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居士. 在家佛子)

무진거사(無盡居士)

근와(槿瓦) 2015. 10. 12. 00:45

무진거사(無盡居士)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宋나라 사람. 성은 張씨. 이름은 商英. 자는 天覺. 諡號는 文忠. 무진거사가 불교를 믿게 된 동기는 어느 날 절에 갔다가 불경을 비단 위에 金銀으로 장식한 것을 보고서, 우리 공자님의 서적은 종이로 장식되어 있는데 불교의 책은 저같이 사치스러운가 하고 시기심이 일어나 집에와 3경이 지나도록 불교를 배척하는 論을 지으려고 했다.

 

밤에 이것을 본 부인이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거사는 "부처가 없다는 無佛論을 지으려고 한다" 하니 부인 향씨가 웃으며 "이미 부처가 없으면 그만이지 論은 지어 무엇합니까" 하였다. 거사는 그 말에 의심이 나서 말이 없었고, 잠시후에 부인은 불경을 읽어 보았느냐고 묻자 거사는 읽어보지 않았다고 하니 부인은 "經을 읽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論을 쓰려고 합니까? 불경을 한번 읽고 쓰시지요" 하였다.

 

거사는 다음 날 인근 절에서 불경을 빌려오니 그 책이 바로 維摩經이었다. 읽어나가다가 文殊師利問病品 제 5의 구절에 이르러 불교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참회하여 護法論(歐陽修의 불교 비방을 공격한 내용) 1권을 지었다.<출전 : 불교학대사전>

 

유생일 때의 ‘무불론(無佛論)’을 짓고자 할 만큼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던 무진거사는 불법을 만난 이후 그 마음 씀씀이는 시원하게 툭 트였다.

더욱이 불교와 유교뿐만 아니라 도교까지도 평등하게 대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부분까지 세세하게 배려했다. 거사로서 그리고 관료로서 모든 것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해 흉년이 크게 들었다. 도교(道敎)의 도사(道士)들까지 그가 불자인줄 알면서도 상대적으로 넉넉한 그의 집을 찾아와 양식을 보시해 주도록 부탁했다. 무진거사는 대뜸 그들에게 <금강경> 외울 것을 주문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도 <금강경>을 외워야만 했다. 일부분만 외는 자에게는 쌀 한 말을 주고 전체를 외운 자에게는 석 섬 두 말의 쌀을 시주했다.

 

만약 여기까지라면 그 역시 아직까지도 또 다른 편협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염불보다는 잿밥으로 승부했다’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시주조건으로 <금강경>을 읽도록 한 것은 반야와의 인연을 맺도록 해주기 위함이다. 이 때문에 후인들은 무진거사가 재물시주와 법시주 두 가지를 했다고 평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흉년이 들었으니 스님들 역시 보시를 청해왔다. 평소에는 법의 위력이 대단하지만 흉년에는 밥의 위력도 그 못지않다. 이후 출가자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노자>를 읽도록 권했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알게 했다. 흉년이라는 시절인연을 이용해 불교는 도교를, 도교는 불교를 이해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남을 알아야 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가르침이지만 서로 알게 되면 서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전체의 안녕과 평화를 추구하려고 하는 그의 깊은 마음 씀씀이를 볼 수 있다.

 

무진거사는 대 문장가인지라 글 보시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그냥 써주는 법이 없었다. 글을 주면서도 꼭 공부무게를 달아보고 써주었다. 담당문준(1061~1115) 선사가 입적하자 탑명(塔銘)을 무진거사에게 부탁하였다. 선사가 입적하고 난 뒤 다비를 하였는데 눈동자와 치아 몇 개는 그대로 있었다. 사리가 무수하게 나왔기 때문에 이를 기록하여 후학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심부름을 온 납자는 그 회상에 온지 2년밖에 안 된 24살의 젊은이였다. 그래도 심부름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초심자라고 봐줄 수는 없는 일이다. 선지(禪旨)에 무슨 세랍과 법랍이 필요한가. 물론 그를 통해 그 집안의 솜씨를 가늠하기 위함이다.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대답을 하면 탑명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돈 5관을 여비로 드리겠으니 발길을 돌려 다시 도솔사로 가서 참선이나 더 하십시오.”

“네! 물으시죠.”

 

“듣자니 문준 노스님의 눈동자가 부셔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내가 묻는 것은 그 눈동자가 아니오.”

“상공은 어떤 눈동자를 물었습니까?”

 

“금강(金剛)의 눈동자를 물었소.”

“금강의 눈동자야 상공의 붓끝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늙은이가 그를 위해 광명을 찍어내 그것으로 천지를 비추라는 얘기군요.”

그 젊은 납자는 뜨락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스승께서는 참으로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상공의 탑명에 감사드립니다.”

무진거사는 허락하면서 웃었다.

 

<유마경>과의 인연으로 조사의 도를 만났고 글 보시와 식량을 시주하면서도 늘 빠지지 않는 법에 대한 열정으로 송대(宋代)불교를 빛낸 거사라고 하겠다.

출처 : http://blog.daum.net/1024511/4285871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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