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오(染汚)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染汚라 함은 번뇌의 흐림에 물들어 더러워져 있다는 뜻. 또 雜染, 染이라고도 한다. 有漏法중, 깨달음에의 길을 방해하는 것. 곧 不善과 有覆無記를 染汚라고 하고, 善과 無覆無記를 不染汚라고 한다(俱舍論 卷七). 그렇더라도 成唯識論述記 卷二 末에는, 雜染이라고 하는 경우는, 染法(不善과 有覆無記)뿐만이 아니라, 有漏法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大乘莊嚴經論 卷三에는 染汚(雜染)에, 煩惱染汚(煩惱를 말함) · 業染汚(번뇌에 의해서 일으키는 業을 말함) · 生染汚(그 결과로서의 苦의 生存을 말한다)의 3종의 染汚(三雜染)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순차로 惑 · 業 · 苦의 三道에 해당한다. 起信論에는, 心體는 본래 淸淨한데 不覺에 의해서 無明을 일으키어 번뇌에 더럽혀지기 때문에, 染心이 된다고 말하고, 그 染心의 相에 6종(六染心)이 있다고 說한다. 곧 執相應染(我執을 말함) · 不斷相應染(分別起의 法執을 말함) · 分別智相應染(俱生起의 法執을 말함) · 現色不相應染(所取의 경계를 나타내는 妄心) · 能見心不相應染(能取의 妄心) · 根本業不相應心(迷妄한 染汚心의 자체)으로, 이것들은 수행에 의해서 차례로 끊어진다고 한다.
참고
염(染) : 染汚·執着·煩惱의 뜻.
유루법(有漏法) : 無漏法의 반대. 번뇌가 있는 법. 有爲法과 같음. 四諦에 있어 苦集 二諦의 법에 해당함.
무기(無記) : 善도 아니고 不善도 아닌 것.
불선(不善) : 진리를 어겨서 現世와 來世를 그르치는 것을 不善이라 한다.
유부무기(有覆無記) : 善도 아니고 惡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점에서 더럽혀져 있는 것.[欲界의 煩惱중 身見(五蘊이 거짓으로 화합한 身體를 常一主宰하는 뜻이 있는 我로 妄執하는 것) 및 邊見(我는 死後에도 상주한다고 생각하는 常見과 我는 死後에는 단절된다고 생각하는 斷見)] 번뇌에 가려져 있으나 선악이라고 명기할 수 없는 것은 무부무기. (2) 눈에는 안보이나 가려져 있는 것. <俱舍論>
선(善) : 不善과 無記(善도 不善도 아닌 것)를 더하여 三性이라고 한다. 현재·미래에 걸쳐서 自他에 이익을 주는 白淨의 法을 善이라 하고, 이에 反하는 것을 不善(惡)이라고 한다.
앞에 것을 白, 뒤에 것을 黑이라고도 한다.
① 二善. (1) 有漏善과 無漏善을 일컬음. 有漏善이라 함은 번뇌의 더러움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世間의 善으로, 이로 인하여 미래에 즐거운 果報를 받지만, 有漏善은 法性의 이치에 꼭 들어맞지는 않으며 차별적인 相을 취해서 닦는 有相善이기 때문에, 그 의미로 相善이라고도 한다. 無漏善이라 함은 번뇌의 더러움과는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出世間의 善으로, 이것에 의하여 미래의 과보를 받게 되는 수는 없다. 더욱 無漏善은 涅槃(이것도 마찬가지로 無漏善이다)의 깨달음을 얻는 데에 필수의 善이다. (2) 止善(소극적으로 不善을 물리쳐 制止하는 것)과 行善(적극적으로 善을 행하는 것)을 말함. (3) 定善(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고 산란한 妄念을 그쳐서, 곧 定心에 의해서 닦는 善과 散善(산란한 마음, 곧 평상시의 마음가짐으로 惡을 그치고 善을 닦는 것)의 일컬음.
② 世福·戒福·行福의 三福을 각기 世善(世俗善)·戒善·行善이라고도 한다.
③ 三善. 初善·中善·後善을 일컬음.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법화경의 序分·正宗分·流通分의 三分(三段)을 善이라고도 한다.
④ 四種善. 勝義善(涅槃을 말함)과 自性善(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善인 것. 곧 無貪· 無瞋·無癡의 三善根과 慚·愧의 2)과 相應善(自性善과 相應하는 것에 의해서 善이 되는 心·心所)과 等起善(自性善과 상응하는 善으로부터 引起)되어 善이 되는 身· 語의 二業 및 得·四相·二無心定)을 일컬음.
⑤ 四種不善. 四種善의 반대. 勝義不善·自性不善·相應不善·等起不善을 일컬음.
⑥ 七種善. 生得善(先天的으로 가지고 있는 善)과 聞善과 思善과 修善(이상의 3은 聞法과 思惟와 禪定의 노력의 결과로서 얻어진 이른바 加行得善)과 學善(有學位에서 일으키는 善)과 無學善(無學位에서 일으키는 善)과 勝義善(涅槃)의 일컬음. 이 가운데 前四는 見道(비로소 無漏智가 생기는 자리)에서 앞의 凡)夫 때 일으키는 善으로 有漏善이며, 後三은 見道 이후의 聖者가 일으키는 善으로 無漏善이다(俱舍論光記卷二).
⑦ 七善. 頓敎가 가진 7종의 善. 時善(時節善이라고도 한다. 前出의 三善과 같은 것으로 序分·正宗分·流通分이 善인 것)·義善(의미가 深遠)·語善(言語가 巧妙)·獨一善(純一無雜의 敎)·圓滿善(완전 圓滿의 敎)·調柔善(極端으로 편벽된 더러움이 없음)·無緣慈善(淸淨한 無緣의 자비의 相이 있음)<法華文句 卷七>.
⑧ 十一善. 唯識宗에서 세우는 11종 善의 心所. 信·慚·愧·無貪·無瞋·無癡·勤·輕安·不放逸·行捨·不害의 일컬음.
⑨ 기타 雜善(他力念佛에 대한 自力의 諸善), 雜毒의 善(三毒 곧 貪·瞋·癡의 번뇌를 섞인 凡夫의 善), 世善(世俗善이라고도 한다. 有爲의 善, 有漏善, 世福을 말함) 등이 있다.
무부무기(無覆無記) : 煩惱에 가려져 있으나 善 · 惡이라고 明記할 수 없는 것을 말함. 淨無記라고도 하며 聖道를 덮어 가리거나 방해하거나 마음을 不淨하게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부(無覆)→번뇌에 더럽혀지지 아니한 순수한 것이라는 뜻.
불염오(不染汚) : 善과 無覆無記를 不染汚라고 한다.(俱舍論 卷七)→위 본문內.
잡염(雜染) : 범어 samklesa의 번역으로 有漏의 뜻. 僧吉隷爍(예삭)이라 音譯하며 雜은 間雜·和雜 등의 뜻이며 染은 染汚法으로 淸淨의 對淨의 對語니 곧 不善法 또는 有覆無記法을 일컫는다. 이 雜染이 染汚와 同意語로 쓰이기도 하지만 成唯識論述記卷二末에는 단지 染·染汚라고 쓸 때에는 染法 곧 번뇌를 가리키는데 대해서 雜染이라고 할 때에는 善·惡·無記의 三性을 통해서 모든 有漏法을 總稱하는 것으로 說하고 있다. 雜染을 3으로 나누어서 三雜染을 말하기도 한다. (1) 煩惱雜染. 惑雜染이라고도 함. 일체의 번뇌 및 隨煩惱를 가리키는 말로 또 이것을 見所斷·修所斷의 2, 혹은 欲界繫·色界繫·無色界繫의 3, 혹은 根本煩惱의 10으로 나눈다. (2) 業雜染. 번뇌로부터 생긴 제2의 번뇌를 뜻함. 혹은 번뇌를 도와서 身·語·意의 三業을 조작하는 의미의 業을 가리키기도 한다. (3) 生雜染. 苦雜染이라고도 한다. 번뇌 및 業에 의해서 三界에 나서 苦를 받으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이상의 三雜染은 차례로 惑·業·苦의 三道에 상당한다(顯揭聖敎論卷一). 또 이상의 三雜染에 障雜染을 더해서 四雜染을 說하기도 한다.
염법(染法) : 染汚法의 준말. ① 惡性과 有覆無記와의 諸法을 말함. ② 迷妄의 諸法을 말함. 이것이 淨法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번뇌염오(煩惱染汚) : 위 본문을 참조하십시오.
업염오(業染汚) : 위 본문을 참조하십시오.
생염오(生染汚) : 위 본문을 참조하십시오.
삼잡염(三雜染) : 煩惱雜染·業雜染·生雜染의 세 雜染을 말하며, 그것은 차례로 惑·業·苦에 해당한다. 成唯識論述記莊嚴經論 卷三에 있는 說로 雜染을 染汚라고도 한다.
혹업고(惑業苦) : 또는 惑業事 · 惑業生이라고도 함. 迷의 인과를 나타내는 말. 惑은 탐 · 진 · 치 등의 번뇌, 業은 惑을 근거로 하는 선악의 행위를 짓는 것, 苦는 이 業에 의하여 받게 되는 과보인 三界에 유전하는 것. 이것은 중생이 윤회한 순서를 제시한 것으로 三道라 함.
기신론(起信論) : 大乘起信論의 약칭. 馬鳴보살의 저술. 梁나라 眞諦의 번역본 1권과 唐나라 實叉難陀의 번역본 2권이 있음. 이 論은 通論的으로 여러 大乘經에 공통된 敎理를 말하였으므로 大乘通申論의 하나라 한다.
청정(淸淨) : 범어 suddha. 나쁜 짓으로 지은 허물이나 번뇌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깨끗함. 戒行이 아주 조촐함. 自性淸淨과 離垢淸淨의 2종이 있음.
불각(不覺) : 萬有의 眞相을 깨닫지 못하는 중생의 밝지 못한 마음. 根本不覺·枝末不覺이 있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② 有部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相應無明과 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를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또 後者는 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과 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는 第七 末那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는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이 獨行不共無明은 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과 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또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種子와 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의 種子를 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의 現行을 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迷의 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이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纒·相應·不共의 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또 根本과 枝末과 共과 不共과 相應과 不相應, 迷理와 迷事, 獨頭와 俱行, 覆業과 發業과 種子子時와 行業果와 惑의 15種의 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③ 勝鬘經에서는 見惑 및 三界의 修惑인 貪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을 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一은 見惑, 뒤의 三은 三界의 修惑을 의미한다)의 惑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의 無明을 無始無明住地의 惑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의 惑) 이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의 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④ 起信論에서는, 無明을 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을 根本無明과 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은 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또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곧 眞如平等의 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念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의 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과 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의 惑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은 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의 惑業이다.
⑤ 天台宗에서는 空·假·中의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의 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과 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品의 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의 最後의 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品의 無明이 있다 한다)을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位인 等覺의 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의 無明을 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說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觀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번뇌(煩惱) : 범어 klesa의 번역. 吉隷捨로 음역하고, 惑이라고도 번역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히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 그 성질은 不善 및 有覆無記이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서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報를 받아 미혹의 세계(生死)에 매어 있게 된다. 이것을 惑業苦의 三道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번뇌는 그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는다. 隨眠·惑(이치에 어둡고 現象의 세계에 대해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染·漏·結使·結·縛·纒·軛·暴流·取·蓋·繫·使·垢·株杌·燒害·箭·稠林(번뇌의 수가 많은 것을 무성한 삼림에 비유한 것)·塵勞·塵垢·客塵·諍根(다툼의 근본)이라고도 하고, 또 번뇌의 體 그것을 正使(다만 使라고도 한다), 體를 멸해도 역시 남아있는 관습의 기운을 習氣라고 한다. 모든 번뇌는 因力(아직 번뇌가 끊기지 않은 것)·境界力(욕심 등에 순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加行力(대상에 대해서 非理·作意를 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俱舍論 卷二十〕혹은 境界力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다고도 한다.〔入阿毘達磨論 卷上〕
① 구사종이나 유식종에서는 번뇌를 근본번뇌와 枝末번뇌의 두 번뇌로 나눈다.
근본번뇌라 함은 번뇌의 體 그것으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번뇌로, 本惑·根本惑 혹은 다만 번뇌라고도 부르며, 有部에서는 隨眠이라고도 한다. 단 經部에서는 隨眠을 번뇌의 종자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서 번뇌의 現行(현재에 일어나서 활동하는 것)을 纒(전)이라 한다. 유식종에서도 隨眠이란 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고 말하며, 근본번뇌에 貪·瞋·癡·慢·疑·見(惡見)의 六번뇌(六隨眠)가 있는데, 見을 有身見·邊執見·邪見·見取見·戒禁取見의 五見으로 나누어 貪 등의 다섯과 합해서 十번뇌(십隨眠, 十使)라고 한다. 이 가운데 貪 등의 다섯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 작용이 느리고 둔하기 때문에 五鈍使(五惑), 五見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이 있고 그 작용이 빠르고 날카롭기 때문에 五利使라고 한다. 또 六隨眠 가운데 貪을 欲界의 탐과 上二界(색계·무색계)의 貪으로 나누어 이것을 각각 欲貪·有貪이라고 하며 합하여 七隨眠(七使)이라 하고, 혹은 十隨眠 중에 貪을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로 나누어 欲貪·色貪·無色貪으로 하고 十二隨眠(十二使)이라고도 한다. 唯識宗에서는 십종의 근본번뇌 가운데 제七識과 상응하여 항상 일어나는 我癡(無我의 이치에 미혹하여 나의 相에 어두운 번뇌로 無明을 말함)·我見(我執을 말하며 有身見의 일부)·我慢(나를 집착하고 나를 믿고 우쭐하는 거만)·我愛(나를 집착하여 나에 탐착하는 것)의 넷을 四煩惱(四根本煩惱, 四惑)라고 한다. 또 탐·진·치는 모든 악을 낳게 하는 근본(즉 因)이며, 대표적인 번뇌이기 때문에, 三不善根·三毒·三垢·三縛 등이라고 한다.
지말번뇌라 함은 근본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 隨惑·枝末惑·隨煩惱라고도 한다. 단 수번뇌란 말은「心王에 붙어다니는 번뇌」란 뜻으로 풀어 근본번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지말번뇌에는, 구사종에서는 放逸·懈怠·不信·惛沈·掉擧·無慚·無愧·忿·覆·慳·嫉·惱·害·恨·諂·誑·憍·睡眠·惡作의 十九를 말하며, 유식종에서는 睡眠·惡作을 버리고 失念·散亂·不正知를 더하여 二十으로 하기도 한다.
② 俱舍宗 등에서는 迷理·迷事의 二惑을 나누어,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 곧 四諦의 이치에 迷惑하고 있는 思想上의 知的인 번뇌를 迷理의 惑이라 하고, 구체적인 개개의 事象에 미혹한 바의, 곧 인간성에 바탕한 情意的인 번뇌를 迷事의 惑이라고 한다. 또 自相·共相이 二惑을 나누어서, 色·聲 등 각자 개개의 특수한 고유의 相(곧 自相)을 迷해서 각각의 법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번뇌를 自相의 惑이라 한다. 空·無我 등 三世의 모든 것에 공통된 相(곧 共相)을 迷함으로 많은 법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번뇌를 共相의 惑이라 한다. 앞의 것에는 貪·瞋·慢 또는 貪·瞋·慢·嫉·慳이 있고 뒤의 것에는 五見·疑·無明이 있다고 한다. 唯識宗에서는 煩惱障·所知障의 二障을 나누어, 我執에 의해 일어나서 중생을 미혹의 세계(生死)에 流轉시킴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惑을 煩惱障이라고 하며, 法執에 의해 일어나서 알아야 할 대상인 진리를 막음으로 보리를 깨닫는 길을 방해하는 惑을 所知障이라 한다. 번뇌장은 일체의 번뇌를 體로 하고 반드시 所知障을 수반한다. 번뇌장은 所知障을 依支處로 하기 때문이다. 所知障은 함께 번뇌를 體로 하지만, 반드시 번뇌장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또 業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惑을 發業의 惑(주로 다음에 말하는 分別起의 혹으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無明이 그것이다)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 迷界의 중생을 윤택하게 하고 삼계의 중생을 받게 하는 혹을 潤生의 혹(다음에 말하는 俱生起의 번뇌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貪을 主로 한다)이라고 한다. 또 어떻게 해서 번뇌가 일어나는가 하는 점에서 나누면, 二障 공히 각기 분별기와 구생기가 있다. 邪師·邪敎·邪思惟 등 밖으로부터의 緣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분별기의 혹이라고 하며,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일어나는 본능적인 것을 구생기의 혹이라고 한다. 十근본번뇌중에서, 의심과 邪見과 見取見과 戒禁取見과의 四는 분별기뿐이며, 다른 六과 二十隨惑은 양쪽에 모두 공통한다.
③ 번뇌를 끊어야 할 수행단계의 相異에 따라 번뇌를 나누면 見惑과 修惑(思惑)의 二惑이 있다. 전자는 見道에 의해서 없애야 할 번뇌(見道所斷의 惑)이며 후자는 修道에 의해서 끊어야 될 번뇌(修道所斷의 惑)이다. 俱舍宗에서는 迷理의 惑을 見惑, 迷事의 惑을 修惑이라고 하고, 唯識宗에서는 分別起의 惑을 見惑, 俱生起의 惑을 修惑이라 한다. (1) 俱舍宗에서는 三界 四諦의 각각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見惑에 총 八十八이 있다. 欲界의 苦諦에 관해서는 貪 등 十근본번뇌와 集諦와 滅諦에 관해서는 身見·邊見·戒禁取見을 뺀 七근본번뇌, 道諦에 관해서는 戒禁取見을 더하여 八근본번뇌가 있으므로, 합하면 欲界의 三十二, 色界·無色界에는 瞋이 없기 때문에 四諦의 하나하나에 瞋을 뺀 각 二十八, 計 八十八이 된다. 이것을 見惑八十八使라고 한다. 修惑은 欲界에 貪·瞋·癡·慢의 四, 色界·無色界에 각기 貪·癡·慢의 셋이 있어 합하면 열이 되므로 여기에 見惑의 八十八을 더하면 九十八隨眠 또는 九十八使라고 한다. 단 修惑은 성질이 遲鈍애매하여 분명히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九地의 각 위에 강약의 정도에 따라 九品(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의 아홉 品階)의 구별을 세워, 九地九品의 思惑, 修惑 八十一品 등이라고 한다. 이 九十八使를 遍行과 非遍行으로 나눈다. 遍行의 惑이라 함은, 三界九地 중에서 自界自地의 五部(見道에 있어서 四諦의 觀行과 이것을 거듭하여 닦는 修道)에 널리 작용하여 五部의 法을 더럽히는 惑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五部 중의 自部에만 작용하는 惑을 非遍行의 惑이라고 한다. 곧 九十八隨眠 중에서 널리 五部의 모든 有漏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고, 널리 그것들과 隨順하고 그것들에 의해서 더욱 더 增長하고(곧 隨增하고), 因이 되어서 널리 五部의 染法(번뇌 등의 染汚法)을 낳게 하는 힘이 강한 惑은 遍行의 惑으로 三界의 각각에 있어서 苦諦의 理에 헤매는 五見·疑·無明과 集諦의 理에 헤매는 邪見·見取見·疑·無明과의 十一이 있다. 이것을 十一遍行의 惑이라 한다. 이 중 身·邊의 二見은 다만 自界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自界緣의 惑이라고 하지만 나머지 다른 아홉은 自界는 물론 또 다른 上界까지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他界緣의 惑이라고 하고, 이 아홉은 上界上地까지도 緣이 있다고 하는 의미로 九上緣의 惑이라고도 한다. 또 九十八使를 有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有漏緣의 惑과 無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無漏緣의 惑으로 나누면 滅道二諦의 理에 迷한 邪見과 疑와 癡(邪見·疑에 상응해서 일어나는 相應無明과 및 독립으로 일어나는 不共無明)의 六惑은 無漏緣이며, 그밖의 것은 有漏緣이다. (2) 唯識宗에서는, 見惑에는 欲界의 四諦 각각에 十근본번뇌(欲界四十), 색계·무색계에 성냄(瞋)을 뺀 九근본번뇌(色界三十六·無色界三十六) 계 百十二번뇌를 들고, 修惑에는 欲界에 疑·邪見·見取見·戒禁取見을 뺀 六근본번뇌, 색계·무색계에 각기 다시 瞋을 뺀 각 五근본번뇌, 計 十六번뇌를 들므로 見修二惑을 합하여 百二十八번뇌가 된다.
④ 知的인 惑 즉 五利使와 見惑 등을 見煩惱라고 하고, 情意的인 惑 곧 五鈍使와 修惑 등을 愛번뇌라 하며, 합하여 見愛(二)번뇌, 見著二法, 愛見이라고 한다. 그 體는 虛假(헛소리)이기 때문에, 또 見假·愛假라고도 한다. 勝鬘經에는 四住地번뇌의 說이 있다. 곧 見번뇌는 見道에 있어서 한때에 끊겨지기 때문에 見一處住地(一切見住地)의 惑이라고 부르고 愛번뇌는 이것을 三界에 나누어 각기 欲愛住地의 惑, 色愛住地의 惑·有愛住地의 惑이라 부른다. 또 이 넷에 다시 모든 惑의 근본이 되는 無明(無明住地의 惑)을 더하여 五住地번뇌, 五住地惑이라 한다. 唯識宗에서는 五住地번뇌 중 앞의 넷은 煩惱障의 종자이며, 뒤의 하나는 所知障의 종자라고 한다. 天台宗에서는 전자를 界內見思의 惑, 후자를 界外의 惑이라고 한다. 대개 住地라 함은 다른 모든 惑이 일어나고 의지처가 되며(住) 잘 惑을 일으키는 因이 된다는 뜻이다. 智度論 卷七에는, 자신에 집착하는 번뇌를 內著번뇌, 外境에 집착하는 번뇌를 外著번뇌라 하며, 전자는 五見·疑·慢 등, 후자는 婬·瞋에 속한다고 한다.
⑤ 天台宗에서는 見思·塵沙·無明의 三惑(三障·三垢)을 말함. 곧 우선 見惑과 修惑(思惑)을 見思의 惑이라고 부르며, 다음에 티끌(塵)이나 모래(沙)에도 비유할 만큼의 무수한 사물의 하나하나의 事理에 迷한 劣慧(번뇌의 習氣로 不染汚無知라고도 한다)를 體로 하고, 다른 것을 化導하는 것을 막는 惑을 塵沙의 惑이라고 부른다. 다음에 모든 惑의 근본으로, 中道 第一義諦의 도리를 迷한 가장 적은 번뇌를 無明의 惑이라 부른다. 각각 空觀·假觀·中觀에 의해서 끊긴다고 한다. 이 三惑을 번뇌장·소지장에 配對하면 見思는 번뇌장, 塵沙·無明은 소지장에 해당한다. 또 見思는 三乘에 공통하는 惑이므로 通惑·塵沙·無明은 특히 보살만이 끊는 惑이기 때문에 別惑이라고 부르고(通別二惑), 見思는 三界안에서 일으키는 惑이므로 界內의 惑, 無明은 三界를 넘은 곳에 있는 惑이기 때문에 界外의 惑, 塵沙는 양쪽 모두 통하므로 界內界外의 惑이라고 한다. 또 見思의 惑은 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사물의 相을 집착하여 취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따로 取相의 惑이라고 말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뒤의 二惑도 또한 取相의 惑이라고 한다.
⑥ 번뇌에는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1) 三縛. 貪縛·瞋縛·癡縛. 이상의 차례로 樂·苦·捨의 三受의 對境을 향해서 일어난다. (2) 三漏. 欲漏(癡를 뺀 欲界繫의 근본번뇌 및 十纏)·有漏(癡를 뺀 上二界繫의 근본번뇌로 이 경우의 有는 有身의 뜻. 身의 존재를 말한다. 無漏에 대한 有漏는 아니다)·無明漏(三界의 癡). (3) 三結. 有身見結·戒禁取結·疑結. 五見 및 疑의 六근본번뇌가 이 중에 포함된다. 「三結이 다하면 預流果에 이른다」라고 한 經說에 따라 三結이 다하면 그 때 見惑의 모든 것이 끊어진다고 한다. (4) 四暴流(四流). 欲暴流·有暴流·見暴流·無明暴流. 三漏의 분류법에서 見을 독립시킨 것. (5) 四軛. 四漏. 欲·有·見·無明의 넷으로 惑體는 四暴流와 같다. (6) 四取. 欲取·見取·戒禁取(戒取)·我語取. 俱舍宗에서는 欲界의 五鈍使 및 十纏을 欲取, 五利使 중 앞의 넷을 見取, 戒禁取見을 戒(禁)取, 上二界의 貪·慢·癡·疑를 我語取라고 한다. 이어라 함은 내신(자기의 몸)을 말한다. 내신에 의해서 나를 설하기 때문이다. 상이계의 번뇌는 대개 내신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아어취라고 부른다. (7) 四身繫(四身縛·四縛·四結이라고도 한다). 貪欲身繫(貪欲身縛·欲愛身縛)·瞋恚身繫(瞋恚身縛)·戒禁取身繫(戒禁身縛)·此實執取身繫(我見身縛). (8) 五蓋. 欲貪蓋·瞋恚蓋·惛眠蓋·掉悔蓋·疑蓋. 疑가 섞이지 않는 것을 疑蓋無雜이라고 하는 말도 여기에 연유한다. (9) 五(順)下分結. 有身見·戒禁取見·疑·欲貪·瞋恚. 下分이라 함은 欲界란 뜻. (10) 五(順)上分結. 色貪·無色貪·掉擧·慢·無明. 上分이라 함은 上二界란 뜻. (11) 五結. 貪·瞋·慢·嫉·慳. (12) 六垢(六煩惱垢). 惱·害·恨·諂·誑·憍. 煩惱垢라 함은 근본번뇌에서 흘러나와 그 모습이 더러워지고 거칠다는 뜻. (13) 七流. 見諦所滅流·修道所滅流·遠離所滅流·數事所滅流·捨所滅流·護所滅流·制伏所滅流(華嚴孔目章 卷三 등) (14) 九結. 愛結·恚結·慢結·無明結·見結·取結·疑結·嫉結·慳結. (15) 十纏. 無慚·無愧·嫉·慳·惡作·睡眠·掉擧·惛沈·忿·覆 등의 十. 忿·覆을 빼고 八纏이라 하는 경우가 있다. 枝末번뇌 중에 六垢는 가볍고, 十纏은 무겁다. 九十八隨眠에 十纏을 더해서 百八번뇌가 된다고 하고, 또 모든 번뇌를 다 말하면 八萬四千의 번뇌가 있다고도 한다.
⑦ 번뇌를 여의는 것을 離垢, 번뇌가 없는 것을 無垢, 번뇌가 다한 것을 漏盡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漏盡比丘, 또 漏盡하여 마음에 진리를 了解하는 것을 盡漏意解라고 한다.
염심(染心) : ① 染汚心의 준말. 心體는 원래가 청정한 것인데 不覺의 無明으로 그 本心이 가리워진 마음. 곧 惡心과 有覆無記心을 말함. ② 日常心과 7識.
육염심(六染心) : 大乘起信論에, 마음 자체는 원래 淸淨하나 不覺으로 無明이 생겨 번뇌로 가려진 染心을 執相應染·不斷相應染·分別智相應染·現色不相應染·能見心不相應染·根本業不相應染으로 구분한 것.
(1) 執相應染. 눈 앞에 나타나는 온갖 모양에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染心으로 6麤 가운데에 執取相과 計名字相에 해당된다.
(2) 不斷相應染. 객관대상은 반연하여 일어나는 分別心이 상속하는 地位로 6麤 중의 相續相에 해당된다.
(3) 分別智相應染. 6麤 중의 智相에 해당된다.
(4) 現色不相應染. 3細 중의 境界相에 해당된다.
(5) 能見心不相應染. 아리야식 중의 주관적 마음작용으로 3細 중의 能見相에 해당된다.
(6) 根本業不相應染. 3細 중의 無明業相에 해당된다. 眞如가 근본무명에 의하여 최초로 움직이는 마음의 모양이며, 迷의 본원이 되는 것이다.
집상응염(執相應染) : 我執. 객관의 대상을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染心.
분별기(分別起) : 邪師 · 邪敎 등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세력이나 스스로의 부당한 추리분별에 의해 일어나는 후천적 번뇌를 말함.
법집(法執) : 객관인 物 · 心 현장을 실재한 것인 줄로 잘못 알고 고집하는 것.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 : 起信論의 6染心의 하나. 또는 6麤의 하나인 智相.
구생기(俱生起) : 몸이 生함과 동시에 일어난다 라는 뜻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선천적 번뇌를 말함.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 : 기신론에서 설한 六染心의 하나. 五識 중의 現識, 三細 중의 現相이다. 現識은 일체의 色像, 즉 경계의 相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現色이라고 이름한다. 境界의 相을 낳는 것은 오직 미세한 근본 무명의 分際가 되어서, 心王과 心所로 더불어 서로 상응하여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不相應染이라고 일컫는다.
소취(所取) : 알려지는 것. 포착되는 것. 객관적 대상. 객관.
망심(妄心) :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 迷妄한 마음. 무명번뇌.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 : 6染心의 하나. 能見相의 뜻.
능취(能取) : 아는 것. 주관. 인식주관. 대상을 파착(포착)하는 것.
미망(迷妄) : 事理에 어두운 것을 迷라 하고, 空虛하여 실재하지 않는 것을 妄이라 한다.
미(迷) : 일체 사물의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틀린 것에 집착하는 것을 迷라고 한다. 迷에서 깨어나 명확하게 진실을 체달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거짓 形相(假相)에 집착하여 그것을 진실로 아는 妄念을 끊지
못하는 마음을 迷情·迷心이라 하고, 또 迷情에 사로잡혀 一切 사물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경지, 곧 三界를 迷界·迷境이라 한다. 또 迷悟를 生死의 江河를 건너고 건너지 않은 것에 비유하여 迷界를 迷津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하여 진실의 知見을 열어 깨달음의 도를 얻는 것을 悟道라고한다.
염오심(染汚心) : 위 染心과 같음.
수행(修行) : 敎法을 몸에 지녀 갈고 닦아 실천하는 일.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찾는 마음을 발하여(發心), 그 願望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고, 그 결과로서 깨달음을 펼친다고 한다. 수행이란 특히 頭陀苦行 또는 廻國巡禮란 뜻으로 쓰고 이를 행하는 사람을 修行者, 또는 行者라 부르기도 한다. 성문 · 연각 · 보살이 각각 究極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에 대하여 성문은 三生六十劫, 연각은 四生百劫, 보살은 三祇百劫을 요한다고 한다.
(1) 三生六十劫이란, 성문이 아라한과에 이르기까지 가장 빠른 것은 세번 태어나는 기간을 지내고, 가장 늦는 것은 60劫(이 劫은 刀兵등의 1小劫)을 지낸다고 한다. 제一生 또는 처음 20劫에는 順解脫分을 일으키고, 제二生 또는 다음의 二十劫에는 未至定에 의하여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키고, 제三生 또는 마지막 20劫에는 根本定에 의하여 다시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켜 見道에 들고 마침내는 無學果를 증명한다고 한다. 그러나 제三生에서 처음으로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킨다고 하는 說도 있다. 또한 빠른 것은 利根, 늦은 것을 鈍根이라 하나, 거꾸로 늦은 것은 오랜 鍛鍊을 참아낼 수 있는 練根으로서의 利根이라고 할 수도 있다.
(2) 四生百劫이란 연각이 辟支佛果에 이른는데 가장 빠른 것은 四生, 가장 늦은 것은 百劫을 요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俱舍論> 권十二에는, 麟角喩獨覺(緣覺)은 반드시 百大劫 기간에 깨달음의 바탕을 닦는다고 설명하고, 四生의 說을 설명하지 않는다.
(3) 三祇百劫이란, 三祇는 3아승지겁(三僧劫, 三祇劫이라고도 함), 百劫은 百大劫의 약어로서 三僧劫百大劫이라고도 하고, 보살은 3아승지겁에 걸쳐 波羅蜜을 닦고 그후의 百大劫에 있어서 부처가 갖출 수 있는 뛰어난 姿形(즉 32相 · 80種好)의 씨앗이 되는 相好業을 심는다고 하고 이들 수행을 三祇의 修行, 이 수행을 거쳐 성불하는 것을 三祇成佛이라 한다.
<大毘婆沙論> 권百七十八에는, 보살이 初아승지겁에 7만5천佛, 제二아승지겁에 7만6천佛, 제三아승지겁에 7만7천佛이라는 수많은 부처님을 섬겨 깨달음에 이르는 근본으로 삼고, 계속하여 91劫에 6佛을 섬겨 異熟業을 닦아 왕궁에 태어난 후, 34心斷結成道를 설하였고,
<智度論> 권二十七 같은 데에도 三祇百劫의 說이 있으며,
<攝大乘論> 권下에서는 三祇만을 설하고 百劫을 별도로 說하지 않고 있다.
法相宗에서는 初아승지겁은 五位 중의 資量 · 加行의 二位이며, 여기에서는 一行 속에서 一行을 닦고, 제二아승지겁은 通達位 및 修習位의 1部, 즉 初地에서 7地까지이며, 여기에서는 一行 속에서 一切行을 닦고, 제三아승지겁은 修習位의 나머지 즉 8地에서 10地의 滿心까지이며, 여기에서는 一切行 속에서 一切行을 닦는다. 그리하여 10地의 滿心에 있어서 等覺의 位에 올라 여기에서 비로소 成佛을 위한 方便의 行을 닦는 것이 百劫의 行에 해당된다. 또한 三祇의 수행중에 열심히 노력하여 뛰어난 사람은 중간 단계를 뛰어 넘어 높은 修行階位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여 이것을 超劫이라고 하는데 初地 이상에서는 超劫이 없다고 하는 說도 있다.
화엄종이나 천태종에서는, 三祇百劫의 說은, 小乘 및 下根인 사람을 위한 方便的인 敎로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兩宗이 각각 圓敎라고 하는 최고의 차원에서 본다면, 중생은 본래적으로 부처이므로 三祇라는 시간의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眞言宗에서는 三劫의 妄執(三妄執)을 一念으로 초월할 것을 설하고, 淨土敎에서는 本願의 힘에 의해 왕생하여 成佛이 되는 것이므로 三祇의 修行을 설하지 않는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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