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40)-400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391 / 1773] 쪽
허공을 봄도 또한 평등하여 생사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관하고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하는 것, 생사의 허물을 보고 마음으로 후회하는 것이 없음이니, 이러한 모든 착한 법을 원만히 갖추어 항상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친근해야 합니다.”
이 법을 말할 때에 사자 장군과 권속들이 유순한 지혜[柔順忍]을 얻었다.
이때 세존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아난아, 네가 마땅히 이러한 경전을 받아 가지고 읽어 외우며 베껴 쓸지니, 그 까닭은 이 경전은 일체 법의 모양을 분별했으며, 또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였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만약 능히 한량없는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을 심는다면, 이 사람은 이 경전을 믿고 받아 가지고 읽어 외우며 베껴 쓰고 널리 이치를 분별하리라. 이 경전을 받는 사람은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냄이요, 둘째는 물러나지 않는 마음을 얻음이요, 셋째는 능히 바른 법을 보호함이니라.”
이때 대중이 이 말씀을 들으니 7나유타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래께서 멸도하신 후 능히 이 경전을 받다 가져 읽어 외우고 베껴 쓰겠나이다.”
무언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 세존은 어떠한 법을 얻어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받아 가지며 지키고 보호합니까?”
“선남자야, 만약 능히 이 법 가지는 사람을 보호하면 이것이 바로 법을 보호함이니, 이른바 베껴 쓰고 읽어 외우고 문자로 해석함이니라. 문자는 설할 수 있지만 법은 설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야, 법을 보호하는데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법답게 머무름이요, 다른 하나는 이 문자를 외움이니, 만약 문자가 없으면 법을 설할 수 없으리라.”
이때 모든 대중과 사자 장군의 권속과 모든 천상·세간 사람들이 이 법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392 / 1773] 쪽
대방등대집경 제13권
북량 천축 담무참 한역
이진영 번역
7. 불가설보살품(不可說菩薩品)
그때 세존께서는 짐짓 욕계와 색계의 중간 큰 보배 궁전 가운데 계시면서 여러 대중에게 둘러싸여 설법하셨다.
이때 대중 가운데에 불가설이란 한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다시 단정하게 하고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부처님 발에 나와 예배하고 합장하고 꿇어앉아 게송으로 말하였다.
걸림 없는 지혜와 걸림 없는 계행
허공의 성품 같아 설할 수 없고
3세에 평등해 각(覺)과 관(觀) 없으니
나 이제 더 없는 높은 이께 예배합니다.
무상(無相)을 관하여 고요함 즐기고
온갖 감관 조복하여 모양 여의시며
모든 법성 둘 없음을 밝게 아시니
나 이제 사람의 사자왕께 예배합니다.
중생 성품이나 법의 성품
모두 차별 없음 관하시고
[393 / 1773] 쪽
중생을 보는 마음 평등하시니
온갖 성품 끊은 이께 예배합니다.
보리를 얻었으나 얻은 것 없으니
보리의 성품처럼 색(色)도 그러하며
무상(無相)의 장엄으로 모양을 장엄하니
나 이제 더 없는 높은 이께 경례합니다.
모든 법계는 각과 관 없건만
범부가 보기로는 모양 있는 법이라고
법계의 성품 무너지지 않으니
나 부처님 진실한 지혜에 예배합니다.
여래의 몸의 업 설할 수 없고
입과 뜻의 업도 또한 그러하여
모든 법의 성품과 중생까지도
더 없이 높은 이는 분명히 아시네.
여래는 진실한 경지에 머무르시어
그 연설하심 음성과 문자 없고
중생들 즐겨 듣고 큰 이익 얻으니
그러므로 여래는 헤아리기 어렵네.
연설하신 여러 법 모양 없으며
중생을 조복하여 온갖 존재 끊고
중생과 법성 공함을 연설하시니
나 대장부께 예배합니다.
그때 불가설보살이 이렇게 게송으로 찬탄하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394 / 1773] 쪽
“세존이시여, 여기에 모인 보살들이 제각기 뜻대로 묻기를 마쳤으니, 제가 이제 이 대집경전에서 조금 묻고자 합니다. 원컨대 여래께서 가엾이 여겨 들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야. 의심나는 대로 물어라. 내 너를 위해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그때 불가설보살이 이미 허락을 받고는 곧 선정에 들었는데, 선정에 든 뒤에 대중들로 하여금 다 큰 보대(寶臺)에 있게 하고, 허공에 올라가서 꽃과 향을 뿌리고 갖가지 흥겨운 풍악으로써 공양하고 외쳤다.
“이제 불가설 보살마하살은 여기에서 큰 일을 묻고자 합니다.”
그때 불가설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의 보리는 청정하고 고요하며, 크게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어둠 없이 크게 빛나며, 진실 그대로 성품도 평등하고 미묘하고 매우 깊어서 각과 관이 없으며, 온갖 더러움을 멀리 여의어 연설할 수 없습니다.
또 글자 없고 글귀 없고 음성도 없으며, 넓고 크기가 한량없고 끝과 짬이 없으며, 온갖 가[邊]를 여의어 더하고 덜하지도 않고 나아가거나 물러나지도 않고 머물러 그침도 없으며, 험하고 평평함도 없고 있는 것 없는 것도 없습니다.
견고하여 무너짐이 없고 나와 내 것이 없고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며, 넓거나 좁은 것은 없고 법 없고 중생 없으며, 다함없고 마지막 다함도 없으며, 공도 아니고 공한 성품도 아니고 그런 이치도 아니고 그런 이치 아님도 아닙니다.
또 마음도 아니고 지음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멸함도 아니며, 흙·물·불·바람과 같아 끝과 짬이 없어 측량할 수 없으며, 평등하고 두루 하여서 장애 없기가 마치 허공 같으며, 눈의 식별의 경계가 아니고 내지 뜻의 식별의 경계도 아니며, 온갖 존재를 끊어 비유할 수 없음은 온갖 비유를 여읨이니,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지혜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 아닌 것이 아님은 온갖 중생이 다 얻기 때문이며, 진리와 다르지
[395 / 1773] 쪽
않은 것은 온갖 중생이 다 평등하기 때문이며, 그 성품이 바로 존재란 것은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며, 그 성품이 바로 진실함이란 미래와 현재의 짬이 없기 때문이며, 지음[作] 없어 받음[受] 없고 색(色) 없어 마음[心] 없고 생각[想] 없어 수(受)가 없으므로 온갖 감관을 끊고, 상(想)이 없어서 생각을 끊고, 행(行)이 없어서 지어감을 끊고, 식(識)이 없어서 분별을 끊고, 음(陰)·입(入)·계(界)가 없어서 음·입·계를 끊고, 처음·중간·뒤가 없어서 모든 마군의 업을 여의며 유포함이 없고 번뇌[漏]가 없어 거둬줌이 아닙니다.
행함도 아니고 하소연[頌]도 아니며, 다툼도 없고 죄도 없으며, 항상 자성(自性)에 머물러 분별이 없으며, 나는 것도 없고 낼 수도 없고 멸함[滅]도 없고 멸할 수도 없으며, 근본이 없어 위·아래가 없고 집[屋宅]이 없어 모나거나 둥근 것이 없으며, 지혜도 아니고 슬기도 아니어서 슬기로운 행도 아니며, 진리[諦]의 거둬줌도 아니고 생사의 거둬줌도 아니며, 다스림[對治]도 없고 공덕을 갖춤도 없어서 모든 모양[相]을 멀리 여읩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이러한 이치를 보리라 한다면, 이는 곧 변함없는 글귀, 깨달음 없는 글귀, 탐욕 없는 글귀, 다툼 없는 글귀, 견고한 글귀, 무너지지 않는 글귀, 움직이지 않는 글귀, 짓지 않는 글귀, 몸 없는 글귀, 남[生]없는 글귀, 더함이 없는 글귀, 평등한 글귀, 두 가지 없는 글귀, 실다운 글귀, 존재[有]의 글귀, 참된 글귀, 가장 으뜸 되는 글귀, 분별없는 글귀, 한 맛[一味]의 글귀, 한 일[一事]의 글귀, 1승(乘)의 글귀입니다.
다함없는 글귀, 3세가 평등한 글귀, 3세를 분별하는 글귀, 공(空)한 글귀, 모양 없는[無相] 글귀, 원 없는[無願] 글귀, 지어감 없는[無行] 글귀, 고요한 글귀, 성품의 글귀, 진리[如]의 글귀, 남이 없는[無生] 글귀, 나옴이 없는[無出] 글귀, 다한[盡] 글귀, 집 없는 글귀, 법의 글귀, 진실한 성품의 글귀, 자신(自身)의 성품 글귀, 몸 없는 글귀, 지음 없는 글귀, 모양 없는 글귀, 말다툼 없는 글귀입니다.
끊임없는 글귀, 덧없는[無常] 글귀, 12인연의 글귀, 하관할 만한[下觀] 글
[396 / 1773] 쪽
귀, 선정의 글귀, 윗[上] 글귀, 훌륭한[勝] 글귀, 죄와 허물이 없는 글귀, 위없는 글귀, 필경의 글귀, 청정한 글귀, 정수리 없는 글귀, 이길 수 없는 글귀, 견줄 수 없는 글귀, 의지함이 없는 글귀, 염하는 글귀, 서로 같음이 없는 글귀, 온갖 세간에 뛰어난 글귀, 글귀 없는 글귀, 온갖 글귀의 의지하는 글귀입니다.
이러한 보리(菩提)는 푸르고 누른 것도 아니고 붉고 흰 것도 아니고 색도 아니고 색 아닌 것도 아니며, 길고 짧은 것도 아니고 둥글고 모진 것도 아니고 어떤 표준이 있는 것도 아니며, 삼계의 거둠이 아니고 도가 아니고 필경이 아니고 행함이 아니고 이르는 것이 아니며, 처소가 아니고 취함이 아니고 버림이 아니며, 온갖 번뇌를 여의어 수심이나 두려움이 없으며, 온갖 기쁨을 끊어 참과 거짓이 없으며, 온갖 감관을 여의어 나[我]와 내 것[我所]이 없으며, 중생·수명·장부가 없으며, 한량없고 그지없고 헤아릴 수 없고 분단과 한계가 없음이 마치 허공 같아서 그 성품은 마침내 연설할 수 없나니, 이러한 한량없는 법을 성취함을 보리라 합니다.”
이 법을 말할 때에 삼천대천세계의 온 땅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온갖 하늘은 향·꽃·풍악으로 큰 공양을 베풀면서 제각기 말하였다.
“참 훌륭합니다. 선남자여, 이 말씀을 잘 하셨습니다.”
그때 모임 가운데 8만 4천의 보살이 무진기(無盡器) 다라니·일체자재(一切自在)삼매·무애해탈문(無礙解脫門)을 얻었으며, 어떤 사람이나 이러한 신심을 내는 이는 다 이 법의 이익을 얻었다.
그때 불가설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의 계(戒)는 가히 설할 수 없나이다. 왜냐하면 몸의 본 성품을 설할 수 없으므로 몸의 계를 설할 수 없으며, 입의 본 성품도 설할 수 없으므로 입의 계를 설할 수 없으며, 뜻의 본 성품도 설할 수 없으므로 뜻의 계를 설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더 없는 보리도를 수행할 적에 열 가지 착한 법[十善法]을 보호하는 것도 설할 수 없나니, 만약에 열 가지 착한 것으로써 중생들에게 권한다면 중생들에게 권하는 것도 설할 수 없으며,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마음을 닦음도 설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마음을
[397 / 1773] 쪽
닦아서 중생을 없다고 관하고, 슬픔을 닦아서 지음과 느낌이 없고, 기뻐하는 마음을 닦아서 교만에 취(醉)함을 여의고, 평정한 마음을 닦아서 이 두 가지 모양을 멀리 여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4무량심(無量心)을 닦으면 곧 청정한 범행(梵行)을 닦아 범도(梵道)에 머물리니, 이 범(梵)의 방편은 온갖 범에 뛰어나므로 항상 여러 범천의 공양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범행에 뛰어나기 때문이며, 중생 인연의 사랑을 닦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법 인연의 슬픔을 닦지 않기 때문이며, 두 가지 형상 인연의 기쁨을 닦지 않기 때문이며, 안팎 인연의 버림을 닦지 않기 때문이며, 온갖 세간의 행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세간의 모든 범행을 버리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항상 여러 범천의 공양을 받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이 인연으로써 보살의 계는 설할 수 없나니 보살의 계란 마침내 스스로 속이지 않고 부처님을 속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란 것은 곧 성품 없음이요, 성품 없음은 곧 없음이요, 없음이란 나옴[出]이 없음이요, 나옴이 없음이란 곧 인연이 없음이요, 인연이 없음이란 글자 없음이요, 글자 없음이란 곧 설할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보살이 이렇게 배운다면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어떤 것을 속이지 않음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부처님 여래는 일체 법이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님을 분명히 깨달음이니, 만약에 법이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라면 곧 평등함이요, 이러한 평등은 설할 수 없으므로 보살이 만약에 이렇게 배우면 모든 부처님 여래를 속이지 아니한다 하겠습니다.
또 스스로란 것은 나 없고 내 것 없음이요, 나 없고 내 것 없음을 아는 것이니, 만약에 이와 같이 닦아서 배운다면 나 없고 내 것이 없을 것이며, 이와 같이 생각하여 관한다면 스스로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여래는 능히 진리[如]에 따르나니, 진리에 따름이란 곧 중생에 따름이요, 중생에 따름이란 일체 법에 따름이요, 일체 법에 따름이란 곧 나지 않고 멸하지 않고 머물지 않음이니, 만약에 법이 나지 않고 멸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면 곧 함이 없는 것[無爲]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이 없는 법을 말하는데 세 가지 모양[相]이 있으니, 이른바 나옴이 없고 멸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음인데, 이런 이치를 함
[398 / 1773] 쪽
이 없음이라 하나니, 함이 없음은 곧 성(聖)이요, 성은 원수가 없음이요, 여래는 온갖 원수를 여의므로 성이라 합니다.
원수란 것은 무명(無明)을 말함이니, 여래는 온갖 원수를 여읨으로써 원수들의 침해를 당하지 않지만, 범부는 무명을 갖추므로 항상 원수의 침해를 받습니다. 여래 세존께서는 원수의 경계와 지혜의 경계를 관하고 번뇌의 경계와 고요한 경계를 알며, 생사의 경계와 열반의 경계를 알고 중생계와 법계를 알며, 마군의 경계와 부처님 경계를 분명히 알고 색의 경계, 눈의 경계, 귀의 경계, 소리의 경계, 코의 경계, 냄새의 경계, 혀의 경계, 맛의 경계, 몸의 경계, 촉감의 경계, 뜻의 경계, 법의 경계를 분명히 압니다.
무명(無明)의 경계와 지혜의 경계가 다 평등하다면 곧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이며, 생사와 열반의 두 경계가 평등하다면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이며, 이름과 색[名色]의 경계나 이름과 색을 아는 경계가 다 평등하다면 이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임을 압니다.
또 6입(入)의 경계와 6신통(神通)의 경계가 다 평등하다면 곧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이며, 닿음[觸]의 경계와 멸함[滅]의 경계가 다 평등하다면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이며, 느낌[受]의 경계와 멸함의 경계가 다 평등하면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이며, 애욕의 경계와 멸함의 경계가 다 평등하다면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이며, 취함[取]의 경계와 멸함의 경계가 다 평등하다면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입니다.
존재[有]의 경계와 멸함의 경계가 다 평등하다면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이며, 생(生)의 경계와 사라짐의 경계가 다 평등하다면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이며, 늙고 병들고 죽는 경계와 멸함의 경계가 다 평등하다면 부처님 경계는 설할 수 없는 경계임을 알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만약 이와 같이 관한다면 온갖 경계에 들어가게 되고 이러한 여러 경계에 들면 탐냄[貪] 있는 이를 보고 성내지 않고 탐냄 끊은 이를 보아도 사랑하지 않으며, 성냄[瞋] 있는 이를 보고 성내지 않고 성냄 끊은 이를 보아도 사랑하지 않으며, 어리석음[癡] 있는 이를 보고 미워하지 않고 어리석음 끊은 이를 보아도 사랑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399 / 1773] 쪽
세 가지 경계 속에서 분명히 아는 까닭에 이와 같이 세 덩어리[三聚]를 다 압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만약 이것을 배우고자 한다면 여래를 속이지 않으리니, 왜냐하면 모든 여래의 깨닫는 법을 알고, 또 이 보살은 배움에 수순(隨順)함으로써 여래를 속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임 가운데에 무소외(無所畏)라 하는 한 보살이 불가설보살에게 물었다.
“어떻게 배우는 것이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합니까?”
불가설보살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만약에 보살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계(戒)를 가지는데 저 사람은 계를 깨뜨린다’고 하면 이러한 보살은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할 것이며, '나는 보시하고 저 사람은 인색하며 나는 인욕을 닦고 저 사람은 성내며, 나는 정진하고 저 사람은 게으르며, 나는 선정을 닦고 저 사람은 산란하며, 나는 지혜롭고 저 사람은 어리석으며, 나는 만족을 알고 욕심이 적은 사람으로서 고요함을 즐기고 몸 가꾸기를 검소하게 하며, 걸식하고 더러운 옷을 입되 3의(衣)를 갖추고, 대중 속에 처하지 않으며, 많이 듣고 청정한 말로써 고운 말씨를 쓰며, 중생들이 즐거이 받고 지혜를 염(念)하게 하고, 모든 위의와 입의 업(口業)을 깨끗이 하며, 4섭법(攝法)과 자비희사(慈悲喜捨)를 갖추며, 진실하게 말하되 말함과 같이 머물며, 마군의 경계를 알고 알고는 멀리 여의며, 항상 6바라밀을 배우고 설법을 잘 하여서 여러 중생을 위해 큰 서원을 내고 중생을 교화시켜 방일하지 않게 한다’고 이와 같이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는다면, 이 보살은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나는 이러한 법을 관찰하고 멀리 여의어서 멸함[滅]을 닦는다’고 말한다면, 이도 또한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여러 부처님들이 출세하거나 출세하지 않거나 법의 성품은 언제든지 머무르는 까닭에 일체 법계는 알아볼 수 없고 멀리 여읠 수 없고 멸함을 닦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만약 나와 내 것을 말한다면 이도 또한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두 가지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에 말하기를 ‘나는 이미 증
[400 / 1773] 쪽
(證)을 얻었고 나는 능히 멀리 여읜다’고 한다면 이도 또한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성품은 청정하기 때문이며, 또 ‘나는 4념처(念處)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여래는 일체 법을 분명히 깨달아서 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4정근(正勤)이 있다’고 말하는 자도 또한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여래는 일체 법을 깨달아서 본 성품을 여의기 때문이며, ‘나는 4여의분(如意分)이 있다’고 말하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여래는 일체 법을 깨달아서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나는 이미 5근(根)·10력(力)·7각분(覺分)·8정도를 갖추었다’고 말한다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여래 세존은 성품이 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르고 도가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몸이 바로 이 도이기 때문이며, ‘무명(無明)이 유애(有愛)와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무명과 유애는 곧 지혜이고 해탈이기 때문이며, ‘3독(毒)은 3해탈문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이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기 때문이요, ‘네 가지 뒤바뀜[四倒]이 네 가지 과[四果]와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네 가지 뒤바뀜이 곧 네 가지 도과(道果)이기 때문입니다.
‘8사(邪)가 8정도(正道)와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8사를 헐기 위하여 8정도를 닦기 때문이며, ‘중생의 9거지처(居止處)가 부처님의 9차제(次弟)와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부처님이 10선법(善法)이 무학(無學)의 10선법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도 여래를 속이는 것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일체 법을 수학(修學)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에 이러한 여러 법을 배운다면 이것을 이르러 여래를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선남자여, 모든 중생과 한 중생은 둘이 아니고 차별이 없나니, 왜냐하면 그 성품이 나가 없기[無我] 때문에 한 중생이나 모든 중생이 둘이 아니고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대방등대집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집경(42)-420 (0) | 2015.11.24 |
---|---|
대집경(41)-410 (0) | 2015.11.23 |
대집경(39)-390 (0) | 2015.11.21 |
대집경(38)-380 (0) | 2015.11.21 |
대집경(37)-370 (0) | 2015.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