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十二緣起)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유형은 앞에서도 일부 고찰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제 무엇보다도 의미 깊고 다시금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은 연기(緣起)에 입각한 중도설입니다.
연기설은 보통 십이연기(十二緣起)가 대표적인데, 이 십이연기설은 사성제(四聖諦) · 중도(中道) 등과 함께 부처님이 최초기부터 말씀하신 근본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에 속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아서 정각자가 되었듯이, 부처님이 발견한 이 연기설, 또는 십이연기설 역시 중도의 궤도를 이탈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의 핵심교리인 이 십이연기설이야말로 참으로 중도를 나타내는 귀중한 진리라 할 만합니다. 앞으로 이 십이연기에 근거한 중도설을 더듬어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십이연기에 근거한 중도설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한 경전을 원시경전 가운데 지적한다면 우선적으로 가전연경(迦栴延經)이 뽑힐 것입니다.
그 까닭은 가전연경에서 연기설에 바탕하여 중도를 설하였는데, 그 중요성이 이미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부터 거론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이 경전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가전연경에서 말하는 중도설은, 연기의 근본적인 이해와, 십이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 등에 대한 이해가 쌓이지 않으면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가전연경의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자리에서 십이연기의 기본적 설명과, 십이연기의 역관 및 순관에 대한 해설을 대강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십이연기를 설한 일부의 경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존(世尊)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緣起) 및 연하여 생긴 법(緣生法)을 설하리니 그대들은 듣고서 잘 생각하라.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여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이것은 정하여져서, 법으로 정하여져서 법으로 확립되어져 있느니, 곧 서로 의지하는 성품(相依性)이니라. 여래는 이것을 증득하고 이를 아느니라. 증득하고 알아서 교시하고 선포하고 상설하고 개현하고 분별하고 명료하게 하여 ‘너희들은 보라’고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유(有)에 연(緣)하여 생(生)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취(取)에 연(緣)하여 유(有)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애(愛)에 연(緣)하여 취(取)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수(受)에 연(緣)하여 애(愛)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촉(觸)에 연(緣)하여 수(受)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육처(六處)에 연(緣)하여 촉(觸)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명색(名色)에 연(緣)하여 육처(六處)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식(識)에 연(緣)하여 명색(名色)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행(行)에 연(緣)하여 식(識)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있느니라.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여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이것은 정하여져서, 법으로써 정하여져서 법으로 확립되어져 있느니, 곧 서로 의지하는 성품이니라. 여래는 그것을 증득하고 아느니라. 증득하고 알아서 교시하고 선포하고 상설하고 개현하고 분별하고 명료하게 하여 ‘너희들은 보라’고 말하느니라.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렇게 여(如)이며 불허망성(不虛妄性)이며 불이여성(不異如性)이며 상의성(相依性)인 것, 비구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말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연하여 생긴 법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노사(老死)는 무상(無常) · 유위(有爲) · 연생(緣生) · 멸진(滅盡)의 법이고, 패괴(敗壞)의 법이고, 탐욕을 떠나야 할 법이며, 멸(滅)의 법이니라.
비구들이여, 생(生)은, 유(有)는, 취(取)는, 애(愛)는, 수(受)는, 촉(觸)은, 육처(六處)는, 명색(名色)은, 식(識)은, 행(行)은, 무명(無明)은, 무상(無常) · 유위(有爲) · 연생(緣生) · 멸진(滅盡)의 법이고, 패괴(敗壞)의 법이고, 탐욕을 떠나야 할 법이며, 멸(滅)의 법이니라. 비구들이여, 이들을 연하여 생긴 법이라고 하느니라.”
연기라는 이름으로 설해진 원시경전은 매우 많으며 그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열두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십이연기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그 때문에 후대에는 연기설이라 하면 대개 이 십이연기설에만 한정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도 원시경전에는 일정하게 설해져 있지 않으나, 그 근본 의미는 연기하는 모습을 무명(無明)과 행(行)등의 열두 가지로 연결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무명은 지혜인 명(明)이 없음을 말하며, 이는 곧 불교의 진리인 연기나 무아의 도리를 알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행은 제법을 지어나가는 행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특히 무명, 무지로 인하여 행한 행위의 형성력을 뜻합니다. 식(識)은 인식작용 또는 인식의 주체를 말하며, 명색(名色)은 앞의 식(識)의 인식대상이 되는 물질(色)과 정신(名)입니다. 육처는 인식대상을 감지하는 눈 · 귀 · 코 · 혀 · 몸 · 의지의 육근(六根)이며, 촉(觸)은 앞에서 말한 식(識) · 근(根)과 명색인 경계(境)의 셋이 접촉함을 뜻합니다. 수는 근 · 경 · 식의 셋이 접촉하여 생겨나는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감수작용이며, 애는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감수작용에 따른 그릇된 애증을 말하며, 취는 맹목적인 애증에 따른 집착을 말합니다. 유는 애증과 집착에 의해 결정된 존재를 뜻하며, 생은 그 존재의 발생 또는 영위를 말하며, 노사는 생으로부터 빚어지는 늙고 죽음이나 그로 인한 괴로움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를 자주 말씀하셨으므로 연기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나 연기란 결코 부처님께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시기 전에도 연기법은 있었으며 부처님이 나신 뒤에도 연기법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연기법이란 내가 만든 법이 아니라 본래 있는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상의성(相依性)이란 서로 의지해 있다는 뜻입니다. 곧 삶(生)은 죽음(死)에 의지하고 죽음(死)은 삶(生)에 의지하고, 무명은 행(行)을 의지하고 행은 무명을 의지합니다. 이와 같이 연기법은 무명, 행 등 여러 가지 항목에 의지하여 존립한다는 것입니다.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모든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를 불구하고 이 원리는 정하여진 것으로서 법의 고정성(固定性), 법의 정칙성(定則性) 곧 상의성(相依性)이니라. 여래는 이것을 깨치고 이것에 도달하느니라. 깨치고 도달하여서 이것을 널리 알리고 말해 주고 자세히 설하고 분별하여 명료히 하느니라. 너희들은 보아라.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여기에서 진여성(眞如性) · 불허망성(不虛妄性) · 불이여성(不異如性) · 상의성(相依性)을 띠고 있으니 이것을 곧 연기(緣起)라고 말하느니라.
위 우정(宇井)박사의 인용문은 앞 상응부 경전의 것보다 번역이 자세하므로 같은 내용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이 번역에 의하면 연기는 제법이 상의함을 말한 것이며, 그것은 진여를 바탕으로 한 진여성이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다음에는 이 경전에 해당하는 한역 경전과 비교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마땅히 인연법(因緣法)과 연생법(緣生法)을 말하느니라. 어떤 것을 인연법이라 하는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하느니라.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으며 행(行)을 연(緣)하여 식(識)이 있으며 내지 이렇고 이렇게 하여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純大苦聚)가 모이느니라. 어떤 것을 연생법이라 하는가. 무명이 지어감을 말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며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그것을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알아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여 열어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고 내지 생(生)을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다고 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러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그것은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여 열어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생(生)을 연(緣)하므로 노(老) · 병(病) · 사(死)와 우(憂) · 비(悲) · 뇌(惱) · 고(苦)가 있다고 하느니라.
이들 모든 법은, 법이 머무르며(法住), 법이 공하며(法空), 법이 여여하며(法如), 법이 그러하며(法爾), 법이 여여함(如)을 떠나지 아니하며, 법은 여여와 다르지 아니하며, 참으로 진실하여 전도되지 아니하니, 이와 같이 연기에 수순하는 것을 연생법이라고 하느니라.
爾時世尊 告諸比丘하사대 我今當說因緣法及緣生法하리니 云何爲因緣法고 謂此有故彼有니 謂緣無明行하며 緣行識乃至如是如是하여 純大苦聚集이니라 云何緣生法고 謂緣無明行하니라. 若佛出世거나 若未出世거나 此法常住하여 法住法界하느니라. 彼如來自所覺知하고 成等正覺하여 爲人演說하며 開示顯發하니 謂緣無明有行하고 乃至緣生有老死하니라. 若佛出世거나 若未出世거나 此法은 常住하여 法住法界하느니라. 彼如來自所覺知하고 成等正覺하여 爲人演說하며 開示顯發하니 謂緣生故로 有老病死憂悲惱苦하니라 此等諸法은 法住하며 法空이며 法如며 法爾며 法不離如며 法不異如며 審諦眞實하여 不顚倒니 如是隨順緣起를 是名緣生法이니라.
이 연기법은 항상 있어서 법이 법계(法界)에 머문다는 표현 속에는 연기의 근본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연기법이란 법계이며, 나중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진여법계(眞如法界)의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법이 머문다(法住)’는 것은 법이 연기하여 존재함을 말하며, 연기한 모든 법은 다 공하므로 ‘법이 공(法空)’하다는 것입니다. ‘법이 여여함(法如)’이란 일체만법이 진실하여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법이 그대로(法爾)’란 흔히 연기법을 자연법 그대로가 아니냐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며, 그 참된 의미는 ‘진여법 그대로다’하는 뜻입니다.
앞의 파리문 경전에서는 연기법과 연생법을 진여성(眞如性) · 불허망성(不虛妄性) · 불이여성(不異如性) · 상의성(相依性)이라 말한 것을, 여기 한역 경전에서는 ‘법이 머물고(法住), 법이 공(法空)하며, 법이 여여하고(法如), 법 그대로다(法爾)’거나, ‘법이 여여와 다르지 않다(法不異如)’라고 말했는데 이 양자의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거의 같다고 하겠습니다.
십이연기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이 정도로 해두고, 다음에는 연기의 역관과 순관을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은 처음 현등각(現等覺)을 성취하시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한 번 결가부좌하신 채로 7일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며 앉아계셨다. 세존은 초저녁에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생각하시었다.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생에 연하여 노사가 생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의 쌓임(苦蘊)의 모임이 일어나느니라.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의 쌓임(苦蘊)이 멸하느니라. 세존은 밤중에 연기를 순역으로 생각하시었다. 세존은 새벽에 연기를 순역으로 생각하시었다. 세존은 7일을 경과한 후 그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보리수나무 아래로 나아가서 한 번 결가부좌하신 채로 7일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며 앉아계셨다.
부처님은 도를 이루고 나서 다섯 비구에게 초전법륜을 하시기 전에 이와 같이 하시기를 4주간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율장(律藏)에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 이에 의하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도리는 바로 연기이며, 곧 십이연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시경전에 설해진 연기설이 모두 십이연기설만은 아니며, 십이연기는 여러 가지 유형의 연기설 가운데 가장 완비된 형태를 보이므로 보다 후기에 정립된 연기설이라고 합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이때에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생각하신 도리는 연기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관하는 법(觀法)이 있습니다. 하나는 괴로움과 번뇌가 생기는 과정을 일컫는 것으로 이를 순관(順觀) 또는 유전연기(流轉緣起),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하며, 또 하나는 그 생사 윤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말한 것으로 이것을 역관(逆觀), 또는 환멸연기(還滅緣起),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합니다. 십이연기를 설하는 대개의 경문에는 순관의 내용은 비교적 자세히 설해져 있지만, 역관의 환멸문에 대해서는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생이 멸하므로 노사가 멸한다’라는 정도로 말할 뿐, 그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연기의 역관을 말할 때 마지막의 노사에서부터 시작하여 행 · 무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멸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중생의 눈에 우선 보이는 것이 생 · 노 · 병 · 사이므로 그것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면에서 남전대장경이나 한역대장경에서는 순관과 역관이 모두 무명에서 시작하는 형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전 : 百日法門 上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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