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등대집경

대집경(15)-150

근와(槿瓦) 2015. 10. 20. 00:21

대집경(15)-150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41 / 1773] 쪽

하는 말이라 하고 계와 같이 머무르기에 진실하다 하며, 인욕을 닦아서 보리를 얻는 것이요 성내는 마음을 인하여 얻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뜻과 입이 서로 합하는 말이라 하고 인(忍)을 닦아 구족하므로 이것을 진실하다 하며, 정진을 부지런히 행하여 보리를 얻는 것이요, 게으름에 인하여 얻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뜻과 입이 서로 합하는 말이라 하고 정진을 닦으므로 이것을 진실하다 하며, 선정(禪定)을 닦아서 보리를 얻는 것이요, 어지러운 마음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뜻과 입이 서로 알맞은 말이라 하고 정심(定心)을 닦으므로 이것을 진실하다 하며, 지혜를 닦아 보리를 얻는 것이요, 어리석음을 인하여 얻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뜻과 입이 서로 합하는 말이라 하고 지혜를 닦는 까닭에 이것을 진실하다 하나니, 37조보리법(助菩提法)과 4무량심도 다 이와 같으니라.

 

다시 보녀야, 대저 진실이란 것은 이른바 성행(聖行)이요, 성행이란 것은 이른바 괴로움이요, 무상한 행이다. 다시 성행이란 것은 괴로움[苦]을 알고 원인[集]을 멀리하고 멸함[滅]을 증득하고 길을 닦는 것이다. 5음(陰)에서 생겨나는 모양[相]이 없음을 아는 것을 괴로움을 안다 하고, 5음의 인[因]은 이른바 애욕의 맺힘이니 필경 멀리 떠나서 탐착하지 않고 찬탄하거나 구하지도 않고 가고 오지도 않나니, 이것을 원인[集]을 떠나 일체의 모양[相]이 멸한다 한다. 그러나 그 멸하는 때는 한 법도 멸하는 것이 없고 평등하지 않은 법도 평등하게 되나니, 이것을 사라짐을 증득하는 관(觀)이라 한다. 사마타(奢摩他)·비바사나(毘婆舍那)는 그 모양이 평등하여서 각(覺)과 관(觀)이 없고 평등도 없고 매임이 없고 취(取)함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변함이 없나니, 이것을 도를 닦는 것이라 한다.

 

진실로 이러한 따위의 생각을 다 알고 또 능히 그 뜻을 분별하여 널리 말한다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참으로 이 진실한 법을 말한다 하느니라.”그때 십천(十千)의 보살이 진실한 인(忍)을 얻었다.

 

“보녀야, 법어(法語)란 것은 모든 연설이 다 법에 의지하여 말하는 것이니, 법을 관하고 법을 염하고 법을 받들어 행하고, 이르는 곳마다 법을 행하고, 법을 구하고, 법을 하고자[欲] 하고, 법을 즐거워하고, 법을 닦고, 법의 당기[法幢]와 법의 지팡이[法杖]로써 법의 그릇[法器]을 장엄하고, 법의 등잔[法

 

                                                                                 [142 / 1773] 쪽

燈]·법의 밝음[法明]·법의 생각·법의 뜻·법의 존재[有]·법의 의심[法疑]을 장엄케 하며, 영락(瓔珞)으로써 법의 평상[法床]·법의 위의[法儀]·법의 보호·법의 재물·법이 다함이 없어서 광대하고 그지없는 것, 법의 일[法事]·법의 몸[法身]·법의 입[法口]·법의 뜻[法意]을 장엄케 한다.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법을 구족하여 성취하나니, 이것을 법어라 하느니라.

 

법어란 것은 진실한 말로써 법어를 수호하고 사람을 가르쳐 부모·화상(和上)·늙은 사람·덕 있는 사람을 공양하고, 보리와 보리도를 찬탄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버리지 않게 하고, 지심으로 생각을 온전히 하여 보리를 잊지 않게 하고, 장엄을 떠나지 않고 보리 법을 닦게 하고, 현성(賢聖)과 선지식을 친근케 하고, 신심을 닦아 온전한 생각으로 법을 듣고 바른 법을 사모하여 정진을 부지런히 하고, 법에 탐착하지 않아 은혜 갚을 줄 알고, 고요함을 즐겨하여 성스러운 종자[聖種]가 끊이지 않게 하고, 두타(頭陀)를 교화시켜 부지런히 10선(善)을 행하고 일체의 선한 법을 베풀어 서원으로 보리 얻기를 찬탄하고, 지심으로 청정한 계율을 받아 지니고 인욕을 닦아 게으름을 제거하고, 청정한 선정·지혜·방편·자(慈)·비(悲)·희(喜)·사(捨)를 닦고, 4제(眞諦)를 닦아서 진리에 들어가고, 4무애지(無礙智)로써 큰 신통을 얻고, 법보시에 따라 4념처(念處)를 닦으며, 나아가 8성도분(聖道分)·선정·지혜 두 법을 닦아서 지혜의 해탈을 얻고 법과 같이 성문·연각·보살의 모든 승(乘)을 해탈하고, 일체의 복덕을 찬탄하고 깊고 깊은 12인연을 관함에 있어 공문(空門)·무상(無相)·무원(無願)을 분별하여 두려워함이 없고, 5음(陰)으로서 허깨비 같고 조화 같음을 말하고, 18계(界)가 허공의 모양 같음을 말하고, 모든 입(入)의 성품이 공(空)의 성품과 같음을 말하고, 항상 7재(財)·6염(念)·6경(敬)을 말하고, 6바라밀(波羅蜜)의 구족함을 해설하고, 6상행(常行)을 말하고 6신통을 닦고 5안(眼)을 구족하여 으뜸가는 이치[第一義]를 말하고, 세간에 유포하여 업의 말[業語]을 성취하여 일체 중생의 그 마음이 평등하게 부처님 말씀을 찬탄하게 하느니라.

 

보녀야, 만일 어떤 보살이 이러한 법어(法語)를 구족한다면 그의 입에는 끝내 나[我]를 설하지 않는 말, 중생을 설하지 않는 말, 수명(壽命)을 설하지 않는 말, 장부[士夫]를 설하지 않는 말, 단(斷)을 설하지 않는 말, 상(常)을 설

 

                                                                                 [143 / 1773] 쪽

하지 않는 말, 유견(有見)을 설하지 않는 말, 무견(無見)을 설하지 않는 말, 양단(兩斷)을 설하지 않는 말,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말, 취(聚)를 설하지 않는 말, 멸(滅)을 설하지 않는 말, 다툼을 설하지 않는 말, 편벽함을 설하지 않는 말, 깨달아 알지 못하는 말, 뒤바뀌지 않는 말, 의심을 더하지 않는 말, 법에 거슬리지 않는 말, 법계(法界)를 관찰하는 말, 교만을 깨뜨리는 말을 한다.

 

설법하는 보살은 법과 같이 머물러서 법과 같이 진신한 말·법어(法語)·끊이지 않는 말·꺾이지 않는 말을 하고, 설법하는 보살은 일체 세간과 함께 의논할 수 없어 보는 사람이 겁내고 두려워하며, 법어 보살은 능히 공과 무상과 무원을 연설하여 삼계(三界) 및 모든 존재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따라 구걸하지 않고 마음·뜻·식별이 없고 티끌 때[塵垢]가 없고 밝음이 없고 어둠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기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높고 낮음도 없고 일체 경계의 인연을 뒤섞지 않고 청정하고 고요하여서 도수(導首)가 있지 않고 알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여 행할 수 없어 청정한 지혜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나니, 받음[受]과 받는 이도 없어 길이 모든 받음을 끊고 3세를 지나 멸함 없는 모양[無滅相]을 멸하지 않고 남이 없는 모양[無生相]을 내지 않고 넉넉함도 모자람도 없고 남 없고 단(斷)없고 늘거나 줄어듦도 없고 현재의 존재[當有]도 없고 과거의 존재[已有]도 없다.

 

닦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이 아니며, 악마의 소견도 아니고 진실한 소견도 아니며, 모양[相]도 아니고 모양 아닌 것도 아니며, 한 모양[一相]도 아니고 또한 한 모양이고,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을 멀리 떠난 것도 아니며, 가까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며, 떠난 것도 아니고 따로 하는 것도 아니며, 얽매는 것도 아니고 푸는 것도 아니며, 누(漏)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없는 것도 아니며 또 서로 비슷한 것도 아니며,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며, 구족(具足)한 것도 아니고 구족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이름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며, 집착도 아니고 벗어난 것도 아니며, 깨진 것도 아니고 완전한 것도 아니어서 비록 금강(金剛)을 무너뜨릴 수 없는 모양이 아닐지라도 진실하기가 이와 같고 가까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고 색도 없고 인연도 없다.

 

                                                                                [144 / 1773] 쪽

또 둥글거나 각진 것도 아니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자기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며,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며,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잊는 것도 아니며, 식(識)도 아니고 앎[知]도 아니고 분별의 경계도 아니고 앎의 경계도 아니니라. 보녀야, 이것을 법이라 한다. 만일 이러한 법을 능히 널리 말한다면, 이것을 설법이라 하느니라.

 

다시 보녀야, 법어(法語)보살은 일체 세간과 더불어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다른 배우지 못한 이를 멸시하지 않고 거만하지 않고 마음으로 비웃지 않고 잘난 체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스스로 찬탄하지 않고 다른 말을 비방하지 않고 음식 때문에 남을 위하여 설법하지 않고 다른 이의 착한 것을 막아 의혹을 내지 않게 하고 다른 이의 범죄를 보고 끝내 이를 말하지 않고, 다른 법 안에서 가벼이 하거나 천하게 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다른 이의 수행하는 법을 막지 않는다.

 

모든 말하는 법은 공과 무상과 무원을 떠나지 않고, 끝내 일체 법계를 분별하지 않고 법계에 흔들리지 않고 진실한 성품에 흔들리지 않고 글자·분별·사람·밝지 못한 이치에 의지하지 않고 비록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비방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대중들과의 분별을 내지 않고 또 12인연을 비방하지 않고 세간에 있는 것이 아니면서 세간을 깨끗이 하고, 법 아닌 것으로써 법을 깨끗이 하고, 탐냄이 없고 인색함이 없고, 계(戒)를 헐뜯는 것이 없고 계를 깨뜨려 버리지 않고, 성냄이 없고 질투함이 없고, 게으름이 없고 도심(道心)을 잃지 않고 보리를 잊지 않고 위없는 지혜를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서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다른 법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에 질투함이 없고, 계경(契經)아닌 것에 집착하여 계경을 비방하지 않는다.

 

비나야(毘尼)·마나(摩那)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바른 법에 있으면서 마침 그른 것을 보지 않고, 거만함을 인하여 거만함을 더 자라게 하지 않고, 인과와 업(業)의 과보(果報)를 비방하지 않고, 바른 법 가운데에 있어서 마음에 물러나거나 흔들림이 없고, 은혜를 알고 은혜 갚기를 잊어버리지 않고, 마침 성내거나 한스러운 마음을 품지 않고, 아견(我見)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질투하지 않고, 원수에게나 친한 이에게 두 가지 생각을 갖지 않고, 남에게 헐뜯음을 당하여도 보복하려 하지 않고, 두 가지 말로써 이 사

 

                                                                                 [145 / 1773] 쪽

람 저 사람을 싸우게 하지 않고, 아첨과 그릇된 생각으로 야릇한 짓을 나타내어 중생을 의혹시키지 않는다.

 

다른 이의 기쁨을 위하여 보살계·비구계·비구니계·식차마나계(式叉摩那戒)·사미니계·우바새계·우바이계를 받지 않고, 한가한 곳에 머물러 생각을 고요히 하고, 부지런한 마음으로 12부(部) 경전을 받아 외우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 위하여 이러한 경전을 받아 지키지 않고, 공양하기 위하여 만족한 생각을 나타내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만족을 모르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의 만족함 아는 것을 닦지 않고,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는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악한 업을 지어서 삿됨과 악하게 살지 않고 7재(財)를 버리지 않고 음식을 탐내지 않고 성인의 종자를 끊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고 자기를 찬탄하지 않고 불법(佛法)가운데에서 수량을 만들지 않고, 대승을 찬탄함에 있어서 마음에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을 법어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다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의 이치란 것은 이른바 신심으로써 장엄을 닦을 때, 헛되거나 속임이 없다. 일체 선근을 장엄케 하기 위하여 지극한 마음을 생각을 모아 선한 법을 닦아 행하여서 중생들의 의심을 깨뜨려주어도 과보(果報)를 요구하지 않고, 모든 중생에게 편안과 쾌락을 베풀고 금계(禁戒)를 보호해 가지어 참는[忍] 마음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을 닦아서 선한 법을 더 자라게 하고, 고요한 정(定)을 닦아 모든 어지러움을 거두고, 위없는 지혜를 갖추어 무명의 어둠을 깨뜨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닦아서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아서 중생들의 하는 일에 따라 친히 가서 도와주고, 기뻐하는 마음을 닦아서 중생들에게 법의 기쁨을 베풀고, 평정한 마음을 닦아서 고락을 관찰하지 않고, 법보를 버려도 마음에 후회하거나 인색함이 없고, 말하는 것은 부드럽고 연하여 중생들의 악한 마음을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을 이익 되게 하기를 원만하고도 매우 깊게 하여 같은 사업을 닦아 행하매 대승을 권발(勸發)하나니, 이 네 가지 거둠[攝]으로써 중생을 조복하고 일체의 행(行)은 다 무상(無常)·괴로움[苦]·공(空)·나 없음[無我]이라고 보고 모든 번뇌를 깨끗이 하고 뜻에 의지한다.

 

                                                                                [146 / 1773] 쪽

글자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에 의지하며, 식별에 의지하지 않고 밝은 이치의 경전에 의지하며, 밝지 않은 이치를 버리고 법에 의지하며,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걸림 없는 이치를 끝없이 말하여 다함이 없으면서도 법계에서 분별하는 것이 없고 걸림 없는 변재로 해탈을 얻고 즐겁고 걸림 없이 말하되 법과 같이 말하고, 혜시(惠施)를 장엄하여도 만족함을 모르고, 계(戒)를 장엄하여 잘 성취되기를 원하고 많이 들음을 장엄하여 법과 같이 머물고, 공덕을 장엄하여 32상과 80종호를 구족하고, 지혜를 장엄하여 모든 중생의 상·중·하 근기의 차별의 모양을 알고, 정(定)을 장엄케 하기 위하여 마음을 청정케 하고 지혜를 장엄케 하여 세 가지의 슬기를 얻는다.

 

4념처(念處)를 닦기 위하여 마음을 산란케 아니하고, 4정근(正勤)을 닦기 위하여 선근을 얻고, 4신족(神足)을 닦아서 여러 곳으로 왕래하고, 5근(根)을 닦아서 분별된 글귀를 변론하고, 5력(力)을 닦기 위하여 번뇌를 무너뜨리고, 7각분(覺分)을 닦기 위하여 모든 법을 알고, 8정도(正道)를 닦아서 악에 흔들리지 않고, 신통을 닦기 위하여 물러나거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이치를 아나니, 이것을 이치를 안다고 한다. 만일 보살로서 이 이치를 능히 설할 수 있다면 이치를 말한다고 하느니라.

 

다시 보녀야, 또 이치란 것은 공정(空定)을 닦아서 모든 존재[有]의 법을 무너뜨리고, 무상(無相)을 닦아서 모든 법 모양을 무너뜨리고, 무원(無願)을 닦아서 삼계(三界)를 구하지 않고, 만일 이러한 세 가지 공(空)을 연설할 수 있다면 이치를 말한다 하느니라.

 

일체의 행을 닦아 행할 수 없는 것을 이치라 하고, 보살이 닦아 행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 하며, 일체의 생(生)을 끊는 것을 이치라 하고 보살이 이 생 없음을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 하며, 모든 존재의 나음이 없음을 이치라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고 하며, 4제(眞諦)를 이치라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고 하며, 나[我]와 내 것[我所] 없는 것을 이치라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고 하며, 글자로서 설할 수 없는 것을 이치라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고 하며, 진실한 이치를 이치라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고 하며, 일체 보살이 헤아릴 수 없는 법을 이치라 하고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147 / 1773] 쪽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고 하며, 다문(多聞)의 사람이 법과 같이 머무는 것을 이치라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고 하며, 일체 승(乘)에서 대승이 으뜸 되는 것을 이치라 하고 능히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고 한다.

 

다시 보녀야, 분별 없는 것을 이치라 한다. 중생(衆生)도 없고 수명(壽命)도 없고, 한 가지 맛[一味]으로서 움직이지 않고 다하지도 않고, 한 가지 일[一事]로서 나지 않고 나오지 않고 오지 않고 가지 않고 멸하지 않고 둘이 아니어서 볼 수 없고 조작 없고 함이 없고, 지음이 없어서 마음이 아첨하거나 그릇되지 않고 3세(世)가 평등하고, 3분(分)이 차별 없어 잃지 않고 얻지 않고 덥지 않고 차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행하지 않음도 그러하다.

 

취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도(道) 아닌 것에서 도를 보이고 상(常)도 아니고 단(斷)도 아니고 또 중도(中道)도 아니고 성내지 않고 흐리지 않아서 법과 법 아닌 것을 보지 않고 일체의 글자·음성·사어(辭語)가 아니고 탐냄·성냄·어리석음에서 분별을 내지 않고, 일체 법의 조작한 모양[相]과 존재의 모양과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 이 세 가지가 바로 공하여서 진실로 법에 들어가면 평등과 평등하지 않은 것이 모두 다 평등하게 되고 지혜로 인하여 해탈을 얻으리라.

 

보녀야, 보살이 만일 이러한 이치를 갖춘다면 이것을 이치라 하고 이러한 이치를 말하는 것을 이치를 말한다 하느니라.”

 

보녀가 아뢰었다.

“어떤 것을 보살이 비니(毘尼:毘那耶)를 말한다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첫째는 범(犯)하는 비니요, 둘째는 번뇌로운 비니다. 어떤 것을 범한다 하고 어떤 것을 비니라 하는가. 범하고서 곧 착하지 않다는 생각을 깨닫되, 무명(無明)·뒤바뀜[顚倒]·허망·속임·번뇌로 인하여 나에 집착하는 중생들의 의심은 해탈을 얻지 못하므로 갈팡질팡 후회하고 교만하고 방일하고 들음이 적나니, 이러한 따위를 범함이라 한다.

 

만일 해탈을 얻으면 의심을 깨뜨릴 것이요, 해탈을 얻음으로써 범함이 있

 

                                                                                [148 / 1773] 쪽

는 곳을 보나니, 곧 이것은 곳이 아니고[非處] 곳 아닌 것도 아니며, 몸·입·뜻이 아니며, 취(取)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아서 볼 수 없으며, 이 몸의 지음도 아니고 마음·입의 지음도 아니다. 만일 이 세 가지의 지음이라면 바로 이것은 멸(滅)하는 법이요, 만일 멸하는 법이라면 누가 짓고 누가 범하는 것이랴. 일체의 법도 다 이와 같다.

 

모든 법은 근(根)도 없고 지음[作]도 없고 처소[處]도 없다. 만일 이러한 의심을 파괴한다면 이것을 깨끗하다 하고 뜨겁지 않다 한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짓나니, 이것을 믿음이 있다 하고 정(定)이 있다 하고 비니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번뇌라 하고 어떤 것을 비니라 하는가. 열두 가지의 갈래가 있으니, 이른바 무명에서 늙어 죽음[老死]에 이르기까지를 번뇌 성품이라 하고, 능히 일체 번뇌를 조복하는 것을 비니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은 능히 모든 법을 조복 받는 것이니, 만일 법이 공하여서 성품과 모양이 없고 원이 없다면 무엇을 탐내고 미워하고 어리석음이 있다 하겠는가. 조작이 없는 것은 능히 일체 법을 조복 받는 것이니, 만일 일체 법이 조복 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을 번뇌의 모든 맺힘[結]이 있다 하겠는가. 일체 법은 인연으로부터 나나니, 만일 인연으로부터 난다면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하는가. 이러한 열두 가지의 갈래를 본다면 또한 번뇌와 번뇌의 모양을 안다. 만일 이 공한 지혜로써 능히 보리를 관한다면 바로 이것은 공으로써 번뇌를 공하게 하는 것이며, 만일 이러한 평등을 관찰한다면 비니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이치를 연설한다면 이는 보살이 능히 비니를 말한다 하며, 이 비나야가 능히 나를 안다면 바로 이것은 번뇌로운 비니를 분명히 아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나[我]를 아는 비니라 하는가. 말하자면 나없음을 관하고 나의 성품을 관하여서 나의 깨끗함과 나의 진실함을 알고 나의 분별과 나의 공함과 나의 닦음을 알고 나의 움직이지 않음·말하지 않음·집착하지 않음·나지 않음·멸하지 않음을 안다. 만일 이와 같이 나를 아는 이라면 곧 이 번뇌를 아는 비니라 하느니라. 만일 나란 것이 없는데 나란 생각을 일으킨다면 번뇌가 없는데 번뇌의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이와 같나니, 만일 나란 것이 본디 없다면 번뇌도 또한 그러하다. 만일 비바사나(毘婆舍那)를 구족한다면

 

                                                                                [149 / 1773] 쪽

능히 이와 같이 관찰하여 분명히 알 것이니, 이것을 나를 아는 번뇌로운 비니라 한다. 번뇌란 것은 과거·미래·현재가 아니다. 만일 짓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번뇌로운 비니를 안다할 것이며, 비니도 또한 과거·미래·현재가 아니다.

 

마음이 색이 아닌 것과 같이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고 또 중간도 아니다. 번뇌도 또한 그러하여 색이 아니고 안팎 및 중간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깨달아 알음이 없고 싸움과 다툼이 없고 청정함이 없고 조작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모든 번뇌가 나지 않고 멸하지 않음을 안다면 이것을 번뇌 비니를 분명히 안다고 한다. 보녀야, 보살이 만일 이러한 따위의 번뇌를 아는 비니라면 또 중생을 위하여 이 법을 연설하나니, 이것을 보살이 비니를 연설한다 하느니라.”

이 법을 연설하실 때 십천(十千)의 보살들이 무생인(無生忍)을 얻었다.

 

그때 보녀가 마음으로 크게 즐겨하고 기뻐하여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진실한 법의 이치와 비니는 도저히 알 수 없나이다. 만일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이 말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알고 보았다 하겠나이다.”

 

그때 사리불(舍利弗)이 보녀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이미 이러한 법을 갖추었으니, 능히 연설할 수 있겠습니까?”

 

“대덕 사리불이여, 진실이란 탐냄이 없는 것이요 탐냄이 없음은 진리이니, 이러한 진리는 설할 수 없고 설할 수 없는 것을 이 비니라 합니다. 대덕이시여, 만일 이러하다면 어떤 것을 설할 수 있다 하겠습니까? 또 사리불이여, 진실이란 곧 멸(滅)이요, 멸이란 법이요, 법이란 깨끗함이요, 깨끗함이란 진리요, 진리란 곧 비니이니 이러한 법은 문자가 없나이다. 만일 문자가 없다면 어떤 것을 설할 수 있다 하겠습니까? 대덕이시여, 진실이란 곧 진리요 진리란 곧 법이요 법은 둘이 없고 둘이 없음은 바로 진리라. 대저 둘이 없다는 것은 또한 고룰[調]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고룰 수 없다면 어떤 것을 고룬다 하며, 이러한 법은 모두 다 소유(所有)가 없나니, 소유가 없다면 어떤 것을 설할 수 있다 하겠습니까?”

 

                                                                                [150 / 1773] 쪽

사리불이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어떤 보배를 성취하였기에 이러한 이름을 세워서 보녀라 합니까?”

 

보녀가 대답하였다.

“대덕이시여, 서른두 가지 보살의 보배 마음이 있으니, 이러한 마음 가운데에는 모두 성문·벽지불의 마음이 없습니다. 어떤 것을 서른두 가지라 하는가.

 

첫째,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발심(發心)함이며, 둘째, 부처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셋째, 부처님 법을 가져 아주 없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넷째, 승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다섯째, 중생들에게 성스러운 법의 즐거움을 베풀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여섯째, 중생들을 위해 크게 슬픈 마음을 닦아서 그들로 하여금 번뇌의 모든 괴로움을 멀리 떠나게 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일곱째, 크게 슬픈 마음을 닦아서 안팎의 물건을 버리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여덟째, 금계(禁戒)를 보호하고 훼계(毁戒)를 고루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아홉째, 인욕(忍辱)을 닦아서 참지 못하는 마음·교만한 마음·악한 마음·뒤바뀐 마음·술 취한 마음·미친 마음·방일 자재한 마음을 부수기 위하여 발심합니다.

 

열째, 정진하여서는 게으른 마음·겁내어 물러나는 마음·후회하는 마음을 부수고 모든 중생을 조복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열한째, 정(定)을 닦아서 어지러운 마음·미친 마음·망령된 생각을 부수고 중생으로 하여금 4선(禪)과 8해탈을 얻어 욕계의 모든 중생을 조복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열두째, 지혜를 닦아서 일체의 어둠을 깨뜨리고 진실로 알고 보아 법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열셋째, 중생들에게 평등하고 둘이 없어 다 한 가지 맛[一味]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열넷째, 탐냄·성냄을 없애고 이익과 손해·헐뜯음과 칭찬을 없애고 그 마음 둘이 없이 착한 법에 편히 머물러 고락에 흔들리지 않아 중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열다섯째, 겁내거나 두려워함이 없고 매우 깊은 12인연을 알아서 일체의 소견을 떠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열여섯째, 지혜와 공덕을 장엄하여서 만족한 생각을 없게 하려고 하기 위하여 발심함이며, 열일곱째, 부처님을 보고 항상 법.....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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