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선(善)과 달마 선(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中峰和尙山房夜話-
(1) 어느 수도자(修道者)의 물음에 중봉스님은 대답하였다.
문) 제가 들으니 불문(佛門)에서 경론(經論)을 연구하여 진리의 본말을 밝히고자 하는 이론가들이 말하기를 6바라밀 중에서 다섯째의 선정(禪定)바라밀이 달마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며, 또한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胎息論>이라는 불서(佛書)를 가지고 와서 중국에 전하여 대대로 비밀히 서로 전하여 오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달마선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라고 하여, 그 논문의 내용을 교묘하게 끌어대서 우리 심리의 제8식 상태인 것이라고 하여, 우리들이 어머니의 포태(胞胎)중에 들어 있을 때에는 오직 한 숨(一息=冬眠狀態)으로만 열 달을 뱃속에서 머물러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태식(胎息)이라고 하는 것인데, 6바라밀 가운데 다섯째인 선정을 또한 이 일식법(一息法)인 태식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라고 하나, 이것은 다 그 지말적인 것에 말에 불과한 것이라 이「달마선」과 어긋나는 말이지마는, 저 소승의 아라한과 독성들의 선정이 바로 이 태식이라고 하는 말에 대하여서 어떻게 봅니까?
답) 그것은 그 사람이 불법을 비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달마조사가 전한「선」이라는 것이 무엇인 줄 모르기 때문에 저 소승불교의 네가지 선(禪)과 여덟가지 정(定)을 내어놓고는 따로「선」이라는 것이 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달마조사가 3천년 전의「석가여래」부처님께서 이 마음의 청정한 본연 면목(正法眼藏)과 가장 뚜렷하고 안락하며 기묘한 이 마음은 말로나 글로써 전하거나 받을 수 없는(敎外別傳)것이다.
이 마음의 참된 근본 면목을 바로 깨달아서 직접 부처님의 정법을 받아 이은「마하아 카아샤파」로부터 대대로 상속하여 오는 27대 조사인 반야다라의 선법을 계승한 부처님에 원극심종(圓極心宗)의 정통법인 것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최고 최후의 극비인「달마선」이라는 선에는 들어맞지도 아니하고 그르치기만 하는 임시적인 가명(假名)도 많은 것이다. 예를 들면, 가장 높은「최상의 선」이라고도 하며 또한 8만4천 불법의 가장 근본이 되는 이 마음이기 때문에「제일의(第一義)의 선」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저 소승불교에서나 외도들이 닦는 선법과는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분명하게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 달마조사가 전한 조사선의 실제 면목은 사실상 깨달은 도인들끼리만 서로 긍정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 소식은 다만 이러할 뿐으로 부처님께서는 <대장경>으로도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미 여러 경전 가운데서 말한 바다. <전등록>이나 <염송>등 조사들의 말씀 가운데도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한 후에 마지막으로 저 보리수 아래서 새벽 하늘에 샛별을 보시고 확연히 크게 깨달으신 선의 한 소식은 그림자도 비추지 아니한 도리인 것이며, 또한 이 마음은 일체 선정으로도 닦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 자신도 6년을 한번 앉아 움직이지 아니한 고행이 한갓 고생만 되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마음은 보고 들은 지식으로도 알아볼 수 없는 것이며, 이 자리야말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며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며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아니므로 동서남북 상하 간방(間方)이 없기 때문에 들어갈래야 길도 문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인생으로서의 최대 고행인 6년 동안을 앉아서 먹지도 자지도 아니하고 고행 수도를 마친 후에 저 보리수 아래에서 확연하게 이 마음의 본연 면목을 깨닫고 보니, 이 소식은 오직 부처님끼리만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범부 중생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리어 대법(大法)을 비방하고 그 죄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인연 있는 중생들을 따라서 다른 세계로 갈 것을 생각하기까지 하였다가 천상의 대범천왕의 세 번 권청함을 허락하여 49년 동안에 횡설수설 8만4천 가지 방법으로, 보리수 아래서 샛별을 보시고 깨달은 이 마음의 본래부터 참된 이 소식, 이대로를 이렇게 제대로 행하기 위하여 대비를 드리웠으나, 거의가 헛일이 되어버렸다.
마치 한 살 먹은 어린애를 안고 수억 만리 떨어진 저 공중에 밝아 있는 둥근 달을 손으로 가리켜서 쳐다보게 하려는 일보다, 백천 만억 배나 더 어려운 일을 한 것이다. 손으로 힘차게 달을 가리킬수록 뜻모르는 아기는 빵긋빵긋 웃기만 하는 것이다. 애가 탄 엄마는 저렇게 밝은 저 달을 좀 보라고 소리를 질러도 아기는 그럴수록 놀라기만 하고, 눈까지 감아 버리는 것이다. 어찌 애가 탈 일이 아닌가.
용을 한 마리 낚고 싶어서
한없이 길고 긴 이 낚싯줄을
바다 물 깊숙이 던져 보았다.
홀연히 한 물결이 일어나더니
어느덧 천파(千波) 만랑(萬浪)이로다.
밤은 이미 저물어 고요해지고
물은 더욱더 차고 차져서
고기들도 물때가 지나 버렸다.
하는 수 없어서 다 걷어들고
빈 배에 저 달빛만 가득히 싣고
이 밤중에 나혼자 돌아가노라.
(2) 그러나 마침 카아샤파라는 상수(上首)제자가 있어서 또한 이 마음 본래 소식을 온전히 챙겼으므로 부처님의 이 법을 받아 이어서 그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었으므로 전한 것도 없이 전한 것이요, 또한 받은 것도 없이 완전히 받은 것이다. 이러므로 이 마음, 이 법, 이 도리, 이 소식은 말로도 인식으로도 행동으로도 도저히 전하고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글로써 적을 수 있으며 전하고 받을 수가 있으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말도 부득이하여 남겨놓게 된 것이다. 골목에서 외치는 저 엿장수는 도리어 이 마음, 이 법, 이 소식을 여지 없이 설명하고 있다.
「싸구려 싸구려, 말만 잘하면 거저 준다오.」
이 말을 알아들었는가? 다겁으로 힘써 마음을 가진 범부들은 밝고 날카롭고 재치 있어, 입을 벌리기 전에 알아듣고 마는 것이다. 이 마음은 이미 이 나의 이 마음에, 누가 깨달을 수가 있으며, 무엇을 따로 깨달을 것이 있으랴. 이렇게 여지없이 제대로 된 뒤에는 저 청산 깊숙이 들어가서 산명수려(山明水麗)한 곳에서 밝은 달과 흰 구름을 벗삼아 깃들이는 도인도 있고, 혹은 걸인의 행색으로 시정에 들어가 공원이나 거리에나 시장의 한 구석에 앉거나 서거나 돌아다니면서 연대갑자(年代甲子)를 다 잊어버리고, 넋 빠진 등신처럼 그날그날을 지내는 도인도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왕사 국사(王師國師)로 출세하여 임금의 스승이요 국민의 사표로써 인간을 개조하며 사회를 개선하여 지상극락을 건설하는 도인도 있다. 대수도원을 경영하여 인간과 천상의 사표가 될 수 있는 수천명의 승도(僧徒)들을 빈틈없이 지도 육성하고 있는 도인도 있다. 또는 대자대비하며 청정엄숙한 도인도 있는 반면에 광인행(狂人行)과 잡승행(雜僧行)도 있다. 이렇게도 신비막측(神秘莫側)한 수도행각(修道行脚)에 있어서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므로 범부의 속정(俗情)으로는 왈가왈부(曰可曰否)가 범부와 성인을 가릴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초월하여 사의불용(思議不容)하는 해탈 아닌 해탈만행에 대하여 누가 감히 미오(迷悟)를 말할 것이며, 또한 선정(禪定)이니 태식(胎息)이니를 말할 수 있으랴. 대체로 달마조사는 경론 등 문서의 논리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이 마음의 깨닫는 법을 가르치려던 것이 아니고, 바로 직접으로 당장에 불법을 알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그것 그놈 그 책임자가 누구이며 또한 무엇인가를 바로 물어 핍박하여 졸라 붙여서 학자로 하여금 귀신도 모르게 흔적없이 이렇게 본래대로 000하였다. 그러나 그후 제6대손인 혜능 대사가 이 말을 듣고 평하되,
「달마대사가 바로 가리키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켰을 때에 벌써 불법은 다 망친 것이다.」하였다.
이렇게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중생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는 이 철퇴 앞에서 누가 감히 말로나 문자로 이 법을 전하느니 하다가는 그 신명조차 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태식론으로 이 법을 전수(傳受) 운운하는 것은 어떤 요망한 무리들이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나 그것은 달마대사를 속여 팔아먹는 짓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달마대사를 속여 파는 그것은 제 마음을 제가 스스로 속이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3) 부처님께서 49년의 긴 세월을 두고 8만4천 법을 가르치신 것은 저 미혹한 고해 중생들이 업보인연(業報因緣)으로 생겨난 이 육신만을 자아(自我)인 줄 착각하여 영겁으로 돌아치며 생사대몽(生死大夢)을 깨지 못하고, 꿈을 꿈인 줄도 모르고 몽중고락(夢中苦樂)을 참인 양 헤매는 것을 불쌍하고도 민망하게 여기시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마음을 깨달아서 생사의 꿈을 초월하여 영원무궁한 무진장의 행복을 누리도록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생사의 큰 꿈을 완전히 깨우게 하는 8만4천 가지 방법으로 지도하는 그 제일 요긴한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문제로서의 문제가 아닌 문제이기 때문에 깨닫기 이전의 문제도 아니며 또한 깨달은 이후의 문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깨닫기 이전은 어두운 중생들의 생사 꿈이요, 깨달은 뒤라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의 꿈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과연 이 꿈을 어디서 깨야 깨는 것일까? 생시도 이놈이요 잠이 푹 들어도 이놈이요 꿈에도 이놈이다. 태 중에서도 이놈이요 배 밖에 나와서도 이놈이요, 늙어도 이놈이요 병들어도 이놈이요, 죽는 때에도 이놈이요, 죽은 후에도 이놈이요 억만겁 이후에도 이놈이요 소나 개로 태어나도 이놈이요 지옥을 가도 이놈이요 천당 극락을 가더라도 이놈이요 억만겁 이전에도 역시 이놈이었다. 이 천지에 이놈만은 어디에 빠져 있어도 물 한 방울이 묻거나 젖지 아니한다. 진실하고 깨끗하고 자유자재한 변하지 아니하는 실상자리로서 사고방식이 미치지 못한다.
어느 때에는 중생도 되었다가 홀연히 부처도 된다. 그러나 또한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 따라서 생사도 열반도 보리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인가? 이놈! 잠을 자다가 잠이 아닌 꿈으로 나갔으니, 잠도 아닌 그 즈음에는 무슨 상태일까? 이놈이 자유 천지에서 뛰노는 법계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놈이 중생의 생사 꿈도 이루고 부처의 열반 꿈도 이루는 것이다. 이놈만 알아내면 영원한 자유의 왕이 되는 판인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자유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지옥에도 자유로 가는 것이고 유치장에도 자유로 가는 것이다. 자유! 이놈 때문에 좋기는 하지만 큰 낭패다. 부처는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요, 사람은 부처를 속이는 부처이다. 어느 사람이 참으로 속이는 사람이며 어느 사람이 진정 속는 사람일까? 정말 속지 말아야 하는데, 과연 어느 곳에서 어느 순간에 어떻게 하여야 아니 속는 법인지, 부처와 중생의 틈이 어디 쯤인지, 번뇌는 보리가 아니고 보리는 번뇌가 아닌 것도 같은데, 이 번뇌 망상과 보리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하니 대체 무엇을 어떻게 알고 하는 것인지? 다만 죽음은 시일을 미리 알리는 법이 없다.」
출전 : 수상록(청담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청담큰스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의 사회 참여 (0) | 2015.10.20 |
---|---|
또 하나의 얼굴 (0) | 2015.10.18 |
모든 사물의 실상을 마음의 눈으로 보다 (0) | 2015.10.15 |
오늘은 어디까지 왔나 (0) | 2015.10.13 |
의심을 떠나지 말라 (0) | 2015.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