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번뇌의 강을 건너는 보살과 바라밀(波羅蜜) (163)

근와(槿瓦) 2015. 10. 24. 00:39

번뇌의 강을 건너는 보살과 바라밀(波羅蜜) (163)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때 또 이 회중에 덕왕(德王)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손히 세존 앞에 나아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는다고 하면 아직껏 번뇌를 끊지 못한 자는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이 되옵니까? 그렇다면 열반의 성(性)은 먼저 없었던 것이 이제 생겨났다는 것이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무상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런 것을 어찌해서 그것이 상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존께서 밝히셨다.

“열반의 성은 앞서 없던 것이 이제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있든지 없든지 그 성과 상은 상주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은 번뇌에 뒤덮여 이것을 보지 못하므로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나와서 지혜의 등불로써 이것을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원래 없던 것이 지금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맹인을 의사가 치료하여 해와 달을 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덕왕(德王)이여, 보살이 걸식하는 자를 보고 음식을 주는 것은 베푸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상의 보시는 아니다. 걸식하는 자가 없는데도 마음을 열어 스스로 베푼다면, 이런 음식을 무상의 보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때때로 보시하는 것으로는 위 없는 보시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일상의 보시를 닦는 것이 위 없는 보시인 것이다. 또 남에게 보시 한 뒤에 뉘우침을 낳는 것도 이 위 없는 보시는 아니다. 보시를 하되 뉘우침이 없는 것이 이 위 없는 보시인 것이다.

 

왕이 적을 두려워하고 혹은 물이나 불의 재난을 겁내어 베푸는 것은 보시이기는 하지만 위 없는 보시는 아니다. 기쁘게 베푸는 것이 이 위 없는 보시인 것이다. 보답을 바라는 것도 위 없는 보시가 아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 이 위 없는 보시인 것이다.

 

만약 명리나 가법(家法)이나 교만을 위하여 베풀었다면 역시 위 없는 보시라고는 할 수 없다. 보살은 베푸는 자와 받는 자와 베푸는 재물에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고, 시절(時節)을 보지 않고 복전이냐 아니냐를 구별하지 않으며, 인(因)을 보지 않고 연(緣)을 보지 않으며, 정(淨)과 예(穢)를 보지 않고 자타를 생각하지 않으며, 또 자신과 받는 사람과 재물을 가벼이 하지 않고 열반을 위하여 보시를 닦아 모든 중생에게 베푸는 것이 참으로 위 없는 보시인 것이다. 다른 다섯 가지의 위 없는 도도 이와 같다.

 

덕왕이여, 선근을 끊은 사람은 운명이 정해진 자가 아니다. 만일 정해진 자라면 끝내 비할 수 없는 도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능히 이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역죄나 정법을 비방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살은 일체의 법에 대해서 정상(定相)을 보지 않는다. 부처에게도 또한 정상은 없다. 부처에게는 색상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다.

 

중인도에서 태어나 혹은 사위성에도 있었고 혹은 왕사성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상주임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처는 여기에 있고 거기에는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허공이 없는 곳이 없는 것처럼 일체처에 걸쳐서 두루 부처는 있는 것이다. 때문에 상주인 것이다. 부처는 지금 멸도에 드는 것을 시현하므로 정한 상은 아니다. 그러니 상주, 상락, 상아(常我), 상정(常淨)이므로 정해져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부처에게는 정상(定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덕왕이여, 부처는 항상 성스러운 행을 닦고 있으므로 번뇌는 새지 않는다. 보살도 또한 성스러운 행을 닦아 길이 모든 누(漏)를 끊고 마음을 잘 다스려서 탐욕, 진에, 우치, 교만, 질투 등을 두려워 해야 한다.

 

덕왕이여, 한때 어느 나라에 많은 백성이 군집하여 넓은 길에 꽉 차 있었다. 왕이 어느 신하에게 명하기를 ‘한 개의 기름 주발을 가지고 그것을 돌리게 하여 만약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흘리면 네 목숨을 끊을 것이다’고 명했다. 그리고 한 사나이에게 칼을 뽑게 하여 그 뒤를 따르게 했는데 그 신하는 왕의 명을 두려워하여 기름을 한 방울도 새지 않게 하였다. 보살도 역시 이와 같은 망집 속에 있으면서 지혜를 버리지 않고 다섯 가지 욕에 있어 탐을 내지 않는다면, 마음은 청정하고 계는 갖추어져 길이 모든 번뇌를 끊게 될 것이다.

 

덕왕이여, 어떻게 하면 번뇌를 여읠 수 있는가? 만약 능히 이 가르침을 닦고 이 뜻을 생각한다면 이를 여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참된 나의 제자이며 훌륭히 나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 이는 내가 돌보는 바이며 걱정하는 바이다. 그는 분명히 내가 멸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주하는 곳이 어디가 되건 나도 또 그 가운데 머무르며 언제나 옮기지 않으리. 만약 기뻐하고 믿는 사람이 있어, 나를 돌보고 나를 공경하고 도를 닦겠다고 생각한다면, 이 가르침을 가지고 이 뜻을 생각하는 자에게 가서 이를 공경하고 이를 섬기고 부족한 곳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가 만약 멀리서 올 때에는 응당 십 리까지 나가서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가르침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 마치 우담화를 만나기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먼 옛날에 이 가르침 때문에 날마다 몸을 베어 돈으로 바꾸어서 부처께 바치고 법을 듣고 마침내 가이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능히 이 가르침을 받은 자는 반드시 모든 번뇌를 끊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덕왕이여, 보살은 그 몸을 돌봄을 병과 같이, 원수와 같이, 독전(毒箭)과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몸은 괴로움이 모이는 곳, 모든 악의 근본인 것이다. 그렇지만 보살은 오히려 마음을 다하여 그 몸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몸을 탐하기 때문이 아니고 법을 위한 것이다. 생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열반을 위한 것이다.

 

덕왕이여, 보살은 항상 능히 몸을 수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몸을 수호하지 않으면 목숨을 온전히 할 수가 없으며 목숨을 온전히 할 수 없으면 그 가르침을 받아 널리 이 뜻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덕왕이여, 강을 건너려고 생각하는 자는 능히 뗏목을 지키고, 길에 임하는 사람은 능히 말(馬)을 두호한다.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그 몸이 청정하지 않음을 보더라도 이 도를 수지하기 위해서는 능히 이것을 지켜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보살은 사나운 코끼리를 두려워 하지 않을지언정 나쁜 벗은 두려워 해야 한다. 코끼리는 다만 몸을 훼손할 뿐이지만 나쁜 벗은 마음까지도 훼손하게 할 것이다. 또 코끼리는 육신을 훼손하는데 그치지만 나쁜 벗은 법신까지도 훼손시키고, 코끼리에게 죽음을 당하더라도 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지만 악우에게 해침을 당할 때는 반드시 악도에 빠질 것이다.

 

덕왕이여, 또 보살은 의복을 입되 몸을 위함이 아니요, 다만 법을 구하기 위하여 입는 것이다. 교만을 증장시켜서는 안 되며 마음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 허영을 위함이 아니고 수치를 감추기 위한 것이며, 추위와 더위, 풍우, 독 있는 벌레의 해를 막음에 족한 것이다. 음식을 취하는 것도 몸을 위하여 마음으로 탐함이 없이 항상 정법을 위하여 취해야 한다. 피부를 아름답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중생들을 위해서 취해야 한다. 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몸의 힘을 지탱하기 위해서 취해야 한다. 또 방사(房舍)의 보시를 받는 경우에도 탐과 만(慢)을 위한 것이 아니고 보리의 마음으로 번뇌의 악적(惡賊)이나 풍우를 막기 위하여 주의해야 한다. 또 의약을 구하는 데에도 마음에 탐과 교만을 없애고 다만 정법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명을 위하여 하지 말고 세세(世世)의 생명을 위하여야 한다. 모름지기 보살이 이 네 가지의 공양을 얻는 것은 도를 위한 것이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만약 이를 받지 않는다면 몸을 지탱할 수 없으며, 괴로움을 참을 수 없으며, 괴로움을 못 참으면 선근을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덕왕이여, 예컨대 어떤 왕이 한 상자에다 네 마리의 독사를 넣고 한 사람에게 이를 기르게 하였는데, 만약 한 마리라도 노엽게 한다면 그 사람을 살육하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상자를 버리고 도망하였으므로 왕은 다섯 명의 노예에게 그 뒤를 쫓게 했다. 다섯 명은 비밀리에 상의를 했는데, 한 사람이 그를 속여 가까이하여 데리고 돌아오도록 했으나 그는 좀체로 믿지 않고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 은신처를 찾았다. 그때 공중에서 ‘이 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다. 오늘 밤 여섯 명의 적이 올 것이다. 네가 만약 이들과 만난다면 반드시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또 그곳을 피해 달아났는데 앞 길에 큰 강이 가로 놓여 있었다. 이 강은 물살이 세고 그곳을 건너려고 해도 배가 없었다. 그래서 가지가지의 초목을 모아 뗏목을 만들어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는 독사와 노예와 나를 속여 가까이하는 자와 여섯 명의 적 때문에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이 강물에 빠져 죽어 버린다 할지라도 저 뱀과 적들 때문에 해를 당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생각하여 뗏목을 물 위에 띄우고 물을 가로질러 드디어 피안에 이르러 겨우 안존함을 얻을 수가 있었다.

 

덕왕이여, 몸은 이 상자를 닮았고 사대(四大)는 독사와 같은 것이다. 보살은 이것을 두려워 하여 성도를 좇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오음(五陰)의 노예는 모든 번뇌로 자신을 꾸미고 찾아들어 해치려고 한다. 그렇지만 보살의 몸은 금강과 같이 단단하고 마음은 허공과 같이 넓으므로 그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의 탐애가 거짓으로 친한 척하며 다가오지만 이것에도 속지 않는다. 육입(六入)의 취락이 참으로 좋지 못한 주거처라는 것을 보고는 육진(六塵)의 적에게도 위협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도를 닦아 정진하여 되돌아서지 않는다. 다시 도중에 번뇌의 폭류(暴流)를 만나지만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으며 그 가(邊)를 바라볼 수가 없다. 갖가지의 무서운 물고기가 이 속에 잠겨서 중생들을 해치고 있으나, 보살은 이곳에서도 도품(道品)의 뗏목을 만들어 마침내 상락(常樂)의 피안에 이르는 것이다.

 

보살이 열반의 도를 닦을 때에는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있다. 그렇지만 만약 자신이 이것을 참지 않으면 중생들로 하여금 번뇌의 강을 건너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는 잠자코 일체의 괴로움을 참아내는 것이다. 참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보살도 번뇌가 없는데 부처가 어찌 번뇌가 있을 것인가.”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