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심밀경(解深密經)

55-3-해심밀경-6

근와(槿瓦) 2015. 11. 10. 06:32

55-3-해심밀경-6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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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자여, 저 모든 보살은 세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말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문(文)의 뜻이요, 둘째는 의(義)의 뜻이요, 셋째는 계(界)의 뜻이다. 선남자여, 문(文)의 뜻이란 이른바 이름의 몸[名身] 따위이다. 의(義)의 뜻이란 마땅히 알라.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의 모습이요, 둘째는 두루 아는 모습이요, 셋째는 영원히 끊는 모습이요, 넷째는 깨달음을 짓는 모습이요, 다섯째는 닦고 익히는 모습이요, 여섯째는 저 진실의 모습 따위 품류가 차별된 모습이요, 일곱째는 의지하는 대상과 의지하는 주체가 서로에게 속하는 모습이요, 여덟째는 두루 아는 모습 따위를 장애하는 법의 모습이요, 아홉째는 그 수순하는 법의 모습이요, 열째는 두루 알지 못하는 따위와 두루 아는 따위의 허물과 공덕이 되는 모습이다. 계(界)의 뜻이란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기세계(器世界)요, 둘째는 유정의 세계요, 셋째는 법계요, 넷째는 조복의 세계요, 다섯째는 조복하는 방편의 세계이다. 선남자여, 이 다섯 가지 뜻은, 마땅히 알라. 일체 뜻을 두루 포섭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思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사마타 · 비발사나를 닦아서 이루는 지혜[修所成慧]로 그 뜻을 깨닫는다 하시니, 이는 어떻게 다릅니까?”

 

“선남자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는 문자에 의지해 다만 그 말대로만 할 뿐이지, 아직 그 의취(意趣)를 능통하지는 못하며,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 역시 문자에 의지하나 꼭 말대로만 하지는 않고 그 의취를 능통한다. 그러나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모든 보살의 닦아서 이룬 지혜는 문자에 의지하기도 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기도 하며, 말씀대로 하기도 하고 말씀대로 하지 않기도 하며, 의취(意趣)에 능통하고, 알아야 할 일의 동분(同分)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이 현전하며, 해탈에 아주 잘 수순하며, 이미 해탈을 성취하는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 선남자여, 이것을 세 가지 뜻을 아는 차별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 · 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이 법을 알고 뜻을 알되 무엇이 지혜[智]이며, 무엇이 소견[見]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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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자여, 내가 무량한 문으로 지혜와 소견 두 가지 차별을 말하였으니, 이제 그대에게 간략히 그 모습을 말하리라. 총법(總法)을 반연하여 사마타 · 비발사나를 닦아서 얻는 묘한 지혜는 지혜라 하고, 별법(別法)을 반연하여 사마타 · 비발사나를 닦아서 생긴 지혜는 소견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은 어떤 작의(作意)에 의지해 어떻게 모든 모습을 제거합니까?”

“선남자여, 진여의 작의에 의지해 모든 법의 모습과 뜻의 모습을 제거한다. 그 이름[名]과 이름의 자상(自相)에 대하여 얻은 바가 없을 때에는 또한 그것이 의지하는 모습도 관찰하지 않으니 이렇게 제거한다. 이름에서와 같이 구절[句]에서도 문자[文]에서도 일체 뜻[義]에서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나아가 계(界)와 계의 자성에서도 얻은 모습을 관찰하지 않으니, 이렇게 제거한다.”

 

“세존이시여, 깨달아야 할 모든 진여의 뜻과 모습에서 이 진여의 모습도 버릴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깨달아야 할 진여의 뜻 가운데는 도무지 모습이 없으며 또한 얻을 것도 없거늘, 무엇을 버리겠느냐. 선남자여, 진여의 뜻을 깨달을 때 일체 법과 뜻의 모습을 항복받는다고 나는 말한다. 이 깨달음은 다른 이가 항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흐린 물그릇의 비유와 맑지 못한 거울의 비유와 못 물을 휘젓는 비유에서 그런 것에는 자기의 얼굴 그림자를 비추어 관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관찰할 수 있다면 그건 앞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마음을 잘 닦지 못하면 존재하는 진여를 여실하게 관찰할 수 없으며, 마음을 잘 닦으면 관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관찰하는 어떤 마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어떤 진여에 의지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선남자여, 이는 세 가지의 능히 관찰하는 마음을 말하니, 이른바 듣고서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과 생각하여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과 닦아서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이다. 또 알아내는 진여에 의지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법과 뜻을 아는 보살은 모든 모습[相]을 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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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부지런히 가행(加行)을 닦습니다. 몇 가지 모습이 버리기 어려우며, 누가 이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열 가지 모습이 있으며, 공(空)으로써 능히 제거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법과 뜻을 깨치는 까닭에 갖가지 문자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일체 법공(法空)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둘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를 깨닫는 까닭에 나고 멸하고 머무르고 달라지는 성품이 상속하여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모습의 공과 앞뒤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셋째는 능취(能取)의 뜻을 깨닫는 까닭에 몸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모습과 아만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안의 공과 얻은 바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넷째는 소취(所取)의 뜻을 아는 까닭에 재물을 돌아보고 아끼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외공(外空)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다섯째는 수용(受用)의 뜻인 남녀의 받들어 섬김과 필요한 도구[資具]가 상응함을 깨닫는 까닭에 안으로 안락한 모습과 밖으로 밝고 묘한 모습이 있으니, 이는 안과 밖의 공과 본성의 공을 말미암아 제거한다. 여섯째는 건립(建立)의 뜻을 아는 까닭에 무량한 모습이 있으니, 이는 큰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일곱째는 무색(無色)을 아는 까닭에 안으로 고요한 해탈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함이 있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여덟째는 상진여(相眞如)의 뜻을 아는 까닭에 보특가라 무아의 모습과 법무아(法無我)의 모습과 혹은 유식의 모습과 승의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필경의 공과 성품 없는 공과 성품 없는 자성의 공과 승의의 공을 말미암아 능히 바르게 제거한다. 아홉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의 뜻을 아는 까닭에 함이 없는 모습과 변함없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함이 없는 공과 변역(變易)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바르게 제거한다. 열째는 그 모습을 다스리는 공의 성품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까닭에 공의 성품과 모습이 있으니, 이는 공한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열 가지 모습을 제거할 때 어떤 것을 버리며, 어떤 모습에서 해탈을 얻습니까?”

“선남자여,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의 모습을 제거해 버리고, 잡되고 물든 속박의 모습으로부터 해탈을 얻고는 그것 또한 버린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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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수승함에 나아가서 이러한 공으로 이러한 모습을 다스림을 말하였지만 그 하나하나가 일체 모습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무명(無明)이 나아가 노(老) · 사(死) 따위의 모든 잡염법(雜染法)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승함에 나아가서 행(行)을 낸다고만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모든 행이 가장 가까운 연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의 도리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세존이시여, 이 가운데 어떤 공이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입니까? 모든 보살이 이것을 알면 잃어버림이 없이 공의 성품과 모습에서 증상만(增上慢)을 벗어날 것입니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여래에게 이와 같이 깊은 뜻을 물어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공의 성품과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구나.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공의 성품과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이는 곧 일체 대승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그대에게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을 말하리라. 선남자여, 의타기상(依他起相)과 원성실상(圓成實相) 가운데서는 일체 품류의 잡염과 청정,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 필경에 그 성품을 멀리 벗어난다. 또 그 가운데서는 도무지 얻을 것이 없다. 이것을 대승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 · 비발사나는 몇 가지 수승한 삼마지를 포섭할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무량한 성문과 보살과 여래에게 무량한 종류의 훌륭한 삼마지가 있으니, 마땅히 알라. 일체가 모두 이에 포섭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 · 비발사나는 무엇으로 인(因)을 삼습니까?”

“선남자여, 청정한 시라(尸羅)와 청정하게 듣고 생각하여 이룩한 바른 소견으로써 그 인을 삼는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 · 비발사나는 무엇으로 과(果)를 삼습니까?”

“선남자여, 훌륭한 청정계(淸淨戒)와 훌륭한 청정심(淸淨心)과 훌륭한 청정혜(淸淨慧)로써 과를 삼는다. 또 선남자여, 일체 성문과 여래가 가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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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 출세간의 일체 선법은, 마땅히 알라. 모두가 사마타 · 비발사나로 얻은 과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 · 비발사나는 어떤 업을 짓습니까?”

“선남자여, 두 가지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이른바 상박(相縛)과 추중박(麤重縛)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얽매임[繫]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장애이고,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모두의 장애입니까?”

“선남자여, 몸과 재물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것은 사마타의 장애요,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을 뜻대로 얻지 못하는 것은 비발사나의 장애이다. 모습을 좋아하는 것, 뒤섞여 지내는 것, 적은 것을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은, 마땅히 알라. 모두의 장애이다. 첫 번째 때문에 닦아 나아가지 못하며, 두 번째 때문에 닦은 가행이 구경에 이르지 못한다.”

 

“세존이시여, 5개(蓋)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모두의 장애입니까?”

“선남자여, 도거(掉擧)와 악작(惡行)은 사마타의 장애요, 혼침(惛沈)과 수면(睡眠)과 의(疑)는 비발사나의 장애요, 탐욕[瞋]과 성냄[恚]은 모두의 장애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사마타도(奢摩他道)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나아가 가지고 있던 혼침과 수면을 바르게 잘 제거하면 이럴 경우 사마타도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비발사나도(毘鉢舍那道)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나아가 가지고 있던 도거와 악작을 바르게 잘 제거하면 이럴 경우 비발사나도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은 사마타 · 비발사나가 나타났을 때 몇 가지 마음이 산동업(散動業)이라고 알아야 합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작의의 흔들림[作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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散動]이요, 둘째는 바깥 마음의 흔들림[外心散動]이요, 셋째는 안 마음의 흔들림[內心散動]이요, 넷째는 모습의 흔들림[相散動]이요, 다섯째는 거칠고 무거운 흔들림[麤重散動]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대승에 상응하는 작의을 버리고 성문 · 독각과 상응하는 모든 작의 가운데 떨어져 있으면, 마땅히 알라. 이는 작의의 흔들림이다. 만일 바깥의 다섯 가지 묘한 욕심의 모든 잡되고 어지러운 모습과 그에 따른 찾고 생각하는 수번뇌 가운데서, 또는 바깥으로 소연 경계 가운데서, 마음이 풀려 산만해진다면, 마땅히 알라. 이는 바깥 마음의 흔들림이다. 만일 혼침(惛沈)이나 수면(睡眠) 때문에, 혹은 가라앉음[沈沒] 때문에, 혹은 사마발지에 애착하기 때문에, 혹은 어느 하나의 삼마발지에서 모든 수번뇌로 더럽혀진 까닭에, 마땅히 알라. 이는 안 마음의 흔들림이다. 만일 바깥의 모습에 의지해 안의 등지(等持)가 행하는 대상인 모든 모습에 대하여 뜻을 지어 생각하는 것을 모습의 흔들림이라 한다. 만일 안의 작의를 반연하여 일어나게 되는 모든 수(受)가 거칠고 무거운 몸[麤重身]을 말미암아 아(我)를 계교하고 거만을 일으키면, 마땅히 알라. 이는 거칠고 무거운 흔들림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 · 비발사나는 처음의 보살 지위로부터 여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장애를 물리칩니까?”

“선남자여, 이 사마타 · 비발사나는 초지(初地)에서 나쁜 세계의 번뇌잡염(煩惱雜染) · 업잡염(業雜染) · 생잡염(生雜染)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2지에서는 미세한 잘못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3지에서는 욕심과 탐심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4지에서는 선정에 대한 애착[定愛]과 법에 대한 애착[法愛]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5지에서는 생사와 열반을 한결같이 등지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6지에서는 모습이 많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7지에서는 미세한 모습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8지에서는 모습이 없는 공용(無相)과 모습이 있어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9지에서는 일체 종류의 공교한 말에 자재를 얻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10지에서는 원만한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친다.

 

선남자여, 이 사마타 · 비발사나는 여래의 지위에서 극히 미세하고 가장 미세한 번뇌장(煩惱障)을 물리친다. 능히 이러한 장애를 영원히 없애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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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마침내 집착 없고 장애 없는 일체 지견(智見)을 증득하고, 해야 할 바를 원만히 이루는 소연에 의지해 가장 청정한 법신을 건립한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이 사마타 · 비발사나에 의지해 부지런히 수행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합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사마타 · 비발사나를 얻고, 일곱 가지 진여에 의지해 듣고 생각한 법 가운데서 훌륭한 선정의 마음[定心]을 말미암아 잘 살펴 결정하고 잘 생각하고 잘 세우며, 진여의 성품 안에서 안으로 빠르게 생각한다면, 그는 진여에 대해 빠르게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일체 미세한 현행들도 버릴 수 있는데 하물며 거친 모습이리오. 선남자여, 미세한 모습이란, 이른바 마음이 집착하여 받는 모습[心執受相]과 받아들이는 모습[領納相]과 알아내는 모습[了別相]과 물들거나 청정한 모습[雜染淸淨相]이다. 혹은 안의 모습[內相]과 밖의 모습[外相]과 안팎의 모습[內外相]이다. 혹은 ‘나는 수행을 해 일체 유정을 이롭게 하리라’고 하는 모습과 바른 지혜의 모습[正智相]과 진여의 모습[眞如相]과 고 · 집 · 멸 · 도의 모습[苦集滅道相]과 유위의 모습[有爲相]과 무위의 모습[無爲相]과 영원한 모습[有常相]과 무상한 모습[無常相]과 괴로움에 변하고 달라지는 성품이 있는 모습[苦有變異性相]과 괴로움에 변하고 달라지는 성품이 없는 모습[苦無變異性相]과 유위의 이상의 모습[有爲異相相]과 유위의 동상의 모습[有爲同相相]과 일체를 일체라고 알아 일체가 있게 되는 모습[知一切是一切已有一切相]과 보특가라 무아의 모습[補特伽羅無我相]과 혹은 법무아의 모습[法無我相]이다. 그것들이 나타나도 마음이 능히 버린다. 그들은 이미 많이 이러한 수행에 머문 까닭에 때때로 일체 얽매임과 덮임과 산란과 요동에서 마음을 잘 닦는다.

 

이로부터는 일곱 진여에서 일곱 가지로 각각 차별되는, 스스로 안으로 증득하는 통달의 지혜[通達智]가 생기게 되니 이를 견도(見道)라 한다. 이를 얻는 까닭에 보살의 바른 성품에 들어가 중생을 벗어나고 여래의 집에 태어나 초지(初地)를 증득하며, 또 이 지위의 훌륭한 덕을 수용한다. 그는 이미 지난 세상에서 사마타 · 비발사나를 얻은 까닭에 이미 두 가지 소연(所緣)을 얻으니, 이른바 유분별영상소연(有分別影像所緣)과 무분별영상소연(無分別影像所緣)이다. 그는 이제 견도를 얻은 까닭에 다시 사변제소연(事邊際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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緣)을 증득하고 다시 다음의 일체 지위에서 수도(修道)로 닦아 나아간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소연에서 뜻을 짓고 사유하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그의 작은 말뚝으로 큰 말뚝을 뽑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보살은 이 말뚝으로 말뚝을 뽑는 방편에 의지해 안의 모습[內相]을 버리는 까닭에 일체 잡되고 물든 부분에 수순하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 모습을 버리는 까닭에 추중(麤重) 또한 버린다. 일체 모습과 추중을 영원히 버렸으므로 점차 그 다음 다음의 지위에서도 금을 연마하는 기술과 같이 그 마음을 단련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며, 또 해야 할 바를 원만히 이루는 소연을 얻는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보살이 안의 지관(止觀)을 바르게 수행하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

 

“선남자여, 보살이 만일 6처(處)를 안다면 곧 보살의 광대한 위덕을 이끌어 낼 것이니, 마음의 생김을 잘 알고, 둘째 마음의 머무름을 잘 알고, 셋째 마음의 벗어남을 잘 알고, 넷째는 마음의 늘어남을 잘 알고, 다섯째는 마음의 줄어듦을 잘 알고, 여섯째는 방편을 잘 알 것이다.

 

마음의 생김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16행의 마음이 일어나는 차별을 여실히 알면 이를 마음의 생김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16행의 마음이 일어나는 차별이란, 첫째 지각할 수 없고 굳게 머무는 그릇과 같은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아타나식(阿陀那識)이다. 둘째는 갖가지 행상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단번에 일체 색 따위의 경계를 취하는 분별의식(分別意識), 단번에 안과 밖으로 경계를 취하는 각수(覺受), 단번에 한 생각 순식간 잠깐 사이에 현전의 많은 선정에 들어 많은 불토를 보고 많은 여래를 뵙는 분별의식이다. 셋째는 작은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욕계의 식이다. 넷째는 큰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색계의 식이다. 다섯째는 무량한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공(空) · 식(識) · 무변처(無邊處)의 식이다. 여섯째는 미세한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이른바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식이다. 일곱째는 변제(邊際)의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이른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식이다. 여덟째는 모습 없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세상을 벗어나는 식과 적멸을 반연하는 식이다. 아홉째는 괴로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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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지옥의 식이다. 열째는 잡수(雜受)와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욕계에 행하는 식이다. 열한째는 기쁨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초정려(初靜慮)와 제2 정려(靜慮)의 식이다. 열두째는 즐거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제3 정려의 식이다. 열셋째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제4의 정려에서 비상비비상처까지의 식이다. 열넷째는 더러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번뇌와 수번뇌에 상응하는 식이다. 열다섯째는 착함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믿음 따위와 상응하는 식이다. 열여섯째는 무기(無記)와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저들과 함께 상응하지 않는 식이다.

 

마음의 머무름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요별진여(了別眞如)를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마음의 벗어남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상박(相搏)과 추중박(麤重縛) 이 두 가지 결박에서 벗어났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그 마음을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마음의 늘어남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박과 추중박을 다스리는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그것이 자라나고 그것이 쌓일 때에 또한 자랄 수 있고 또한 쌓일 수 있으니, 이것을 늘어남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마음의 줄어짐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다스릴 대상인 모습과 추중에 물든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니, 그것이 쇠퇴할 때와 그것이 물러날 때에 이것도 또한 쇠퇴하고 이것도 또한 줄어드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방편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해탈(解脫) · 승처(勝處) · 변처(遍處)의 닦고 버림을 여실하게 잘 아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보살의 광대한 위덕을 이미 이끌어냈거나 미래에 이끌어낼 것이며 현재에 이끌어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서는 일체 수(受)가 남김없이 영원히 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수들이 여기에서 영원히 없어집니까?”

“선남자여, 대략 말하건대 두 가지 수(受)가 남김없이 멸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무언가에 의지한 추중수(麤重受)요, 둘째는 그 결과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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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境界受)이다. 무언가에 의지한 추중수에는, 마땅히 알라.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색(有色)에 의지한 수요, 둘째는 무색(無色)에 의지한 수요, 셋째는 결과가 이미 원만히 이루어졌다고 하는 추중수요, 넷째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추중수이다. 결과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 추중수란 이른바 현재의 수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수란 이른바 미래의 원인인 수이다. 그 결과인 경계수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지하여 지니는 수요, 둘째는 살림살이[資具]의 수요, 셋째는 수용의 수요, 넷째는 아끼는 수이다.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에서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수는 모두 이미 없어지고, 그를 다스리는 명촉(明觸)에서 생긴 수를 받아들여 함께하거나 또는 그 결과가 이미 원만히 이루어졌다는 수가 있게 된다. 또 두 가지 수가 이미 없어지고 오직 현전에 명촉에서 생긴 수만 받아들이기도 한다.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세계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는 그것 또한 영원히 없어진다. 그러므로 무여열반의 세계에서는 일체 수가 남김없이 멸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가 이제 원만하고 가장 청정하고 미묘한 유가도(瑜伽道)에 의지해 여래에게 묻는구나. 그대는 이미 유가에서 확실히 가장 좋은 방편을 얻었도다. 나는 이미 그대를 위해 원만하고 가장 청정하고 미묘한 유가도를 말하였다. 일체 과거와 미래의 정등각(正等覺)께서 이미 말씀하시고 앞으로 하실 말씀 역시 모두 이와 같으니라. 모든 선남자 혹은 선여인들도 모두 이에 의지해 용맹정진하며 바르게 닦고 배워야 할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밝히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을 거짓으로 세운 유가 가운데

방일한다면 큰 뜻을 잃으리라.

이 법과 그리고 유가에 의지해

바르게 수행하면 대각을 얻으리라.

얻을 것 있다 하고 벗어나길 구하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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