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인간의 마음 속에 감춰진 불성(佛性) (158)

근와(槿瓦) 2015. 10. 19. 00:48

인간의 마음 속에 감춰진 불성(佛性) (158)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순타가 돌아가고 얼마 후 세존은 여러 제자들에게 고하시기를,

“너희들이 만약 의문이 있다면 지금 바로 묻는 것이 좋으리라.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그 소청에 따라 그 의문을 풀고 연후에 멸도에 들어갈 것이다.

 

제자들이여, 부처가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희귀하다. 사람의 몸은 얻기가 어렵다. 부처를 따라 신심을 일으키고 능히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고 계를 지켜 파괴함이 없고 성스러운 지위를 얻는 일 역시 어렵다. 예컨대 사금(沙金)이나 우담화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희들은 나를 만나서 허무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 나는 옛날의 수행에 의하여 지금은 무상의 힘을 얻은 것이다. 너희들을 위하여 무한한 세월 동안에 수족의 골수까지도 돌보아 주었다. 너희들은 방일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이여, 정법의 성에는 공덕의 보물이 갖추어져 있고 계와 선정과 지혜로써 담장과 해자를 삼고 있다. 너희들은 지금 이 불법의 보물성에 들어가면서, 비유컨대 모든 기와나 자갈을 취하여 돌아가듯이 허망한 물건을 취하여 기뻐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작은 마음으로서만 족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출가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도 대승을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 염의(染衣)를 입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청정의 법에 물들여 있지 않다. 음식을 구하여 곳곳을 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대승법이란 마음의 양식을 빌려고는 하지 않고 있다. 수발(鬚髮)을 깎고는 있으나 아직도 정법을 위하여 여러 번뇌를 제거하고 있지 않다. 나는 지금 진정 너희들에게 고한다. 부처의 법성은 진실한 것이며 도착된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참으로 애써 마음을 다스리고 용맹정진하여 모든 번뇌를 분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혜의 해가 지면 너희들은 무명 때문에 뒤덮일 것이다.

 

제자들이여, 예컨대 모든 약초가 사람들을 훌륭히 살리듯이 나의 법은 묘한 감로를 자아내어 사람들의 번뇌의 병을 구하는 것이다. 지금 내 아들인 재가, 출가의 제자들로 하여금 남김없이 비밀의 법장 속에 안식하게 하리라. 나도 확실히 이 속에 안식하며 멸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비밀의 법장이란 무엇인가? 부처의 법신, 반야의 지혜, 해탈의 법이 곧 이것이다. 제자들이여, 불법의 몸은 상주(常住)의 것, 열반은 영세의 낙, 부처는 영세의 주(主)인 것이다. 부처의 정법은 청정하며, 만들어진 법은 부정한 것이다.「아(我)」는 부처의 의(義)이며 상(常)이라 함은 법신의 의, 낙이라 함은 열반의 의, 정(淨)이라 함은 정법의 의인 것이다.

 

사람들은 괴로움을 낙으로 생각하고 낙을 괴로움이라 생각하며, 무상을 상(常)으로 생각하고 상을 무상으로 생각한다. 또 무아임을 아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가 있음을 아가 없다고 꾀하며, 부정함을 정이라 헤아리고 정을 부정이라고 헤아리고 있으나, 이것은 모두가 어느 것이나 도착된 견식인 것이다. 너희들은 반드시 이 도착된 견식을 여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들이 말씀하시기를,

“세존은 길이 이 사도(四倒)를 여의셨는데도 어찌하여 이제 일겁이나마 더 이곳에 머무르시어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옵니까. 부처가 만약 가신다면 저희들은 어떻게 이 번뇌의 몸으로써 행을 닦을 수 있으리오.”

 

세존이 밝히시기를,

“너희들은 그와 같이 말해서는 안 된다. 나의 위 없는 정법은 길이 세상에 전해진다. 부처가 뭇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듯이 부처의 유법도 역시 너희들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너희들은 반드시 애써 어디에 있더라도 항상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상을 닦음이 좋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세존께서는 앞서 모든 법에「아」는 없다, 너희들은 이것을 배워 아상(我相)을 여의라. 아상을 여의면 교만을 여의고 교만을 여의면 곧 열반에 들 수가 있다고 설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지금 어떤 방식으로 이 의(義)를 풀이해야만 하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요긴한 일을 물었구나. 나는 비유로써 너에게 고하리라. 어떤 마음 어두운 국왕이 있었다. 그에게 한 의사가 따랐는데 역시 완고하고 어리석었다. 그 의사는 다만 유약(乳藥)만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의심스러웠다. 병이 나면 그 병의 성질을 생각하지 않고 모조리 이 유약만을 사용했다. 왕 또한 이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병과 약을 잘 아는 나그네 의사가 찾아왔지만 원래 의사는 이를 경시하여 가르침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에 나그네 의사는 부탁했다. ‘나는 당신을 섬기고 싶다. 모쪼록 청허해 주십시오.’ 원래의 의사가 말했다. ‘그대가 만약 48년 동안을 능히 나를 섬긴다면 나는 반드시 그대를 가르치리라.’ 나그네인 의사가 말했다. ‘반드시 명심하여 섬기겠습니다.’ 어느 날 원래의 의사가 나그네 의사를 동반하여 왕을 알현했다. 나그네 의사는 거기서 왕을 향하여 여러 가지 의방을 설했다. 여기에 왕은 비로소 원래 의사의 어리석음을 깨달아 이를 물리치고 깊이 나그네 의사를 공경했다. 나그네 의사는 왕을 가르치는 것은 지금이라고 생각하여 왕에게 이야기 드리기를 ‘왕이시여, 원컨대 나라 안에 포고하시어 유약을 금하십시오. 이 약은 사람을 해치는 일이 많사옵니다.’ 이리하여 그 왕은 포고하고 이를 범한 자를 벌했다. 지금의 의사는 여기에 여러 약을 갖추어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였다. 그런 얼마 후에 왕이 병들었다. 바로 그 의사를 불러 말하시기를 ‘나는 지금 병이 무거워 죽을 것같이 괴롭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낫게 할 수 있겠느냐’고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가 말했다. ‘젖을 복용하는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그 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여워하며 ‘너는 미쳤느냐, 아니면 나를 속이는 것이냐. 앞서는 젖을 독물이라 하고 이제는 또 이것을 약이라고 하느냐, 이상하지 않느냐?’ 의사가 말했다. ‘임금님이시여,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어 문자의 모양을 나타냈다 하더라도 이 벌레는 그것이 문자인지 아닌지를 모르며 사람들도 또 이 벌레는 문자를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임금님이시여, 원래의 의사도 또한 그렇습니다. 여러 병을 구별하지 않고 모조리 유약을 주어 그것이 듣느냐 아니냐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깨닫지 못한다 함은 무슨 소린가?’ 의사가 말했다. ‘임금님이시여, 이 유약은 독일 수도 감로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암소의 먹이와 물이 적당하여 맑은 냇물을 마시고 술찌꺼기 등을 먹지 않으며 방목지는 고원도 아니고 또 습지도 아니고 수소와 같이 살지 않도록 하고 그 송아지도 순하게 길들인다면 그 젖은 모든 병에 잘 들을 것입니다. 이것이 감로이오며 다른 것은 대개는 독인 것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아아, 나는 오늘 처음으로 유약의 좋고 나쁨의 이치를 알았다’고 말하고 곧 이를 복용하여 병이 나았으므로 나라 안에 포고하기를 ‘오늘부터는 유약을 복용해도 좋다’고 했다. 백성은 노여워하며 제각기 ‘왕은 마(魔)에 걸려 미쳤는가’하고 외치면서 왕의 처소로 달려갔다. 왕은 자상히 이를 설유하여 백성과 함께 이 의사를 공경하게 되었다.”

 

제자들이여, 부처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대의왕(大醫王)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시어 일체의 사의(師醫)를 항복시켜 사람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아」가 없다는 도리를 설했다. 그것은 외도에서 말하는「아」는 벌레가 만든 문자와 같이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때를 앎으로「아는 없다」고 설하고 또 설해도 좋을 인연이 있으므로「아가 있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그 양의의 유약이어야 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를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우둔한 자는 아를 두고 크게 엄지손가락과 닮았다고 말하고 혹은 겨자나 티끌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부처는 이와 같이 아를 설하지 않는다. 때문에 모든 법은「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아」가 없는 것임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곧 아(我)란 것인가? 만약 법으로써 진실, 상주, 자재하여 바뀌는 것이 없는 것이라면 이것을「아」로 이름 붙인다. 저 양의가 능히 약을 알고 있듯이 부처도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법 속에 참으로「아」가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능히 이 법을 닦는 것이 좋다.”

 

그 자리에 다라(多羅)마을의 바라문족인 가섭이라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공손히 합장하며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금강처럼 부서지지 않는 신심을 얻겠나이까? 또 무엇에 의하여 견고한 힘을 얻겠나이까?”

 

세존이 밝히셨다.

“왕자가 죄를 범하여 옥에 묶였다면 왕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스스로 어가를 돌려 그곳에 가는 것과 같이 도를 구하는 사람 역시 모든 사람에게 신경을 써서 내 자식과 같은 생각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하고 모든 공포심을 덜어 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무상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가섭이 말씀드렸다.

“어째서 계를 파하고 정법을 비방하는 것과 같은 자에게 대하여 자식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두고 자식 생각을 하는 것이 외아들인 라후라를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섭이 말씀드렸다.

“옛날 십오야의 포살(布薩)의 회중에 행이 바르지 못한 한 동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적 역사(密迹力士)가 부처의 신력을 받아 금강의 절구로 티끌과 같이 이를 바셨습니다. 어찌하여 부처는 뭇 사람을 보는 것이 라후라와 같다고 말씀하시옵니까?”

 

세존이 밝히셨다.

“이제 와서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 된다. 이 동자도 밀적도 부처의 방편으로써 나타난 빌린 사람으로서 참된 사람은 아니었다. 가섭이여, 혹은 정법을 비방하고 선근을 끊으며 혹은 사람들을 죽이고 사견에 떨어져 짐짓 금계를 범하는 자가 있더라도 나는 남김없이 그들을 어여삐 하고 동일하게 자식처럼 생각하는 것은 라후라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만 여러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과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 조복(調伏)을 나타냈던 것이다. 만약 제자로 하여금 법을 파괴하는 자를 보고 이를 책하며 이를 몰아내고 이를 들어 벌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법 속에 있으면서 부처와 원수를 구분 못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이를 책하여 이를 몰아내고 이를 들어 벌했다면 이야말로 참된 제자인 것이다. 가섭이여, 비유컨대 왕이 그 아들을 키우기 위하여 이를 엄한 스승께 붙여 응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왕에게는 조금도 죄가 없다. 그것은 사랑에 의했기 때문이다. 부처도 그와 같은 것이다. 법을 파괴하는 자를 보는 것도 똑같이 외아들과 같은 것이다. 부처는 지금 정법을 가지고 여러 국왕, 재상, 대신, 출가승, 재가의 제자들에게 부탁한다. 진정 모든 수행하는 사람을 격려하여 계와 선정과 지혜를 증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만약 태만하여 파계하고 법을 훼손했다면 이것을 괴롭혀 고치는 것이 좋다.”

 

가섭 :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세존의 수명은 어찌하여 백년까지를 채우지 못하는 것이옵니까?”

 

세존 : “가섭이여,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 난폭한 말을 하는 것이냐. 부처의 수명은 여러 수명에 있어서 더없이 훌륭한 것이다. 그 얻어진 법은 여러 법 중에서 제일인 것이다. 가섭이여, 이 나라에 여덟 대하(大河)가 있다. 또 수많은 작은 내(川)가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귀일함은 대해(大海)인 것과 마찬가지로 뭇 사람들의 수명인 강물도 귀일하는 바, 불명(佛命)의 대하인 것이다. 그러니 부처의 수명은 무량하다. 또 가섭이여, 예를 들면 아뇩달지(阿耨達池)가 네 개의 대하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이 부처도 또한 일체의 수명을 이루는 근원인 것이다. 또 예를 들건대 모든 약 중에서 제호(醍醐)가 그 첫째인 것처럼 부처는 사람들 속에서 수명의 제일인 것이다.

 

부처는 곧 상주의 법이라는 것을 앎이 좋다. 그러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번뇌를 수반하는 몸을 시현하여 멸도에 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가섭이여, 너희들은 힘써 이 제일의 의(義)를 닦아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밝힘이 좋다. 그렇게만 하면 나의 가는 곳에 따라, 나의 이르는 곳에 이를 수가 있을 것이다. 가섭이여, 바로 부처와 법과 승가의 상(常)에 머문다는 것을 희망함이 좋다. 예를 들면 나무마다 그림자가 있는 것과 같이 상의 법이 있으면 곧 귀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부처의 육신까지 상주의 것일진대 뭇 사람의 귀의하는 바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가섭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지금부터 이 취지로서 부모를 깨닫게 하고 70세의 부모로 하여금 모두 이것을 믿도록 하겠습니다. 밝을손가, 세존이시여, 제가 스스로 배우고 또 그것을 남을 위하여 설하는 것입니다.”

 

세존 : “가섭이여, 부처의 법신은 항상 머물러 있어 부서짐이 없다. 그것은 금강의 몸으로써 밥으로써 보유되는 몸임이 아니고, 곧 이는 법신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병고를 나타내는 소이는 이에 의하여 사람들을 조복케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섭 : “세존이시여, 무엇에 의하여 이 법신을 성취하는 것이옵니까?”

 

세존 : “가섭이여, 나는 훌륭하게 정법을 수호했기 때문에 이것을 성취한 것이다. 출가와 재가의 제자들도 힘써 정법을 지키는 것이 좋다. 만약 법을 설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칼을 잡더라도 이것을 수호해야 한다. 나는 무상의 비장(秘藏)을 부촉(付囑)했다. 가섭이여,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는 길이 머물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부처는 곧 그 사람의 몸 속에 있는 것이다. 가섭이여, 모든 부처가 스승으로 하는 바는 법인 것이다. 법은 상주(常住)이므로 모든 부처도 또 상주인 것이다. 가섭이여, 저 나무가 다 타면 재가 남듯이 번뇌가 멸진하면 곧 열반인 것이다. 철은 차갑게나 또 뜨겁게 할 수 있지만, 부처는 그렇지는 않다. 번뇌를 잘라 없애고 영원히 청량하게끔 되어 있다. 번뇌의 불꽃은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없다. 알아 두어라. 사람은 철과 같은 것, 나는 번뇌를 빈틈 없는 지혜의 불로써 뭇 사람들의 번뇌의 쇠를 태우는 것이다.

 

가섭이여, 왕이 그 후원에서 노는데 여러 채녀(綵女) 속에 있지 않더라도 그가 죽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 또한 그와 같아서 이 세상에 보이지 않더라도 항상 없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는 무량의 번뇌를 나서서 상세(常世)로 즐거운 열반에 들어, 모든 각의 꽃 사이에 놀고 있는 것이다.

 

가섭이여, 나는 이미 오래도록 이 큰 열반에 살면서 이 하늘 아래에서 갖가지 신통을 나타내었다. 룸비니(藍毘尼)의 동산에 있어서는 어머니 마야에게서 태어나는 사실을 시현했고, 사람들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나를 갓난 아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예부터 오늘까지 멀리 인간된 제약을 떠나고 있다. 다만 세간의 약속에 따라 이것을 시현했을 뿐인 것이다. 불신은 곧 이것이 법신인 것이며 살점, 힘줄, 맥, 뼈 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태어난지 7일이 경과했을 때 사람들은 나의 머리를 깎고 나를 이끌어 산토신(産土神)에게 참배케 하였으며, 드디어 커서는 학문을 배우게 하여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예부터 이러한 약속을 떠나고 있다. 뒤에 집을 나와 도를 닦을 때에도 사람들은 모두 실달다 태자가 처음으로 집을 나갔다고 말했으며 보리수 밑에 앉아서 모든 마를 항복시켰을 때에도 사람들은 모두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이를 항복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먼 옛날에 세상에 임금 지위를 버리고 법의 왕이 되어 오래도록 모든 마를 항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세상에 따라서 번뇌가 강한 사람들을 투항시키기 위해 이것을 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있으면서 가끔 멸도를 나타냈다. 사람들은 모두 부처가 정말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상주의 법임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가섭이여, 이것이 곧 모든 부처의 법계인 것이다.

 

가섭이여, 나는 또 때로는 세상에 나타나서 혹은 신심 없는 사람이 되고 악마가 되었으며, 여신으로도 나타나고 신의 모습으로도 나타났다. 때로는 창녀의 집에 들고 도박장을 찾고, 때로는 국왕이 되고 학자가 되었고 전염병이 일어나면 먼저 의약을 베풀어 후에 정법을 설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곧 이를 위해 법을 설하여 재난을 여의게 하였고 상(常)의 생각에 집착되는 자를 위하여 무상함을 설하고, 이 세상을 즐겁다고 집착하는 자를 위하여 괴로움을 설하였고, 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자를 위하여 아가 없다고 설하고, 이 세상을 청정하다고 집착하는 자를 위해서는 부정하다고 설하고, 이 세상을 탐하는 자를 위해서는 이 위 없는 미묘한 법이야말로 즐거움이라고 설하고 번뇌를 단절시키기 위하여 이 위 없는 미묘한 법을 내리고 모든 외도를 제도하려고 생각하고는 바른 법을 설하였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나와서 사람들의 스승이 되기는 했으나 마음에는 원래 스승이라는 생각이 없다. 여러 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법을 설하지만, 이는 거저 그들을 돕겠다고 생각하는 데에 불과하므로 악업에 의하여 이러한 몸을 받은 것은 아니다. 부처의 정각은 이와 같이 안온하게 큰 열반에 살고 있다. 그러니 상주인 것이며 변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을 커다란 열반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다. 만약 도를 구하는 사람이 이곳에 산다면 능히 이 신통을 나타내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가섭이여, 등불이 꺼지듯이 부처도 멸도하면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등불은 등잔 속에 기름이 있는 동안은 켜지지만 기름이 다하면 등불도 역시 다한다. 그렇지만 등불은 다 되더라도 등잔은 남아 있다. 부처도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번뇌가 멸하더라도 법신은 항상 머물러 있다.”

 

가섭이 말씀드렸다.

“등잔이 무상한 것과 같이 법신 역시 무상이며 변하는 것이옵니까?”

 

세존이 밝히셨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부처는 무상의 법기인 것이다. 일체의 법 속에서 열반은 상주인 것이다. 부처는 이것을 체(體)로 하므로 상주인 것이다.”

 

가섭이 세존께 말씀드리기를,

“세존께서는 부처에게 비장(秘藏)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는 남김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능히 알게 하시고 보게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착하도다, 너의 말대로이다. 부처에게는 실은 비장이라는 것은 없다. 부처의 말은 하늘의 맑은 가을달과 같이 청정하여 그림자가 없다. 다만 어리석은 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비장이라고 할 뿐이다. 가섭이여, 부한 자에게 단지 외아들이 있는데 이를 어여삐한다면 그가 지닌 보물은 모두 그 아들에게 보였을 것이다. 부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뭇 사람들을 보는 것은 외아들과 같은 것이므로 덮어 감출 것은 조금도 없다.”

 

가섭이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어떠한 것이 열반이라 일컫는 것이옵니까?”

 

세존이 밝히셨다.

“가섭이여, 열반은 해탈인 것이다.”

 

가섭이 말했다.

“모쪼록 해탈의 취지를 설해 주십시오.”

 

세존 : “착하도다, 가섭이여. 진실한 해탈을 원리(遠離)라 한다. 모든 애욕의 계박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또 불생(不生)이라고 한다. 해탈은 부모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무병이라고 한다. 일체의 병에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무투(無鬪)라고 한다. 탐하고 서로 빼앗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안온이라고 한다.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무구(無垢)라고 한다. 지혜의 빛을 막는 티끌이나 안개가 없기 때문이다. 또 무채(無債)라고 한다. 부자처럼 짊어진 짐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무핍(無逼)이라고 한다. 감로와 같이 조절이 알맞기 때문이다. 또 무동(無動)이라고 한다. 이를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희유(稀有)라고 한다. 불 속에 연이 나듯이 진기하기 때문이다. 또 무량이라고 한다. 대해와 같이 헤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최상(最上)이라고 한다. 허공과 같이 비길 데가 없기 때문이다. 또 단단하여 썩는 일이 없고 안이 차서 대나 갈대처럼 공이 아니다. 또 젖과 같이 그 맛이 하나인 것이며 부모가 자식에 대하듯이 평등한 것이다. 또 족한 것을 알고 굶주린 자의 감로를 대하는 것과 같은 일이 없고 적정(寂靜)한 것이어서 홍수가 가득한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이 함께 안온하게 즐길 수 있고 좁은 길을 둘이서 나란히 가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다.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기 때문에 법애(法愛)가 있다고는 하나 길이 아귀와 같은 탐하는 사랑을 여의고 있다. 그리고 신하가 왕에게 부탁할 때 타인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듯이 사람이 이를 따르면 남에게 의뢰할 필요가 없다. 광야를 지나서 집에 들면 안온한 기분이 되듯이 이에는 험난이 없다. 가섭이여, 이와 같이 해탈은 능히 일체의 두려움을 구하고 모든 인연을 뽑고, 교만을 누르고 방일을 고르고, 무명을 제거하며, 망집을 버릴 것, 물이 능히 일체의 초목을 윤택케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섭이여, 참된 해탈은 부처인 것이며, 곧 이것이 열반이다. 열반은 다하지 않는 것, 다하지 않는 것이 곧 불성이다. 부처의 성은 곧 결정, 결정(決定)은 곧 더할 수 없이 바른 길인 것이다.”

 

가섭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비로소 부처의 다하지 않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다하지 않는 곳이므로 수명 또한 무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세존 : “착하도다, 가섭이여. 너는 지금 훌륭하게 정법을 보전했던 것이다. 만약 사람이 모든 번뇌를 끊으려고 생각한다면 바로 이와 같이 정법을 유지함이 좋다. 가섭이여, 이 가르침을 펴내는 곳은 그 땅 곧 이는 금강과 같이 존귀하고 이 속의 뭇 사람도 역시 금강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이 가르침을 듣는 자가 있다면 곧 도에 있어서 좌절되지 않고 남김없이 그 원하는 바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가섭 : “계를 유지하는 제자로서도 역시 범할 수가 있사옵니까?”

 

세존 : “법이 쇠퇴하여 성자가 나타나지 않고 모든 제자들이 율과 그렇지 않는 것과를 판별하지 못할 때에 이르면 그들은 조도하기 위하여 한 사람이 그 속에 섞여서, 그리고 같은 번뇌의 티끌에는 더럽혀지는 일이 없고 다만 지혜의 빛을 부드럽게 하여 번뇌 속에 든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범하는 바가 있더라도 계를 깨뜨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약 계를 범하여 교만심으로 덮어 감추어 후회함이 없는 것이라면 이야말로 참으로 계를 깨뜨릴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섭 : “사람들 중에 참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 구별이 어려운 것은 암마라(菴摩羅) 열매가 익지 않은 것과 익은 것과를 구별하기 어려운 것과 같았습니다만 어찌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존 : “경(經)에 의함이 좋다. 경에 의하면 심안(心眼)이 생겨 이에 의하여 구별할 수가 있다.”

 

가섭 : “부처의 설하시는 바는 진실이옵니다. 저는 이를 믿고 있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러 제자들은 참으로 법에 의하되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의(義)에 의하되 말에 의하지 않고, 지혜에 의하되 분별에 의하지 않고, 완전히 설해진 경에 의하되 완전하지 않는 경에는 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존 : “법이라 함은 곧 법성(法性)인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곧 뒤떨어진 가르침의 사람인 것이다. 법성은 부처, 뒤떨어진 가르침의 사람은 생사 속에 있는 사람이다. 부처는 상주이며 생사가 있는 사람은 무상이다. 설령 부처의 무상함을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의(義)라는 것은 부처의 상주하는 이치인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모든 이론의 기식(奇蝕)의 언사인 것이다. 부처가 상주하는 것이므로 정법도 상주인 것이며, 정법이 상주하는 것이므로 승가도 상주인 것이다. 모든 의론의 언사는 탐구를 설하고 아첨을 말하여, 부처는 제자들에게 청정하지 못한 것을 쌓아도 좋다고 허락했다고 말하지만 모름지기 그의 의에 의하되 이 말에 따라서는 안 된다.

 

지혜라는 것은 부처의 지혜인 것이다. 뒤떨어진 가르침의 사람은 부처의 덕을 알 수 없다. 이러한 지혜에 의해서는 안 된다. 만약 부처는 곧 법신임을 안다면, 이야말로 진실한 지혜인 것이다. 이것은 기필코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바이다.

 

완전히 설해진 경(經)이라는 것은 이 위 없는 대승(大乘)을 말하는 것이다. 완전히 설하지 못한 경이라는 것은 뒤떨어진 가르침의 법인 것이다. 만약 부처의 상주를 말할진대 이는 완전이며, 만약 부처의 무상을 말할진대 이는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뒤떨어진 가르침의 법에 의하지 말고 기필코 대승의 법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부처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뒤떨어진 교법을 설하고 또 대승의 법을 설하는 것이지만 뒤떨어진 교법은 마치 처음으로 경작하되 아직 열매를 얻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가섭이여, 내가 설하는 것처럼 머무르는 곳을 아는 것이 좋다. 내가 멸한 후에 악마가 엽사의 법의를 걸친 것처럼, 재가와 출가의 제자 모습을 하고 점점 이 정법을 저해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섭이여, 만약 일체의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부처의 성이 있더라도 번뇌에 뒤덮여 있으므로 알지도 못하고 또 보여 주지도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힘써 번뇌를 끊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하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 만약 ‘자기는 이미 도를 성취했다. 왜냐하면 불성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죄를 범한 것이다. 설령 불성이 있더라도 닦지 않으면 아직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직껏 나타나지 않는다면 도를 성취한 것은 아니다. 가섭이여, 세상 사람은 아가 있다고 설하고는 있으나 불성이 있는 것은 모른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가 없는 것에 아의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며 전도된 생각인 것이다. 불법에 있어서「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곧「불성」을 말함이다. 세인들이 부처의 가르침에는 아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불성의「아」까지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이 또한 전도된 생각이다.

 

가섭이여, 예컨대 가난한 여자가 있는데 집에 황금 상자가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와서 그 여자에게 ‘너는 나를 위해 풀 뽑는 작업을 해 주겠는가’고 말하자, 좀 어렵겠다고 말하며 그 여자가 답하자 ‘내가 만약 당신에게 황금 상자가 당신 집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곧 나를 위하여 일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 여자가 ‘좋다’라고 말하자, 그 다른 사람이 그 여자 집에서 황금상자를 꺼내 보여주자, ‘우리 집 사람들도 모두 이것을 모르는데 어찌하여 너는 알고 있는 것인가’고 말한다. 여자는 이상히 여기면서도 기뻐하며 그 사람을 위하여 일하고 또 공경했다. 가섭이여, 나도 역시 그러하다. 뭇 사람들에게 원래 그 가지고 있는 불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가섭이여, 예컨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아기가 병에 걸렸으므로 그녀는 근심하여 의사에게 부탁했다. 의사가 와서 아기에게 약을 주고 또 고하여 말하기를 ‘아기가 약을 먹었으면 잠시 동안 젖을 주어서는 안 된다. 약이 소화됨을 기다린 후에 이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젖에는 독이 있다. 닿아서는 안 된다.’아기는 굶주린 채 젖을 구했지만 독인 줄 알고 빨지 않았다. 드디어 약이 소화되었으므로 어머니는 물로 유방을 씻고 그 아이를 불러 ‘젖을 줄테니 오너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독을 두려워하여 다가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먼저는 약을 잘 듣게 하기 위해 독을 발랐지만, 지금은 그 약도 소화되었다. 이젠 독을 씻어 버렸으므로 와서 젖을 먹어라. 조금도 쓰지 않으니까’고 말한다. 아이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먹었다. 가섭이여, 부처도 또 그와 같이 세간의 모든 망견을 제거하고 세간에서 생각하는 아는 것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한다. 앞서의 모든 법을 아가 없다고 설했지만 이것은 드디어 여래장(如來藏)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두려움을 품어서는 안 된다. 저 영아가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젖을 먹는 것과 같이 마땅히 스스로 부처의 비장을 판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섭 : “세존이시여, 만약「아」가 있는 것이라면 영아가 태어났을 때에 어찌하여 지려(知慮)가 없는 것이옵니까? 어째서 생을 받은 뒤에 죽는 일이 있는 것이옵니까? 만약 불성이 항상 있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귀천 빈부 등의 차별이 있으며, 어찌하여 살해나 취란(醉亂)이나 망실(忘失) 등이 있는 것이옵니까? 그리고 그「아」라는 불성은 어디에 있는 것이옵니까?”

 

세존 : “ 가섭이여, 예를 들면 왕가에 한 사람의 역사가 있는데, 미간에 금강주를 장식하고 있었다. 때마침 다른 역사와 씨름을 했을 때에 그의 머리가 그 이마에 닿았으므로 구슬이 살 속으로 들어가 버려 그곳에 창이 생겼다. 그러자 의사를 청하여 이를 낫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의사는 이 창은 구슬이 살에 파고 들어가 생긴 것임을 알아내고 역사에게 묻기를 ‘너의 미간의 구슬은 어디로 간 것이냐’고 물었다. 역사는 놀라 슬퍼하면서 말했다. ‘구슬이 없어졌습니까?’ 의사가 말하기를, ‘근심하지 말라. 구슬은 너의 살 속에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역사는 ‘당신은 나를 속이는 것인가요. 만약 가죽 속에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농혈이 나오지 않는 것인가요. 만약 힘줄 속에 있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당신은 그것을 볼 수 있단 말이오’라고 말한다. 이때 의사가 거울을 들고 그 얼굴을 비추었던 바 구슬이 분명히 거울 속에 비치었다. 역사는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가섭이여, 일체의 사람들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며 착한 친구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불성이 있더라도 볼 수가 없다. 탐, 진, 치에 뒤덮여져 갖가지의 업보에 의하여 갖가지로 세상에 태어나고, 설령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 또는 절름발이의 몸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제자들도 역시 이와 같이 착한 친구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아가 없는 것을 배우되 아가 없는 이치를 모른다. 아가 없는 것의 진성을 알지 못하고 어찌 아가 있는 진성을 알 수 있으리오. 가섭이여, 저 역사가 밝은 거울 속에 그 보주(寶珠)를 보듯이 뭇 사람들도 그 번뇌가 다할 때에 곧 밝게 불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또 가섭이여, 설산에 일미(一味)의 약이 있는데 그 맛은 극히 달다. 깊은 덤불 밑에 있어 사람들은 이것을 볼 수가 없다. 다만 그 향기에 의하여 그 소재를 살필 뿐이다.

 

옛날 한 성왕이 있었다. 나무통을 만들어 이 약에 담은 즉 약이 모두 유출되어 통 속에 모였다. 왕이 죽은 뒤 이 약은 통 속에 있는 동안 혹은 시고 혹은 짜고 혹은 맵고 혹은 쓰고 그 흐르는 시간에 따라서 맛은 모두 같지가 않았다. 진짜 맛은 홀로 머물러 산 속에 있었다. 사람들은 고심하여 그 원인을 알려고 애썼지만 진미는 나오지 않았다. 후에 다른 성왕이 나와서 이 맛은 산 속에 있는 맛이 진짜 맛임을 알게 된다. 가섭이여, 부처의 비장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번뇌의 덤불에 뒤덮여서 무명(無明)의 사람들은 이를 볼 수가 없다. 일미란 불성에 비유한 것이다. 불성은 일미이지만 번뇌 때문에 여러 가지 생을 받는 것이다.

 

가섭이여, 불성은 용맹하여 깨뜨릴 수가 없다. 때문에 결코 해칠 자도 없다. 또 볼 수도 없다. 네가 만약 도를 성취했다면 곧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가섭 : “세존이시여, 만약 죽이는 일이 없다면 불성의 업은 없는 것이옵니까?”

 

세존 : “가섭이여, 실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불성은 몸과 마음 속에 살아 있다. 만약 몸과 마음을 깨뜨리면 불성만 남는다고 하지만 만약 죽이는 일이 있다면 그는 곧 악취에 떨어지리라. 세인들은 바르지 못하게 아의 상을 헤아리는데 그것은 모두가 망상인 것이다. 망상은 진실이 아니다. 때문에 불성을 담는 그릇인 몸을 깨뜨리고는 진실한 아의 상을 찾을 수가 없다. 세상이 꾀하는 것과 다른 이와 같은 아의 상이야말로 불성인 것이다. 이는 가장 아를 잘 헤아린 것이다. 가섭이여, 사력(砂礫)은 뚫을 수가 있지만 금강은 뚫을 수가 없다. 몸과 마음은 사력에 비기고 불성은 금강에 비겨도 좋다. 마(魔)와 사람들은 모두 몸과 마음을 깨뜨릴 수가 있지만 끝내 불성만은 깨뜨릴 수가 없다. 가섭이여, 불성은 이와 같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가섭이여, 대승은 감로의 법이다. 이것에 의해 열반에 이를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안다면 생사도 초월할 것이다. 가섭이여, 너는 능히 삼보에 귀의하는 일을 분별하는 것이 좋다. 이 삼보에 귀의하는 성은 곧 아의 성인 것이다. 만약 능히 명확하게 아성(我性)이 불성임을 깨달았다면 이 사람은 숨겨진 부처를 찾아낸 것이다.

 

가섭이여, 부처를 의지하는 자는 다른 신들을 의지하지 않는다. 이는 참으로 참된 신자인 것이다. 법에 의지하는 자는 외도를 구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두려워할 바가 없는 것이다.

 

가섭이여, 나는 이제 다시 너를 위하여 쉽게 여래장에 들어가 설하리라. 만약 진심으로 아의 집착에 머무른다면 항상 괴로움을 여의지 못한다.

 

만약 진심으로 아가 없어진다면 도를 닦더라도 효과가 없다. 만약 또, 아가 없는것이라면 이는 곧 사견(邪見)인 것이다. 만약 아가 항상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사견에 빠지는 것이다. 만약 그저 괴로움만을 말할진대 곧 이 역시 사견인 것이며, 만약 그저 즐거움만을 말한다면 이 또한 사견인 것이다. 그러니 불법의 중도(中道)는 멀리 모든 이변(二邊)의 길을 여의고 진실을 설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훌륭한 의사는 능히 병의 인을 알고 그에 따라 처방하여 병을 낫게 하듯이, 부처는 모든 번뇌의 몸이나 상(相)이나 그 차별을 알고 이를 제거하여 감추어진 바의 청정한 불성을 여는 것이다. 범부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고(苦)라고 설하면 낙이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변한 것을 설하면 불성의 변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아가 없다고 하면 일체의 불법에 아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숨겨진 불성이 번뇌에 뒤덮였더라도 번뇌를 여의고 공적(空寂)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를 듣고 단멸의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지혜 있는 자는, 부처는 상주인 것으로 변역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해탈은 환상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범부는 이것을 마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혜 있는 자는, 설사 인신을 빌린 부처의 생사가 있을지라도 그 법신은 상주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무명은 제행의 원인이 된다고 하면 범부는 명과 무명을 달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혜 있는 자는 그 성이 둘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이 둘이 아닌 성이야말로 실성(實性)인 것이다. 만약 모든 법에 아가 없다고 한다면 범부는 아가 있는 것과 아가 없는 것을 둘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성이 둘이 아님을 알고 있다. 성에 둘이 아니면 그것은 곧 실성인 것이다.

 

가섭이여, 소가 맛 있는 풀을 먹으면 그 젖이 달고, 쓴 풀을 먹으면 그 젖도 쓰다. 사람들은 명과 무명의 인연에 의하여 두 개의 상을 만든다. 그러나 만약 무명이 바뀌면 명으로 되는 것과 같이 일체의 선악의 법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가섭이여, 설산에 여러 독초가 있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약초가 있다. 소가 이것을 먹으면 제호(醍醐)를 얻음과 같이, 뭇 사람들의 몸은 무상의 독약이라고는 하지만 그 속에 불성이 신묘한 약임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다만 번뇌의 객진(客塵)에 뒤덮여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 이것을 본다면 곧 이 위 없는 각에 들어갈 것이다. 이 사람은 능히 불은에 보답하는 자이다. 이는 참된 불자인 것이다.”

 

가섭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찌 하면 이 불성을 볼 수 있는 것이옵니까?”

 

세존 : “경에 따라 믿으라. 그러면 곧 알 수가 있다. 가섭이여, 한여름 철에 물이 차면 원앙은 높은 언덕을 택해 그 위에 새끼를 낳고 그러한 뒤에 마음 편히 노는 것과 같이 부처도 세상에 나와서 무량 중생들을 교화하는 마음에 정법을 주거케 한 다음 곧 멸도에 든다. 가섭이여, 모든 변천은 이 고인 것이다. 열반은 이 낙인 것이다. 그것은 무상의 미묘한 것으로 모든 변천을 깨뜨린다. 근신하여 방일하게 되지 않는 것은 감로의 땅인 것이다. 방일하여 근신이 없는 것은 죽음의 길인 것이다. 방일은 망집, 망집은 괴로움인 것이다. 방일이 아닌 것은 열반인 것이다. 이는 무상의 낙인 것이다. 만약 변천으로 향한다면 죽음인 것이며 비길 수 없는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만약 열반으로 향하면 죽음이 없으며 참으로 신묘한 낙을 받는다. 그러하기에 범부에게는 죽음이 있고 성자에게는 늙음도 죽음도 없다. 그것은 위 없는 상세(常世)의 낙인 열반에 들기 때문인 것이다.

 

가섭이여, 달이 이곳에서 지면 이곳 사람들은 달이 졌다고 말하며 달이 타처에 나타나면 그곳 사람들은 달이 떴다고 한다. 그렇지만 달은 항상 있으며 그 성에는 출몰은 없다. 부처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그 성에는 생멸이 없다. 다만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생멸을 나타내는 것이다. 가섭이여, 사람들은 월초에는 달이 찬다고 하고 월말에는 달이 이지러진다고 한다. 그렇지만 달의 성은 항상 차서 더하는 일도 없고 주는 일도 없다. 부처도 또한 그와 같이 사람들의 보는 바는 같지 않더라도 항상 머무르며 변치 않는다.

 

가섭이여, 달은 일체의 위에 나타난다. 성읍에도 취락에도 산에도 습지에도, 혹은 우물 또는 독, 혹은 못, 백 리가 되건 천 리가 되건 달은 항상 그 몸에 따른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달은 솥의 아가리와 같다고도 말하며 혹은 수레바퀴와도 닮았다고도 일컫는다. 그렇지만 월성(月性)은 하나인 것이며 다른 모양은 없다. 부처도 또한 그와 같이 세상에 따라 무량한 인연을 나타내지만 그 성은 상세(常世)에 바뀌지 않는다.

 

가섭이여, 부처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몸을 버리는 것은 뱀이 낡은 허물을 벗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금은 세공이 좋은 금을 얻으면 뜻대로 갖가지 물건을 만들 듯이, 부처는 이 세상에 있어서 갖가지의 색신(色身)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망집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가섭이여, 세상은 장부상(丈夫相)이 있다. 그것은 불성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으로서 불성을 모른다면 곧 남상(男相)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자일지라도 그 사람을 여자로 이름 붙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달리 만약 여자일지라도 능히 자신에게 불성이 있는 것을 안다면, 이 사람은 장부상이 있는 것으로, 이는 틀림없이 남자인 것이다.”

 

가섭 : “세존이시여, 저에게는 지금 장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숨겨진 불성을 보는 가르침에 들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지금 비로소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에 의하여 확고히 밝게 될 수가 있었습니다.”

 

세존은 가섭을 칭찬하여 밝히기를,

“좋을시고, 가섭이여. 비길 수 없는 법은 깊고 깊어서 알기 어렵다. 그런데도 너는 이제 앎을 얻었다. 마치 벌이 꿀을 채집함과 같은 것이다.”

 

가섭은 또 세존에게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와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그 성에 차별이 없다는 것이옵니다만, 자상히 이 취지를 설하여 대중에게 시혜해 주시옵소서.”

 

세존 : “가섭이여, 예를 들면 장자의 아들이 갖가지 털빛을 가진 많은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때 제사에 쓰기 위하여 그 젖을 짠즉 젖빛은 모두가 희었다. 그는 의심하기를 ‘소의 털빛은 각각 다른데도 그 젖은 어째서 모두 흰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생각 끝에 이것은 모두가 업보의 인연에 의하여 그 빛이 하나임을 깨달았다.

 

가섭이여, 불성이 모든 사람에 있어서 하나인 것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번뇌가 새어 나는 것을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가섭이여, 예를 들면 황금의 광석을 용해하여 이를 달구어 황금으로 만들면 그 값이 비싸지는 것과 같이, 여하한 사람도 모두 동일한 불성을 성취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광석의 찌꺼기를 제거함과 같이 번뇌의 더러움을 제거하면 일체 사람들이 갖는 동일한 불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섭이여, 부처의 상주를 모르는 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인 것이다. 만약 부처의 상주를 안다면 이는 신의 눈을 가진 사람이다. 설사 신의 눈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를 알지 못하면 육(肉)의 눈과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이 사람이 자신의 수족을 알지 못하고 또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가섭이여, 부처는 항상 일체 사람들의 부모인 것이다. 부처가 한 가지 말로 법을 설하면 다른 사람들도 각각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으며, 모두 감탄하여 부처는 오늘 나를 위하여 법을 설하셨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섭이여, 아기가 태어나면 16개월 동안은 부모가 우선 그 소리를 같이하여 영아가 말하는 대로 이야기하고 그리고 서서히 말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도 또한 그와 같이 뭇 사람의 갖가지 소리에 따라서 법을 설하고 그 봐야 할 바에 따라서 갖가지 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정법에 안주케 하기 위한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