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번뇌를 끊어야 대열반에 든다(164)

근와(槿瓦) 2015. 10. 25. 00:49

번뇌를 끊어야 대열반에 든다(164)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어떠한 것이 위대한 열반이옵니까?”

 

하고 덕왕이 세존께 물었다. 세존이 설하시기를,

“대자비로써 일체를 어여삐 여기고 모든 중생에게 강을 건너게 하고 널리 하나의 확실한 도를 시현해 준다. 그것이 곧 대열반인 것이다. 또 대아(大我)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이름한다. 대아라 함은 열반의 아가 없는 것, 자재한 것으로 구하는 것이 없으므로 일체의 법을 얻을 수 있으며 허공처럼 일체처에 충만하므로 실지로는 볼 수가 없지만, 그러나 모든 중생에게 생각하는 대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또 대락(大樂)한 것이므로 대열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대락이라 함은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멀리 일체의 궤뇨(潰鬧)를 떠나 지혜가 원만하고 몸은 항상 오래도록 적정하기 때문이다. 또 순정(純淨)이라 함은 능히 모든 미계(迷界)의 부정을 끊고 업도 몸도 마음도 청정하기 때문이다.

 

덕왕이여, 보살은 모든 중생에게는 모름지기 불성이 있음을 알고 있다. 불성이 있으므로 선의 싹을 끊어 시들게 한 중생일지라도 오히려 그 마음을 버리면 반드시 모두 위 없는 각의 도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부처가 아니고서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덕왕이여, 대열반에 가까이하는 원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착한 벗을 가까이 하며, 둘째는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법을 듣고 셋째는 염을 보아 법을 생각하고 넷째는 법과 같이 닦는 일이다.

 

덕왕이여, 사람이 병들면 의사의 가르침을 받고 가르침대로 약을 복용하면 낫고 몸도 편안하게 된다. 착한 벗은 곧 훌륭한 의사인 것이다. 보살이 능히 그 가르침에 따른다면 번뇌의 병을 제거하고 열반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덕왕이여, 번뇌가 일어나지 않음을 열반이라 한다. 모든 지혜는 여하한 자를 대할지라도 장애가 없는 것이 부처인 것이다. 부처는 범부가 아니다. 그 몸과 마음과 지혜는 널리 가이없는 국토에 충만하여 장애됨이 없고 또 상주하는 것이며 변천하는 일이 없다.

 

덕왕이여, 보살은 하나의 일(事)을 지키고 하나의 실(實)에 따른다. 하나의 일이란 보리심인 것이다. 보살이 이것을 두호함은 마치 세간에서 외아들을 두호함과 같고 애꾸가 한눈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 이것으로 도를 얻어 대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하나의 실에 따를 것인가. 보살은 모든 중생이 모두 하나의 도에 귀의할 것임을 알고 있다. 하나의 도라고 함은 대승인 것이다.

 

덕왕이여, 보살은 이 가르침을 닦아서, 신심과 진심을 얻어 중생들의 허물을 보고도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번뇌를 낳아 악취(惡趣)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또 만약 중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착한 일을 보면 이것을 칭찬한다. 착한 일은 불성이며 불성을 칭찬하는 것이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비길 수 없는 각의 도에 마음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덕왕이여, 세상에 희유하기가 우담화와 같은 사람이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며 한 사람은 죄가 있으면 능히 뉘우치는 사람이다. 또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며 한 사람은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 두 사람이 있다. 새로운 법을 받는 사람과 오랜 가르침에 젖어 잊지 않는 사람이다. 또 두 사람이 있다. 법을 듣는 것을 즐기는 사람 법을 설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또 두 사람이 있다. 훌륭하게 묻는 사람과 훌륭하게 답하는 사람이다. 훌륭하게 묻는 사람은 그대이며 훌륭하게 답하는 사람은 나이다. 나는 훌륭한 물음에 의하여 비할 데 없는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

 

덕왕이여, 선근을 끊은 무리는 여러 부처를 만나거나 만나지 않거나 선근을 끊은 마음을 여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능히 보리심을 발한다면 역시 비할 데 없는 각의 도를 얻게 될 것이다.

 

덕왕이여, 어떤 왕이 공후(箜葔)를 타는 소리를 듣고 그 맑고 묘한 감흥을 잊을 수 없었기에 의문을 일으켜 시신(侍臣)에게 물었다. ‘이러한 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러자 시신은 ‘공후에서 나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렇다면 그 소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시신은 공후를 들고 와서 왕에게 ‘왕이시여, 이것이옵니다’고 말했다. 왕은 공후를 보고서 ‘소리를 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줄을 끊었으나 그래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 공후를 부수고 아름다운 소리를 구하려 했지만 얻지 못하자 왕은 노하여 시신에게 ‘너는 어찌하여 나를 속였느냐’하고 말했다. 시신은 왕에게 ‘왕이시여, 소리를 얻는 데는 그러한 방법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바로 연(緣)의 방편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고 말씀드렸다.

 

덕왕이여, 중생들의 불성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주처가 없으면서도 다만 갖가지 연에 의하여 소리를 내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선근을 끊은 무리는 불성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악도의 죄를 막을 수 있으리오. 만약 그들이 이 불성이 있는 것을 믿는다면 악도에는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보살은 항상 중생의 선을 칭찬하되 그의 결점을 꾸짖지 않는다. 또 스스로 곧게 하여 악을 범하지 않는다. 만약 그릇됨이 있으면 즉시 뉘우치고 고쳐 사장과 동학 앞에 숨기지 않고 고백하며 스스로 책하다면 다시는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가벼운 죄라도 극히 심중하게 생각하여 남이 힐문하면 솔직히 범했다고 대답하여, ‘이 죄는 누가 지은 것이며 누가 한 짓이냐’고 묻는다면 ‘남이 아니며 자신이 지은 일이라’고 답하고 마음을 이처럼 곧게 하여 내 자신 속에 불성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선의 뿌리가 있는 사람이며 부처의 제자인 것이다.

 

보살은 대열반을 위해 제반사를 갖추어 짓기 어려운 일을 능히 짓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고, 베풀기 어려운 일을 베풀어야 한다. 만약 항상 한 알의 삼(麻)씨를 먹으면 도를 얻을 것이라 하는 자가 있다면 보살은 길이 한 알의 삼씨를 먹으며, 만약 불에 들면 도를 얻으리라 하는 자가 있다면 보살은 길이 옥화(獄禍) 속에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또 머리나 눈을 보시한다면 도를 얻으리라 하는 자가 있으면 보살은 모두 이것을 보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모는 좋은 옷을 그 자식에게 주고 자식이 게으르고 방자하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여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또 자기가 그 자식에게 옷을 주었다는 생각조차 일으키지 않듯이 보살도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베풀기 어려운 것을 능히 베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중생을 보는 것은 마치 외아들을 대함과도 같다. 만약 아들이 병에 걸린다면 부모도 또한 앓게 되듯이 보살도 또한 중생들의 번뇌의 병을 불쌍히 여겨 법을 설하여 그 괴로움을 끊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끝내는 내가 중생들을 위하여 그 번뇌를 끊어 주었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 생각을 일으켰다면 그 생각 자체로 인하여 도를 얻을 수 없다.

 

덕왕이여, 나는 모든 중생의 선우(善友)이다. 만약 무거운 번뇌에 계박된 자라도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힘으로써 그 사람을 위하여 이것을 끊어 줄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