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운중(雲中)관음과 우용택(禹龍澤)의 발심

근와(槿瓦) 2015. 9. 26. 01:48

운중(雲中)관음과 우용택(禹龍澤)의 발심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강화 낙가산(洛迦山, 普門寺)은 관음도량이면서 동시에 나한도량이니 그 영이(靈異) 또한 특이한 데가 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젊었을 때의 권상로(權相老)는 이곳에 와서 자주 관음기도를 올려 성취회향(成就廻向)하여 높은 학덕(學德)으로 이름을 떨치게 하였던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의 외척(外戚)으로 우용택(禹龍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제 때의 일이니 우용택은 해평면장(海平面長, 경북 善山郡)의 자리에 있기도 하였다.

 

그는 어느 때 가을, 친구들과 더불어 강화도(江華島)구경을 가게 되었다. 그들은 도내(島內)의 명소인 마니산(摩尼山)이나 전등사(傳燈寺)는 물론이지만 낙가산 보문사의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역시 순례함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행은 갑꼬지(甲串)에서 작은 목선(木船)을 타고 인천을 경유해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돌풍의 엄습을 받게 되니 거센 풍랑을 헤쳐나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가을철에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우용택으로서는 너무나 엄청난 해난(海難)에 부딪힌 것이었다.

 

흔히「육지(陸地)의 무신론자(無神論者)도 바다에서는 유신론자(有神論者)가 된다」는 말도 있으나 철저한 유생적(儒生的)기질의 우용택으로서도 눈앞이 깜깜하였음은 물론이다.

 

<관음경>에 보면 삼재칠난(三災七難)의 하나로 또는 인생十二難의 하나로써「수난(水難)」을 들어 관음보살의 가피(加被)에 의해 구제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만약 큰 물에 표류하게 될 때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즉시 물이 얕은 곳을 얻게 된다-若爲大水所漂 稱其名號 卽得淺處」

 

이와 같이 일심(一心)으로 관세음을 생각하고 그 명호를 부르면 곧 구제된다는 것이니 때마침 이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거의 무아경(無我境)에 이른 모양으로 다만 <관세음보살> · <나무 관세음보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구나 이 승객은 결심이라도 하였다는듯이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풍랑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나무 관세음보살>을 일제히 부르십시오.」

 

그는 이어서 힘주어 말했다.

「이 강화에는 낙가산 보문사가 있으며 여기에는 신령한 관세음보살이 계시니,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그 보살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그 묘지력에 힘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배 안에서는 일제히 <나무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소리로 꽉 차 있었다. 다만 우용택만은 멍청하게 앉아 있었으니 그 이는 거듭 재촉하며,

「노형, 나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십시오. 필시 관음보살의 가호가 뒤따를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워낙 위기일발의 찰나인지라 우용택으로서도 어디엔들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배 안의 사람들과 더불어 이구동성으로 나무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풍랑은 심하였다. 이 풍랑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할 나위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휘몰아치는 거센 파도는 곧 배를 송두리째 삼켜버릴 것 같은 위세였다. 그런데 이때 우씨 옆에서 관세음보살을 선창한 그 이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우용택을 향해 눈짓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저것을 보십시오.」

 

과연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오색이 찬연하고 뚜렷한 광명이 휘황한 가운데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이다. 흰 천의(天衣)로 장엄하고 구름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운중(雲中)관음을 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순간 파도가 거세게 일더니 배의 돗대가 부러지면서 바다로 날아가 버렸다. 우용택은 깜짝 놀라면서,

「이제는 죽었구나.....나무 관세음보살」

 

하고 절규하였으며 망지소조(罔知所措)하고 있었으니 그러한 순간이 흐르자 관세음보살도 사라져갔다. 이로부터 차츰 바람은 가라앉고 배의 운행도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후 관세음보살의 영응(靈應)에 감동한 우용택은 관음신자가 되었으며 가족들까지도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가족들과 더불어 도리사(桃李寺) 신도(信徒)로써 한 평생동안 신행(信行)을 닦으면서 살았다.

 

우리나라의 바다 三면에는 일찍부터 관음영장(觀音靈場)이 조성되어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도모하려 하였으니 이상에서 그 대요를 살펴 보았다. 특히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호국의 대룡(大龍)이 되겠다는 원력(願力)으로써 호법 · 호국(護法護國)하기를 서원(誓願)하여 해중대왕능(海中大王陵)을 이룩하였던 것으로, 그 정신은 불후(不朽)의 민족적 의지로써 오늘에 숭앙되고 있다.

 

그런데 일제하(日帝下)의 역경 속에서 한국미술사(韓國美術史)를 새로이 정립(定立)하였던 우현(又玄, 高裕燮)은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세상을 떠났거니와 그는「대왕암(大王巖)」의 노래를 읊은 바 있다.

 

대왕(大王)의 우국성령(憂國聖靈)은

소신(燒身) 후 용왕(龍王)되사

저 바다 저 길 속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해천(海天)을 덮고 나는

적귀(賊鬼)를 조복(調伏)하시고

 

1940년에 발표된 이 노래에서 그의 뜨거운 조국애(祖國愛)를 느끼게 하거니와 호국대룡(護國大龍)의 정신을 오늘에 일깨워주는 싯귀가 아닌가 한다.

 

 

출전 : 관음신앙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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