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55)-550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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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에 받음[受]도 없고 취함[取]도 없습니다.
어떤 것이 받음도 없고 취함도 없는 것인가 하면 색이 항상하거나 항상하지 않거나 받음이 없고 취함도 없는 것이고,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늘 항상하거나 항상하지 않거나 받음이 없고 취함도 없는 것입니다. 색이 만약 괴롭거나 즐겁거나 내가 있거나 내가 없거나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거나 받음이 없고 취함도 없다면 수·상·행·식도 괴롭거나 즐겁거나 내가 있거나 내가 없거나 받음이 없고 취함도 없을 것이며, 색이 만약 공하거나 공하지 않거나 받음이 없고 취함도 없다면 수·상·행·식도 공하거나 공하지 않거나 받음이 없고 취함도 없을 것이며, 색이 만약 여의거나 여의지 않거나 받음이 없고 취함도 없다면 수·상·행·식도 여의거나 여의지 않거나 받음이 없고 취함도 없을 것입니다.
보살은 받음이 없고 취함도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의 받음이 없는[無受] 삼매를 얻으며, 이 삼매에 머물고 나면, 부처님 세존께서 위없는 심통(心通)으로써 이 보살에게 수기(授記)하시되 ‘이 보살은 비록 열반에 들었지만 모든 중생이 구경에는 열반의 성품과 같음을 보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장엄하고 보살의 큰 슬픔을 버리지 않느니라.
어떤 것을 보살이 열반에 들어서 보살의 행을 행한다 하는가. 선남자야, 무릇 지음이 있는 것을 생사라 하고 지음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 하나니, 보살은 밝은 지혜로써 온갖 행을 여의는 모양[相]을 보며 보살은 법의 눈[法眼]으로써 다 분명히 보는 까닭에 능히 여래의 지혜 밝음을 말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나이다.”
그때 보덕보살이 허공장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자기의 지혜를 숨기고 이것을 다 여래의 힘이라 합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선남자여, 여래는 어찌 ‘착한 것은 숨기고 나쁜 것은 드러낸다’고는 말씀하지 않소. 내 도로 그대에게 묻노니 생각대로 나에게 대답하십시오. 선남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약 아나바달다용왕(阿那婆達多龍王)이 없을 때라면 아뇩의 큰 못[阿耨大池]이 네 강[四河 : 남섬부주 북부에 있는 아뇩달지에서 흘러내리는 네 갈래의 큰 강. 항하(恒河)남섬부주 북부에 있는 아뇩달지에서 흘러내리는 네 갈래의 큰 강. 항하(恒河)·신도하(信度河)·박추하(縛芻河)·사다하(徙多河)의 네 강을 말한다.]으로 흘러서 중생들로 하여금 받아 쓰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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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 쓰지 못할 것입니다.”
허공장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만약에 여래가 없었다면 법과 계율이 없었을 것이며, 보살은 큰 지혜의 바다를 이룩할 수 없고 또 온갖 중생을 이익 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니, 여래께서 출세한 까닭에 법과 계율이 있고 보살이 큰 지혜의 바다를 이룩할 수 있고 또 온갖 중생을 교화 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이러한 까닭에 모든 보살이 변설(辨說)을 얻어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은 이것이 다 여래의 신력(神力)인 줄 알아야 합니다.”
보덕은 다시 물었다.
“선남자여, 여래의 변설은 보살의 마음에 굴러들어[轉至] 그 변설을 얻게 합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보덕이 말하였다.
“무엇을 여래의 힘을 말미암아 변설을 얻는다고 합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마치 과일나무를 심으면 인연의 화합으로 곧 과일을 얻는데, 나무가 곧 과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일이 나무를 떠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선남자여, 여래가 말씀하신 법을 보살이 이 법 속에서 잘 순행(順行)하기 때문에 곧 큰 지혜의 밝은 변설을 내는 것이니 부처님 말씀으로 인하여 얻기는 하지만, 그러나 굴러드는 것은 없습니다.”
보덕이 말하였다.
“희유합니다, 선남자야. 인연으로 생기는 법은 이처럼 아주 깊어 측량하기 어렵군요.”
허공장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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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자여, 일체 법은 끝내 나는 것이 없습니다.”
보덕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모든 법은 연(緣)을 따라 난다고 합니까?”
허공장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이미 난 것도 난 것이고, 아직 나지 않은 것도 난 것입니다.”
보덕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이미 난 것도 나지 않은 것이고, 아직 나지 않은 것도 나지 않은 것입니까?”
허공장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러므로 나는 것이 없다 합니다.”
보덕은 물었다.
“선나마자여, 연(緣) 가운데 인(因)이 있거나 인 가운데 연이 있습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다 없습니다.”
보덕이 말하였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이거나 연이거나 다 스스로 진실한 성품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허공장이 말하였다.
“없습니다.”
보덕이 물었다.
“선남자여, 그대는 모든 법이 인연 없이 난다고 생각합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체 법은 자성(自性)이 없어 나는 것[生]도 없고 이는 것[起]도 없고 나오는 것도 없음이니, 이러므로 연은 인을 낳지 않고 인은 연을 낳지 않으며, 자성은 자성을 낳지 않고 타성(他性)은 타성을 낳지 않으며, 자성은 타성을 낳지 않고 타성은 자성을 낳지 않나니, 그러므로 일체 법의 자성은 나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까닭은 진리[如]는 생멸이 없음으로써 법성의 실제(實際)도 생멸이 없으며, 진리는 법성의 실제임과 같이, 여래의 깨닫는 일체 법도 또한 그러하여 생멸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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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여래는 또한 출세하지 않습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이는 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일체 법에 있어 다 설할 수 없음으로 출세한다고 설할 수 없고 출세하지 않는다고 설할 수도 없나니,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여래가 출세하느냐 출세하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슬기로운 자는 여래를 비방하지 않기 위하여 마땅히 그만 두고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덕이 물었다.
“어떻게 그만 둔다고 말합니까?”
“법성의 머묾과 같으므로 그만 두고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덕이 또 말하였다.
“어떤 것을 법성의 머묾이라 합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허공의 성품 머무는 것처럼 머무는 곳이 없는 것입니다. 법성도 그와 같이 머무르고 법성과 같이 중생의 성품도 그러하고 중생의 성품과 같이 일체 법이 다 그러하고 일체 법과 같이 여래도 그렇게 머무르며, 머물되 머무른 곳이 없고 머무른 곳이 없으므로 머무름도 없고 머무르지 않음도 없나니, 그러므로 생멸(生滅)을 설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덕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여래께서 출세하는 일은 아주 깊고 깊군요.”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만약 사실대로 연생(緣生)하는 법을 분명히 안다면 이름하여 부처님의 출세(出世)라고 합니다.”
보덕이 말하였다.
“누가 이 말을 알겠습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만약 일체 법에서 더하거나 덜하지 않은 자라면 알 것입니다.”
보덕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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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더한다 합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더함이란 더 늘어나는 글귀[增上句]이니, 없는 데에서 망령되게 더 늘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더 늘어남이 없는 글귀라는 것은 평등한 글귀, 평등도 없는 글귀는 문자 없는 글귀, 문자도 없는 글귀는 가르침이 없는 글귀이니, 가르침이 없는 속에서 글귀도 없고 더 늘어남도 없고 마음·뜻·식별도 없으므로 이것은 글귀가 아닙니다. 마치 공중에 새의 발자취는 끝내 없지만 새의 발자취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체 법에 있어서 글자나 글귀가 없음도 또한 그러한지라, 글귀 없는 것을 가정하여 글귀라 하고 발자취 없는 것을 가정하여 발자취라 하는 것처럼, 여래의 출세도 출세함이 없지만 가정하여 출세라고 하는 것 또한 그와 같습니다.
이 때문에 슬기로운 자는 취(取)하여 집착하지 않으며 취하여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출세라고 가정하여 말하지만, 그러나 항상 출세함이 없음에 머무나니, 왜냐하면 나는 것이 없음[無生]은 일체 법의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것이 없다면 아무 존재[有]도 없으므로 일체 법은 아무것도 없는 성품[無所有性]이라 하며, 아무것도 없는 성품은 머무는 곳이 없고, 머무는 곳이 없으므로 머무는 짬[際]이 없나니, 일체 법과 머무는 짬이 없음이란 바로 궁극의 짬[實際]이며, 궁극의 짬은 곧 일체 법의 짬이니 그러므로 일체 법과 궁극의 짬을 같다고 말하고, 궁극의 짬이란 것은 3세[三場]가 분단(分斷)되는 짬이며 파괴할 수 없는 짬이며 단(斷)도 아니고 상(常)도 아닌 짬이며 사실대로(如實)의 짬이며 3세의 평등한 짬이므로, 이러한 짬을 일체 법의 짬과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궁극의 짬과 나[我]의 짬은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궁극의 짬과 중생·수명·교육하는 사람(敎育人)의 짬도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궁극의 짬과 아견(我見)의 짬도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아서 아견 속에 궁극의 짬이 없나니, 이 같은 것을 사실대로 안다면 스무 가지의 아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의 짬 속에는 하나도 없고 많은 것도 없는 까닭이며, 궁극의 짬과 평등은 같아서 오고 감이 없고 다하거나 멸함이 없어 궁극의 짬은 마침내 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법을 다함없는 문[無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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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다함없는 짬[無盡際]이라 합니다.
열반이란 다함이 없는 것이니, 이른바 공하기 때문이요,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반이 다함이 없고 다하지 않음도 없는 것처럼 일체 법도 그와 같나니, 이러한 까닭에 일체 법과 열반을 평등하다 하며, 모든 법은 평등함도 없고 평등하지 않음도 없고 짝[儔]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허공이 짝이 없는 것처럼 일체 법도 그러하나니, 만약에 짝이 있다고 보고 열반이 있다고 말하는 자로서 이미 열반이 있다고 말하고는 곧 열반을 구한다면, 현성(賢聖)과는 서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미 열반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문득 이것은 마땅히 알아야 하고 이것은 끊어야 하고 이것은 증득해야 하고 이것은 닦아야 하고 이것은 낳아야[生] 하고 이것은 없애야[滅] 한다고 말하나니, 이와 같이 행이 갖추어지지 못한 자로서 여실히 알지[知] 못하고 여실히 보지도[見] 못하면, 곧 분별도[識] 못하고 이해도[解] 못하나니,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여 일체 법을 분별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자에 집착하고 일체 법에 있어서 망령되게 다투나니, 불법 가운데에 다투는 자야말로 가엾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사문(沙門)의 법은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대덕 아난(阿難)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대사들은 재변(才辯)이 이렇게 아주 깊고도 분명하여서 알기 어렵고 측량하기 어렵나이다. 일체 법을 다른 데로부터 받지 않고 스스로가 몸소 증득한 것처럼 이와 같이 말합니다.”
허공장보살이 곧 아난에게 말하였다.
“대덕이여, 나는 이미 스스로의 몸으로 증득하여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증득하여 아는 것을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몸이 바로 허공인 까닭에 허공으로써 일체 법을 증득하여 알아 허공인(印)을 인(印)치는 것입니다.
대덕 아난이시여, 무릇 보살로서 몸을 닦아 몸의 상호[相]를 잘 이해하는 자라면, 능히 이 몸으로써 모든 불사를 일으키고 갖가지 모양[色像]을 나타내면서도 참다운 법신(法身)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번뇌의 업[結業]으로 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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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몸을 여의지 않고 평등한 성품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변화의 몸을 나타내어 다 자재롭게 되며, 온갖 부처님 나라에 널리 보이어 마침내 변화하는 몸을 숨기지 않으리니, 이같이 행하는 자는 다 그의 몸으로 행을 증득[證]한다고 합니다.”
아난이 물었다.
“선남자여, 그대는 법에 있어서 자못 증득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대덕 아난이여, 나는 법이 몸을 여읜다거나 몸이 법을 여읜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난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대가 만약에 몸소 증득하였다면, 그대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습니까?”
허공장이 말하였다.
“대덕이시여, 얻음도 얻지 않음도 없나니,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요, 일체 법에 고뇌의 행이 없기 때문이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읜 때문이니, 이것을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아난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대는 어느 때에 반열반하겠습니까?”
허공장이 말하였다.
“대덕이시여, 아라한이란 것은 반열반이 없소. 일체 법이 끝내 열반인 줄을 안다면 열반의 모양도 없거늘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이같이 분별하고 희론(戲論)을 행하여 ‘이것은 생사요 이것은 열반이다’라고 말하지만, 아라한이란 것은 이런 희론이 없습니다.”
대덕 아난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내가 그대가 말하는 뜻을 이해하는 것처럼, 대저 보살이란 마땅히 범부라고도 말할 수 없고, 또 배운 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배우지 않은 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니, 두 가지 모양[相]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허공장이 말하였다.
“대덕 아난시여, 거룩하고 거룩합니다. 범부가 아니고 배워야 할 이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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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 배울 것이 없는 이도 아니기 때문에 있는 곳마다 다 나타내 보이고 일체 법에 있어서도 취(取)하여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때 5백의 큰 성문들이 각각 자기가 입고 있는 우다라(優多羅) 비단으로써 허공장보살께 받들어 올리고 그리고는 일시에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어떤 중생이 깊은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낸다면, 쾌히 착한 이익을 얻고, 이 같은 큰 지혜의 법장(法藏) 속에서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받들어 올린 비단 옷이 이내 나타나지 않자 여러 성문들은 허공장에게 물었다.
“옷은 어느 곳으로 갔습니까?”
허공장이 대답하였다.
“나의 갈무리 속에 들어갔소. 그리고 여래께서는 당신들이 물을 줄 알고 계시오.”
그때 여러 성문들이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옷은 어느 곳으로 갔나이까?”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동방으로 한량없는 아승기의 여러 부처 나라를 거쳐 가사당(袈娑幢)이란 세계에 산왕(山王)여래라고 부르는 부처님이 계시는데, 허공장이 이 옷을 이미 저 세계에 보냈느니라.”
성문들은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옷을 보내어 저 세계에 이르게 하였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옷으로 저 세계에 불사를 일으키려 함이니라. 허공장보살이 여기에서 허공장 따위와 같은 삼매인(三昧印) 법문을 말하매, 이 삼매가 저 옷 속에서 마땅히 그의 법음(法音)을 연출하므로 저 세계의 한량없는 아승기 보살들이 이 법음을 듣고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음이니, 여러 비구들이여, 보살은 이러한 갖가지 방편을 만들어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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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을 말할 때에 윗 허공 속에서 한량없는 금색의 꽃을 뿌려 이 꽃으로써 묘보장엄(妙寶莊嚴)의 도량을 두루 덮고, 여러 꽃 속에서는 이러한 법음(法音)을 연출하였으니, 그 어느 중생이라도 이 허공장의 설법을 듣고서 잘 수순하고 사유하여 그 이치를 분별한다면 다 마땅히 퇴전(退轉)하지 않는 인(印)을 인(印)치고 마침내 결정코 위없는 도량에 이르게 되리라.”
그때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어떤 상서로운 징조이기에 꽃을 뿌려 이러한 묘음(妙音)을 연출하여 중생을 편히 위로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광명장엄(光明莊嚴)이라 하는 범천(梵天)이, 그 범천으로부터 68백천의 범중(梵衆)들과 함께 이곳에 오고자 함이니라.”
여래께서 이 말씀을 하고 나자, 때마침 여러 범중들이 홀연히 묘보장엄 당상(堂上)에 이르러, 부처님 발에 엎드려 절하고 오른 편으로 일곱 바퀴 돌고, 그리고는 한쪽에 서서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아뢰었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허공장보살은 불가사의합니다. 계취(戒聚)를 청정히 하여 모든 선정을 잘 닦으며, 큰 지혜를 잘 분별하여 모든 신통에 유희하며, 크고 넓은 서원을 만족히 하여 큰 방편을 잘 성취하며, 몸과 입과 뜻을 장엄하여 모든 법에서 크게 자재로움을 성취하였나이다. 이 허공장보살은 몸·입·뜻에 아무런 조작이 없고 분별함[分別憶想]이 없으면서도 이 불가사의한 장엄과 신변(神變)을 나타내며, 또 한량없는 백천의 법문을 드러내고 백천의 삼매문에 드나들게 되었으니, 이는 옛적부터 항상 착한 법을 즐거이 닦아 성취한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들은 옛적에 닦은 선근(善根)에 응하지 않고 그 인(因)을 알지 못하며, 모든 선근을 닦되 또한 싫어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적에 심은 선근의 과보(果報)를 인하여 능히 이같이 불가사의한 신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말과 같이 그렇고 그렇다. 보살들은 이미 선근의 자량(資糧)과 출요(出要)의 지혜 방편을 성취하였기에 이같이 불가사의한 공덕이 장엄한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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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내어도 분별함도 없고 또 분별하지 않음도 없느니라.”
범천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보살이 선근의 자량과 출요의 지혜 방편을 모은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광명장엄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근에 세 가지가 있으니, 그 세 가지란, 이른바 탐냄이 없는 선근, 성냄이 없는 선근, 어리석음이 없는 선근이니 이것을 선근이라 하고, 자량이란 이른바 온갖 있는 것[所有]을 버리고서 자비심을 닦아 모든 법을 관하는 이것을 자량이라 하며, 방편이란 것은 이른바 범부의 자리[地]를 여의고 성문·벽지불의 자리를 원하지 않고서 보살의 자리에 나아가는 이것을 방편이라 하며, 지혜란 것은 이른바 착하지 않은 법을 버릴 줄 아는 지혜, 착한 법을 모을 줄 아는 지혜, 보리에 회향할 줄 아는 지혜 이것을 지혜라 하니, 보살이 능히 이러한 바른 행에 머무는 것을 출요라 하느니라.
다시 선근이란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며, 자량이란 것은 이른바 온갖 착한 법을 구하는 것이며, 방편이란 것은 이른바 이미 지었거나 아직 짓지 않은 선근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며, 지혜란 것은 이른바 허깨비[幻化] 같음을 아는 것이니, 이러한 법을 현전(現前)에 분명히 아는 것을 출요라 하느니라.
다시 선근이란 순수하고 지극한 것[淳至]이며, 자량은 발동(發動)하는 것이며, 방편은 깊은 마음[深心]이며, 지혜는 가짐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것이니, 능히 이러한 법을 행함을 출요라 하는 것이니라.
다시 선근이란 착한 법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자량이란 훌륭하게 정진하는 것이며, 방편이란 방일하지 않은 데 편히 머무는 것이며, 지혜란 온갖 것이 의지하거나 집착함을 버리는 것이니, 능히 이러한 행을 행함을 출요라 하느니라.
다시 선근이란 바르게 믿는 것이며, 자량은 본원(本願)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방편은 염정[念定 :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을 말한다.]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지혜는 슬기로운[慧]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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