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견(法堅)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552~1634) 조선 중기의 승려로서 僧兵將이었다. 호는 奇巖. 西山대사의 高弟로 詩文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이끌고 출전, 여러 곳에서 적병을 무찔러 활약하여 摠攝이 되었고, 94년에는 竺巖山城 축조를 지휘 감독하였다. 저서로는 奇巖集이 있다.
참고
승병(僧兵) : 전쟁에 참가하던 승려. 僧軍이라고도 한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수도승이 많아짐에 국가 유사시 그들은 출전을 하게 되었다. 원래 불교는 살생을 금하나 한국 불교는 호국신앙과 결부되어 金剛明經 · 仁王經 · 藥師經 등을 존중, 국가 유사시 군사로 출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승병은 삼국시대 고구려에 唐太宗이 침입함에 3만의 승병을 출전시켰다는 것이 高麗史 崔瑩傳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때는 사원에 모두 隨院僧徒라는 것을 두어 勞役에 종사시켰는데 국가의 비상시에는 이들 인적 자원을 이용, 승병을 조직하여 降魔軍이라 하였다.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임진왜란(1592~1597) 때로 休靜과 惟政이 각각 승병을 이끌고 싸웠으며 靈圭 · 處英 등 유명한 승병장이 나와 金山과 행주산성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호국신앙(護國信仰) : 우리 나라 불교의 일관된 신앙으로, 崇信으로 호국한다는 사상. 불교를 굳게 믿음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생각하는 이른바 現世佛敎的 신앙에서 나왔다. 불교와 왕권은 이 호국신앙과 굳게 결부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역대 제왕들은 더욱 불교를 숭상하고 장려해 왔다. 이와 같은 신앙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우리의 정신계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이 왕조의 무궁함을 바라는 호국기원에서 세워졌고, 문무왕이 당나라 군사의 내침을 물리치고 백제고구려의 옛땅을 통합한다는 사상에 입각하여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또한 전설에, 문무왕이 평소 知義法師에게 「내가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하고 우리 나라를 수호하고 싶다」고 한 사실 등은 모두가 호국신앙에 그 근본을 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일관되었는데, 사원은 불교 자체를 위하기보다 국가를 위한 裨補寺院으로서 의의가 컸다. 고려 태조의 十訓要 제1조에 「우리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諸佛護衛의 힘에 의존한다」라고 한 것이라든지 文宗 때 불교의 법력에 의하여 국가의 복리를 증진한다는 의미에서 흥왕사를 세운 것 등은 이같은 사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또 외침을 막기 위하여 대장경을 간행한 것은 더욱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抑佛策으로 불교의 부흥을 보지 못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승군의 활동은 모두 호국신앙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휴정(休靜) : (1520~1604) 이조 선조 때의 승려. 휴정은 법명. 속성은 崔씨. 자는 玄應, 호는 淸虛 · 西山, 본관은 完山. 평안도 安州에서 9세에 어머니를 그리고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안주목사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泮齋에서 공부하였으나 마음에 맞지 않으므로 동급생 열 사람과 같이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 드디어 禪家의 법을 깨닫고, 崇仁에게 출가하다. 21세에 靈觀대사에게 인가를 얻고 촌락으로 돌아다니다가 정오에 닭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心神을 깨달았다. 30세에 禪科에 합격하고, 大選에서 兩宗判事에까지 이르러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서 三夢詞를 짓고 향로봉에 올라가「만국의 도성들은 개미 집이요, 고금의 호걸들은 바구미 벌레 같네. 창에 비친 밝은 달빛 아래 청허하게 누우니 끝없는 송풍의 운치가 별미로다. (萬國都城如지蟻 千家豪傑等蛭鷄 一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라는 시를 지었는데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옥사에 요승 無業이 무고하여 체포되었으나 선조가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하였을 뿐 아니라 시를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선조께 뵙고 각지의 노약자로 하여금 기도케 하고 나머지 승려들을 데리고 적군을 몰아내겠다고 하여 8도 16종 都摠攝이 되었다. 義僧 5천을 모집하여 인솔하고 관군을 도와 공을 세우고 왕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 늙음을 이유로 군사를 유정과 처영에게 맡기고 산으로 되 돌아가 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름이 더욱 높았으며, 금강 · 두륜 · 묘향 등의 산으로 왕래하니 따르는 제자가 천여명이요 유명한 제자가 70여인에 이르렀다. 묘향산 원적암에 제자들을 모아 설법을 하고 글을 그 영정뒤에 써서 유정 · 처영에게 주고 입적하다. 저서로는 禪敎釋 · 禪敎訣 · 雲水壇 · 三家龜鑑 · 淸虛堂集 8권 · 禪家龜鑑 · 心法要 · 說禪儀文 · 諸山壇儀文 등이 있다.
총섭(摠攝) : 고려 말기부터 있었던 우리나라 僧職. 고려 말 懶翁王師가 禪敎都摠攝의 職名을 받은 바 있고, 1592(朝鮮宣祖 25년)에 西山大師가 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전국 승려의 統師權을 가진 일이 있으며, 그 뒤를 이어 四溟 · 碧巖 · 白谷 등이 禪敎都摠攝이 되었다. 그러데 이조 때에는 승군을 통솔하는 것이 중요한 직권인 듯하다. 그로부터 南漢僧營 · 北漢僧營 · 陵園史庫 등 중요한 의미를 갖는 寺院에는 다 摠攝을 두었고 僧大將이라 이름했다. 이조말기에는 큰 절에는 대개 摠攝을 두는 것으로 되었었다.
기암집(奇巖集) : 조선 선조 때의 승려 법견의 시문집. 1648년(인조 26)에 간행되었다. 규장각도서. 3권 1책. 목판본. 권두에 1647년 이민구(李敏求)가 쓴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1648년(인조 26) 삭녕 용복사에서 간행했다는 간기가 있다. 권1에는 5언 및 7언절구와 율시(律詩) 등 60여 편, 권2에는 상량문 · 소문(疏文) 등 18편, 권3에는 권선문 · 모연문(募緣文) · 발문 · 수탑기(修塔記) · 중창기(重創記) 등 2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