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혹(通惑)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천태종에서 말하는 5惑 중 見思惑을 通惑이라 일컫는다. 또 塵沙와 無明을 別惑이라고 한다. 見思는 3乘을 통하여 끊을 수 있다. 四敎儀에는 集諦는 곧 見思惑이며, 혹은 通惑이라고 했다.
참고
천태종(天台宗) : 또는 天台法華宗 ∙ 天台法華圓宗 ∙ 台宗 ∙ 台家라고도 함. 중국 隋나라 때 천태산에서 天台 智顗를 開祖로 하여 창립한 대승불교의 한 파. 법화경을 근본경전으로 하며 禪定과 지혜의 調和를 宗義로 함. 智顗는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적으로 불교를 통일하고, 적극적으로 諸法實相論을 주창하며 심오한 불교학의 체계를 세워「法華文句」∙「法華玄義」∙「摩訶止觀」등 三大部를 지어서 한 宗을 이룩하였다. 그 뒤에 章安 ∙ 智威 ∙ 慧威 ∙ 玄朗 ∙ 湛然 등이 계승하고, 荊溪 湛然은 三大部의 주석을 지어 그 때에 융성하던 법상종 ∙ 화엄종 ∙ 선종 등에 맞서 천태종의 眞面目을 크게 선양하였다. 그 뒤에 道邃 ∙ 廣修 ∙ 物外 ∙ 元琇 ∙ 淸竦 ∙ 義寂 등이 전해오다가, 五代의 전란에 宗典이 흩어지고, 思潮가 떨치지 못하였다. 義寂은 그 宗典을 고려와 일본에 전하여 다시 宗義의 연구가 성행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山家 ∙ 山外의 두 파로 대립하게 되었다. 山家派는 四明知禮가 으뜸이었는데 그의 학풍은 천태종의 근본 사상인 物 ∙ 心을 같이 취급하는 사상을 굳게 지키고, 또 현재의 자기를 여의지 않고 전체를 해결하는데 치중하였다. 그리고 源淸 ∙ 宗昱 ∙ 智圓 ∙ 從義 ∙ 仁岳 등이 영도한 山外派의 학풍은 緣起論에 반하여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데 있었다. 중국에서는 明나라 때의 智旭이 종풍을 빛낸 것이 끝이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玄光 ∙ 法融, 고구려의 波若, 고려의 諦觀 등이 천태종을 깊이 연구하였다. 또 義天은 송나라에 유학하여 宗旨를 배워 돌아온 후 개성에 국청사를 짓고, 천태종을 설립하였다. 그 門下에는 德麟 ∙ 翼宗 ∙ 景蘭 ∙ 連妙 등이 있었다. 천태종은 법화경 ∙ 대열반경 ∙ 대품반야경 ∙ 화엄경 ∙ 금광명경 ∙ 유마경 ∙ 지도론 ∙ 중론 ∙ 법화론 등을 所依의 경전으로 삼고, 實相論의 극치를 주장하였다.
오혹(五惑) : 오둔사(五鈍使)라고도 함. 貪·瞋·癡(無明)·慢·疑의 5가지 妄惑.
견사혹(見思惑) : 견혹(見惑)과 사혹(思惑). 또, 見愛·見修·四住·染汚無智·枝末無明·通惑·界內惑이라고도 함. 모두 三界의 번뇌임. 見惑이라는 것은 부정하게 도리를 분별하여, 생각을 일으키는 我見·邊見 등의 惑을 말하며, 思惑이라는 것은 세간의 사물을 생각하고 일으키는 惑을 말함. 이 二惑은 바르게 三界의 生死를 받는 원인으로서 , 이것을 斷滅하기 시작하여, 三界의 生死를 이탈함. 그리고 이것을 滅除하는 데에 순서가 있다. 먼저, 見惑을 斷滅하는 位를 見道라고 하고, 思惑을 斷滅하는 位를 修道라고 함.
견사(見思) : 또는 見愛·四住·染汚無知·枝末無明·通惑·界內惑·見修. 우주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迷惑인 見惑과 낱낱의 사물에 대한 진상이 판명되지 않은 미혹인 思惑을 가리킴.
진사(塵沙) : ①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먼지와 모래에 비유한 것. ② 塵沙惑. 천태종에서 見思 · 無明과 한가지로 三惑의 하나로 치며, 三界의 내외에 걸쳐 있는 惑으로 假觀에 의해서 破할 수 있는 惑이라고 한다. 지혜가 열등하여 더욱 나아가 온갖 차별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보살이 자유자재로 중생을 교화하는데 장애가 되므로 化道障의 惑이라 한다. .....삼혹(三惑)→3障이라고도 한다. (1) 見思惑. 見道와 修道에서 끊는 見惑과 修惑을 말함. 見惑은 세상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煩惱이고, 修惑은 모든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여 얼어나는 煩惱이다. (2) 塵沙惑. 塵沙란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할 때에 마음이 어두워 한없이 많은 법문을 알아 자재로이 구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3) 無明惑. 障中道惑이라고도 한다. 迷의 根本을 이루어 밝은 지혜가 없는 번뇌이다. 이 3惑 가운데 見思惑은 聲聞·緣覺·보살이 함께 끊을 수 있는 것이므로 通惑이라 부르고, 塵沙惑과 無明惑은 보살만이 끊는 것이므로 別惑이라 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② 有部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相應無明과 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를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또 後者는 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과 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는 第七 末那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는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이 獨行不共無明은 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과 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또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種子와 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의 種子를 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의 現行을 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迷의 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이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纒·相應·不共의 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또 根本과 枝末과 共과 不共과 相應과 不相應, 迷理와 迷事, 獨頭와 俱行, 覆業과 發業과 種子子時와 行業果와 惑의 15種의 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③ 勝鬘經에서는 見惑 및 三界의 修惑인 貪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을 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一은 見惑, 뒤의 三은 三界의 修惑을 의미한다)의 惑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의 無明을 無始無明住地의 惑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의 惑) 이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의 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④ 起信論에서는, 無明을 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을 根本無明과 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은 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또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곧 眞如平等의 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念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의 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과 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의 惑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은 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의 惑業이다.
⑤ 天台宗에서는 空·假·中의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의 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과 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品의 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의 最後의 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品의 無明이 있다 한다)을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位인 等覺의 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의 無明을 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說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觀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별혹(別惑) : 보살은 十界 중생의 無量의 惑, 그것을 對治하는 無量의 敎法을 알지 않으면 안되지만 空觀에 의해 見思의 惑을 깨뜨리는 것은 空理에 집착되어, 더 나아가 이들 無邊의 差別相을 알고자 하지 않으므로 이 塵沙의 惑을 또 著空의 惑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의 障이 되며 특히 보살만이 끊을 수 있으므로 이것을 別惑이라고도 한다. 이 惑은 界內界外에 공통하며 假觀으로 끊을 수 있다. 無明의 惑은 모든 것이 一法界가 되는 것을 모르는 미세한 번뇌이므로 界外의 惑이라 하고 보살만이 끊을 수 있으므로 別惑이라 한다.
삼승(三乘) : 聲聞 · 緣覺 · 菩薩에 대한 세 가지 敎法을 말하는 것으로 乘은 짐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말한다.
(1) 聲聞乘. 4諦法, 곧 佛說의 소리를 듣고, 이를 觀하여 해탈을 얻음.
(2) 緣覺乘. 12因緣이니, 스승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잎이 피고, 꽃이 지는 이치를 觀하여 깨닫는 것.
(3) 菩薩乘. 6波羅蜜이니, 菩薩이 이 法에 의하여 스스로 解脫하고, 다른 이도 해탈케 하여 부처가 되는 것.
집제(集諦) : 苦의 因은 구하고 탐하여도 그치지 않는 執着이다 라고 한 가르침.
사교의(四敎儀) : ① 天台四敎儀의 약칭. ② 6권. 隋나라의 智顗가 저술함. 化儀化法의 四敎의 뜻을 밝힌 것. 諦觀이 지은 <천태사교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大本四敎儀라 함. 藏 · 通 · 別 · 圓의 四敎에 대하여, 석존 교화의 大網을 적은 것. 처음에 四敎의 이름을 해석하고, 다음에 四敎에 말한 이치를 서술하여, 四門入理 · 判位不同 · 權實 · 觀心 등의 뜻을 서술한 것. ③ 1권. 諦觀이 저술함.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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