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네 가지의 무량심의 요료(了了) (162)

근와(槿瓦) 2015. 10. 23. 00:45

네 가지의 무량심의 요료(了了) (162)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다시 설하시기를,

“가섭이여, 법을 알고 의(義)를 알고 때를 알고 족함을 알고 자신과 남과 존귀함과 비루함을 알고 또 자, 비, 희, 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을 닦아야 한다.

 

가섭이여, 나는 무량의 방편을 가지고 미친 사람들을 조복시키고 사람들이 만약 재보를 탐하면 그 사람을 위하여 몸을 성왕(聖王)으로 바꾸어 길이 그 요구에 따라 가지가지로 내려 주고, 그 뒤에 그에게 이 위 없는 각의 도를 가르쳐 안존하게 해 주리라. 사람들이 만약 오욕에 빠진다면 신비로운 오욕의 내력을 깨우쳐 그 소원을 채워 주고 그러한 뒤에야 그를 이 위 없는 각의 길로 권하여 들이고 안존하게 해 주리라. 사람들이 만약 영화로 스스로 잘난 체 한다면 그 사람 때문에 길이 복사(僕使)가 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가 섬기되, 첫째 그 마음을 얻은 뒤 그를 이 위 없는 각의 길로 인도해 주리라. 사람들이 만약 옹고집이어서 자신을 착하다고만 믿고 있으면 길이 책하고 가르쳐 그 마음을 조절하고 그러한 뒤에 가르쳐 그 사람을 이 위 없는 각의 도에 안존케 하리라. 가섭이여, 이러한 방편은 조금도 허망하게는 되지 않는 것이다. 부처는 연꽃을 닮았다. 설사 악의 무리 속에 있더라도 더렵혀지는 일은 없다.

 

가섭이여, 자애심을 닦으면 능히 탐욕의 마음을 끊고, 비(悲)를 닦으면 능히 진에의 마음을 끊고, 기쁨을 닦으면 능히 탐욕이나 진에나 사람들을 차별시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가섭이여, 보살은 뭇 사람을 대하되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조금도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 곧 이것이 은애의 성취인 것이다. 그러나 차별 없는 것만으로 큰 은혜를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큰 은혜를 이루는 것은 실로 말로 형언키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깍지가 말랐을 때의 콩은 송곳으로 찌를 수도 없는 것처럼 번뇌의 딱딱함이란 대단한 것이다. 일일 일야(一日一夜)를 마음에 집중하여 어지럽지 않게 하고 이를 조복(調伏)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 진에를 버리기 어려움은 집을 지키고 있는 개와 같으며, 은애를 잃기 쉬움은 숲을 달리는 사슴과 같은 것이다. 또 그것은 돌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며 물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그것은 불의 취(聚)와 같은 것이며 이것은 번갯불과 같은 것이다. 가섭이여, 만약 보살은 심한 악인에 대해서도 차별을 하지 않고 과실을 보지 않으며 또 진(瞋)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 것 같으면 이것이 곧 큰 자애라고 일컫는 것이다.

 

가섭이여, 뭇 사람을 위하여 이락(利樂)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큰 자애인 것이다. 뭇 사람을 위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이락을 주는 것이 큰 슬픔인 것이다. 뭇 사람에 대하여 마음에 환희를 낳는 것이 기쁨인 것이다. 일체의 법을 보는 데 있어서도 평등하며 거리를 두지 않고 자신의 낙을 버리고 이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 큰 사(捨)인 것이다. 이 네 가지의 무량심은 모든 선의 근본이라 하겠다.

 

가섭이여, 보살이 시혜를 행함은 외포(畏怖)가 있어서가 아니다. 명예나 이익을 위한 것임이 아니다. 남을 속이기 위함도 아니다. 그러니 이 때문에 교만심을 일으키든지 또 갚음을 바란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행할 때에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또 그것을 받을 사람을 택해서는 안 된다. 뭇 사람에게 대하여 자심(慈心)을 평등하게 하되 외아들을 생각하듯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괴로워함을 볼 때는 부모가 병든 아이를 보듯이 불쌍히 여기고, 그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는 부모가 병든 아이의 낫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기뻐하고, 이미 베푼 뒤에는 특히 부모가 아이의 장성한 뒤에 훌륭히 자기 생각에 따라 생활을 영위함을 보는 것과 같이 하되 개의할 것까지는 없다.

 

가섭이여, 보살은 자심을 닦으면 능히 무량선(無量善)을 낳는다. 그러니 자심은 진실인 것이며 허망한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이 선의 근본인가를 묻는다면 자심이라고 답함이 좋다. 가섭이여, 능히 선을 이루는 것은 바른 사유에서이므로 바른 사유는 그대로 자심인 것이다. 또 가섭이여, 자심은 곧 부처인 것이며 보리의 길이므로 자심은 참으로 모든 사람들을 키우는 부모라 해야 하며, 따라서 부모는 또 부처인 것이다. 또 가섭이여, 자심은 사람들의 불성인 것이다. 오랜 동안을 번뇌에 뒤덮여 있으므로 사람은 이것을 보지 못하지만, 사람에게 이것이 있어서 봄동산에 풀이 돗아나듯이 일어나면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때문에 자심은 또 상주(常住), 상락(常樂), 상아(常我), 상정(常淨)인 것이며, 이 성은 곧 교법이며 또 교법은 승가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승가는 교법, 교법은 부처, 부처는 자심인 것이 된다. 가섭이여, 만약 자심이 상주, 상락, 상아, 상정이 아닐진대 그 자심은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작은 것이다. 가섭이여, 이와 같이 자심은 범정(凡情)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법도 불도 법성도 또 모두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지만 보살은 자타가 함께 즐기는 대승의 열반에 거처하며 이 자심을 닦는 것이므로 잠에 빠지는 일이 없고, 잠에 빠지는 일이 없으므로 또 잠을 깬 상태로되 깬 것도 아니다. 항상 정진일로가 있을 뿐이다. 또 좋지 못한 일을 행하는 일이 없으므로 잠 속에 있을 때에도 무서운 꿈에 놀라게 되는 일이 없다. 그리고 생명이 끝나고 신의 세계에 태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신의 세계의 즐거움에 묶이는 일도 없다. 가섭이여, 자심을 닦는 일에는 이와 같이 무량 공덕이 차 있는 것이다.

 

가섭이여, 보살이 자와 비와 희를 닦으면 외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처럼 안주할 수가 있다. 가섭이여, 어찌하여 극애라고 하며 외아들이라고 일컫는가? 가섭이여, 부모는 그 아들의 안존함을 보면 크게 기뻐하고 그 아들의 근심을 보면 크게 근심하듯 보살도 이 자리에 서면 뭇 사람을 보는 것이 외아들을 대함과 마찬가지이다. 선을 닦는 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고, 그 번뇌의 병에 휘감기는 것을 보고는 크게 괴로워한다.

 

또 가섭이여, 유아가 만약 똥이나 진흙이나 또는 기와 조각을 입에 넣었다면 부모는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바른손으로 그것을 끄집어내듯, 보살은 그 자리에 들면 뭇 사람의 법신이 아직 축적되기 전에 신, 구, 의의 세 가지 업에 불선한 일을 행함을 보고 곧 지혜의 손으로 이것을 뽑고 그로 하여금 망집의 세상에 유전시키지 않을 것을 바라는 것이다. 또 가섭이여, 아이가 죽으면 부모는 한탄하며 함께 죽고 싶다고까지 하는 것과 같이, 보살은 선근을 끊은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가 만약 괴로움을 받을 경우, 혹은 일념(一念)일지라도 회오의 마음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만약 일으킨다면 그 때문에 법을 설하며 일념의 선이나마 일으켜 보려고 생각하고 함께 지옥에 태어나려고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생이 지옥에 떨어지면 보살 또한 지옥에 태어나 외아들을 사랑하듯이 서원하는 것이다. 또 가섭이여, 부모가 단지 외아들이라면 그 아들을 자나깨나, 길을 가거나 머물거나 항상 이를 생각하고 이를 근심하여, 만약 죄과가 있으면 간곡히 이를 이끌어 악을 더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한다. 보살도 또한 뭇 사람의 혹은 삼악도에 떨어지고 혹은 인간계나 천계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이것을 마음에 두되 망각하는 일이 없다. 설사 모든 악을 행하려 해도 종내는 그 사람에게 다시는 악을 짓게 하거나 저지르는 것을 그냥 두지 않는다.”

 

가섭이 다시 묻기를,

“세존이시여, 예컨대, 감로를 누차 익히면 갖가지의 맛이 나오는 것과 같이, 또 진금을 누차 불리면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이 더함과 같이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참으로 심오한 뜻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은 자(慈)와 비(悲)와 희(喜)를 닦아 일자지(一子地)를 얻었다면, 다음은 사(捨)를 닦아 무엇을 얻는 것이옵니까?”

 

세존이 밝히셨다.

“허공과 같이 평등한 마음가짐을 얻을 것이다. 가섭이여, 보살은 이 지위에 주하면 부모 친척에게 특별히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모든 경계에도 차별을 두지 않으며 마음은 허공과 같이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가섭이여, 보살은 일체의 법을 알고 있다. 또 그 뜻을 알고 있으므로 가르침은 여러 가지가 되더라도 궁극에는 하나가 되고 마는 것임을 알고 있다. 또 일체의 말을 알고 있으므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설하는 것도 뜻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그 덕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에 집착한다면 보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에 집착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무애(四無礙)라고 한다. 무애란 곧 자재(自在)란 뜻이다. 그것에는 구하는 바가 없다. 만약 구하는 바가 있다면 장애가 될 것이다. 장애가 되면 전도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보살에게는 전도의 마음은 없다. 그런만큼 장애되는 일도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법에 마음을 주(住)하지 않으므로 대승을 얻는 것이다. 가섭이여, 너의 묻는 바에도 구하는 바가 없다. 내가 설하는 바에도 구하는 바가 없다. 만약 구하는 바가 있다면 이는 마의 권속이며 나의 제자는 아니다.

 

가섭이여, 일체의 속제(俗諦)도 부처에 있어서는 진제(眞諦)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부처가 참을 위해 속제(俗諦)를 설하고, 또 이에 따라 중생들에게 참된 이치를 체득하게 할 수 없다면, 모든 부처가 어떻게 속제(俗諦)를 밝힐 수 있으랴. 가섭이여, 부처가 때로 속제를 설하면 중생들은 부처가 진제를 설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때로 진제를 설하면 부처는 속제를 설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부처는 참으로 뜻깊은 지혜의 경계이며, 그 밖에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바이다.

 

가섭이여, 도(道)의 성(性)이나 상(相)에는 생도 없고 멸도 없기 때문에 포착할 수 없다. 또 빛도 모양도 없다. 그러므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지만 실제는 용(用)이 있는 것이다. 마치 마음은 볼 수가 없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보살은 분명히 이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섭이여, 보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추측의 견해와 요료(了了)의 견해이다. 앞의 것은 연기를 보고 불을 보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뒤의 것은 눈으로 빛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섭이여, 눈이 밝은 사람이 자신의 수중에 있는 암마라(菴摩羅)의 열매를 보는 것처럼 보살은 밝히 도를 보고 보리와 열반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옛날 사리불에게 ‘사리불이여, 세상 사람이 아는 것을 부처는 이를 알고 있으며, 세간 중생이 알지 못하는 것도 부처는 이를 알고 있다. ‘ 때문에 부처는 일체를 모두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