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승법어집)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태자서응경(太子瑞應經)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에 〈나〉혼자만이 가장 높다. 삼계(三界)가 모두 고통인데 무슨 즐거운 것이 있겠느냐.」하셨다.
이것은 석가모니께서 처음 탄생하였을 때에 하신 말씀이다.
석가모니의 「나」가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에 가장 높다면 우리의「나」도 가장 높을 것이다.
그 이유는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우리의 「나」가 가장 높다는 뜻이다.
그런데「나」란 무엇인가?
이 「나」라는 것은 부처님이나 우리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까지도 제각기 「나」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하면 이 세상에는 「나」만치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나」라는 것을 따지고 보면 내 몸과 내 마음 밖에는 다른 것이 없다.
우선 내 몸으로 말하면 맨 처음 부모가 낳아 주셨고 어릴적에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조금 자라면 음식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몸은 가죽과 살과 뼈와 피와 5장 6부와 귀, 눈, 코, 입 등의 감각 기관으로 되었는데 생리학에서는 열 몇가지의 원소로 되었다 하고 불교 즉 고대 인도에서는 네 가지 대종(大種) 〈지 · 수 · 화 · 풍〉으로 화합하여 된 것이 중생의 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몸은 사람에 따라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건강하기도 하고 쇠약하기도 하고 완전한 이도 있고 불구의 몸을 가진 이도 있다.
그 다음에 내 마음은 무엇인가?
우리의 주먹구구식으로 말하면 보고 듣고 좋아하고 슬퍼하고 성내고 기뻐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당체(當體)라 하겠다.
불교에서는 심리의 작용을「수 상 행 식」의 넷으로 구별했다.
수(受)는 감각기관으로 외계(外界)의 사물에 접촉하여 감수하는 것이니 예를 들면 밝다, 어둡다, 차다, 덥다, 달다, 쓰다는 등이요, 상(相)은 감수한 사물에 대하여 괴롭다, 즐겁다, 좋다, 나쁘다는 등의 생각하는 것이며, 행(行)은 흘러서 옮아 간다는 뜻이니 생각하는 자체가 잠깐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라 찰라로 변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식(識)은 인식하는 자체니 모든 마음의 본체(本體)를 말함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이 없으니 크다, 작다, 하나다, 둘이다 할 수도 없다.
그리고 보면 어디에 주재한다고 할 수도 없겠고, 오고 가고 한다고 할 수도 없다.
〈나〉와 마음과는 분리할 수가 없다.
「나」가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곧 「나」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도 부모가 낳아 주신 것일까? 부모가 낳아 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은 뇌세포의 작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몸이 생기고야 마음이 있을 것이요, 이 몸이 죽으면 마음은 없어질 것이다.
몸이 생기면 마음이 있고 몸이 죽으면 마음도 없어진다 하고, 몸은 부모가 낳아 준 것으로 백년 안팎에 늙어서 죽고야 마는 것인 즉, 우리의 존재는 금생의 일생 뿐일 것이며 우리의 존재가 일생 뿐이라면 앞 뒤를 고려할 것 없이 어떻게 해서라도 목전의 쾌락을 즐기는 것만이 능사일 것이다.
그리고 보면 현세 일류의 불량배들이 말하는 「짤막하게 잘 살자.」는 주장이 제일의(第一義)가 될 것이다.
불교의 이론은 어떠한가?
대승기신론에는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眞如=우주의 진리)이 생기고 없어지는 것(無明=망상)과 화합하여 아뢰야식(藏識=인식의 본체)이 된다.」고 하였다.
생기지 않으니 비롯이 없고, 없어지지 않으니 나중이 없다.
비롯과 나중이 없다는 것을 초월하였다.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우리 마음의 본체란 것인데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사려하는 마음은 그 본체가 동작하여서 생기고 없어지고 해서 되는 것이니 본체는 진여(眞如)요, 동작함은 무명(無明)이다.
비유하면 물은 본래 맑고 고요한 것인데 흔들려서 파도가 되는 것인 즉, 우리의 마음도 보고 듣고 좋아하고 슬퍼하는 작용은 파도와 같고 아무 작용도 없이 맑고 고요한 본체 곧 명경지수와 같은 식심(識心)의 당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서 우주의 진여(眞如)이다.
마치 거울의 본체는 맑기만 하고 영상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데 밝은 작용에 의지하여 각색의 영상이 비치우는 것이 아닌가. 영상이 없는 것은 거울의 본체(本體)요 영상이 비친 것은 거울의 현상(現象)이다. 그와 같이 우리 마음의 본체는 무사무려(無思無慮)한 진리인데 보고 듣고 좋아하고 슬퍼하는 것은 마음의 현상이다.
우리는 현상으로는 중생이요 본체로는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은 「불(佛)」이다.
다시 말해서 물의 현상인 파도 그대로가 고요한 물의 본체라 할 것이다.
위에 말한 것을 요약하면 마음은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것인데 몸은 나고 죽고 하는 무상한 것이다.
영원한 마음이 무상한 몸과 부즉불이(不卽不離)한 것을 우리는 「나」라고 한다.
이 「나」가 마음인 면으로는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것인데 몸인 면으로는 나고 죽는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마음은 중요시 하지 않고 무상한 몸만을 끔찍하게 여겨서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가벼운 의복을 입히고 고루거각에 있게 하느라고 죽을지 살지 모르고 분망하게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마음은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입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것을 모르고 취생몽사하는 것이 중생이다.
화엄경에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일체 중생이 저마다 여래와 꼭 같은 지혜(마음)와 덕상(몸)이 있지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써 증득(체득)하지 못한다. 이것은 중생이 여래와 꼭 같은데 허망한 생각과 고집하는 애착이 있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거울의 본체는 여래와 같아서 밝기만 한데 영상이 비친 것은 중생의 망상과 집착 뿐이다.
다시 말하면 영상이 비쳤다고 해서 거울이 아닌 것이 아니며 한걸음 나아가서 영상이 비쳐야 거울이다.
영상이 비치지 않으면 그것은 목석이다. 그와 같이 망상이 있다고 해서 여래가 아닌 것이 아니며 또 보고 듣고 깨닫고 알아야 여래(如來)이니 만일 보고 깨닫고 하는 작용이 없으면 그것은 목석(木石)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생 이대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다.
그런데 여래의 유아독존(唯我獨存)과 우리의 유아독존은 어떻게 다른가. 여래는 유아독존을 철저하게 깨달은 유아독존이요, 우리는 유아독존인 줄을 모르는 유아독존이다.
부처라는 뜻은 깨달은 사람이란 말이니 「나」곧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요 중생은 깨닫지 못한 이를 말하는 것이니 부처님과 중생의 경계선은 나를 깨닫고 깨닫지 못한데 있다.
그래서 「깨달으면 불(佛)이요, 미혹하면 중생이라.」한다.
「나」란 무엇인가?
「나」의 몸은 무엇이고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 이것이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최고의 목적이다.
처음에는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따져보고 도리에 맞게 관찰하다가 그 관찰하는 공부가 성숙하여 최후의 일념에 투철하게 되면 그때에는 「나」의 몸과 마음이 철두철미하게 목전에 전개될 때만 「나」를 본다.
삼라만상의 일체사리가 활연(豁然)하게 관통되어 끝이 없는 시간과 공간이 소송영영(昭昭靈靈)하게 앞에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피안이며 견성(見性)이며 열반의 경지이다. 또한 석존이 보리수 아래서 대각하신 내용이며 우리의 진면목(眞面目)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나」를 모르고 깨닫지 못할까?
화엄경 말씀과 같이 망상과 집착 때문이다.
망상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환경의 사물을 오관(五官)으로 접촉하고 감수하여 이것은 밝다, 이것은 어둡다, 차다, 덥다, 달다, 쓰다 이렇게 분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망상이라 하는 이유는 그 환경들이 영구불변하는 진실한 존재가 아니고 일시적으로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나타나는 가상인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진정한 존재로 잘못 생각하는 탓이다.
마치 거울에는 밝은 본체 뿐이고 별개의 영상이 있는 것이 아닌데 어린애는 거울을 보고 그 속에 다른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여 불러 보고 만져 보려는 것과 같다.
현상만을 감수하고 본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그래서 중생의 사고방식을 망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집착은 무엇일까?
어떤 사물에 대하여 고집하고 애착하는 것이니 가령 명예나 재리(財利)나 주택 처자 등에 대하여 〈이것이 내게 필요한 것이고 이것은 내것이다 〉하여 거기에 애착하고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한다. 우리는 한번 인정한 이상에는 다시 내버리지 못하고 꼭 집착한다. 집착하기 때문에 생사를 걸고 싸우려는 것이다.
아무리 애착하고 원수시 하다가도 한번 웃어버리고 방하착(方下着)하는 때에 우리는 애욕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요 벗어만 나면 통쾌하고 막힘이 없이 환하게 터져서 시원하게 된다.
그런 곳에 장부의 기상이 있으며 범부가 속박에서 해탈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과 범부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부처님은 세상의 진루(塵累)를 훨훨 벗어버리고 시방삼세에 대해탈(大解脫) 대자재(大自在)하시는데 우리는 삼간 초가와 수백원의 재물에도 혈안이 되어 싸우다가 필경에는 인명까지 살해하는 죄과를 범한다. 실로 애석하기 짝이 없다.
부처와 중생의 경계선은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거리가 멀다.
부처님과 범부와는 차별이 없으면서도 알고 모르는데 천양의 차가 있다.
불교의 팔만대장경은 불(佛)과 중생의 차를 좁히는 방법을 입이 쓰도록 말씀한 것이다.
두 사이가 원래 현격하다면 아무리 노력하여도 접근할 수 없을 것이지만 차별이 없는데서 거리가 멀어진 것은 실로 애닯은 일이다.
석존이 태자의 영화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출가 수도 하시어 마침내 정각을 이루시고 그 후부터 사십여년을 각지로 다니시면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설법하신 것은 그 노파심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2500년 후인 오늘에 다행히 정법을 만나게 되었으니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나」를 살펴보고 「나」를 깨닫고 소아(小我)에서 해탈하여 대자재(大自在)한 대아(大我)를 체득해야 하겠다.
출전 : 고승법어집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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