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늙음을 재촉한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우리들이 말세에 태어나 성질이 어리석고 미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비하(卑下)로 상(相)에 집착하여 도를 구한다면, 예전 사람들이 배워 얻은 선정과 지혜의 오묘한 법은 어느 누가 행할 것인가. 행하기 어렵다고 하여 그것을 버려두고 닦지 않으면, 지금 닦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힘써 닦으면 닦기 어려운 행일지라도 닦아 익힌 그 힘이 있기 때문에 점점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예전에 도를 얻은 사람치고 범부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이가 어디 있었던가. 그리고 여러 경론(經論) 중에 말세 중생이라고 해서 번뇌가 없는 도를 닦지 못하게 한 귀절이 있던가.
<원각경(圓覺經)>에 말하였다.
'말세 중생이라도 망령된 마음만 내지 않으면 그는 곧 현세의 보살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화엄론>에서는,
'만약 이 법이 범부의 경계가 아니고 보살의 행할 바라고 한다면, 그는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없애고 정법을 파멸시킨 것이 된다.'고 하였다. 지혜있는 사람은 이런 각오로 부지런히 수행해야 한다. 비록 수행하여 당장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선(善)의 씨앗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쌓아 익힐 좋은 인연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심결(唯心訣)>에서 말하기를,
'듣기만 하고 믿지 않더라도 부처될 인연의 씨를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할지라도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낫다.'고 한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말법이니 정법이니 따질 것도 없고 자기 마음의 어둡고 밝음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믿는 마음으로 분수를 따라 수행하여 바른 인연을 맺을 것이니 겁내거나 나약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고 바른 법은 듣기 어렵다. 어찌 엄벙덤벙 인생을 헛되이 보낼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면, 아득한 과거로부터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헛되이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고, 현재에도 헤아릴 수 없는 핍박과 미래의 고통도 끝이 없어, 버리기도 어렵고 떠나기도 어려운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다가 이 몸과 목숨의 나고 죽음이 덧없어 한 찰나도 보장하기 어려움에랴.
그것은 부싯돌의 불꽃과 바람 앞의 등불과 흐르는 물과 기우는 해로써도 비유할 수 없다. 세월은 급하고 빨라 조용히 늙음을 재촉하는데 마음을 닦지 않고 죽음의 문앞에 그대로 다가서려는가.
예전에 함께 지내던 이들을 생각하면 어진 이도 있고 어리석은 이도 있었지만, 오늘 아침 손꼽아 보니 아홉은 가고 하나가 남았다. 살아 있는 이도 그들과 같아 하루하루 쇠잔해 가니 앞으로 남은 세월인들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데도 함부로 지내어 탐욕과 분노 질투와 교만 방종으로 명예와 이익을 구하고 헛되이 세월을 보내면서 쓸데없는 말로 세상 일에 참견한다. 계행(戒行)의 덕도 없으면서 신도의 보시를 받아들이고, 남의 공양을 받으면서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이와 같이 그 허물이 끝이 없는데 어찌 덮어 두고 슬퍼할 줄 모르는가.
그러므로 지혜있는 이라면 모름지기 삼가고 조심하여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고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여 바르게 고치라.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행하여 온갖 고통에서 어서어서 떠나야 할 것이다.
오로지 부처님과 조사의 진실한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의 마음이 본래부터 신령스럽고 청정하며, 번뇌의 바탕이 텅비어 있음을 알라. 또 삿되고 바름을 분명히 가리어 자기 소견을 고집하지 말고, 마음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으면 혼미하지 않을 것이다. 단정적인 견해(斷見)를 일으키지 말고, 공(空)에도 유(有)에도 집착하지 말라. 깨달은 지혜가 항상 밝아 면밀하게 청정한 행을 닦으며, 큰 서원(誓願)을 세워 중생을 널리 건져야 할 것이니, 그것은 내 일신만 해탈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일에 여러 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괴로워하거나 악귀로부터 오는 두려움 등으로 몸과 마음이 불안할 때는 시방세계의 부처님 앞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을 없애라. 예불과 염불을 똑같이 행하고, 하는 것과 쉬는 것을 때를 알아 움직이고 그치며, 말하고 침묵할 때 항상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의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보라.
그 바탕(體性)은 텅 비어 마치 물 위에 뜬 거품이나 구름 혹은 그림자와 같으므로, 온갖 비방과 칭찬 옳다거나 그르다는 소리가 모두 목구멍에서 망령되게 나오니, 그것은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바람소리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출전 : 밖에서 찾지 말라(지은이 : 보조선사, 옮긴이 : 법정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僧)'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통의 지혜(권수정혜결사문) (0) | 2015.11.20 |
---|---|
성성(惺惺)과 적적(寂寂) (0) | 2015.11.19 |
시대는 바뀔지라도(권수정혜결사문) (0) | 2015.11.13 |
참마음이 있는 곳(眞心所在) (0) | 2015.11.12 |
진심의 체와 용의 같고 다름(眞心體用一異) (0) | 2015.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