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永平寺의 감회

근와(槿瓦) 2015. 4. 13. 00:04

永平寺의 감회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지난해 7월 도원 선사(道元禪師)의 옛 도량인 영평사를 찾았던 일이 지금 돌이켜보아도 감회가 새롭다. 평소 선사의 법어와 행적을 대할 때마다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아온 나로서는, 일본에 대한 여러 가지 착잡한 영상 속에서도 유달리 도원 선사의 존재는 밤하늘의 별처럼 내 안에 자리잡고 있다.

 

동경에 유학 중인 오진(悟震)스님의 주선으로 현호 스님과 함께 길을 떠났다. 동경에서 시속 250킬로로 달린다는 신간선을 타고 신요꼬하마 나고야를 거쳐 한 중간역에서 다른 열차로 갈아탔다. 후꾸이(福井)역에 내리니 미리 연락을 받고 절 차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영평사는 도원 선사가 송나라의 유학에서 돌아온 후 정법을 실현하기 위해 1244년 창건된 청정한 수도 도량이다. 후꾸이시에서 동남쪽으로 16킬로 떨어진 대불사산(大佛寺山)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10만평이나 되는 경내에는 수령 6백년이 된다는 삼나무들이 우람하게 서 있었다. 크고 작은 70여동의 법당과 전각들이 장엄한 도량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의 절 양식과는 달리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 흙을 밟지 않고 회랑을 통해서 절 전체를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지하 1층에서 지상 4층에 이르는 건물도 있는 그런 도량이다. 2백명 스님들이 무엇 한 가지 소홀하거나 흐트러짐 없이 옛 총림((叢林 : 수도원)의 전통적인 가풍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모습을 대하니 저절로 환희가 일었다. 도원 선사(1200~1253)의 투철한 구도정신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싶으니, 같은 불자로서 환희와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경 시내 아사꾸사사(淺草寺)와 같은 무속과 상업주의에 오염된 절간이 있는가 하면, 영평사와 같은 청정한 도량이 있음을 보고 일본 불교의 막강한 잠재력을 알 수 있었다.

 

새벽 3시에 기상, 지객(知客)스님의 안내로 승당(僧堂)의 외당(外堂)에서 좌선에 참석했다. 이따금 졸음과 흐트러진 자세를 일깨우는 경책 소리가 내당(內堂)쪽에서 들려왔다. 5시, 다다미 4백장이 깔린 큰법당에 들어가 예불과 근행. 1시간 30분 걸리는데, 모든 의식이 생략되어 버린 우리네 처지에서 보면 다소 번다한 것 같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정숙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특히 2백명 대중이 커다란 목어(木魚)에 맞추어 합송하는 독경 소리가 법당에 메아리칠 때는 장엄 바로 그것이었다. 이웃나라에서 찾아온 객스님들을 축원 속에 넣어준 따뜻한 배려도 고마웠다.

 

예불 끝에 강사 스님의 주선으로 니와(丹羽廉芳) 관수(貫首)스님을 친견했다. 영평사 제77세(世). 그때 나이 85세라는데 동안에 하얀 눈썹이 인상적인 아주 인자하신 노스님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종정 스님 격인데 그렇게 겸손하고 친절할 수가 없었다. 삼배를 드리자 우리보다 더 공손하게 맞절 삼배를 하셨다. 나는 속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다. 도원 선사와 충직한 제자 회장(懷奘)스님의 영골이 봉안된 승양전(承陽殿)을 참배할 때는 실로 감회가 무량했다. 선사의 투철한 구도정신이 7백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 도량에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목격하고 그저 감사한 생각뿐이었다.

 

출세간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두고 생각할 때 도원 선사와 회장 스님의 경우는 특별하고도 아주 절실하다.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이며 일본의 종교사상 가장 탁월한 종교인인 도원 선사가 송나라에서 귀국하여 몇해가 지난 후, 제자 회장은 비로소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회장은 일찍이 달마종 각안(覺晏)의 문하에서 인가(印可)받을 만큼 뛰어난 수행자였지만, 도원 선사를 만나게 되자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 한평생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스승을 극진히 모신다.

 

그때 스승인 도원선사 나이는 35세, 제자 회장은 37세. 두 살이나 손아래인 스승을 헌신적으로 섬기면서, 그 언행을 기록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때 4년 동안에 걸쳐 스승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글이 저 유명한 구도서인 <정법안장 수문기(正法眼藏隨聞記)>가 된다. 뿐만 아니라 선사가 입적한 후 회장은 선사가 써놓은 많은 글과 법문을 손수 베끼고 정리, 출간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하였다.

 

선사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법문을 한 적이 있다(重雲堂式).

“출가 수행승은 수행 도량 안에서 물과 젖처럼 화합하여 서로 도업(道業)을 격려하여야 한다. 지금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스승과 제자가 함께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긴 눈으로 볼 때 이와 같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끼리 어쩌다 함께 도를 구하는 동지로서 만나 행하기 어려운 행을 닦게 된 그 인연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것이다.

도량에서 함께 사는 대중의 은혜는 부모의 은혜보다 더하다. 부모는 한때 생사 윤회 속의 부모이지만, 대중은 영원히 불도의 도반이기 때문이다.”

 

선지식(善知識)이란 선우(善友)의 뜻도 함께 들어 있다. 좋은 스승과 제자 사이는 서로에게 선지식이 되고 선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선지식은 우연히 저절로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간절한 원을 세우고 찾아 나섬으로써 만나게 된다.

선사는 말년에 영평사의 모든 일을 제자인 회장에게 대행시켰다.

회장이 그 까닭을 묻자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 날이 오래지 않으니 그대가 내 대신 정전(正傳)의 불법을 펼쳐야 한다. 나는 그대를 불법을 위해 소중하게 보고 있다’고 하면서 제자임에도 마치 스승을 대하듯 정중하게 대했다고 한다.

 

회장은 선사가 돌아가신 후 영평사의 제2세가 되어 스승의 법등(法燈)을 성실하게 지켜 나간다. 그는 방장(方丈 : 주지실)한쪽에 선사의 영정을 모시고 마치 살아 있는 스승을 모시듯이 조석문안과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도원 선사와 회장의 사이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 정법을 추구하는 구도자로서 서로에게 선우(善友)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스승과 제자 사이를 그토록 하나로 묶어놓았는지 오늘 우리는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구도의 정신인가 세속적인 물질이었던가를.

 

요즘의 사제관계란 일종의 계약관계처럼 보일 때가 더러 있다. 스승은 물질적인 후원자이고, 제자는 그 대가로 일을 거들어주는 정도다. 그러니 출세간의 의리나 정신은 희미해지고 세속적인 이해관계로 전락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있듯이 스승과 제자 양쪽에 허물이 있다.

 

도원 선사는 24세에 송나라에 들어가 천동산(天童山)의 여정(如淨)선사 문하에서 불퇴전의 정진 끝에 ‘신심탈락(身心脫落)’이란 말에 큰 일을 마치게 된다. 이후 대안락(大安樂)의 법문인 좌선으로 수행을 쌓아 나가다가 28세 때 여정 선사로부터 정전(正傳)의 불법을 이어받고 그해 8월에 귀국하게 된다.

이때 여정 선사는 제자인 도원 선사에게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이런 당부를 한다.

“도시에서 살지 말라. 국왕 대신을 가까이 말라. 항상 심산유곡에 머물면서 한 개 반개라도 좋으니 바른 법을 찾는 사람에게 가르쳐라.”

이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교훈은 평생을 두고 선사의 지표가 된다. 특히 국가 권력의 주변에 있는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사람들을 멀리 했다.

 

한번은 불교신자인 한 집권 무신(武臣)의 초청을 받아 도시에 나간 일이 있었다. 절을 하나 지어줄테니 거기에 머물러 달라는 그의 간청을 받자 이를 거부하고 곧바로 영평사로 돌아온다. 스승 여정 선사의 교훈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토록 단호한 스승의 뜻을 모른 현명(玄明)이란 한 제자는, 그 집권 무신으로부터 기증받은 토지문서를 가지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스승보다 며칠 늦게 절로 돌아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선사는 그를 크게 꾸짖고 가사 장삼을 벗겨 당장 산문 밖으로 쫓아내었다. 선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명이 앉아 정진하던 승당의 방석과 자리를 걷어치우고, 그 밑의 흙을 일곱 자나 파서 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선사가 얼마나 세속적인 명리(名利)를 준엄하게 거부했던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일화로 전해진다. 그 시절 승려들은 세상의 권력자나 부호로부터 많은 시주를 받으면 마치 자신의 덕화나 법력이 그만큼 큰 줄로 착각하는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사는 이런 작태를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권력에 야합하거나 빌붙으려는 마음이야말로 끝내는 청정한 불법을 더럽히고 뒷날 화를 불러일으킬 씨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선사의 단호한 태도가 세속적인 차원에서 보면 너무 혹독한 처사로 여겨지겠지만, 정법을 지향하는 청정한 승가정신으로 볼 때는 두고두고 한 규범이 될 것이다.

스승이 제자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가를 보여준 한 보기일 수도 있다. 선사가 회장을 대했을 때의 자비와 현명을 대했을 때의 위엄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대조적이다. 그러나 참된 스승의 역할에는 이런 양면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의 스승과 제자가 세속적인 인정에 매이지 않고, 뒷날에 가서 함께 부처와 조사가 되기 위해서라면, 피나는 격려와 채찍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오늘 우리 둘레에서는 영평사의 살아 있는 그런 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출전 : 텅빈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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