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경(楞伽經)

120-4-입능가경-12

근와(槿瓦) 2015. 10. 31. 18:15

120-4-입능가경-12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11 / 415] 쪽

대혜여, 내가 말한 이와 같은 모든 법에는 앞뒤가 상위한 것이 있지 않다.

 

대혜여, 나는 외도가 내세운 인과의 뜻이 합당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든 법이 생함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대혜여, 일체 외도의 어리석은 무리들이 말하기를, '유와 무로부터 일체법이 생한다'라고 하고, 자심의 분별과 집착의 인연으로 생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혜여, 나는 모든 법의 유(有)도 또한 불생(不生)이며, 무(無)도 또한 불생이라 말하니, 그러므로 대혜여, 나는 모든 법을 불생이라 말한다.

 

대혜여, 내가 일체법이 있다[有]고 말한 것은 제자(弟子)들을 두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 법을 알게 함이니, 무엇이 둘이 되는가? 첫째는 모든 세간(世間)을 섭취(攝取)함이요, 둘째는 모든 단견(斷見)을 두호하기 위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업(業)에 의하므로 여러 가지 몸이 있어서 6도(道)에 태어남을 받으니, 그러므로 나는 모든 법을 있다고 말하여 세간을 섭취한다.

 

대혜여, 내가 일체법을 환과 같다고 말한 것은 일체 어리석은 범부로 하여금 필경에 능히 자기 모양[自相]과 같은 모양[同相]을 떠나게 함이니, 모든 범부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집착하여 사견(邪見)에 떨어지고, 다만 자심이 허망하게 본 것임을 능히 알지 못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집착의 인연으로서 생긴 법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나는 '일체 모든 법이 환상과 같고 꿈과 같아서 실체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와 같이 말하지 아니한다면, 어리석은 범부는 사견의 마음에 집착하였기에 자신과 타인을 속이고 기만하고, 일체법을 여실히 보는 것[如實見]을 떠날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을 여실견(如實見)에 머무르는 것이라 하는가? 이는 자심이 모든 법을 보는 데에 들어간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법이

일체 생(生)함이 아니라 함은

이는 인과를 비방함이며

여실견이 아니네.

 

                                                                                                                           [112 / 415] 쪽

내가 생함의 법을 말함은

세간을 포섭하기 위함으로,

모든 법을 환상과 같이 보아

모든 보는 상을 취하지 않네.

 

부처님께서 또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내가 지금 여러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명(名) · 구(句) · 자신(字身)의 상(相)을 말하리니, 보살은 명 · 구 · 자신의 상(相)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명 · 구 · 자신의 상에 의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요, 보리를 얻고서는 중생을 위하여 명 · 구 · 자신의 상을 말해야 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곧 말씀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어떤 것이 명신(名身)인가? 어떠한 법에 의하여 명신이라 이름을 지음이니, 사물(事物)의 이름은 다르나 뜻은 같으니 대혜여, 이를 내가 명신(名身)이라 말한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구신(句身)인가? 뜻[義]과 사물을 결정함인 구경(究竟)에 보이는 뜻인 것이니, 대혜여, 이를 내가 구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자신(字身)인가? 이는 문구(文句)의 필경(畢竟)인 것이다.

 

대혜여, 또한 명신은 어떤 법에 의하여 명(名) · 구(句)를 요별(了別)하고, 제 형상을 능히 요지(了知)하는 것이다.

 

대혜여, 또한 구신은 구(句)와 사(事)의 필경인 것이다.

 

대혜여, 또한 명신은 이른바 모든 글자는 이름을 따라서 차별함이니, 아(阿)자로부터 아(啊)자에 이르니 명신(名身)이라 이름함이다.

 

대혜여, 또한 자신(字身)은 소리의 장단(長短)과 음운(音韻)의 고하(高下)를 말하여 '자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또한 구신(句身)은 골목길의 발자국인 것이니, 사람과 코끼리와 말과 여러 짐승의 발자국 등과 같은 것을 구(句)가 된다고 이름한다.

 

                                                                                                                          [113 / 415] 쪽

대혜여, 또한 명자(名字)는 색(色)과 4음(陰)이 없는 것을 말함이니, 명에 의하여 말한 것이다. 대혜여, 또한 명자(名字)의 상은 능히 명자상을 요별(了別)함을 말함이다. 대혜여, 이를 명 · 자 · 구 · 자신의 상이라 한다.

 

대혜여, 이와 같은 명 · 구 · 자의 상(相)을 그대는 마땅히 배워서 사람들을 위하여 연설해야 할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명신(名身)과 구신(句身)

그리고 자신(字身)의 차별을

범부가 어리석게 계탁(計度)하고 집착함이

코끼리가 깊은 진흙에 빠짐과 같다.

 

대혜여, 미래 세상에 지혜가 없는 자는 사견(邪見)의 마음으로써 여실법(如實法)을 알지 못하므로 세간론(世間論)을 따라서 스스로 지자(智者)라 말한다. 그러나 지자가 있어서 사견상(邪見相)의 같음과 다름, 갖춤[俱]과 갖추지 못함[不俱]을 떠난 여실법을 묻는다면, 저 어리석은 사람은 말하기를, '이 물음은 옳지 않으며, 바른 생각으로 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말하자면 색(色) 등의 법과 항상됨과 무상(無常)함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이와 같은 열반과 유위(有爲)인 모든 행(行)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형상 가운데에 있는바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짓는 이[作者]와 짓는 바[所作]가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사대(四大) 가운데 색(色) · 향(香) · 미(味) · 촉(觸)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능견과 소견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진흙덩이와 미진(微塵)이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지자(智者)의 아는 바가 같음이 되는가, 다름이 되는가? 이와 같이 위로 올라서 차제상(次第相)과 위로 올라서 무기(無記)와 치답(置答)을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함이니, 이는 나를 비방함이다.

 

대혜여, 나는 이와 같은 법을 말하지 않은 것은 외도가 사견에서 말함을 막기 위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외도들이 말한 것은 '몸이 곧 명(命)

 

                                                                                                                         [114 / 415] 쪽

이니, 몸이 달라짐에 명도 달라진다'라고 함이니, 이와 같은 법은 외도가 말한 바이고, 이는 무기(無記)법이다.

 

대혜여, 외도는 인과의 뜻에 어리석기에 무기(無記)라 함이요, 나의 법에서 말한 무기는 아니다.

 

대혜여, 우리 불법에서는 능견(能見)과 가견(可見)의 허망한 생각을 떠나서 분별심(分別心)이 없나니, 그러므로 나의 법에서는 답할 것 없이 그냥 두는 치답(置荅)이 있지 않다.

 

모든 외도들은 가취(可取)와 능취(能取)에 집착하여, 다만 자심에서 보여진 법임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을 위하여 나는 법을 묻는 이에게 네 가지로 답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였지만, 무기(無記)와 치답(置答)만이 나의 법에서 함이 아니다.

 

대혜여, 부처님 · 여래 · 응공 · 정변지께서 중생을 위하여 네 가지로 답하여 말하는 데에 치답(置荅)이 있는 것은 때를 기다려서 하기 위함이므로 이러한 법을 말함이다. 또는 근기(根機)가 성숙하지 못한 이를 위한 것이요, 근기가 성숙한 이를 위한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내가 치답의 뜻을 말하였다.

 

대혜여, 일체 모든 법이 만약 짓는 것과 인연을 떠나면 생하지 않으리니, 짓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체법이 불생(不生)이라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였다.

"일체 모든 법은 체상(體相)이 없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일체 모든 법은 실체상(實體相)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스스로 증득한 지혜로서 일체 모든 법의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건대, 모든 법이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나는 '일체 모든 법은 실체상이 없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법은 또한 취하는 상[取相]도 없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뜻으로 일체 모든 법은 또한 취하는 상도 없습니까?"

 

                                                                                                                          [115 / 415] 쪽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에도 법을 가히 취할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나는 '법을 가히 취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법은 또한 버리는 상[捨相]도 없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모든 법에는 또한 버리는 상도 없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건대, 법을 가히 버릴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나는 '일체 모든 법은 또한 버리는 상도 없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불멸(不滅)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일체 모든 법은 불멸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건대, 체상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나는 '모든 법은 불멸이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무상(無常)한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일체 모든 법은 무상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법은 항상 무상한 모습이며, 항상 불생(不生)인 것이니, 그러므로 나는 '모든 법이 무상하다'라고 말한다.

대혜여, 또한 나는 일체법을 무상하다고 말한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일체 모든 법을 무상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116 / 415] 쪽

"형상이 생(生)하지 않으며, 생하지 않는 체상이기 때문에 항상 무상함이니, 그리하여 나는 '모든 법이 무상하다'라고 말한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기론(記論 : 記論四記答)에 네 가지가 있으니

그렇다고 바로 답하는 직답(直答)과

반문해서 답하는 반질답(反質答)

분별하여 답하는 분별답(分別答)

답할 것 없이 그냥 두는

사치답(捨置答)이 그것인데,

이로써 모든 외도들의

있다, 없다고 함을 제어한다.

승구(僧佉)와 비세사(毗世師)

모두 무기(無記)라고

이와 같은 말로

그들은 말한다.

바른 지혜로 관찰하건대

자성(自性)이란 얻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므로,

체상(體相)도 없다고 말하노라.

 

                                                                                                                          [117 / 415] 쪽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세존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수다원(須陀洹) 등 행(行)의 차별상(差別相)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와 일체 보살마하살들이 수다원 등의 수행상(修行相)을 잘 알면, 여실히 수다원 · 사다함(斯陀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을 알아서, 이와 같이 중생을 위하여 설할 것이니, 중생이 듣고서 두 무아상(無我相)에 들며, 두 가지 장애가 깨끗하여 차례로 지위와 지위의 수승한 데에 나아가서, 여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의 수행을 얻을 것이며, 수행처(修行處)를 얻고는 여의보(如意寶)가 중생이 생각하는 수용경계(受用境界)와 몸과 입과 뜻의 행(行)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훌륭한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지금 그대를 위하여 말할 것이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잘 받아 듣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수다원(須陀洹)은 세 가지 과(果)의 차별이 있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어떤 것이 세 가지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하(下)와 중(中)과 상(上)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수다원의 하(下)인가? 이는 3유(有)에서 일곱 번이나 생(生)을 받는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중(中)인가? 3생(生)이나 5생 만에 열반에 드는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상(上)인가? 바로 1생(生)에 열반에 드는 것이다.

 

대혜여, 이 세 가지 수다원은 세 가지 결박[結]이 있으니, 말하자면 하와 중과 상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세 가지 결박인가? 신견(身見)과 의(疑)와 계취(戒取)

 

                                                                                                                           [118 / 415] 쪽

이다.

 

대혜여, 저 세 가지 결박은 위로 올라서 잘 닦아 정진하여야만 아라한(阿羅漢)을 얻는 것이다.

 

대혜여, 신견(身見)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구생(俱生)이요, 둘째는 허망한 분별로서 나는 것이니, 인연으로 분별하는 법과 같다.

 

대혜여, 비유컨대 인연의 법상(法相)에 의하여 허망한 분별로서 실상(實相)이라고 함과 같다. 그러나 저 인연법에는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니, 있음과 없다고 분별함이란 실상(實相)이 아닌 까닭이다.

 

어리석은 범부가 여러 가지 법상에 집착하는 것은 새와 짐승들이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함과 같다.

 

대혜여, 이를 수다원(須陀洹)의 신견(身見)이라 하니, 무슨 까닭인가? 지혜가 없기 때문이며, 끝없는 세월로 오면서 허망하게 상(相)을 취했기 때문이다.

 

대혜여, 이 신견의 더러움[垢]은 인무아(人無我)를 보아야만 능히 멀리 떠날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수다원의 구생신견(俱生身見)인가? 이른바 자기 몸과 다른 이 몸인 그 두 가지와 4음(陰)과 무색(無色)과 색음(色陰)이 날 때엔 4대(大)와 4진(塵) 등에 의하여 피차 인연이 서로 화합하여 색(色)이 생기는 것을 보고, 수다원은 그것을 알고서 능히 있다, 없다고 하는 사견(邪見)을 떠나며, 신견을 끊고, 신견을 끊고서는 탐심(貪心)을 내지 아니 하니, 대혜여, 이를 수다원의 신견의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수다원의 의(疑)의 모양인가? 법을 증득하는 데에 잘 보는 것을 얻고서, 신견과 이견(二見)인 분별의 마음을 먼저 끊으니, 그러므로 모든 법에서 의심을 내지 않으며, 또한 다른 높은 이에게 높다고 여김과 깨끗하고 깨끗하지 아니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대혜여, 이를 수다원의 의(疑)의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수다원의 계취(戒取)의 모양인가? 이는 몸을 받아 날 곳[受生處]이 괴로운 것임을 잘 보았으니, 그러므로 계상(戒相)을 취하지 않

 

                                                                                                                         [119 / 415] 쪽

는다.

 

대혜여, 계취(戒取)라는 것은 모든 범부들이 계(戒)를 지니고 정진하며 여러 가지 착한 행으로 안락한 경계를 구하며 하늘에 태어나려고 함이니, 저 수다원은 이러한 것을 취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이 안으로 증득하고 회향(回向)하는 것을 취하여 수승한 곳에 나아가서 모든 망상(妄想)을 떠나고, 무루계분(無漏戒分)을 닦으니 대혜여, 이를 수다원의 계취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수다원은 세 가지 결박인 번뇌를 끊고 탐(貪) · 진(嗔) · 치(痴)를 떠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많은 탐(貪)을 말씀하옵시니, 수다원은 어떠한 탐(貪)을 떠났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수다원은 여인들과 더불어 어울림을 떠나서 현재의 즐거움으로 미래의 괴로운 원인[苦因]을 심으려 하지 않고, 치고 두들기며 탄식하고 끌어안으며 곁눈으로 보는 것을 멀리 떠났다.

 

대혜여, 수다원은 그와 같은 탐심을 내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삼매락(三昧樂)인 행(行)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혜여, 수다원은 이와 같은 탐은 떠났으나, 열반의 탐은 떠나지 못하였다.

 

대혜여, 어떤 것이 '사다함(斯陀含)'의 과(果)의 모양인가? 한번 가는 것[一往]인데, 색상(色相)을 보고 눈앞에서 곧 마음을 내지만, 허망한 분별의 생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禪)의 수행하는 모양을 잘 보고, 그러므로 세간에 한번 왕래하여 문득 고(苦)를 끊어 다하고 열반에 드니, 이를 사다함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아나함(阿那含)의 모양인가? 과거 · 현재 · 미래의 색상 가운데서 있다, 없다는 마음을 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허망한 분별심(分別心)인 모든 결박[結]으로 하여금 나오지 못하게 하니, 그러므로 이를 아나함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아라한(阿羅漢)의 모양인가? 분별로서 사유(思惟)함과

 

                                                                                                                         [120 / 415] 쪽

사유할 바와 삼매와 해탈과 힘과 통(通)함과 번뇌와 괴로움 등의 분별심을 내지 않으니, 그러므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한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세 가지 아라한을 말씀하셨으니, 여기서는 어떠한 아라한을 말하여 아라한이라 이름합니까?

 

세존이시여, 결정(決定) · 적멸(寂滅)을 얻었다고 말하는 나한(羅漢)입니까? 보리원(菩提願)과 선근(善根)과 선근을 잊는 것을 말하는 나한입니까? 교화하려고 응화(應化)하는 나한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결정 · 적멸을 얻었다고 말하는 성문(聲聞)의 나한이요, 다른 나한이 아니다.

 

대혜여, 다른 나한은 말하자면 일찍이 보살행을 수행한 자이고, 또한 응화불(應化佛)이 화현한 나한이니, 본원(本願)인 선근과 방편의 힘으로 여러 부처님 국토에 태어나고 대중 가운데 나타나서 부처님의 큰 회중(會衆)을 장엄한 것이다.

 

대혜여, 그는 거래(去來)를 분별하여 여러 가지 일을 말하고, 증득할 과(果)에서 능사유(能思惟)와 소사유(所思惟)로 사유하는 것을 멀리 떠났으므로, 자심(自心)이 견(見)과 소견(所見)으로 된 것임을 보았으니, 그 과(果)를 얻은 모양이라 말할 것이다.

 

대혜여, 만약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세 가지 결박이니, 나는 세 가지 결박을 떠났다'라고 하면, 대혜여, 이는 세 가지 법을 본 것이며 신견(身見)에 떨어진 것이니, 그가 만약 이와 같다면, 세 가지 결박을 떠나지 못할 것이니, 대혜여, 그러므로 수다원은 이와 같은 마음을 내지 않는다.

 

대혜여, 만약 선(禪)과 무량(無量)과 무색계(無色界)를 떠나려고 한다면 마땅히 자심의 보는 상을 멀리 떠날 것이며, 소상(少相)인 적멸정(寂滅定) 삼마발제(三摩跋提)의 상을 멀리 떠날 것이다. 대혜여, 만약 이와 같이 않는다면 저 보살은 마음에서 모든 법을 볼 것이니, 사유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능가경(楞伽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0-4-입능가경-14   (0) 2015.11.03
130-4-입능가경-13  (0) 2015.11.01
110-3-입능가경-11   (0) 2015.10.24
100쪽-3권-입능가경-10번째   (0) 2015.10.20
90-3-입능가경-9  (0) 2015.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