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경(楞伽經)

100쪽-3권-입능가경-10번째

근와(槿瓦) 2015. 10. 20. 00:23

100쪽-3권-입능가경-10회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91 / 415] 쪽

대혜여, 일체 외도도 또한 그와 같아서 끝없는 예로부터 희론과 훈습에 인하여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법들에 집착하니 대혜여, 그는 오직 마음에서 허망하게 본 것임을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여러 남자와 여인과 코끼리와 말과 수레들이 움직이는 것과 성읍(城邑)과 취락(聚落)과 소와 물소와 동산 숲과 나무와 여러 산과 강과 흐르는 샘과 목욕하는 못과 궁전과 누각과 여러 가지로 장엄하고 광대하며 화려한 것을 보기도 하며, 자기 몸이 그 속에 있는 것도 보다가 문득 꿈이 깨어서는 그 광대한 성읍들을 생각한다면 대혜여, 그대의 뜻에는 어떠한가? 그 사람을 성자(聖者)라고 할 수 있는가?"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의 삿된 견해로 본 여러 가지도 그와 같으니, 그는 모든 법이 꿈속에 있는 마음에서 본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의 견해에 집착한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그림 속의 모양은 높지도 않으며, 낮지도 않는 것과 같지만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는 허망하게 모든 법이 높고 낮음이 있는 것으로 본다.

 

대혜여, 미래의 세상에는 외도의 삿된 견해에 의하여 마음의 훈습함이 더욱 더하여 허망하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분별하리니, 대혜여, 저 외도는 자신도 버리고 남도 버리면서 말하기를, '모든 법은 생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아니하여 있음과 없음이 모두 고요하다'라고 하니, 그것을 이름하여 올바르지 못한 견해라 한다.

 

대혜여, 저 외도는 인과법(因果法)도 비방하니, 삿된 견해에 빠진 까닭이다. 일체 착한 뿌리[善根]와 깨끗한 법[白法]과 청정한 종자를 뽑아 버린다.

 

대혜여, 수승한 법을 구하려면 마땅히 그와 같은 법을 말하는 사람을 멀리

 

                                                                                                                       [92 / 415] 쪽

할 것이니, 그 사람은 마음이 자타(自他)의 두 견해에 집착하고, 허망한 법에도 집착하였으므로 법을 비방하는데 떨어질 것이며, 삿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악도(惡道)에 들어갈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병든 눈으로 허공에 털 바퀴[毛輪]가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이 푸르고 누르며, 붉고 흰 것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대혜여, 그러나 저 털 바퀴는 본래 자체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여, 외도들이 삿된 견해에 의지하여 허망하게 분별함도 또한 그와 같다. 허망하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이 모든 법을 내었다고 집착한다.

 

대혜여, 비유컨대 하늘의 비가 물거품을 내어 수정 구슬과 같은데, 어리석은 범부는 허망한 견해로 집착하여 구슬이라는 생각하고 동쪽 서쪽으로 헤매는 것과 같다. 대혜여, 그러나 저 물거품은 보배 구슬이 아니며 보배 구슬이 아닌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구슬이라고 취(取)하며 취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여, 저 외도의 허망한 마음으로 인하여 분별하며 훈습함도 또한 그와 같다. 그가 있지 않는 법을 말하여, '인연에 의지하여 생겼다'라고 하며, 또한 '실로 법이 없어지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대혜여, 저 외도가 삼종량(三種量)과 오분론(五分論)을 세워서 말

 

                                                                                                                     [93 / 415] 쪽

하기를, '실로 성자(聖者)의 안으로 증득하는 법이 있는데, 두 자체(自體)를 떠난 것이다'라고 하여 허망하게 분별한다.

 

대혜여, 심(心) · 의(意) · 식(識)을 떠나면 이 몸이 변해서 문득 성인(聖人) 종류의 몸을 얻으리니, 여러 가지 행을 수행하지만 그러한 마음이 없이 자심의 견해와 허망한 경계를 취하는 것을 떠날 것이며,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서 자신이 정진(精進)하여 거룩한 지혜를 증득할 것이니, 여실히 수행하는 자는 있다 없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대혜여, 여실히 수행하면 반드시 이와 같은 경계를 얻을 것이다.

 

대혜여, 만약 유무법(有無法)을 취함이 있다면 곧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이 될 것이다.

 

대혜여, 유무법과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말함은 이는 응화불(應化佛)의 말이요, 법불(法佛)의 말이 아니다.

 

대혜여, 응화 여래께서 이와 같은 법을 말함은 어리석은 범부의 보는 마음에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수행하게 함이요, 참다운 수행을 건립하여 자신(自身)의 안으로 증득하는 거룩한 지혜와 삼매락행(三昧樂行)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대혜여, 비유컨대 사람이 물 속의 나무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다.

 

대혜여, 저것은 그림자가 아니며 그림자가 아닌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나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저 외도가 삿된 견해의 마음에 의하여 망상으로 훈습함도 또한 그와 같다. 그는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을 분별하니, 이는 망상으로 분별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오직 마음에서 본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인연을 따라 모든 색상을 비추어 나타내지만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대혜여, 저것은 색상도 아니며 색상이 아닌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인연이 있으면 나타내 보이고 인연이 없

 

                                                                                                                    [94 / 415] 쪽

으면 나타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여,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자심의 분별로 색상이 있음과 없음을 본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여러 음향이 사람과 산과 강물과 허공과 집 등과 함께 어울려서 들리는 것과 같으며, 저 들리는 음향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소리로 인하여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대혜여, 일체 외도는 자심의 허망과 분별의 훈습으로서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본다.

 

대혜여, 비유컨대 풀과 나무와 동산 숲이 없는 대지에 햇빛과 먼지와 흙이 어울림으로 인하여 물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물결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것과 같으니, 무슨 까닭인가? 중생들이 그것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일체 외도와 어리석은 범부도 또한 그와 같아서 끝없는 예로부터 번뇌의 마음과 희론으로 훈습함을 인하여 생(生) · 주(住) · 멸(滅),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분별하니, 이는 성인이 몸소 깊이 증득하는 지혜의 문에서 아지랑이를 목이 타게 좋아하는 일들을 보여준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주술(呪術)의 힘에 의하여 죽은 사람과 기관목인(機關木人: 움직이도록 만든 나무 사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중생의 체(體)가 없는데도 바사사(毘舍闍: 癲狂鬼)의 힘과 공교한 환사(幻師)의 힘에 의하여 가고 오게 하는 일들을 하지만, 어리석은 범부는 그에 집착하여 실로 있는 것으로 여기니, 오고 가고 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들이 사견(邪見)의 마음에 떨어진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허망한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에 집착하니, 그러므로 범부와 외도는 허망하게 이와 같은 법을 세운다. 그러므로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생(生) · 주(住) · 멸(滅),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95 / 415] 쪽

떠날 것이니, 이것이 몸소 깊이 거룩한 지혜로 분별함을 증득함이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5음(陰)과 식(識)은

물 속의 나무 그림자 같고,

꿈과 환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

의식에 의해 취(取)하지 말라.

모든 법은 털 바퀴 같으며

아지랑이를 물로 여기는 것과 같으니,

삼계(三界)의 모든 것을

환과 꿈으로 관찰하라.

만약 이와 같이 관찰하여

수행하면 해탈을 얻으리라.

여름날에 물을 찾는 짐승이

아지랑이에 착각 일으킴과 같으니,

그곳에 물이 없지만

허망한 생각이 물로 보이듯

식(識)의 종자로서

경계에 움직이는 견해와 같다.

어리석어서 진실인양 취(取)하나

저 법의 생함은 헛보임 같은데,

끝없는 세월의 어리석음으로

물질을 취함이 품에 안음과 같다.

쐐기로서 쐐기를 빼내는 것과 같아

 

                                                                                                                     [96 / 415] 쪽

범부를 속여 들어가게 하는 법이며,

환술로 시체를 일으키는 기관이라

꿈 · 번개 · 구름이듯 항상 그러하네.

세간을 이와 같은 것으로 관찰하면

유(有)를 끊고 해탈을 얻으리.

아지랑이는 허공에서

모든 알음이 있지 않으니,

모든 법을 이와 같이 관찰하여

일체법에 집착하지 말라.

여러 식(識)은 이름뿐이니

모든 상(相)이 공하기 때문이다.

5음을 보는 것은 털 바퀴와 같으니,

어느 법에 분별하랴.

그 그림과 털 바퀴는

환이요, 꿈이며 건달바(乾闥婆)와 같다.

불 바퀴[火輪]와 새가 물로 본 아지랑이는

실로 없건만 있다고 보나니,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끝없는 예로부터

속박 된 범부의

미혹한 마음에

의지하여 된 것일세.

 

                                                                                                                      [97 / 415] 쪽

밝은 거울 보배 마니(摩尼)와

맑은 물, 깨끗한 눈(眼)에서

여러 가지 색상이 나타나면

허망하게 여러 가지 빛깔을 보느니라.

일체법은 진실함이 없는 것이

꿈과 석녀(石女)와 같으며,

짐승이 허공에 아지랑이를

물로 알고 좋아함과 같다.

 

대혜여, 부처님 · 여래의 설법은 네 가지 견해를 떠났으니,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을 떠난 것이다. 있음과 없음을 세우는 것을 멀리 떠난 것이다.

 

대혜여, 모든 부처님 · 여래의 설법은 실제(實際)와 인연(因緣)과 적멸(寂滅)과 해탈에 의지한다.

 

대혜여, 일체 부처님 여래의 설법은 구경(究竟)의 경계에 의지한 것이며, 인(因) · 자성(自性) · 자재천(自在天) · 무인(無因) · 미진(微塵) · 시간 등의 이와 같은 설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혜여, 부처님의 설법은 두 가지 장애인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을 떠났다. 큰 장사치가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처음 보는 아주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 이르러 차례로 안치하듯이, 여래도 사람들을 차례로 안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법과 지위의 차별상(差別相)을 잘 알게 한다.

 

대혜여, 네 가지 선(禪)이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愚癡凡夫所行禪]이요, 둘째는 뜻을 관찰하는 선[觀察義禪]이요, 셋째는 진여를 생각하는 선[念眞如禪]이요, 넷째는 부처님 · 여래의 선[諸佛如來禪]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인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수행자가 인무아(人無我)와 자기의 몸과 다른 이의 몸을 골쇄(骨鎖)로 관하므로 무상(無常)하고, 괴로움[苦]이요, 내가 없으며[無我], 깨끗하지 못한

 

                                                                                                                      [98 / 415] 쪽

것[不淨]이라 하고, 모든 상에 집착함도 이와 같아서 결코 필경에는 다르지 않다고 하여, 이와 같이 차례로 앞에서 관한 것으로 인하여 차례로 올라가서 내지 비상(非想)과 멸진정(滅盡定)의 해탈에 이르니, 이를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와 성문들의 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뜻을 관찰하는 선인가? 인무아와 자기의 몸 다른 이의 몸을 관하였음으로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가 자기 몸과 다른 이의 몸에 자타(自他)의 모양이 진실함이 없는 것을 보고, 법무아(法無我)와 모든 지위의 행상(行相)과 뜻과 자제(次第)를 관찰함이니 대혜여, 이를 뜻을 관찰하는 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진여를 관찰하는 선인가? 허망한 분별의 인연을 관찰하여 두 가지 무아(無我)를 참답게 알고 일체 모든 법에 진실한 체상이 없는 것을 참답게 분별하고, 그 때 분별함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에 고요한 경계를 얻음이니 대혜여, 이를 진여를 관찰하는 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여래를 관찰하는 선인가? 참답게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 안의 몸[內身]의 거룩한 지혜의 모양과 삼공(三空)과 삼종락(三種樂)의 행에 들어갔으므로 능히 중생에게 베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을 이룬 것이니 대혜여, 이를 여래를 관찰하는 선이라 이름한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범부들의 행하는 선과

뜻을 관찰하는 선과

진여를 관하여 생각하는 선과

구경인 여래 청정선이여.

마치 해와 달의 모양과

발두마(鉢頭摩; 붉은 연꽃)와 바다의 모양과

허공과 불이 다한 모양으로

수행자가 이렇게 관한다면,

 

                                                                                                                     [99 / 415] 쪽

이와 같은 갖가지 모양은

외도에 떨어지는 법이며,

또한 성문과 벽지불의

수행함에 떨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면

이는 곧 있는 바가 없음[無所有]이니,

그 때 시방세계에서

여러 부처님께서 진여의 손으로

그 수행자의 이마를 만져 주시며

진여의 모양이 없는 데에 들게 하리라.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열반(涅槃)을 말씀하시니, 열반이란 것은 어떤 법을 열반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열반이란 것은 모든 식(識)의 법체상(法體相)을 굴려서 소멸한 것이며, 모든 견해로 훈습함을 돌이켰으며, 심(心)과 의(意)와 아리야식(阿梨耶識)의 법상(法相) 훈습을 돌이켰음으로 열반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나와 여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열반을 말함은 바로 법체(法體)와 경계가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대혜여, 열반이란 것은 안의 몸 거룩한 지혜로 수행할 경계인 것이며, 유무법(有無法)을 허망하게 분별함을 떠난 것이다.

 

대혜여, 어찌하여 항상됨[常]이 아니라 하는가?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인 분별법을 떠난 것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항상됨이 아니다.

 

대혜여, 어찌하여 단멸(斷滅)이 아니라 하는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성인이 안의 몸으로 증득함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단멸이 아니다.

 

대혜여, 반열반(般涅槃)이란 것은 죽음도 아니요, 멸함도 아니다.

 

대혜여, 만약 반열반이 죽음의 법이라면 마땅히 삶의 속박이 있을 것이다.

 

                                                                                                                   [100 / 415] 쪽

대혜여, 만약 반열반이 멸하는 법이라면 마땅히 유위법(有爲法)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반열반이란 것은 죽음도 아니며, 멸함도 아니요, 참다운 수행자가 귀의할 바이다.

 

대혜여, 열반이라 말함은 가히 취할 바도 아니고 가히 버릴 바도 아니요,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요, 단멸도 아니고 항상됨도 아니요, 하나의 뜻도 아니고 여러 가지 뜻도 아니니, 그러므로 열반이라 이름함이다.

 

대혜여, 성문(聲聞)의 열반이란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여 모든 법을 깨달으니, 그러므로 성문의 열반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벽지불(辟支佛)의 열반이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모든 경계를 보니, 항상됨이 없으며[無常], 즐거움이 없으며[無樂], 내가 없고[無我], 깨끗함이 없다[無淨]하여 전도(顚倒)된 상을 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문과 벽지불은 구경(究竟)이 아닌 곳에서 열반이란 생각을 낸다.

 

대혜여, 나는 그대를 위하여 두 법체상(法體相)을 말하리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언설(言說)에 집착하는 체상(體相)이요, 둘째는 세상일에 집착하는 체상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언설에 집착하는 체상인가? 끝없는 예로부터 언설의 희론에 집착하고 훈습하여 생긴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세상일에 집착하는 체상인가? 이는 오직 이 자심(自心)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고 바깥 경계를 본 것이다.

 

대혜여, 여러 보살마하살이 두 가지 원력(願力)으로 주지(住持)함에 의하여 부처님 · 여래 · 응공 · 정변지께 정례(頂禮)하고서 의심된 일을 묻는다.

 

대혜여, 어떤 것이 두 가지 원력으로 주지함인가? 첫째는 삼매(三昧) · 삼마발제(三摩跋提)에 의지하여 주지함이요, 둘째는 온 몸이 낙(樂)을 얻음이니, 부처님 여래의 손으로 그의 이마를 만져 주심을 받아 주지하는 힘을 얻는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초지(初地)에 머물러 부처님의 주지하는 힘을 받으므로 이 보살의 대승광명삼매(大乘光明三昧)에 들고나면, 그 때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 · 여래 · 응공 · 정변지께서 보살에게 주지하는 힘을 주시므로 몸과 입과 뜻을 나타내 보인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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