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 말씀

양식(良識)과 사명감

근와(槿瓦) 2015. 9. 21. 01:41

양식(良識)과 사명감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중충 얼어 붙은 하늘폭을 쪼개고 사라져 가는 제트기의 방향을 쫓아 저 멀리 남쪽 산 너머 위, 두둥실 흰 구름 한 점, 창공에 걸려 있는 저 너머에서 희미한 양광을 타고 봄의 숨결이 대기 속에 스며든다. 흰 눈 덮인 산비탈을 죽장(竹杖)으로 헤쳐 오노라면 대가락 굴러가는 고엽의 행방-거기, 말라붙은 잔디를 헤쳐 대지의 맥박이 파아랗게 솟구쳤다. 청정수려(淸淨秀麗)한 이 강토 안에 단아한 겨레가 숨결한 지 광음을 척도하여 4천3백 회의 새 봄의 서기가 정녕 이 고장을 감돌아 들고 있나 보다.

 

가는 해를 병오(丙午)라 일컬어 말띠 딸을 피하노라 20여만 명의 태아(胎兒)가 의사의 손으로 출생을 거부당하였단다. 가히 여성계의 일대위년(一大危年)이었다.

 

이 해는 정미(丁未) 산양의 해-. 양은 본시 우리 겨레의 개성을 상징하듯 온유순량하고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회의없이 수종(隨從)하며, 이지적이 아니어서 개별행동을 취함이 없이 항상 집단으로 움직인다. 수령의 거동에 따라 행동통일을 긴밀히 할 줄 알 뿐 아니라, 단결력과 희생정신이 투철함은 비록 야수계의 생리지만 우리로서도 배울 바 있게 한다. 가령 수급양(首級羊)이 어떤 원인에서건 절벽이나 물 속으로 뛰어들게 되면 남김없이 차례대로 좇아서 뛰어드는 예라든가, 아프리카 야우(野牛)의 경우, 두령소를 먼저 사살하면 마지막 한 마리까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 예는 우리로 하여금 생각케 하는 바 있다.

 

한때 아프리카 지방에 밀생하던 야우군(野牛群)은 이 규율을 준수하는 순성(淳性)을 역이용한 교활한 백인 포수들에 의해서 몰살, 절종(絶種)되었고 통조림으로 화해서 이 도살자들을 치부케 한 예도 있다.

 

양은 살아서 인류에게 젖과 털을 바치고, 죽어서 고기와 뼈와 가죽까지 송두리째 바친다. 이기(利己)와 이타(利他)의 분별이야 알든 모르든-. 양의 세계는 결코 방향 감각을 상실한 한국 현실과 닮지 않았다. 어린이가 과자를 사 먹으면 피를 토하고 죽어야 하든가, 포도당이나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면 급사를 한다든가, 약주를 마시면 눈알이 빠진다든가, 사리탑을 부수고 도굴을 한다든가, 거부가 밀수를 한다든가-등등, 실로 양의 사회와는 극히 닮지 않았다.

 

4천3백 년의 유구한 역사의 전통과 줄기차게 지켜온 단일민족의 긍지와 문화의 유산을 상속해 놓고, 우리는 이제 우리 주변을 냉정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우리 주위에는 너무도 해괴한 현상이 허다히 널려 있음을 본다.

 

양은 줄곧 이리(狼)떼의 침공을 받아왔지만 결코 그것들을 모방하려 들지는 않았다. 낭성(狼聲)을 본받아 미친 놈처럼 고함을 지르는 허스키의 유행가가 번지는가 하면, 발작하는 간질환자처럼 온 몸을 비틀고 궁둥이를 휘두르는 것으로 첨예(尖銳)를 자처하거나, 제임스 딘의 영화 한두 편으로 이유없는 반항을 시도한다든가, 텍사스 황야의 개척사를 흉내내 권총강도질, 폭력단을 조직, 몽둥이를 휘둘러 행인을 노리고-확실히 우리는 무언가 빠져 달아난 것만 같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결코 순탄치 못했으며, 지세로 보아도 대륙과 해양 사이에 끼어 있어 부절(不絶)한 외침을 겪어야 하는 수난의 민족사를 연면히 이어왔음을 볼 수 있다. 최근에도 왜적의 사슬에서 풀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6 · 25의 공침으로 동족상잔의 뼈저린 고통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엄청난 현실의 진통 속에서야말로 무언가 인류사상 유례없는 걸작이 터져 나오리라고 온 세계가 목을 빼고 넘겨다 보고 있는 중이다.

 

이 절박하고 엄숙한 찰나에 처해서 이렇듯 젊은층의 대부분이 쓸갠가 무언가가 빠져나가 있어 민족문화의 전통을 모독하고 있고 양과 소(羊 · 牛)조차 닮지 못한 몰지각배들은 제 배만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원용지고 텔레비전이고 자동차고 돈이고 매사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소화제만 범람하는 현상을 이루어 놓고 있다.

 

한편 당로자(當路者)인 지식층, 문화인, 예술인들에게서는 의당 불출세의 걸작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너무도 많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작품 하나 제대로 발견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두 가지 이유밖에 없는 것이니, 즉 나태(懶怠) 아니면 무능인 것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포도(鋪道) 위에 눈이 내린다. 이 나라 이 민족의 새로운 결의를 축복하려고 겨레의 목덜미에 서설(瑞雪)이 뿌려진다. 확실히 어디인가 빠져 나갔던 과거의 허물일랑 눈 속에 파묻고 새 출발을 다짐해야겠다.

 

단군에게 비롯된 4천3백 번째의 새 해야말로 민족중흥을 향해 총궐기 하는 전환점으로 삼아야겠다. 정치인은 현명한 목자(牧者)로서의 사명감에 투철해야겠고 피정치체인 민중은 상호 신뢰와 인종(忍從)으로 단결을 공고히 해야겠다.

 

보다 이상적인 체제의 개선과 본연을 망각함이 없는 진전 향상에로의 정진을 위해 부단한 연구와 노력과 단합을 이룩해야겠다.

 

이 위대하고 성스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과제에서부터 살펴 보기로 하자.

 

오늘까지의 현실을 돌이켜 결산하여 볼 때, 과거 반만 년의 역사는 확실히 인간이 주체의식을 상실한 몽유병 환자의 방황에 불과하였다.

 

현재 우리가 민족문화의 소산으로 만방에 자랑삼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고려자기와 불국사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한때 불교에의 귀의로 민족이 단일종교를 가졌을 때의 찬란하였던 문화소산 말고 무엇을 또 칠 수 있겠는가?

 

보라! 저기 걸어가는 젊은이의 발걸음에는 신념이 없지 않은가?

 

자기 발등만 내려다 보고 캄캄한 길을 더듬어 우왕좌왕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뚜렷한 도표를 향해 달음질칠 수 있도록 제시할 이념의 등불이 꺼져 있지 않은가?

 

권좌(權座)를 다툼하여 파벌투쟁만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무엇으로 양식을 주입하고 그 사명감을 일깨워 줄 수 있겠는가?

 

공리(功利)와 타협할 줄만 알고 정도(正道)에 과감할 줄 모르는 비굴한 지도층이 영리할 줄만 아는 지식인들에게, 보다 신념에 살 수 있도록 무슨 약을 쓰겠는가?

 

바로 자아의 확립이요, 진아(眞我)의 발견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먼저「나」를 찾아 내야 한다.「나」란 무엇인가?

 

「나」는「나」다.「나」는 유무를 초월하여 산 것이며 힘이며 광명이요,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깨끗한 것이어서 오직「나」일 뿐이다.

 

「나」는 만법과 더불어 있지 않고 독립 · 독존(獨尊) · 독귀(獨貴) · 독권(獨權)하며 유일무이한 실상진아(實相眞我)의 실존을 지칭함이 곧「나」다.

 

이 참「나」를 발견, 체득함으로써 우주의 주인공이 되며 생사의 인과를 초탈(超脫)해서 자재할 수 있다.

 

이 진아(眞我)의 발견이 있은 연후에야 확고부동한 인생관, 세계관 내지 우주관의 확립을 보게 되어 비로소 신념에 찬 생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참 삶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비롯될진저-.

 

산사(山寺)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 온다.

단기 4천3백 년의 새 아침을 고하는 종소리가 우리 겨레의 심금을 울린다.

우리 모두 가슴을 헤쳐 대화를 나누자! 손을 잡자!

나를 내던져 너를 위해서만 살려는 자세를 가다듬자!

이 길만이 우리 겨레를 살리고 전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이정표요, 요체(要諦)인 바에라.

 

 

출전 : 마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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