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의 실상을 마음의 눈으로 보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禪門撮要達摩四行論-
(1) 누가 기둥(柱)을 보고 문득 그것이 기둥이라는 생각을 낸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기둥 모양을 보고서 기둥이라는 생각을 낸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의 기둥은 이미 180년 전부터 서 있는 사실인 것이고, 그것을 보고 기둥이라고 인식한 이 알름알이의 주관은 그보다도 180년이나 뒤늦은 오늘 이 시간, 이 찰나에 비로소 생긴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천지와 만물은 그 자체가 생겨난 그 순간부터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쉴새 없이 변화하면서 흘러가고만 있다. 저 물건이 그렇고 또한 이 마음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떠한 사물을 막론하고 그대로는 재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가릴 것 없이 그것들은 다 천변 만화로 변하면서 토막토막 측정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연속선인 가상(假相)의 환영(幻影)인 것이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러한 그것들이 또한 그렇게 흘러서 가는 이 인생의 눈앞으로 번갯불같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았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들을「산」이다,「물」이다,「너」다,「나」다 하고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다.
나를 이름이 무엇인가? 지을 수 있거든 불러보라. 그러므로 그가 인식하고 있는 기둥이나 기둥 모양은 이 우주간에 실로는 없는 것이다. 만약 무엇을 인식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가 그의 인식을 다시 인식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한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 먼저 생겨 있는 것을 사람이 그 후에 그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유물관(唯物觀)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이 극도로 발달하여 물질 그 궁극 본체가 틀림없이 공무(空無)인 것을 넉넉히 미루어 생각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저 진공(眞空)의 환변(幻變)이 물질의 가환상(假幻相)인 것이고, 이 가환물질(假幻物質)의 환변상(幻變相)이 곧 저 가상(假相)의 대자연계인 것을 또한 수월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반야심경>에서「색즉시공(色卽是空)」「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아무 것도 아닌 진공(眞空)이 변하여 현상계로 나타난 것이므로, 현상된 그대로가 진공적인 존재라는 데서「색즉시공」이라는 것이다.「공즉시색」이라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저 허공이 현상계로 변하여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또한 여기에서 다시 한번 냉철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저 아무 것도 아닌 무정(無情) 허공이 어찌하여 제 스스로가 변화하며 현상(現相)을 할 수 있을 것인가?「공즉시색」도 또한 그러하여 진공적(眞空的)인 저 환영상(幻影相)의 무정 현상계가 어찌하여 그 스스로가 진공으로 변하여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필연코 커다란 숨은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저 무한대의 진공포장(眞空布帳)에다가「색즉공 · 공즉색」이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진공과 물질은 다만 자유도 없는 죽음의 무정 환상인 것이다. 그와 반대로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는 반드시 절대 자유한 이 삶의 무한 생명으로서 조화의 무한 동력인 것이다.
그러면 저 현상계가 창조되기 전의 그 무엇인가로서 이 삶의 무한동력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곧 우리들의 이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은 곧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여 주관과 객관의 본체이기 때문에 저 현상계의 만물은 능히 벌리기도 하며 또한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우주의 근본이며 만물의 본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주관 대 객관으로 벌어져 있는 이 우주와 인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들은 이 다루려고 드는 통에 온 우주의 주인공인 유아독존의 자아가 깜깜하는 순간에 도리어 창해일속(滄海一粟)으로, 한 개의 적은 육체의 인간으로 전락(轉落)되어서 이 생사대몽(生死大夢)을 이루어서 윤회(輪廻)와 인과(因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사는 것도 꿈이요, 죽는 것도 또한 꿈인 것이다. 꿈만 꿈이 아니라 꿈 아닌 것도 꿈이다.
망상(妄想)은 꿈을 이룬다. 이것은 곧 주관은 객관을 조화한다는 실증을 말하는 것이다. 주관 밖에 객관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주관이 곧 객관이며, 객관이 곧 주관인 것이다. 뜨겁고 찬 것이 불과 물에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기둥과 기둥의 모양 밖에 인식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을 쉬어 버린 때에는 객관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기둥 한 가지를 볼 때에는 곧 그 기둥이 나타나는 이치와 그 기둥을 나타낸 이 마음의 본연면목(本然面目)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저 만물을 다루면 된다. 그러면 저 기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어서 말해 보라!
(2) 문.「탐심과 욕심을 무슨 마음이라고 하나?」
답.「범부의 마음이라고 한다.」
문.「생멸(生滅)이 없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성문(聲聞) 나한(羅漢)의 마음이다.」
문.「모든 법이 다 그 개성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연각(緣覺) 독성(獨聖)의 마음이다.」
문.「세상법에나 불법에나 아는 생각도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세상법에나 불법에 흔들리지도 아니하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대승보살(大乘菩薩)의 마음이다.」
문.「아무 것도 깨달은 것도 없고 또한 아무 소견도 없으면 그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아무 말도 아니하겠다. 이 본래의 마음자리는 생각만 해 보려고 하여도 벌써 10만8천 리나 어긋나고 마는 것인데, 어찌 말로써 대답할 수 있으랴. 이 마음은 무심한 자리며, 말이 없는 자리며,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자리며, 특별한 불법의 정지견(正知見)도 가진 것이 없으며, 또한 피차(彼此)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마음은 물건이 아니므로 물질에 속한 것도 아니며 또한 이 마음은 물질이 아닌 것도 없으므로 물질이 아닌 데도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자리는 유무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곧 모든 것을 초월한 해탈의 실재인 자아(自我)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본의 아닌 파계(破戒)를 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파계한 것을 뉘우치는 생각이 본래 없던 것인 도리를 확실히 알고 참회하는 생각까지 버리면 또한 생사를 초월한 해탈의 본연 면목인 이 청정무위(淸淨無爲)한 마음만 남아서 두루하리라.
그러므로 비록 복을 지었어도 천당으로 갈 사람이 없는 것이며, 비록 시공 유무가 본래 없는 줄은 알았지마는, 그 도리를 알아 얻었다는 생각은 남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비록 주관이나 객관이나 간에 그것들은 다 본래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가히 마음에 간직할 것이 없으며, 간직할 것이 없으므로 간직할 수도 없으며 간직되지 아니한다.」
(3) 문.「어떻게 하여야 이 마음 법을 알 수 있을까?」
답.「이 마음 법은 깨달은 것도 없고 또한 아는 것도 없나니, 만약 이 마음 가운데 과연 깨달은 것도 아는 것도 없다면, 이 사람은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니, 마음에 안 것도 본 것도 없으면 그것은 마음을 본 것이며 한 법도 깨닫지 못한 것이 법을 얻은 것이며, 한 법도 얻지 못한 것이 법을 얻은 것이며, 한 법도 보지 못하는 것이 법을 본 것이며, 한 법도 따지지 아니하는 것이 법을 잘 따진 것이다.」
문.「이 마음은 아무 것도 보는 것이 없는 것인데, 어떠한 것이 걸림이 없는 지견(知見)인가?」
답.「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걸림이 없는 일체 알음알이의 바통인 알음알이이며, 또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보는 데 걸리지 아니하는 봄(見)이다.」
출전 : 수상록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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