어나는 행법(行法)이라 하고, 본래의 서원(本願)을 버리지 않는 까닭에 정진에 막히거나 걸림이 없다 하고, 온갖 번뇌의 흐름[流]을 건네는 까닭에 위없음이라 하고, 온갖 세간에서는 항복시킬 이 없는 까닭에 응답[詶對]이 없음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 도는 이러한 것과 또 다른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한지라, 모든 대사(大士)가 이 도에 오름[乘]으로써 능히 오고 가면서 한량없는 중생을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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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하는 까닭에 이것을 그 장엄이라 하고, 모든 번뇌가 없으면서 현전 번뇌에 듦으로 이를 장엄이라 하고, 생사를 관찰하되 끝나는 짬[實際]을 증(證)하지 않으며 공(空)과 무상(無相)과 조작 없는[無作] 문에 이르러 모든 소견[見]과 모양[相]과 모든 원(願)을 행하는 중생을 교화하므로 이를 그 장엄이라 하고, 현재 성문 · 벽지불의 열반에 들어서 생사를 버리지 않으므로 이를 그 장엄이라 하고, 현재 모든 갈래[趣]에 생(生)을 받으면서도 법성(法性)에 흔들리지 않으며, 현재 온갖 언교(言敎)를 말하면서도 말 없음[無言]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이를 그 장엄이라 하고, 온갖 불사를 나타내어서 보살의 행을 버리지 않으므로 이를 그 장엄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를 일러 보살이 큰 서원을 장엄하고 대승을 장엄하고 도를 장엄한다 하느니라.
보살은 큰 서원을 장엄함으로써 스스로 장엄하기 때문에 능히 대승을 타고서 출세간의 성도(聖道)에 수순하고 아직 살바야(薩婆若)를 얻지는 못하여도 중생을 위하여 불사를 일으킬 수 있느니라.”
그때 대중 가운데 보덕(寶德)이란 보살이 있다가 허공장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미 이 출세간의 성도를 닦았습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이미 닦았습니다.”
보덕보살이 또 물었다.
“어떻게 닦았습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청정한 도를 얻는 것처럼 이렇게 닦았습니다.”
보덕보살이 물었다.
“어떤 것을 청정한 도라 합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내가 청정하기 때문에 도도 청정합니다.”
보덕보살이 물었다.
“어떤 것을 내가 청정하다고 합니까?”
“세간의 청정함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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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세간의 청정이라 합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색(色)의 과거 짬[際]은 깨끗하나니 왜냐하면 색의 본래 짬이 오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색의 미래 짬도 깨끗하나니 왜냐하면 색의 미래 짬이 가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색의 현재 짬도 깨끗하나니 왜냐하면 현재의 색이 머묾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이것을 세간의 청정함이라 합니다.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과거 짬도 깨끗하나니 왜냐하면 식별[識]의 본래 짬이 오는 것[來]이 없기 때문이며, 식별의 미래 짬도 깨끗하나니 왜냐하면 식별의 미래 짬이 가는 것[去]이 없기 때문이며, 식별의 현재 짬도 깨끗하나니 왜냐하면 식별의 현재 짬이 머묾[住]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이것을 세간의 청정함이라 합니다. 선남자여, 세간 가운데에서 세간이 청정함으로써 내가 청정하고 내가 청정하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도의 청정함이라 합니다.”
보덕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이같이 청정한 도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능히 큰 지혜의 광명을 일으키나니, 이 지혜 광명의 힘으로 일체 법의 과거와 미래 짬을 알 수 있습니다.”
보덕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을 과거와 미래 법의 짬이라 합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일체 법은 과거 짬에서 나는 것이 없고 미래 짬에서 멸하는 것이 없나니, 이것을 과거와 미래 짬을 안다고 합니다.”
보덕이 다시 물었다.
“만약에 과거와 미래의 짬을 본다면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과거와 미래 이 두 가지를 함께 여읨을 보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함께 여읜다 함은 무엇을 말함입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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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견(斷見) · 상견(常見)을 여읨입니다. 선남자여, 만약에 법이 나는 것을 보고 또 법에 집착한다면 이는 곧 단견과 상견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멸함이 있고, 나고 멸함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곧 단견 · 상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이 자성(自性)과 타성(他性)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인연(因緣)을 보는 것이요, 인연을 본다면 법을 봄이요, 법을 본다면 여래를 봄이오, 여래를 본다면 진리[如]를 봄이요, 진리를 본다면 단견에 막히지 않고 상견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단견도 아니고 상견도 아니라면 곧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을 것입니다.”
보덕이 다시 물었다.
“선남자여, 만약에 생도 없고 멸도 없다면 어떻게 명수(名數)가 있겠습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가정하여 말하자니 법이라고 이름할 뿐입니다. 선남자여, 마치 허공이 있기 때문에 색(色)을 차별하는 이름이 있으니, 이른바 청 · 황 · 적 · 백의 색, 자주색[紫色] · 파리색[頗梨色] · 유리색[琉璃色], 거친 색[麤色]과 미세한 색[細色], 긴 색[長色]과 짧은 색[短色], 모진 색[方色]과 둥근 색[圓色]이 있습니다. 허공은 이러한 따위의 법에 물들지 않지만 그러나 온갖 색도 그 자성(自性)이 또한 공한 것처럼, 모든 법도 그러하여 허공과 같습니다. 다만 말을 빌려 하자니 이른바 착한 법 · 착하지 않은 법과 세간법 · 출세간법과 마땅히 하여야 할 법 · 하지 않아야 할 법과 번뇌[漏]가 있는 법 · 번뇌가 없는 법과 함이 있는[有爲] 법 · 함이 없는 법들의 명수(名數)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온갖 복(福)되지 않은 행은 하지 않나니, 하는 바 복된 행이란 다 거짓말[虛誑]이어서 참(眞)이 아니고 견고하지 않은지라, 이 보살은 온갖 행과 행 아닌 것을 알고 평등하게 온갖 모양[相]을 버리며, 반야(般若)바라밀의 힘을 성취한 까닭에 보리에 회향하여도 보리의 더함이 있거나 덜 함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또 색(色)에서 보리를 구하지 않고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속에서 보리를 구하지도 않나니, 보살은 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청정한 계취(戒聚)에 머물고, 원 없는 해탈문을 닦아 온갖 원을 만족하고, 생사의 성품은 열반의 성품과 같음을 알고, 마침내 열반에 들어도 중생의 허망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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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뀜을 끊어버리기 위해 보살의 행을 행하고, 법의 행을 행함이 없습니다. 선남자여, 이러한 보살은 열반에 들어 보살의 행을 행하는 것이오.
선남자여, 무릇 지음[作]이 있으면 다 생사라 하고 지음이 없으면 열반이라 하나니, 보살의 행은 지음이 없으므로 보살은 열반에 들어 보살의 행을 행합니다. 선남자여, 염착(染着)과 소굴(巢窟)과 망상(妄想)과 희론(戲論) 따위의 모양을 취하는 것을 생사라 하고 이러한 따위의 모양을 취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합니다. 보살은 염착 · 소굴 · 망상 · 희론의 생각을 취하지 않고 보살의 행을 행하나니, 이를 보살이 열반에 들어 보살의 행을 행한다고 합니다.”
이 법을 말할 때에 5백의 보살들이 무생법인을 얻었다.
그때 세존께서 허공장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대사야. 쾌히 법성을 말하고 보살의 행이 진실하여 다름이 없음을 일컬었도다.”
허공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는 바로 여래의 즐거움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의 지혜 밝음을 말미암아 저희들이 이 변재의 부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햇빛이 염부제(閻浮提)를 비추면, 해의 위덕(威德)의 힘으로 말미암아 눈을 지닌 자는 다 색의 모습을 보고 모든 사업을 하는 것처럼, 여래의 큰 지혜 힘을 말미암아 온갖 중생과 여러 세계를 비추는 것도 그와 같나이다.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은 설할 수 없고, 모든 말의 성품은 허공과 같으므로 모든 법은 헤아릴 수 없나니, 헤아릴 수 있는 법이라면 한량이 있고, 한량이 있다면 함이 있고[有爲], 함이 있다면 알 수 있고, 끊을 수 있고 닦을 수 있을 것이며, 알 수 있고 끊을 수 있고 닦을 수 있다면 얻음이 있고 증(證)이 있고 명수(名數)의 법이 있어 사유하고 헤아리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법을 알고 끊고 닦고 증이 있고 얻음이 있음을 보지 않는 까닭에 곧 얻는 것이 없나니, 왜냐하면 일체 법은 나는 것이 없는 까닭에 능히 이 같은 모든 법을 바르게 보고 모든 법 가운데 사랑하거나 물들지 않으며, 사랑함과 물듦이 없기 때문에 집착이 없고 집착이 없기 때문에 가까움이 없고 가까움이 없.......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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