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심밀경(解深密經)

45-3-해심밀경-5

근와(槿瓦) 2015. 11. 8. 07:19

45-3-해심밀경-5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해심밀경 제3권

대당 현장 한역

김달진 번역

 

6. 분별유가품(分別瑜伽品)

 

그때 자씨(慈氏)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머물러 대승의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수행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보살은 법을 거짓으로 세움[法假安立]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원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의지를 삼고 머무름을 삼아서 대승에서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닦는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네 가지 소연경사(所緣境事)가 있으니, 첫째는 유분별영상소연분별경사(有分別影像所緣分別境事)요, 둘째는 무분별영상소연경사(無分別影像所緣境事)요, 셋째는 사변제소연경사(事邊際所緣境事)요, 넷째는 소작성판소연경사(所作成辦所緣境事)입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소연경사이며,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소연경사이며, 몇 가지가 모두에게 소연경사입니까?”

 

“선남자여, 한 가지가 사마타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무분별영상(無分別影像)이다. 한 가지가 비발사나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유분별영상(有分別影像)이다. 두 가지는 모두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사변제(事邊際)와 소작성판(所作成辨)이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37 / 86] 쪽

“세존이시여, 보살은 사마타와 비발사나의 네 가지 소연경사에 의지해 어떻게 사마타를 구하며 비발사나에 능통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내가 모든 보살들을 위해 말한 거짓으로 세운 법과 같으니, 이른바 계경(契經) · 응송(應誦) · 기별(記別) · 풍송(諷誦) · 자설(自說) · 인연(因緣) · 비유(譬喩) · 본사(本事) · 본생(本生) · 방광(方廣) · 희법(希法) · 논의(論議)이다. 보살은 이것들을 잘 듣고 잘 받아 말을 잘 통하고 뜻을 잘 생각하며 소견을 잘 통달하니, 이렇게 잘 생각하는 법과 같이 홀로 비고 고요한 곳에 앉아 뜻을 지어 생각한다. 다시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에 대하여 안의 마음으로 상속하며, 뜻을 지어 생각한다. 이렇게 바른 수행에 많이 머무르기 때문에 몸의 가벼움[輕安]을 일으키니 이것이 ‘사마타’이다. 이러한 보살은 능히 사마타를 구한다. 그는 몸과 마음에서 얻은 가벼움으로 의지할 대상을 삼는 까닭에 곧 잘 생각하는 법과 같은 안의 삼마지(三摩地)로 행하는 영상(影像)에 대하여 관찰하고, 수승하게 깨치고, 마음의 모습[心相]을 버린다. 곧 이러한 삼마지의 영상에서 안 뜻 가운데 능히 바르게 생각하여 선택하고, 가장 극진히 생각하여 가리고, 두루 찾아 생각하고, 두루 살펴 생각하는 인(忍)이나 혹은 즐거움이나 소견이나 관찰을 바로 ‘비발사나’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보살은 비발사나에 능통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보살이 마음을 반연하여 경계를 삼고 안으로 생각하는 마음이긴 하지만, 나아가 몸과 마음의 가벼움을 얻지 못했다면 그때의 작의(作意)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선남자여, 사마타의 작의가 아니다. 이는 사마타에 수순하는 승해와 상응하는 작의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이 나아가 아직 몸과 마음의 가벼움을 얻지 못했고, 생각하는 바와 같이 있는 모든 법의 안의 삼마지로 소연인 영상에 대하여 뜻을 짓고 사유한다면 이런 작의는 무엇이라 합니까?”

“선남자여, 비발사나의 작의가 아니다. 이는 비발사나에 수순하는 승해와 상응하는 작의이다.”

 

                                                                                                                             [38 / 86] 쪽

“세존이시여, 사마타의 도와 비발사나의 도는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합니까,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합니까?”

“선남자여,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에 차이가 없는가? 비발사나의 소연경계에 마음으로써 소연을 삼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차이가 없지 않은가? 유분별영상은 소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비발사나와 삼마지가 행하는 대상인 영상(影像)은 이 마음과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합니까,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합니까?”

“선남자여, 차이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저 영상은 오직 식(識)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내가 말한 식의 소연은 오직 식으로부터 나타난 경계이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 행하는 대상인 영상이 이 마음과 차이가 없다면 어떻게 이 마음이 도리어 이 마음을 볼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이 가운데는 조그마한 법을 볼 수 있는 조그마한 법도 없다. 이 마음이 이렇게 생길 때에 곧 이러한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선남자여, 마치 잘 닦여진 청정한 거울의 표면에 의지해 본질로써 반연을 삼고 도리어 본질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이제 영상을 보았다’고 말하며, 또는 ‘본질을 떠나서 따로 영상이 있어서 나타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아서 마음이 생길 때에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유정이 자성에 머물러 마음의 대상인 영상으로 색(色) 등을 반연한다면, 그것은 이 마음과 또한 차이가 없습니까?”

“선남자여, 또한 차이가 없다. 그러나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잘못된 깨달음에 의지해 모든 영상이 오직 식뿐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고 잘못된 알음알이를 짓는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한결같이 비발사나를 닦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여, 작의를 상속하고 심상(心相)을 생각할 경우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한결같이 사마타를 닦는다고 말씀하십

 

                                                                                                                             [39 / 86] 쪽

니까?”

“선남자여, 작의를 상속하며 무간심(無間心)을 생각할 경우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합쳐 함께 굴린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여,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바르게 생각할 경우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심상(心相)입니까?”

“선남자여, 이른바 삼마지의 대상인 유분별영상(有分別影像)과 비발사나의 소연(所緣)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무간심(無間心)입니까?”

“선남자여, 이른바 저 영상을 반연하는 마음과 사마타의 소연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심일경성(心一境性)입니까?”

“선남자여, 이른바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이 오직 식임을 통달하거나 혹은 이렇게 통달하고 다시 진여의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비발사나는 몇 가지나 있습니까?”

“선남자여,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상비발사나(有相毘鉢舍那)요, 둘째는 심구비발사나(尋求毘鉢舍那)요, 셋째는 사찰비발사나(伺察毘鉢舍那)이다. 무엇이 유상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순전히 삼마지의 대상인 유분별영상만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무엇이 심구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두루 여러 가지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일체 법 가운데서 잘 알기 위해 뜻을 지어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무엇이 심구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두루 여러 가지로 이미 잘 깨친 일체 법 가운데서 극진한 해탈[極解脫]을 얻기 위해 뜻을 지어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세존이시여, 사마타는 모두 몇 가지나 있습니까?”

“선남자여, 저 무간심(無間心)을 따르는 까닭에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또한 세 가지가 있다. 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처음의 정려(靜慮)부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 각각 하나의 사마타가 있는 까닭이다.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의 4무량(無量) 가운데 각각 하나의 사마타가 있는 까닭이다.”

 

                                                                                                                           [40 / 86] 쪽

“세존이시여,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다시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 · 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 · 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이전에 배우고 생각한 법상(法相)에 따라 그 뜻에서 사마타 · 비발사나를 얻는다면, 그것을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라고 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배우고 생각한 법상을 기다리지 않고 그저 다른 훈계와 가르침만 믿고 그 뜻에서 사마타 · 비발사나를 얻는다면, 이른바 푸르게 굳어가는 모습[靑瘀]을 관찰하고 나아가 고름으로 문드러지는 모습[膿爛]을 관찰하며, 혹은 일체 행은 모두가 무상함과 모든 행은 괴로움과 일체 법은 아(我)가 없음과 열반은 끝끝내 고요함을 관찰한다면, 이러한 무리의 사마타 · 비발사나를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 · 비발사나라고 한다.

 

법에 의지하여 사마타 · 비발사나를 얻는 까닭에 나는 법을 따라 행하는 보살[隨法行菩薩]이라고 시설하니, 이들은 영리한 성품이다. 법에 의지하지 않고 사마타 · 비발사나를 얻는 까닭에 나는 믿음을 따라 수행하는 보살[隨信行菩薩]이라고 시설하니, 이들은 둔한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별법(別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총법(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들이 각각 다른 계경(契經) 따위의 법을 반연하여 받은 것과 같은 생각한 것과 같은 법에서 사마타 · 비발사나를 수행한다면 이를 별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라 한다.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일체 계경 등의 법을 반연하여 뭉뚱그려 한 덩이, 한 더미, 한 갈피, 한 무더기로 삼고, 뜻을 지어 이렇게 생각한다. ‘이 일체 법은 진여를 수순하고 진여로 향하며 진여로 들어간다. 보리를 수순하고 열반을 수순하고 전의(轉依)를 수순하며, 또한 그것들로 향하고 그것들로 들어간다. 이 일체 법은 무량․ · 무수한 선법을 일으킨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마타 · 비발사나를 닦는 것을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라 한다.”

 

                                                                                                                            [41 / 86] 쪽

“세존이시여, 소총법(小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또 대총법(大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또 무량총법(無量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소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대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무량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각각 다른 계경(契經)과 나아가 논의(論議)를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면, 마땅히 알라. 이는 소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이다. 만일 나아가 받고 생각한 계경 따위의 법을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되 각각 다르게 반연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는 대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라 한다. 만일 무량한 여래의 가르침과 무량한 법구(法句)의 문자와 무량한 등등의 지혜로 비추는 것을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며, 나아가 받고 생각한 것을 반연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를 무량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라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총법을 반연하여 사마타 · 비발사나를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다섯 가지 반연을 말미암을 경우에 얻었다고 한다. 첫째는 사유할 때에 찰나 찰나에 일체 추중번뇌의 의지하는 대상을 녹이는 것이요, 둘째는 갖가지 망상을 여의고 즐거운 법락을 얻는 것이요, 셋째는 시방의 차별 없는 모습과 무량한 법의 광명을 아는 것이요, 넷째는 해야 할 일을 원만히 이루어 청정한 무분별상(無分別相)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요, 다섯째는 법신을 원만히 이루어 점점 더욱 훌륭하고 묘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는 어디서부터를 통달이라 하오며, 어디서부터를 얻는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처음의 극희지(極喜地)부터를 통달이라 하며, 제 3발광지(發光地)부터를 얻는다고 한다. 선남자여, 처음으로 업을 닦는 보살도 또한 이 가운데서 따라 배우고 뜻을 지으니, 비록 칭찬할 것은 못되나 응당 게을리 하여 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 · 비발사나에서 어떤 것을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

 

                                                                                                                            [42 / 86] 쪽

伺三摩地)라 하며, 어떤 것을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 합니까?”

“선남자여, 취하여 찾고 살피는 법상(法相)에 대하여 만일 거칠고 드러나게 받아들이는 관찰이 있다면, 이런 모든 사마타 · 비발사나를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고 한다. 만일 저 모습에 대하여 비록 거칠고 드러나게 받아들이는 관찰은 없을지라도 미세한 광명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관찰이 있다면, 이런 사마타 · 비발사나를 무심유사삼마지(無尋有伺三摩地)라고 한다. 만약 저러한 일체 법상에 대하여 도무지 작의(作意)와 받아들임과 관찰이 없다면, 이런 모든 사마타 · 비발사나를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고 한다. 또 선남자여, 만일 찾고 구함이 있는 사마타 · 비발사나면 이를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 하며, 만일 살핌이 있는 사마타 · 비발사나면 이를 무심유사삼마지(無尋有伺三摩地)라 하며, 만일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 · 비발사나면 이를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고 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지상(止相)이며, 무엇이 거상(擧相)이며, 무엇이 사상(捨相)입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음이 들뜨거나 혹은 들뜰까 두려워할 때, 모든 싫어하는 법의 작의(作意)와 무간심(無間心)의 작의를 지상(止相)이라 한다. 마음이 가라앉거나 가라앉을까 두려워할 때, 모든 즐거운 법의 작의와 그의 심상(心相)의 작의를 거상(擧相)이라 한다. 만일 한결같이 그치는 길에서나 한결같이 관찰하는 길에서나 혹은 함께 움직이는 길에서 두 가지 수번뇌(隨煩惱)에 물들었을 때, 모든 공용 없는 작의와 마음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가운데 있는 작의를 사상(捨相)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 · 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은 법(法)을 알고 뜻[義]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법을 아는 것이며, 무엇이 뜻을 아는 것입니까?”

 

“선남자여, 저 모든 보살이 다섯 가지 모습에 의지해 법을 아니, 첫째는 명(名)을 알고, 둘째는 구(句)을 알고, 셋째는 문(文)을 알고, 넷째는 별(別)을 알고, 다섯째는 총(總)을 안다. 무엇이 명(名)인가? 이른바 일체 염정법

 

                                                                                                                            [43 / 86] 쪽

(染淨法) 가운데 세워진 자성에 대해 생각으로써 거짓 시설한 것이다. 무엇이 구(句)인가? 이른바 저 이름 따위의 모임 가운데서 능히 모든 염 · 정의 뜻을 말함에 따라 의지하고 건립한 것이다. 무엇이 문(文)인가? 이른바 저 두 가지가 의지하는 문자이다. 무엇이 그것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아는 것인가? 이른바 각각 다른 소연을 말미암아 뜻을 짓는 것이다. 무엇이 그것에 대해 총합하여 아는 것인가? 이른바 총합한 소연을 말미암아 뜻을 짓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총합하고 간략히 하여 하나로 하는 것을 법을 안다고 하며, 이것을 보살이 법을 아는 것이라 한다.

 

선남자여, 저 보살들은 열 가지 모습에 의지해 뜻[義]을 안다. 첫째는 진소유성(盡所有性)을 알고, 둘째는 여소유성(如所有性)을 알고, 셋째는 능취(能取)의 뜻을 알고, 넷째는 소취(所取)의 뜻을 알고, 다섯째는 건립(建立)의 뜻을 알고, 여섯째는 수용(受用)의 뜻을 알고, 일곱째는 전도(顚倒)의 뜻을 알고, 여덟째는 무도(無倒)의 뜻을 알고, 아홉째는 잡염(雜染)의 뜻을 알고, 열째는 청정(淸淨)의 뜻을 안다.

 

선남자여, 진소유성(盡所有性)이란 모든 잡염(雜染)과 청정한 법 가운데 있는 일체 품류의 한계[邊際]이니, 이를 이 가운데의 진소유성이라 한다. 5온(蘊)과 6내처(內處)와 6외처(外處), 이것을 일체라 한다. 여소유성(如所有性)이란, 이른바 일체 염 · 정의 법 가운데 있는 진여이니, 이를 여소유성이라 한다. 여기에 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니 이른바 일체 행의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성품이요, 둘째는 상진여(相眞如)니 이른바 일체 법의 보특가라(補特伽羅) 무아(無我)의 성품과 법무아의 성품이요, 셋째는 요별진여(了別眞如)이니 이른바 일체 행은 오직 식의 성품이요, 넷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고성제(苦聖諦)요, 다섯째는 사행진여(邪行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집성제(集聖諦)요, 여섯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멸성제(滅聖諦)요, 일곱째는 정행진여(正行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도성제(道聖諦)이다.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유전진여와 안립진여와 사행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유정은 평등하고 평등하다. 상진여와 요별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법이 평등하고 평등하다. 청정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성

 

                                                                                                                              [44 / 86] 쪽

문의 보리와 독각의 보리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평등하고 평등하다. 정행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바른 법을 듣고 총합한 경계를 반연하는 훌륭한 사마타 · 비발사나에 포섭되는 지혜가 평등하고 평등하다.

 

능취(能取)의 뜻이란, 이른바 안의 다섯 가지 색처(色處)와 혹은 심(心) · 의(意) · 식(識)과 그리고 모든 심법(心法)이다. 소취(所取)의 뜻이란, 이른바 밖의 6처(處)이다. 또 능취의 뜻이 또한 소취의 뜻이기도 한다. 건립(建立)의 뜻이란, 이른바 기세계(器世界)이다. 그 안에 일체 유정세계를 건립할 수 있으니 이른바 한 마을, 혹은 백 마을, 혹은 천 마을, 혹은 백천 마을, 혹은 하나의 땅덩이의 바닷가에 이르는 것, 이것이 백, 이것이 천, 혹은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섬부주,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4대주(大洲),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이것이 구지(拘胝), 이것이 백 구지, 이것이 천 구지, 이것이 백천 구지, 혹은 이것이 무수(無數), 이것이 백 무수, 이것이 천 무수, 이것이 백천 무수, 혹은 삼천대천세계 무수 · 백천 · 미진의 수량이 시방으로 무량 · 무수한 모든 기세계이다. 수용(受用)의 뜻이란,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유정들이 수용하기 위해 재물[資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도(顚倒)의 뜻이란, 이른바 그 능취 등의 뜻에 대하여 무상함을 영원한 것으로 헤아리는 생각의 전도 · 마음의 전도 · 견해의 전도와 괴로운 것을 계교하여 즐겁다 하며, 부정한 것을 계교하여 맑다 하며, 무아(無我)를 계교하여 아(我)라고 하는 생각의 전도 · 마음의 전도 · 견해의 전도이다. 무도(無倒)의 뜻이란 위의 것과 달라서 능히 그들을 물리치는 것이니 그 형상을 알아야 한다. 잡염(雜染)의 뜻이란, 이른바 삼계의 세 가지 잡염이니, 첫째는 번뇌잡염(煩惱雜染)이요, 둘째는 업잡염(業雜染)이요, 셋째는 생잡염(生雜染)이다. 청정(淸淨)의 뜻이란, 이른바 이 같은 세 가지 잡염에 있는 얽매임을 벗어나는 보리분법(菩提分法)이다. 선남자여, 이들 열 가지는, 마땅히 알라. 널리 일체의 뜻을 포섭한다.

 

                                                                                                                            [45 / 86] 쪽

또 선남자여, 그 보살이 다섯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변지의 일[遍知事]이요, 둘째는 변지의 뜻[遍知義]이요, 셋째는 변지의 원인[遍知因]이요, 넷째는 변지의 결과[遍知果]요, 다섯째는 이들에 대하여 깨달음[覺了]이다. 선남자여, 이 변지의 일이란, 마땅히 알라. 이는 곧 일체 알아야 할 것들이다. 이른바 모든 온(蘊)과 모든 내처(內處)와 모든 외처(外處) 등 이러한 일체를 말한다. 변지의 뜻이란, 나아가 존재하는 품류의 차별로서 응당 알아야 할 경계이다. 이른바 세속(世俗)인 까닭이며, 혹은 승의(勝義)인 까닭이며, 혹은 공덕(功德)인 까닭이며, 혹은 과실(過失)인 까닭이며, 혹은 인연인 까닭이며, 혹은 세상인 까닭이며, 혹은 나고 혹은 머무르고 혹은 무너지는 모양인 까닭이며, 혹은 질병 따위와 같은 까닭이며, 혹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따위인 까닭이며, 혹은 진여(眞如) · 실제(實際) · 법계(法界) 따위인 까닭이며, 혹은 넓고 간략한 까닭이며, 혹은 한결같은 기별(記別)인 까닭이며, 혹은 분별하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반문하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두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숨고 비밀한 까닭이며, 혹은 드러난 까닭이니, 이러한 따위를 마땅히 알라. 이런 일체를 변지의 뜻이라 한다. 변지의 원인[遍知因]이란, 마땅히 알라. 이는 곧 능히 앞의 두 가지를 취하는 보리분법이다. 이른바 염주(念住)와 정단(正斷) 따위이다. 변지의 결과[遍知果]를 얻는다 함은 이른바 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이 영원히 끊어진 비나야(毘奈耶)와 탐욕 · 성냄 · 어리석음 일체가 영원히 끊긴 모든 사문(沙門)의 과보와 그리고 내가 말한 성문여래의 공(共) · 불공(不共) 세간(世間) · 출세간(出世間)에 있는 공덕이다. 이들에 대한 증득, 이들에 대한 깨달음이란, 이른바 이 깨달음을 짓는 법[作證法] 가운데서 모든 해탈의 지혜로써 널리 남에게 말하여 드날리고 열어 보이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러한 다섯 가지 뜻은, 마땅히 알라. 널리 일체의 뜻을 포섭한다.

 

또 선남자여, 그 보살들이 네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심집수(心執受)의 뜻이요, 둘째는 영납(領納)의 뜻이요, 셋째는 요별(了別)의 뜻이요, 넷째는 잡염청정(雜染淸淨)의 뜻이다. 선남자여, 이러한 네 가지의 뜻은 널리 일체 뜻을 포섭한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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