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견상(能見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3細의 하나로 見相 · 轉相이라고도 한다. 眞如가 無明에 의하여 처음 일어나는 것을 業相이라 하고, 그 業相 위에서 主觀과 客觀의 2分이 서로 대립되는 경우에 그 主觀的인 부문을 能見相이라 한다. 이것은 唯識의 4分으로는 見分에 해당한다.
참고
삼세(三細) : (1) 無明業相. 眞如가 無明에 의해 차별적 현상을 내게 되는 첫걸음으로서,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지기 전의 상태를 말함.
(2) 能見相. 無明業相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져 대립될 때에, 그 주관적 방면을 말한다.
(3) 境界相. 能見相인 主觀의 앞에 나타나는 객관적 대상의 境界를 말한다. 곧 眞如本性에 契合하지 않는 虛妄한 상태를 말한다.
견상(見相) : 起信論의 三細相의 하나. 能見相의 준말. 또는 轉相. 眞如가 無明에 의하여 처음 일어나는 것을 業相이라 하고, 그 相業 위에서 주관과 객관의 二分이 서로 대립되는 경우에 그 주관적인 부문을 見相이라 한다.
전상(轉相) : 三細의 하나. 能見相·見相이라고도 한다. 無明業相에 의해 觀相을 인식하는 마음 곧 주관적 인식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상태를 말한다. 또 이것은 主客 能所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業相이 비로소 主觀의 작용을 일으켜 客觀境을 인식하려고 하지만 아직 인식 대상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진여(眞如) :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물의 本體로서 진실로 영원불변한 것이란 의미로 眞如라고 이름한 것이다. 如如 · 如實 · 如 등으로 부르며, 대승에서는 萬有의 本體를 일컫는다.
① 阿含에서는 緣起의 理法이 영원불변의 진리임을 진여라고 한듯하다. 異部宗 輪論에 의하면 化地部에서는 九無爲를 설하는 가운데 善法眞如 · 不善法眞如 · 無記法眞如 · 道支眞如 · 緣起眞如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善 · 惡 · 無記의 三性이나 八聖道나 緣起의 理法이 진실로 영원불변한 일을 진여라고 한다.
② 대승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성이 人法二無我이며 모든 차별적인 相을 초월해서 절대의 하나인 것을 진여라 이름했으며, 또 이것을 여래의 법신의 自性으로 삼는다. 佛地經論卷七에는 진여란 모든 현상(諸法)의 實性이라고 하고 그 體는 一味이지만 相을 따라서 종종의 구별이 있으며 일체법과 不一不異로서 그 體를 보고자 하면 사고도 언어도 미치지 못하는 경지지만 모든 거짓이나 그릇된 견해를 여의고 있다는 점에서 억지로 진여라 이름했다. 또 모든 善이 의지하는 바가 되므로 法界, 損減의 謗을 여의었으므로 實有, 增益의 謗을 여의었으므로 空無, 다만 이것만이 진실이므로 實際, 無分別智의 깨달음이므로 勝義라고 거짓 이름했다고 한다.
진여의 異名으로 大般若經卷三百六十에는 眞如 · 法界 · 法性 · 不虛妄性 · 不變異性 · 平等性 · 離生性 · 法定 · 法住 · 實際 · 虛空界 · 不思議界의 十二名이라 함.
大乘阿毘達磨雜集論卷二에는, 眞如 · 空性 · 無相 · 實際 · 勝義 · 法界의 六名,
法華玄義卷八下에서는, 實相 · 妙有 · 眞善妙色 · 實際 · 畢竟空 · 如如 · 涅槃 · 虛空 · 佛性 · 如來藏 · 中實理心 · 非有非無中道 · 第一義諦 · 微妙寂滅의 14종의 이름을 들고 있다. 또 一如 · 一如法界 · 一法界 · 眞如實相 · 眞如一實 · 眞實際 · 眞勝義諦등으로도 이름하며 그 모습이 절대평등함을 뜻하며 一相이라고도 한다.
解深密經卷三에는 七眞如를 설하고,
(1) 緣起의 理法을 流轉眞如.
(2) 諸法의 實性을 實相眞如.
(3) 萬法唯識의 理法을 了別眞如.
(4)~(7) 고 · 집 · 멸 · 도의 四諦를 차례로 安立眞如 · 邪行眞如 · 淸淨眞如 · 正行眞如라고 하는데 實相眞如이외의 6종을 진여라고 일컫는 의미에 대해서는 그 각각의 理法이 그 자체 그대로 영원불변 하므로 진여라고 한다는 설과 그 理法자체를 진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實相眞如의 나타난 모습의 種別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③ 法相宗說. 成唯識論卷九에서는 진여란 허망한 분별법을 여읜 人法二無我의 본성으로 三性 가운데 圓性實性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 宗에서는 모든 현상은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진여는 현상을 초월한 絶對靜的한 것으로 그 자체는 결코 현상이 될 수 없는 것(眞如凝然不作諸法)이라고 한다. 또 成唯識論卷十에는 보살은 初地에 이르러서 비로소 진여의 진리를 깨닫고 차례로 十地에 이르기까지 그 깨달음의 내용이 깊어지게 되기 때문에 十眞如의 구별을 세운다. 곧,
(1) 遍行眞如. 널리 萬有에 미치는 二空의 이치.
(2) 最勝眞如. 戒를 몸에 완전히 익힘으로 해서 깨달은 진여로 거짓이 없는 德을 구족하게 갖추고 있으므로 최승이라고 한다.
(3) 勝流眞如. 진여로부터 流出한 敎는 그렇지 않은 다른 교보다 수승하다는 뜻이며 그 교의 근본이 되는 진여란 뜻.
(4) 無攝受眞如.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
(5) 類無別眞如. 생사와 열반 등의 구별이 없는 迷悟一如의 뜻.
(6) 無染淨眞如. 진여는 본래 染淨을 초월했다는 뜻.
(7) 法無別眞如. 진여는 생멸의 相을 여의었으므로 諸種의 敎에 갖가지로 說示되어 있지만 그 體는 하나란 뜻.
(8) 不增減眞如. 번뇌의 더럽힘을 끊었지만 줄지 않고 청정한 법을 닦지만 더하지 않는, 집착을 여의었다는 뜻. 대번에 이 진여를 깨달으면 자유자재로 종종의 모습이나 국토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相土自在所依眞如라고도 한다.
(9) 智自在所依眞如. 四無碍智에 의해 자재를 얻는다는 뜻.
(10) 業自在等所依眞如. 모든 神通 · 總持 · 禪定 등에 있어서 身 · 口 · 意의 활동의 자재를 얻는다는 뜻.
이상의 10은 차례로 初地로부터 十地까지 十波羅蜜을 행하여 十重障을 끊고 깨닫는다고 한다. 또 人無我의 진리를 人空眞如, 法無我의 진리를 法空眞如, 이 둘을 합해서 二空眞如라고 하며 二乘은 人空眞如만을 깨닫지만 보살은 二空眞如를 깨닫는다고 한다.
④ 地論宗에서는 제八阿賴耶識, 攝論宗에서는 제九阿摩羅識은 그 자체가 청정한 自性淸淨心 곧 진여라고 하고, 그 識이 무명의 熏習을 받아서 染淨의 諸現象을 나타낸다고 한다.
⑤ 기신론에서는 진여를 중생심의 본체라고 하고 그것은 언어나 사유를 초월해서 여의었으므로 離言眞如, 그것을 억지로 언어로 표현한 것을 依言眞如, 둘을 합하여 二眞如라고 하며, 依言眞如에 있어서 그 본체가 迷惑된 마음을 여의고 空한 점을 如實空(空眞如)이라고 한다. 또 중생심 곧 진여에는 절대부동의 心眞如門과 그것이 무명의 緣에 의해서 染淨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心生滅門이 있어서 不動인 진여를 不變眞如, 그것이 緣을 따라 나타나는 染淨의 현상을 隨緣眞如라 하며 합해서 二眞如라라 한다. 일반으로 萬有가 生起하는 방법을 진여의 不變 · 隨緣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을 眞如緣起(如來藏緣起)라고 한다. 또 이 二眞如라고 하는 같은 의미의 말에 淸淨眞如 · 染淨眞如, 혹은 非安立眞如 · 安立眞如(安立이란 만유를 내고 그 각각의 존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가 있다.
⑥ 화엄종에서는 본체 즉 현상을 性起說에 입각해서 진여 그대로가 萬法, 萬法 그대로가 진여라고 했다. 또 진여를 一乘眞如와 三乘眞如로 나누고 前者에 別敎眞如 · 同敎眞如, 後者에 頓敎眞如 · 漸敎眞如가 있다고 하며, 이것은 진여의 이해의 방법이 諸敎說에 따라서 같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⑦ 천태종에서는 性具說을 세워서 진여에도 본래부터 染淨善惡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⑧ 諸佛의 自性인 진여를 無垢眞如 혹은 出纏眞如라고 하고 중생의 體性인 진여는 번뇌에 더럽혀 있으므로 有垢眞如 혹은 在纏眞如라 하며 둘을 합하여 兩垢眞如라 한다.
⑨ 釋摩訶衍論卷三에는 始覺 · 本覺의 二智를 깨달음의 理로 하여 性眞如와 虛空의 理에 입각하여 淸淨虛空의 理라는 뜻으로 無障碍義 · 周徧義 · 平等義 · 廣大義 · 無相義 · 淸淨義 · 不動義 · 有空義 · 空空義 · 無得義의 十義가 있다고 하고 이것을 性虛空十義라고 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② 有部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相應無明과 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를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또 後者는 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과 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는 第七 末那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는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이 獨行不共無明은 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과 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또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種子와 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의 種子를 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의 現行을 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迷의 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이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纒·相應·不共의 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또 根本과 枝末과 共과 不共과 相應과 不相應, 迷理와 迷事, 獨頭와 俱行, 覆業과 發業과 種子子時와 行業果와 惑의 15種의 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③ 勝鬘經에서는 見惑 및 三界의 修惑인 貪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을 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一은 見惑, 뒤의 三은 三界의 修惑을 의미한다)의 惑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의 無明을 無始無明住地의 惑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의 惑) 이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의 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④ 起信論에서는, 無明을 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을 根本無明과 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은 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또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곧 眞如平等의 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念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의 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과 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의 惑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은 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의 惑業이다.
⑤ 天台宗에서는 空·假·中의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의 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과 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品의 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의 最後의 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品의 無明이 있다 한다)을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位인 等覺의 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의 無明을 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說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觀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업상(業相) : 起信論에서 說한 3細의 하나. 根本不覺의 妄心에 의하여, 眞如의 一念이 처음 기동하여 생기는 최초의 상태를 말함.
기신론(起信論) : 大乘起信論의 약칭. 馬鳴보살의 저술. 梁나라 眞諦의 번역본 1권과 唐나라 實叉難陀의 번역본 2권이 있음. 이 論은 通論的으로 여러 大乘經에 공통된 敎理를 말하였으므로 大乘通申論의 하나라 한다.
주관(主觀) : 外界 및 그 밖의 객체를 의식하는 자아.(국어사전)
객관(客觀) : 주관 작용의 객체가 되는 것. 정신적·육체적 자아에 대한 공간적 외계.(국어사전)
유식(唯識) : 識 곧 心의 本體의 轉變을 떠나서, 어떠한 實在도 없다고 하는 說. 곧 우리들이 자기의 心外에 있다고 하는 物心의 모든 現象은, 우리들의 第八識 그 자체가 主觀(見分)과 客觀(相分)으로 變하여 나타나서, 인식의 대상과 같은 모습을 心外의 影像으로써 비쳐 떠올려 實在인 것처럼 인정하는데 불과하고, 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건자체(本質)는 阿賴耶識중에 攝持하는 種子로부터 變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識 이외에는 實在는 없다고 한다. 이것을 唯識無境이라 하고, 또 萬有는 識에서 變했다고 하는 의미로 唯識所變이라고 한다. 이 이론을, 成唯識論 卷二에는
(1) 因能變(因變 · 生變이라고도 하고, 온갖 것은 阿賴耶識중에 거두어 보존돼 있는 종자에서 變生한다)과,
(2) 果能變(果變 · 緣變이라고도 하고, 그 결과 八識위에 主觀客觀의 구별이 있어서 對象에 向하는 작용을 한다)으로 나누며 觀心覺夢鈔 卷下에는 (1) 熏習道理(種子는 스스로의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識에 심어진 것이라는 것)와, (2) 轉變道理(識이 見相二分으로 變하는 것)로 나누어 說한다.
① 法相宗의 근본적 敎義로, 同宗에서는 唯識의 相을 說하는데, 五位百法이 모두 識을 여의지 않는다고 보이는 것을 總門의 唯識, 不離門의 唯識이라고 하고, 五位중 心王은 識의 自相, 心所는 心王에 응해서 작용하는 相應, 色法은 識이 變한 所變, 不相應法은 이상의 三位에 잠정적으로 세운 것. 無爲法은 이상의 四位의 實性이라 하고, 이와 같은 이유에 의해서 唯識이라고 가리키는 것을 別門의 唯識이라고 한다. 別門唯識의 說은 어리석은 자를 위해서 能所를 분별해서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虛妄唯識 · 不淨品唯識 · 方便唯識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初地 이상의 보살이 唯識의 이치를 깨달아서 唯識無塵智를 證하여 眞識을 가지고 있는 것을 眞實唯識 · 淨品唯識 · 正觀唯識이라고 이름한다. 成唯識論 卷九에도, 唯識의 敎理에 대한 9種의 疑難(이것을 唯識九難이라 함)을 들어서 答釋하고 있다.
곧 唯識九難이라 함은,
(1) 어떠한 교리에 의해서 立論한 것인가(唯識所因의 難).
(2) 世間의 사실로 말하면 心外에 實在가 있는 것이 아닌가(世事乖宗難).
(3) 經典에 色등의 十二處가 있다고 說하는데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聖敎相違難).
(4) 諸法이 空이라고 하는 것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라면 識도 空無한 게 아닌가(唯識成空難).
(5) 物的은 形狀이 있는데 어떻게 唯識이라고 할 수 있는가(色相非心難).
(6) 外界의 實在가 없다면 어떻게 外界의 事象을 직접 인식하는 現量智에 의해서 色 등을 알 수가 있는가(現量爲宗難).
(7) 꿈속에서 보는 대상은 깨고 나면 妄境임을 알 수 있지만, 깨어 있을 때의 일에 대해서는 그 例를 쓸 수 없는 것이 아닌가(夢覺相違難).
(8) 他人의 마음은 자기의 마음 밖에 있으니 他心智에 의해서 그것을 알려고 한다면 他人의 마음은 心外의 境이 아닌가(外取他心難).
(9) 앞의 물음에 대해서, 만일 自心중에 他心의 影像을 비추어 그 影像에 의해서 아는 것이므로 唯識無境이라고 한다면, 그렇더라도 自心 · 他心의 구별이 있으니 唯識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異境非唯難). 이상의 9를 말한다.
또 義林章 卷一 끝에는 모든 經論의 唯識說을 분류해서 境唯識 · 敎唯識 · 理唯識 · 行唯識 · 果唯識의 五種唯識으로 하고 있다. 특히 同宗의 修行으로서 五種唯識觀이 있다.
② 華嚴宗에서는 三界는 모두 一心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여, 이것을 설명하는데,
(1) 相見俱存의 唯識 · (2) 攝相歸見의 唯識 · (3) 攝數歸王의 唯識 · (4) 以末歸本의 唯識 · (5) 攝相歸性의 唯識 · (6) 轉眞成事의 唯識 · (7) 理事俱融의 唯識 · (8) 融事相入의 唯識 · (9) 全事相卽의 唯識 · (10) 帝網無礙의 唯識의 十種唯識을 說하여, 究極적으로는 帝釋宮의 網珠(因陀羅網)와 같이,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그 일체중에 또 각각 일체가 있어 窮盡함이 없고, 重重無盡事事無礙한 것이 唯識이라고 한다. 이것을 다시 五敎에 맞추어 처음의 3은 始敎, 다음의 4는 終敎 및 頓敎, 뒤의 3은 圓敎의 說이라고 한다(華嚴經探玄記 卷十三). 단, 華嚴經大疏鈔 卷三十七에는 처음에 假說의 唯識을 더하여 小乘의 說이라고 하여 (6)을 除한다.
사분(四分) : ① 法相宗의 敎義. 우리의 認識을 구성하는 識의 네 가지 分位로 八識 및 상응의 心所 두 가지에 대해 이 4分이 있다고 한다. (1) 相分. 주관적인 心에 인식되는 객관적 형상. (2) 見分. 相分을 인식하는 主觀의 心작용. (3) 自證分. 自體分이라고도 하며 見分과 다음의 證自證分과를 證知하는 인식 작용. (4) 證自證分. 自證分을 다시 證知하는 인식 작용. 그러나 이상은 法相宗의 正道인 護法의 四分說로 印度에서는, 이밖에 自證分만 주장하는 安慧의 一分說과 見·相의 2分을 세우는 難陀의 二分說과 見·相·自證의 3分을 세우는 陳那의 三分說이 있다. 예부터 護法의 四分說의 流派를 四分家라 한다. 또 이들을 각각 一分家·二分家·三分家라 하며, 四說을 합해서 安·難·陳·護의 1·2·3·4라 한다. ② 화엄경을 4分한 것. (1) 信分. (2) 解分. (3) 行分. (4) 證分 등을 말함.
견분(見分) : 객관의 형상을 보는 작용. 主觀 八識의 四分의 하나. 見分이라고 하는 것은 能此相分을 아는 작용이다. 아는 것이 있다 해도 옳게 아는 功能이 없다면 어찌 알 수 있으랴. 그래서, 心體가 轉變하여 능히 사물을 아는 功用을 일으켜서 이에 의해 능히 알게되므로 見分이라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