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해심밀경-3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해심밀경 제2권
대당 현장 한역
김달진 번역
4. 일체법상품(一切法相品)
그때 덕본(德本)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모든 법상(法相)에 공교한 보살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란 어디에 한하여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께서는 어디에 한하여 그들을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하십니까?”
그때 세존께서 덕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덕본이여. 그대가 지금 이와 같이 깊은 뜻을 여래에게 묻는구나.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하려고, 세간과 모든 하늘 · 사람 · 아소락들을 불쌍히 여겨 의리(義利)와 안락을 얻게 하려고 이렇게 질문하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 모든 법상을 말하리라.”
이른바 모든 법상에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요,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요, 셋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인가? 이른바 이름으로 거짓되게 세워진 일체 법의 자성과 차별이고, 나아가 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인연으로 생기는 자성이니,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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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은 행(行)의 연이 되고, 나아가 순전히 큰 괴로움의 덩어리를 부르고 모은다. 무엇이 모든 법의 원성실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평등한 진여이다. 이 진여를, 모든 보살들은 용맹 정진을 인연하기 때문에 진리대로 생각하고 잘못됨 없이 사유하는 것을 인연하기 때문에 통달할 수 있다. 이러한 통달에서 점점 닦고 모아서, 나아가 위없는 정등보리(正等菩提)를 바야흐로 원만하게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선남자여, 눈병 난 사람의 눈에 생긴 눈병의 허물처럼, 변계소집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눈병 난 사람은 눈병으로 여러 모습 즉 머리털이나 바퀴, 벌과 파리와 거승(巨勝)과 혹은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따위의 차별이 나타남과 같이, 의타기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눈에 눈병의 허물을 여의고 이 맑은 눈의 본성으로 행하는 바에 어지러운 경계가 없음과 같이 원성실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청정한 파지가(頗胝迦)보배는 푸르게 물든 빛과 합하면 곧 제청(帝靑)이나 대청(大靑)의 마니(摩尼)보배와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제청이나 대청의 마니보배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일 붉게 물든 빛과 합하면 곧 호박(琥珀)의 마니보배와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호박의 마니보배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일 초록으로 물든 빛과 합하면 곧 말라갈다(末羅羯多) 마니보배와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말라갈다 마니보배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일 노랗게 물든 빛깔과 합하면 곧 금의 모습과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진짜 금의 모습인 양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덕본이여, 저 파지가보배에 상응하는 물든 빛깔이 나타나는 것처럼, 청정한 의타기상에 나타나는 변계소집상의 말과 습기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저 청정한 파지가를 두고 제청과 대청과 호박과 말라갈다와 금 따위가 있다고 여기는 삿된 집착처럼, 의타기상에 변계소집상을 집착하는 것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저 맑은 파지가보배처럼 의타기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저 맑은 파지가에 나타난 제청과 대청과 호박과 말라갈다와 진금 따위의 모습은 언제나 진실함이 없고 자성이 없는 성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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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처럼, 의타기상에 나타난 변계소집상은 항상 언제나 진실함이 없으며 자성이 없는 성품이다. 원성실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또 덕본이여, 상(相)과 명(名)이 상응하는 것을 인연으로 삼는 까닭에 변계소집상을 알 수 있다. 의타기상에 나타나는 변계소집상은 집착을 인연으로 삼는 까닭에 의타기상을 알 수 있다. 의타기상에 변계소집상의 집착이 없음을 인연으로 삼는 까닭에 원성실상을 알 수 있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 위에서 여실히 변계소집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 모습 없는 법[無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의타기상을 깨닫는다면 곧 여실히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雜染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원성실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一切淸淨相法]을 깨달을 것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의타기상 위에서 여실히 모습 없는 법을 깨닫는다면 곧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을 것이요, 만일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는다면 곧 청정한 모습의 법을 증득할 것이다. 이와 같아서 덕본이여, 모든 보살은 여실히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깨닫는 까닭에, 여실히 모든 모습 없는 법과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과 청정한 모습의 법을 깨닫는 것이다. 여실히 모습 없는 법을 깨닫는 까닭에 온갖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고,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는 까닭에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을 증득한다. 이에 한하여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는 이에 한하여 그들은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한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밝히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에 모습 없는 법을 깨치지 못하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 끊을 수 없나니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 끊지 못하는 까닭에
미묘하고 맑은 모습의 법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행의 뭇 허물을 관찰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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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放逸)하는 허물이 중생을 해치리라.
게으름은 머무름과 움직이는 법에서
없음과 있음의 실수가 있느니라.
5.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그때 승의생(勝義生)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예전에 고요한 곳에 홀로 앉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무량한 문으로 모든 온(蘊)에 있는 자상(自相)과 나는 모습[生相]과 멸하는 모습[滅相]과 영원히 끊음[永斷]과 변지(遍知)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모든 온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처(處)와 연기(緣起)와 모든 식(食)에 대해서도 그러셨다. 무량한 문으로 일찍이 모든 제(諦)에 있는 자상과 변지와 영원히 끊음과 작증(作證)과 닦고 익힘[修習]을 말씀하셨다. 무량한 문으로 모든 계(界)에 있는 모습과 갖가지 계(界)의 성품과 하나가 아닌 계(界)의 성품과 영원히 끊음과 변지를 말씀하셨다. 무량한 문으로 일찍이 염주(念住)에 있는 자상과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과 닦고 익힘과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함과 이미 생긴 것은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고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게 함을 말씀하셨다. 염주(念住)를 말씀하심과 같이, 정단(正斷)과 신족(神足)과 근(根)과 역(力)과 각지(覺支)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셨고, 무량한 문으로 8지성도(支聲道)에 있는 자상과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과 닦고 익힘과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함과 이미 생긴 것은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고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게 함을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또 일체 법이 모두 자성(自性)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잘 모르겠구나. 세존께서는 무슨 밀의(密意)에 의지해 이와 같이 일체 모든 법은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씀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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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제 여래께 이 뜻을 여쭙니다. 바라건대 여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밀의를 해석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 승의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승의생이여, 그대가 생각한 것은 이치에 매우 합당하니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여래에게 이렇게 깊은 뜻을 묻는구나.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하려고, 세간과 모든 하늘 · 사람 · 아소락들을 불쌍히 여겨 의리(義利)와 안락을 얻게 하려고 이렇게 질문하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에게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다’라고 말한 밀의(密意)를 해석해 주리라.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른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 ·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 ·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이다.
선남자여, 무엇이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는 거짓된 이름을 말미암아 세워져서 모양이 된 것이요, 자상을 말미암아 세워져서 모양을 삼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는 다른 연의 힘을 의지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요,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의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생무자성성을 말미암는 까닭에 무자성성이라 부르니, 즉 인연으로 생긴 법도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 가운데서 만일 이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라면 나는 그것을 드러내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의타기상은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가 아니니, 그러므로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부른다. 또 모든 법의 원성실상이 있으니,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법의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을 승의(勝義)라 하며, 또는 무자성성(無自性性)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체 법의 승의제이기 때문이며, 무자성성에서 나타난 것인 까닭이다. 이러한 인연에 의지해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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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자성성이라 한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허공의 꽃’과 같아서 상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꼭두각시의 모형과 같아서 생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1분(分)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허공은 오직 모든 색(色)이 없는 성품이 나타난 것으로서 일체 처소에 두루 함과 같이, 1분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법무아의 성품이 나타난 것인 까닭이며, 일체에 보편한 까닭이다.
선남자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무자성성의 밀의(密意)에 의지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하노라.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의 자상(自相)이 도무지 있는 것이 없으면 곧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요, 생기는 것이 있지 않으면 곧 멸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본래 고요할 것이요, 본래 고요하면 곧 자성이 열반이다. 그 가운데는 다시 그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할 것이 아예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선남자여, 나는 또한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으로 나타난 것인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법무아의 성품에 의지해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은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法性)에 머무는 무위(無爲)이니, 일체 잡염(雜染)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에 머무는 까닭에 무위이다. 무위인 까닭에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일체 잡염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본래 고요하며 자성이 열반이다. 그러므로 나는 법무아의 성품으로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승의생이여, 유정의 세계에서 모든 유정의 무리는 따로따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자성(自性)을 관찰하여 자성을 삼는 까닭에, 또 그들이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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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의타기(依他起)의 자성과 원성실(圓成實)의 자성을 관찰하여 자성을 삼는 까닭에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無自性性)을 세운 것이 아니다. 유정들이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 변계소집의 자성을 더하는 까닭에 내가 세 가지 무자성성을 세운 것이다.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의 모습에 의지해 모든 유정이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가운데 마음대로 말을 일으켜 ‘여여하다[如如]’고 하고, 마음대로 말을 일으켜 ‘이와 같다[如是]’고 한다. 이처럼 언설(言說)로 훈습하는 마음을 말미암는 까닭에, 언설에 따른 깨달음[隨覺]을 말미암는 까닭에, 언설의 수면(隨眠)을 말미암는 까닭에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가운데서 변계소집의 모습을 ‘여여하다’고 집착하고 ‘이와 같다’고 집착한다. 이처럼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서 변계소집의 자성을 집착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의타기의 자성을 일으킨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번뇌잡염(煩惱雜染)에 물들며, 혹은 업잡염(業雜染)에 물들며, 혹은 생잡염(生雜染)에 물들어 나고 죽는 가운데서 오래도록 헤매고 오래도록 굴러다니며 쉴 사이가 없고, 혹은 나락가(那落迦)나 방생(傍生)이나 아귀(餓鬼)나 천상이나 아소락(阿素洛)이나 혹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또 승의생이여, 만일 모든 유정이 본래로부터 아직 선근을 심지 않고, 아직 장애[障]를 맑히지 못하고, 아직 상속(相續)을 익히지 못하고, 아직 많은 승해(勝解)를 닦지 못하고, 아직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資糧)을 모으지 못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하는 까닭에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에 의지해 모든 법을 말한다.
그들은 이것을 듣고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행 가운데서 분수에 따라 무상(無常)하고 무항(無恒)하며 편안치 못하고 변해 무너지는 법임을 깨닫고, 일체 행상에 대하여 마음에 두려움을 내며, 깊이 싫어하는 생각을 낸다.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 깊이 싫어하고, 모든 악을 막고 그치며, 모든 악한 법을 짓지 않으며, 모든 선법은 부지런히 닦고 익힌다. 착한 인을 익히는 까닭에 아직 선근을 심지 못한 이는 능히 선근을 심고, 아직 업장을 맑히지 못한 이는 능히 업장을 맑히며, 아직 상속이 성숙하지 않은 이는 능히 성숙시킨다. 이러한 인연으로 승해(勝解)를 많이 닦고, 또한 복덕과 지혜 두 가지의 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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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많이 쌓고 모으게 된다. 그들이 비록 이러한 모든 선근을 심고, 나아가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모았다고 해도,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 가운데서 아직은 상무자성성과 두 가지 승의무자성성을 여실히 깨닫지는 못한다. 또한 일체 행(行)에서 아직은 바르게 싫어하지 못하며, 아직은 바르게 욕심을 여의지 못하며, 아직은 바르게 해탈하지 못하며, 아직은 두루 번뇌의 잡염에서 해탈하지 못하며, 아직은 두루 모든 업의 잡염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아직은 두루 생의 잡염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그래서 법요(法要)를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과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이다. 그들로 하여금 일체 행에서 능히 바르게 싫어하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르게 욕심을 버리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르게 해탈케 하려는 까닭이며, 일체 번뇌의 잡염을 뛰어넘게 하려는 까닭이며, 일체 업의 잡염을 뛰어넘게 하려는 까닭이며, 일체 생의 잡염을 뛰어넘게 하려는 까닭이다.
그들은 이러한 설법을 들으면 생무자성성에서 능히 바르게 상무자성성과 승의무자성성을 믿고 간택하며 생각하고 실답게 통달한다. 의타기의 자성 가운데 능히 변계소집자성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다. 말[言說]로 훈습되지 않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말을 따라 깨닫지 않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말의 수면(隨眠)을 떠난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능히 의타기상을 멸하고 현재의 법 가운데서 지혜의 힘을 유지해 오는 세상의 인연을 영원히 끊어 버릴 수 있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체 행에서 바르게 싫어하고, 바르게 욕심을 여의며, 바르게 해탈하고, 번뇌잡염 · 업잡염 · 생잡염 세 가지에서 두루 해탈할 수 있다.
또 승의생이여, 모든 성문승종성(聲聞乘種性)의 유정(有情)도 또한 이 도(道)와 이 행적(行迹)을 말미암는 까닭에 위없고 편안한 열반을 증득하며, 모든 독각승종성(獨覺乘種性)의 유정과 모든 여래승종성(如來乘種性)의 유정도 또한 이 도와 이 행적을 말미암는 까닭에 위없고 편안한 열반을 증득한다. 일체 성문과 독각과 보살이 모두 이 하나의 묘하고 청정한 도[一妙淸淨道]를 같이하고, 모두 이 하나의 끝끝내 청정함[一究竟淸淨]을 같이하는 것이니, 다시 두 번째는 없다. 내가 이에 의지하는 까닭에 밀의로써 오직 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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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乘)만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일체 유정계(有情界) 가운데 갖가지 유정의 종성(種性)이 없는 것은 아니니, 둔근성(鈍根性)이나 중근성(中根性)이나 이근성(利根性)의 유정으로 차별된다.
선남자여, 만일 한결같이 고요함에만 빠지는 성문종성의 보특가라(補特伽羅)라면, 비록 모든 부처님께서 시설하여 갖가지 용맹한 가행(加行)과 방편(方便)으로 교화하고 인도하더라도, 끝내 도량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치게 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본래 하열(下劣)한 종성만 가졌기 때문이며, 자비가 박약하기 때문이며, 매양 뭇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양 자비가 박약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저버리며, 그들은 한결같이 뭇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저버린다. 나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와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도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한결같이 고요함에만 빠지는 성문이라 한다. 만일 보리로 회향(廻向)한 성문종성의 보특가라라면, 나는 또한 다른 문으로써 그를 보살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번뇌장(煩惱障)을 해탈하였으니, 만일 모든 부처님들의 깨우쳐 주심을 입으면 소지장(所知障)에서도 그 마음이 분명 해탈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최초에 자기의 이익을 위해 가행을 닦아 번뇌장을 해탈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래는 그를 시설하여 성문종성이라 한다.
또 승의생이여, 이와 같아서 나의 좋은 말이며 좋은 제도의 법인 비나야(毘奈耶)와 가장 청정한 뜻과 즐거움을 말한 좋은 교법 가운데서 모든 유정들은 갖가지로 차별되는 뜻과 알음알이를 얻을 수 있다. 선남자여, 여래는 다만 이와 같은 세 가지 무자성성에 의지해 깊은 밀의를 말미암아 이미 말한 불요의경(不了義經)에서 은밀한 모습으로 모든 법요(法要)를 말하니, 이른바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니라.
이 경 가운데서 만일 모든 유정들이 이미 상품(上品)의 선근을 심고, 이미 모든 업장을 청정히 하고, 이미 상속을 이룩하고, 이미 많은 승해를 닦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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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상품의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으고 쌓았다면, 그들이 이와 같은 법을 듣는다면 나의 매우 깊은 밀의의 설법을 여실히 깨닫고 이러한 법에 깊은 마음과 신해(信解)를 낼 것이며, 이러한 뜻에 뒤바뀜이 없는 지혜로써 여실히 통달할 것이다. 이 통달에 의지해 잘 닦는 까닭에 능히 빠르게 가장 극진한 구경(究竟)을 증득할 것이며, 또한 나에게 청정한 믿음을 깊이 일으키고, 이것이 여래 · 응공 · 정등각이 일체 법에서 현전에 등정각을 이룬 것임을 알 것이다.
만일 모든 유정이 이미 상품의 선근을 심고 이미 모든 업장을 맑히고 이미 상속을 성숙시키고 이미 많은 승해(勝解)를 닦았지만 아직 상품의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으고 쌓지는 못했다면, 그 성품이 강직[質直]하다면, 이 강직한 무리가 비록 폐하고 세울 것을 생각하고 가려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없지만 자기의 견취(見取)에 머물지는 않는다면, 그들이 이와 같은 법을 듣는다면 나의 매우 깊고 비밀한 말에 비록 여실히 깨달을 힘과 능력은 없어도 이 법에 대해 승해를 낼 것이며, 청정한 믿음을 내어 ‘이 경전은 여래의 말씀이며, 이는 매우 깊은 이치를 드러낸 것이며, 매우 깊은 공의 성품과 상응하여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려워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심사(尋思)로 행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며, 미세하고 자세하게 살피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고 믿을 것이다. 이 경전의 말씀에 대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보리는 가장 깊으며, 모든 법의 법성 또한 가장 깊어서 오직 부처님만 요달하실 수 있지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갖가지 승해로 유정들을 위해 바른 법의 가르침을 펴시니, 모든 부처님은 무변한 지견(知見)이시고, 우리들의 지견은 소 발자국의 물과 같다.’
그들은 이 경전을 공경하고, 남을 위해 말하고, 쓰고, 지니고, 읽고, 널리 퍼뜨리고, 소중히 여겨 공양하고, 외우고, 익히기는 하지만 그 닦는 모습[修相]으로써 가행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이런 까닭에 내가 매우 깊은 밀의로써 말한 가르침을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인연에 의지해 모든 유정들이 또한 능히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더할 것이며, 그가 아직 상속이 성숙.....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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